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라는 자부심
앙드레 김 ,그는 누가 뭐래도
세계적인 디자이너야 .
독특한 억양과 패션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소재가 되곤 했지만
그는 그러한 비틀림 조차도
'일반인들에게 디자이너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 며 즐거워한단다.
누군가 자신의 흉내를 내면서 웃는다면
기분이 나쁠만도 한데 말이야.
그가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는 것도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일거야.
앙드레 김은 1962년,패션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로
혜성처럼 나타난 인물이란다.
1962년 데뷔를 앞둔 그는 본명을 사용할지
예명을 지을지 많은 고민을 했대.
알다시피 그의 본명은 '김봉남'이야 .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활동하려면
글로벌한 이름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프랑스 대사관 직원의 말을 듣고
결국 이름을 '앙드레 김'으로 바꾸게 되었지.
이렇게 해서 지금의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탄생 한거야 .
사실 앙드레 김에 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
한때 영화배우를 지망했고
실제로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이야.
1959년 박종호 감독의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에
김지미, 최무룡과 함께 출연했다고 해.
너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그때 김지미, 최무룡은
요즘으로 치면 장동건, 김태희와 비교될 만한
톱스타들이었지.
앙드레 김이 맡은 배역은 한국전쟁을 취재하는
프랑스 종군 기자였대.
하지만 시사회를 보면서 앙드레 김은
자신의 얼굴이 영화에 잘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 .
소위 사진이 잘 받는 얼굴이 아니라고 깨달은 거지.
연기력도 그저 그렇고 .
앙드레 김은 영화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재빠르게 결단을 내렸지.
'칼 같은 결단과 화살 같은 행동' 은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이야 .
너도 지금은 하고 싶은 일이 무척 많을 거야 ,
연기자,개그맨, 가수, 영화감독 , 기자 ,의사, 변호사,외교관 .....
문제는 자신의 재능과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거야 .
그 기준은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재능과 열정이 있어야 하지 .
앙드레 김이 디자이너가 되고자 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는 구나.
"남자가 만든 옷이라고 여자들이 입지 않으면 어떡하니?"
여자 옷을 만들겠다고 나선 아들이
걱정스러워서 한 말씀이겠지?
그럴 만도 한 게 그 당시에는
'남자는 여자 옷을 디자인하기에는
부적절하다' 라는 편견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앙드레 김은 그런 편견에 얽매이지 않았어 .
오히려 그는 여자의 의상을 보는 눈은
남자가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로 용감하게
패션계에 뛰어 들었단다.
그는 자신의 옷을 상품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대.
오페라나 발레, 연극과 같은 예술 장르에서 감동을 느끼듯
의상도 충분히 감동을 자아내는
'창작 예술' 이라고 여긴거지.
패션으로 새로운 예술적 장르를 개척해 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의 말답지 않니?
이 순간을 흘려보내지 말아라
우리가 마음대로 탐색할 수 있는
시간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진짜 사는 것 같이 산다'고
느낄 수 있는 일에 시간을 사용해야 해 .
시간을 쓰는 태도에 따라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지 .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말이야 .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는 시간을 그저 그렇게
흘려 보내는 게으른 사람이 훨씬 더 많은 걸 느낀다.
시간이 넘쳐나니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는 거지 .
사람이 나이를 먹는 방법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단다 .
같은 시간 동안 같은 나이를 먹어 가지만
생각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거든 .
아버지는 앙드레 김을 볼 때마다
그가 참 행복하게 자신의 일에 빠져서
산다는 느낌을 갖게 돼.
늘 자신감에 차서 일하고
일에 대한 의욕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거든.
혹시 그 분 나이가 몇인 줄 아니?
벌써 일흔이 넘었단다 .
나이가 들었으니 그의 작품에
생동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도 생각되지만
그의 열정은 20대 못지않아. 그래서였을까 ?
그는 회갑과 칠순 잔치도 하지 않았다고 해.
우리나라에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몇 안 되는
명사 중 한 사람이 바로 앙드레 김이란다 .
누가 뭐래도 그는 오직 한 길에만 매진해서
일가를 이룬 거장이기 때문이야.
지금도 조수미나 정명훈, 백건우 같은 유명 음악가의
공연장을 가 보면 맨 앞에 앙드레 김이 있다는 구나.
앙드레 김은 44년간 정직과 진실을
신조로 엄격하게 스스로를 관리해 왔어.
요즘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의 이름을 붙인
상품의 종류가 늘어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지난 해 삼성이 새로 분영한 아파트 인테리어 디자인을
그에게 맡겨 화제가 되기도 했지.
시대의 흐름을 앞서서 읽는 사람들은
초반에는 시련을 겪지만 언젠가는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앙드레 김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구적인 면모를 보이며 살아온 사람임에 들림없어.
첫째, 패션 디자이너라는 일의 선택이 그렇지 .
그가 패션업계에 뛰어든 60년대 초반은 남자가
옷을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큰 뉴스가 되는 시절이었어.
하지만 당시 세계 무대를 주름잡는 디자이너들
대부분 남자들이었지 .
조르지오 아르마니,베르사체,피에르 가르뎅,파올로 구치등...
둘째, 앙드레 김이라는 이름이 또 파격적이야 .
요즘이야 외국어 이름이 넘쳐 나지만 당시엔 외국 이름을
예명으로 한다는 건 파격중의 파격 이었지 .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뛰어나고 부러운 점은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의 삶 자체란다 .
진정한 실력은 사람들의 오랜 존경을 받는 것으로
보상받는 법이거든.
이를 명심하고 너도 실력을 쌓기 위한
너만의 공부를 열심히 하렴.
앙드레 김
1962년 서울 소공동에 의상실 '살롱 앙드레'를 내며
국내 남성 디자이너 1호로 첫발을 내딛었다.
1966년 국내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프랑스 파리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
그는 120여회의 국내 패션쇼,40여 회의 해외 패션쇼를통해
여성의 아름다움과 지성미, 교양미를 강조하면서,
일시적인 트랜드 보다는 동양적 감성과
로맨티시즘에 입각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