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세 마디
한 소년이 동산 위 무지개를 발견했습니다.
소년은 그것을 붙잡고 싶어 말 등에 올라타고
동산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무지개는 저 멀리 산 위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이번엔 산을 올랐습니다.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는 기대로 정상에 섰지만
무지개는 바다 위에 떠 있었습니다.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도 무지개는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곤 실망한 소년은 피곤함에 지쳐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나폴레옹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꿈이 큰 소년이었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처절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프랑스의 황제로 군림했고 많은 부와 명예를
손에 쥐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패한 후 쫓겨간 유배지에서
초라한 죽음을 앞두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프랑스,
군인,
조제핀."
그가 사랑한 조국 프랑스,
그의 명예와 긍지 군인,
마지막으로 그와 이혼한 첫 아내 조제핀...
이 세 마디는
나폴레옹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로
인생의 허무가 담긴 아쉬운 절규였습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합니다.
그 누구도 죽음의 그림자를 피할 수 없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왔을 때
후회되는 기억보다 행복했던 기억이 더 많길 원한다면
지금의 삶에서 허무한 것과 가치 있는 것을
구분하며
사는 지혜로운 삶을 사십시오.
나폴레옹의 유배지, 세인트헬레나(HLE) 섬...아래 ↓
-이곳이 나폴레옹이 같혀던 곳이자 죽음의장소-
참고자료:
▲세인트헬레나 섬(Saint Helena Islands)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Rio de Janeiro)에서 3,379km, 화산섬 세인트헬레나의 면적은 불과 122㎢. 강화도와 거제도보다 넓고 세종시와 같은 면적을 지닌 섬이다.
케이프타운(Cape Town)에서 2,736km 떨어져 있다.
귀양살이를 한 나폴레옹은 이 절해의 고도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이번 공항 오픈으로 나폴레옹 이외의 역사관광자원에 관심이 쏠릴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섬은 나폴레옹 이전에도 아프리카의 줄루(Zulu) 왕국 최후의 왕이 영국과의 전쟁에 패하면서 이곳에서 최후를 맞았고, 20세기 초에는 보어 전쟁 포로 6000명이 이송되기도 했다.
또 1957년에는 중동의 바레인의 왕자 3명도 정치범으로 수용되는 등 귀양지로 사용됐다.
세인트헬레나는 화산섬으로, 영국령이 된 것은 1657년.
면적은 425km²로 강화도나 거제도보다 넓고 세종시(465km²)보다 약간 좁다.
이곳의 원주민은 유럽의 농민과 중국인 노동자,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노예 등이었다. 1987년 인구 5644명이었지만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전한다.
공항은 2010년 완공할 예정이었지만, 영국의 불황으로 인한 예산문제로 2015년 완공돼 그해 9월 15일 첫 시험비행기가 착륙했다.
나폴레옹이 최초로 유폐된 브라이아스 파빌리온(Briars Pavilion)과 그 후 옮겨진 롱우드 하우스(Longwood House)가 있다.
나폴레옹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금은 프랑스 영사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여기서 가까운 장소에 나폴레옹이 처음에 묻힌 무덤 흔적이 있다.
[출처] 나폴레옹의 유배지, 세인트헬레나(HLE) 섬에 정기여객편|작성자 영종
# 오늘의 명언
하루하루를 자기 인생의 마지막 날같이 살아라.
언젠가는 그날들 가운데 진짜 마지막 날이 있을 테니까.
- 레오 부스칼리아 -
=늘청춘5678=
첫댓글 불란서의 황제로 지내다 어쩌면 저렇게도 남미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갇히고 또 이곳에서 운명을 달리한 영웅이였다.
그분의 명복을 빕니다.
가족부인에게 애절한 사랑의연민을 느낀 영웅의 모습에 감동입니다.
고마운 글에 감명과 함게 영웅에 감명의 기도와 또 한편 명복을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