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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 가치 실현 세력과 이익 고수 세력의 대결
사도 8,26-40; 요한 6,44-51 / 부활 제3주간 목요일; 2-24.4.18
오늘 독서에 보면, 에티오피아 고관에게 복음을 전한 필리포스를 “성령께서 잡아채듯 데려가시어, 가자로 내려가던 길에서 아스돗으로 공간을 이동시켰다.”(사도 8,39)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사기지은을 사도들에게만 발휘하신 것이 아니라 부제 필리포스에게도 발휘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나, 남쪽 에티오피아의 고관에게나 그리고 서쪽 해안지방의 아스돗과 카이사리아에게도 종횡무진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가 한 곳에서 복음 선포 임무를 마치면 그를 잡아채듯 데려가셨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연대하고자 하는 이들의 뜻과 기운은 시공을 초월하여 빠르게 합해지고 전해집니다. 믿음의 자기장(磁氣場)과도 같이 작용하는 하느님 신앙의 영적 네트워크 안에서라면, 공간의 제약 없이 지역과 나라를 넘어서 동시대인들과 통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살아가신 분들이나 우리 다음에 살게 될 이들과도 시간의 제약 없이 시대를 넘어 통공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이러한 통공이야말로 진정으로 보편적인, 그래서 가톨릭적인 교회의 현실입니다.
스테파노로 인한 박해가 닥치자 일부 신자들은 북쪽으로 피해 가서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 신앙 공동체를 세웠지만, 이와는 달리 부제 필리포스는 서북쪽 사마리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부활의 복음을 어렵사리 전하고 나서, 악령을 몰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었습니다(사도 8,6-8). 그 무렵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천사를 시켜 그에게 사마리아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라고 하셔서,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을 만났습니다. 왕실 고관이었던 그 에티오피아 사람은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는데, 필리포스에게 그 뜻을 풀이해 달라고 청해 왔습니다. 필리포스가 그 대목을 보니, 고난받는 메시아의 셋째(이사 50,4-11)와 넷째 노래(이사 52,13-53,12)였습니다. 그래서 필리포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아를 기다려온 대망사상과 그 메시아가 영광 대신에 받게 된 수난의 운명을 내다본 이사야의 예언, 그리고 과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와 그 결과로 겪으셔야 했던 수난에다가 부활하신 이야기들을 그 고관에게 전해 주었더니 세례를 받겠다고 청해서 바로 세례를 주었습니다(사도 8,35-38).
이사야 예언자로 말하자면 그 당시로부터 무려 오백여 년 전에 활약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 고관과 필리포스의 대화를 통해 그 긴 시간 간격이 일시에 극복되어 버린 셈입니다. 이사야의 예언, 즉 고난받는 주님의 종 이야기는 나자렛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고관의 요청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 즉 이집트에 가까운 남쪽 지방의 어느 한 곳이었습니다. 세례 직후에 성령께서는 가자로부터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아스돗이나 더 멀리 떨어진 카이사리아 등지로 필리포스로 “잡아채듯 데려가셨습니다.”(사도 8,40) 필리포스에게서 세례를 받은 그 에티오피아 사람은 왕실의 고관이었으므로 그는 에티오피아를 비롯해서 인접한 북아프리카 지방의 여러 나라로 복음을 퍼뜨렸습니다.
본시 에티오피아인들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의 자손들인 동시에, 바벨탑을 세우고 수메르 문명의 시조가 된 함의 아들 니므롯의 후손들이기도 했습니다(창세 10,6-8). 니므롯은 힘센 장사여서 많은 무리를 이끌었으며 신아르 지방에 왕국을 세우고 바벨탑을 세웠습니다(창세 10,10; 11,2-4). 그런데 니므롯과 그 수하들의 의도는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자신들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것이었으므로, 하느님께서 그들의 말을 흩어 놓아 탑이 세워지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창세 11,4-8). 수메르 문명이 이렇게 시작되었는데, 이제 필리포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짐으로써 이천 년 가까이 우상을 숭배하던 문명이 하느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계기를 만난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왕실 고관에게 세례를 준 필리포스의 선교 행동은 이처럼 어마어마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의미는 우상을 숭배해 온 문명이 하느님을 신앙하는 문명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익을 앞세운 세력이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믿는 사람은 ‘생명의 빵’을 먹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 말씀에 담긴 이치는 이것입니다.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명은 영적인 자유를 얻어 오히려 남은 이들의 육신 현실과 교감하며 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통공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이치 덕분에 믿는 이들이 현세에만 매여 있는 이들보다 더 자유롭고 용감할 수 있는 것이고, 이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적인 몸으로 발현하여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습이야말로, 제자들도 사도가 되어 입증할 수 있는 모습이었는가 하면 신자들 모두가 믿기만 하면 그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통공 현실이었습니다. 육신이 죽기 전에는 물론 육신이 죽은 다음에도, 이 육신의 죽음이라는 변수와 상관없이 이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영적인 권능으로, 하느님의 뜻이 관철되고 그분의 영광이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 성취될 수 있는, 그야말로 한처음에 그분이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하셨던 인간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 3,5), 즉 부활할 수 없다고 가르치셨는데 이는 믿는 이들이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현실과 동일한 내용과 의미를 지니는 특징들을 나타냅니다. 십자가 죽음 이후 수 차례의 발현에서도 보여 주셨지만 사실은 공생활 동안에도 이미 보여주신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아서 알아보지 못했고 가톨릭교회의 전통교리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육신이 죽은 다음에 일어날 현실로만 가르치는 바람에 전혀 입증될 수 없고 체험될 수도 없어서 신자들에게는 도무지 비현실적인 가르침으로 들리게끔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본래 이 사기지은의 교리는 사도 바오로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가르치고자 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써서 보낸 편지에 나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4). 이것이 믿는 이들이 누릴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실존적 현실인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부활한 육신의 실존적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네 가지 신기한 은혜, 즉 사기지은(四奇之恩)으로 풀이한 바 있습니다. 즉, 손상되지 않고(impassibilitas), 빛나며(claritas), 빠르고(agilitas), 사무침 또는 예민함(subtilitas)입니다.
‘상하게 하지 못함’: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얻으신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를 고스란히 지니신 몸으로도 거뜬하게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는가 하면(요한 20,27), 빵과(루카 24,30) 구운 물고기도 드심으로써(요한 21,12-13) 육신이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살아있는 영적인 몸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즉,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나는” 실존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빛남’: 공생활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타볼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시며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하신 적이 있습니다(마르 9,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타볼산에서처럼 빛나는 모습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거니와 더욱 중요한 것은 평소에 가르쳐 주신 바를 복습시켜 주심으로써 그 가르침이 빛나는 진리임을 깨우쳐 주셨다는 것인데, 이것이,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나는” 실존입니다.
‘빠름’: 예수님께서 영적인 존재로서 육신의 질서를 다스리시는 이 빛나는 모습은, 육신의 차원을 뛰어넘어 이곳저곳에서 때로는 정원지기로(요한 20,15), 때로는 나그네(루카 24,15-16) 혹은 어부의 모습으로(요한 21,4) 발현하시는 모습으로도 나타나는데, 이는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나는”, 즉 영적으로 ‘빠른’ 실존입니다. 이는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이동하여 나타나시는 모습은 물 위를 걷는 기적에서도 나타났습니다(마르 6,49).
‘사무침’ 또는 ‘예민함’: 빛나고 빠른 실존에 이어서, 문을 닫아 걸고 숨어 있던 제자들 앞에 마치 벽을 뚫고 들어오신 것처럼(요한 20,19) 나타나신 데에서는 사무침의 은총이 목격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무침의 은총은 더 나아가 배고프거나 목마른 본능의 욕구를 느끼면서도 사랑과 정의 같은 더 차원 높은 욕구에 끌림으로써,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나는”, 그래서 성령의 이끄심에 대해 ‘예민한’ 실존으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네 가지로 나타나는 부활의 은총, 즉 사기지은은 제자들로 하여금 사도가 되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발현하실 때마다 보여주신 영적 변화였습니다.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가톨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사기지은은 어김없이 주어집니다. 이는 현대 용어로 다시 풀이하자면 이익에 매몰된 우상 숭배적 행태를 벗어던지고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적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고, 구조적인 사회악에 맞서서 사회적 공동선을 증진시키기 위한 영적 행동의 동기를 부여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공생활 동안은 물론 부활하셔서는 더욱 활발하게 누리신 영원한 생명의 실존일 뿐만 아니라, 필리포스가 체험한 바와 같이 당신을 믿는 사도들에게도 허락하신 은총이기도 합니다. 교우 여러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생명의 실존적 현실은 첫째, 손상되지 않는 뜻과 둘째, 빛나는 의지와 셋째, 빠르게 통공하고 연대하는 관계의 네트워크(Network) 그리고 넷째로 진리에 대한 예민함으로 나타나는, 사기지은입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과 ‘생명의 빵’이라는 가치를 담은 사기지은의 교리 내지 메시지를 프리즘으로 하여 우리 사회의 최근 현실에 나타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4.10 총선은 가치를 추구하려는 진보 세력과 이익을 고수 내지 확대하려는 보수 세력이 대결한 한판 승부였습니다. 본시 국회의원 총선거는 정당들이 각기 추구하는 정강 정책에 담긴 가치들을 유권자들 앞에 내걸고 선택을 받는 정치적 심판의 행사입니다.
우리 한국 사회는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쿠데타로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30년 동안 군사독재 치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79년 부마항쟁, 1980년 광주항쟁 그리고 1987년 6월항쟁으로 정치적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개헌이 가까스로 이루어져서 제6공화국이 세워졌습니다. 정치적 기본권이 극도로 제한받는 세월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시급하다보니,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와 평화라는 최고선 가치 가운데에서 겨우 자유와 관련된 기본권에다가 대통령 5년 단임제 같은 최소한의 장치만 규정된 채로 지금까지 30여 년을 지내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드러난 가장 큰 사회악 현상은 검찰, 기획재정부, 감사원, 언론 등 선출되지 않았고 위임된 권력이 세력들이 주권자인 국민 위에 군림하는 행태였습니다. 평등, 정의 그리고 평화와 관련된 기본권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국가가 베푸는 시혜처럼 취급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나마 김영삼이 하나회를 척결한 덕분에 군부쿠데타를 근절시켰다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하겠지만, 6월 항쟁까지 이어져 온 민주화 희생의 결실은 검찰과 언론 등 선출되지 않은 세력들이 주권자 위에 군림하는 기형적 행태로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여 사회악을 조장하기 시작했다는 데 우리 시대의 어둠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는 아주 기본적인 헌법적 상식을 상기시키면서 민주주의 퇴행, 민생 파탄, 외교 망신, 전쟁위협 고조, 수출 퇴조 등 무능한 정치로 국민 위에 군림하려던 현 정부 여당을 심판해야 한다는 가치를 내세웠고, 조국혁신당은 검찰독재를 조기종식시켜야 한다는 제1의제와 사회권을 실현하려는 제7공화국을 건설하자는 제2의제를 내세웠습니다. 가치의 방어와 실현의 정치적 의제를 전면에 내세웠던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여당인 국민의 힘은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을 터무니 없이 범죄세력으로 모는 주장을 하면서 기득권 카르텔의 이익을 고수하려는 행태를 고집하였을 뿐 공약에 그 어떤 가치도 내세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채양명주’로 요약된 사회적 범죄를 은폐하려고 기를 썼습니다. 여기서 ‘이채양명주’란 이태원 참사 희생자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법 거부, 채 상병 희생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 양평 고속도로 변경안에 쏠린 로비 의혹, 김건희 명품 백 수수 행위라는 법률 위반, 주가조작으로 인한 부당이익 취득 의혹 등 5대 사회악 혐의를 말합니다.
취임 전 살아있는 권력을 공정과 상식으로 수사한다던 평소의 주장과는 다르게 윤석열 대통령이 지휘하는 현 검찰은 이 혐의를 모조리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수사와 기소를 외면하고 있고, 국회에서 통과시킨 법률안조차도 대통령은 거부권을 무려 9번이나 행사하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4.10총선으로 나타난 결과는 국민소득 상위 10% 이내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강남과 영남의 기득권 카르텔에 목을 매는 유권자들이 총선의 의제, 즉 검찰독재 청산과 사회권 선진국 실현이라는 가치에 저항하는 행태로 나타났습니다. 현 시기 한국 사회의 민낯을 하느님 말씀과 사기지은 교리의 프리즘으로 비추어 보면, 가치와 이익의 충돌 현상이 이러합니다.
대단히 아쉽게도 전통적인 교리에서는 이 사기지은을 죽은 다음에 부활한 선인의 육신이 지니는 네 가지 특성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위에서 확인해 드린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살아 계시면서도 자유자재로 사기지은을 누리셨고 부활하셔서는 더욱 활발하게 누리셨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신이 부르신 제자들이 당신처럼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어 변화될 수 있도록 같은 은혜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과연 오늘 독서에 보면 부제 필리포스는 에티오피아 고관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는 성령에 의해 잡아 채이듯이 가자로 내려가던 길에서 카이사리아에 이르는 길로 공간을 이동하였다(사도 8,39)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 근거입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만, 오늘날에도 믿는 이들이 선교하는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마귀나 세속의 영향으로부터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뜻과 기운을 보전할 수 있으며, 그런 지향으로 사람들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의 영혼과 인격과 마음은 얼마든지 빛날 수 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의 눈이 문제일 뿐입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간격과 거리를 넘어 연대하고자 하는 믿는 이들의 뜻과 기운은 시공을 초월하여 빠르게 합해지고 전해집니다. 수평적으로 동시대인들과만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서 의롭게 살아가신 분들과도 수직적으로 통공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5G 이상 빛의 속도로 빠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상 사람들이 목을 매는 물질적인 힘들 즉 돈이나 권력 그리고 명예를 숭배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거룩한 가치들 즉 연민과 공감 그리고 섬김과 나눔을 소중히 아끼는 믿는 이들의 뜻도 언제나 예민함을 넘어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저는 부활시기 팔일축제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이 사기지은에 대해 풀이해 드렸습니다만, 오늘날 그리스도 신앙이 전반적으로 활력을 잃어버리고 침체된 데에는 사기지은으로 나타나야 할 부활신앙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거나 부족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는 실존적 현실이며, 손상되지 않는 뜻과 빛나는 의지와 빠르게 통공하고 연대하는 관계의 Network 그리고 진리에 대한 예민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