5월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요한 16,16-20
좋은 친구들만 만나는 게 최선일까?
조던 피터슨은 초 베스트 셀러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어떻게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책식주의’라는 채널에서 ‘진정한 친구 가려내는 간단한 방법: ‘딱 한 마디만 해보세요.’라는 제목으로 각색하였습니다.
나는 중학교 때까지 아주 작은 동네에서 살았다. 죽마고우였던 나와 내 친구들은 서로를 ‘진짜’ 친구라고 믿었다.
멋모르던 학창 시절, 우리는 술을 마시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런 삶에 회의가 들었다.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꿈도 크고 목표도 높았다.
대학 생활은 평온하고 행복했다.
하루하루 인생이 더 나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서 나는 과거의 굴레를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고, 좋은 직장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잘 지내냐?” 어느 날 고향 친구 병식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고향 친구들의 소식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우리는 몇 년 만에 다시 만났다.
병식이는 아직도 그때 그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었고 삶의 모습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계속 어긋났다.
사업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는 나에게 병식이는 ‘내가 널 아는데, 그게 되겠냐?’라며 코웃음을 쳤고
내가 변했다고 말했다.
병식이와 헤어지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엇갈린 삶을 살게 된 걸까?
병식이는 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고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 하지 않았을까?
조던 피터슨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렸을 적 친구가 아직도 안 좋은 친구들고 어울리는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그냥 그런 삶이 좋아서일 것이고, 두 번째는 의리 때문이며, 세 번째는 그런 친구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나의 꿈을 긍정해주지 못하는 이들은 떠나라고 말합니다.
굳이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좋은 친구들과만 어울리는 것이 과연 최선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로 안 좋은 친구들도 만날 때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제자들 사이를 오고 가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고 부활은 다시 제자들에게 오시는 일이며 승천은 다시 아버지께, 성령강림을 통해서는 다시 교회를 만나러 오십니다.
만약 부잣집 부모들 사교모임에서 돈만 있다고 계속 끼어있을 수 있을까요? 그들은 이미 자녀를
낳아 잘 기른 사람들입니다.
돈만으로는 거기 끼어있기 힘이 듭니다.
결혼하여 아기를 낳아 자신도 잘 길러야 함께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친구들과 사귀며 그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하늘 나라에 만에 하나 들어갈 수 있을 지라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사귀고 세상으로 나아가 죄인들과 어울려야 하는 이유는 자녀로만 머무는 것보다 부모가 되는 것이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심으로 행복을 누리시는데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박보영 목사가 길거리 아이들을 데려와서 키울 때 아이들은 한 달만 지나면 슬슬 목사님과 함께 사는
삶에 싫증을 느낍니다.
이때 목사님은 그들이 이전에 입었던 냄새나는 옷을 다시 입어보게 시킵니다.
그들은 생질색을 합니다.
내가 기도와 활동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죄인들도 만나야 하느님과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압니다.
그래서 다시는 뒤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을 불러준 것에 감사해서 또 그들도 자신들의 지위에 올려놓고 싶어집니다.
이처럼 우리 관계의 모델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는 ‘조금 있으면 기도하러 갈게요.’라고 하느님께 말해야 하고, 하느님을 만날 때는 ‘조금 있으면 사람들을 만나러 가야 해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9일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 16,16-20
좋았던 시절 단 순간의 기쁨과 축복, 그거 하나 간직하고 평생을!
시골 살다 보니 재미있는 일이 참 많습니다.
한 가정에 경사가 생기면 너무 기쁜 나머지 만천하에 알립니다.
마을 입구나 사거리 눈에 잘 띄는 곳에다 큼지막한 플래카드를 내겁니다.
'경축 *** 장남 *** 사무관 승진'
최근에는 정말 기쁜 내용을 담은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면민 모두 한마음으로 축하드립니다.
진정한 애국자 *** 득남!'
새 생명의 탄생에 대해 면주민 모두가 기뻐하는데 당사자인 부모나 가족은 얼마나 더 기쁘겠습니까?
물론 부모로서 아이를 양육하고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앞으로 겪게 될 고초나 상처도 만만치 않겠지만, 탄생의 기쁨, 존재에 대한 기쁨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평생을 기쁘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그런 것 같습니다.
좋은 시절 단 순간의 기쁨과 축복, 그거 하나 간직하고 추억하고 회상하면서 평생을 살아가는 것!
성모님의 생애도 그랬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와 출산, 양육과 동반 과정에서 마리아가 겪었던 고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당신의 태중에 모시고 있던 분, 당신의 몸을 통해 탄생하신 분, 당신 가슴을 통해 양육하신 아기가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 기쁨, 그 영광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성모님 역시 좋았던 그 시절의 기쁨과 행복을 마음 깊이 간직한 채 평생을 기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돌출 발언으로 속상할 때도,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실 때에도 그 좋았던 첫순간의 추억을 회상하며 기꺼이 견뎌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 안에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고, 그 이후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계속 머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 이보다 더 큰 은혜,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다.
남아있는 우리의 지상 여정은 당연히 감사와 기쁨의 나날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축복 속에서도 기뻐해야겠지만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 역경과 상처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강론>
(2024. 5. 9. 목)(요한 16,16-20)
<다시 조금 더 있으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 하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하고 내가 말한 것을 가지고 서로 묻고 있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19-20)”
1) 여기서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이제 곧’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닥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4장-16장의 말씀은 ‘최후의 만찬’ 뒤에 하신 말씀이고, 체포당하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군인들이 이미 출발해서 겟세마니를 향해서 가고 있는 중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뜻하는 말씀이고,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짧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체포되어서 그날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재판을 받았고, 금요일 오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고,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된 시간은
실제로는 만 이틀이 안 됩니다.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을 것이고, 부활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이라는 말과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말을 복음서 저자가 반복해서 기록한 것은, 아마도 ‘수난 시간의 짧음’과 ‘부활 후의 영원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2)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이라는 말씀은, “너희는 몹시 슬퍼하면서 나의 장례식을 치르겠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은 나의 죽음을 좋아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박해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뻐하거나 좋아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자들은 예수님을 죽인 뒤에, 자기들을 심각하게 괴롭히는 고민거리가 마침내 제거되었다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라는 자가 스스로 예고한 대로,
정말로 부활하면 어떻게 하나?” 라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는 못했습니다(마태 27,62-66).>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땅의 주민들은 죽은 그들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 두 예언자가 땅의 주민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묵시 11,10).”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땅의 주민들’과, 당신의 죽음을 보면서 기뻐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은 모두 하느님을 등지고 사는 ‘악인들’을 뜻하고,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그들이 ‘악’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냅니다.>
3)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근심’이라는 말은, ‘슬픔’으로 바꿔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너희가 슬퍼하겠지만,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겠지만, 그 슬픔은 부활의 ‘큰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라는 뜻이고, 당신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믿음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뒤에 ‘세상의 기쁨’은 무엇인가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습니다.
굳이 그것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실제 상황을 보면, 세상의 ‘기쁨’은 ‘슬픔’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마태 28,4.11-14).
그 두려움이 좋은 쪽으로 작용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도 있고(사도 2,41), 끝끝내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안 믿은 자들도 있었습니다(사도 4,2).>
4) “다시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적용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1-2).”
우리 인생은 ‘임시 거처’일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인생과
지상에서의 인생을 비교하면, 우리 인생은 글자 그대로 ‘찰나’일 뿐입니다.
<‘영원’과 ‘찰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더라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믿음과 희망이 있다면, 지금의 고난과 시련은 금방 지나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의 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부귀영화도 역시 금방 지나가는 것이고, 덧없고 허무할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짧고 허무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이고, 알면서도 외면하고, 지금의 인생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