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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출처: http://blog.naver.com/atena02/220667486464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기상학자 로렌츠(E.N.Lorentz)가 "브라질에서 나비의 날개짓이 텍사스에서 돌풍을 일으킬 수도 있는가?(Does the Flap of a Butterfly's Wings in Brazil Set Off a Tornado in Texas?)"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 말이죠. 이는 작은 변화가 나중에 커다란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으로 예측의 불확실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역사에서도 나비 효과라는 것이 있을까. 이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연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그렇다고 항상 필연인 것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이라 하여 혼돈 속에도 질서가 있고 질서 속에 혼돈이 있습니다. 어떤 결과는 반드시 원인이 있지만 그 원인은 한가지만이 아니라 수많은 원인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기에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가서 바꾸려고 해도 결과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고 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 "만약 이랬다면?"라는 가정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지극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다양한 경우를 고려해도 너무나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히틀러가 없었다면 2차대전은 일어났을 것인가. 2차대전은 독일의 호전성과 증오심, 대공황, 연합국 지도자들의 무기력함, 무솔리니,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 등에서 비롯되었으며 여기에 결정적인 방아쇠를 당긴 사람이 히틀러입니다. 2차대전은 단순히 히틀러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사건은 아니지만 히틀러가 조금 덜 호전적이었거나 히틀러 대신 아데나워같은 사람이 정권을 쥐고 전쟁 대신 협력으로 헤쳐나가려고 했다면, 또는 체엄벌린 대신 처칠이 정권을 쥐고 독일의 팽창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하려 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어쩌면 소련이 일본과 손을 잡고 세계대전을 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하지 않았다면, 또는 러시아 원정에 성공했다면 그의 제국은 천년을 갔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의 몰락은 단순히 러시아 원정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의 제국이 가지고 있던 취약성 때문이니까요. 히틀러나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은 것은 필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몰락은 필연이었습니다. 역사란 곰곰히 살펴보면 이렇듯 우연과 필연이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공내전에서 마오의 승리는 우연인가, 필연인가? 마오가 아닌 장제스가 이겼다면 이후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는 "2차대전에서 히틀러가 이겼다면?"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중국 5천년 역사는 흔히 내전의 역사라지만, 그 중에서도 국공내전만큼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에 큰 파장을 준 사건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오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극동에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패전 일본을 부흥시켜 영국과 독일, 소련을 능가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시켰으며 미-소의 냉전을 격화시켰습니다. 중국은 약 30년 동안 죽의 장막을 치면서 외부와 철저하게 차단됩니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총GDP에서 인구가 1/20도 되지 않는 우리보다도 작았을 정도입니다. 마오의 통치가 전적으로 중국인들에게 상처만 남겼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중국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시킨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겠지요. 사실 국공내전은 필연적 사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한 뒤 1946년 6월 내전이 폭발하기까지는 내전을 반대하는 미소의 간섭, 국내외적인 비판 여론, 쌍십협정과 수차례의 정전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느 한편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한데다 내전을 일으킬 여력도 없었기에 양측 모두 적정한 선에서 타협할 의사가 있었고 실제로 타협 직전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만약 확실한 승산이 있었다면 굳이 협상 테이블에 앉아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이 신속하게 공격했겠지요. 근 1년 가까이 질질 끌었다는 것은 그만큼 고뇌와 망설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동북을 놓고 갈등과 충돌이 반복되면서 양측의 불신감이 고조되면서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국공내전은 근본적으로는 국공의 갈등과 모순에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동북을 놓고 벌인 경쟁이 촉발했습니다. 어느 한편도 동북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동북이 갈등의 요인이 되지 않았다면 국공내전이 벌어졌을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겠지요. 이는 중공이 장제스보다 먼저 동북을 점령했기 때문인데 소련군이 만주를 점령한 뒤 스탈린이 장제스를 견제할 목적으로 중공의 동북 선점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국민정부군의 만주 진입은 방해합니다. 이로 인해 국민정부군은 철도를 제대로 이용할 수 없었고 그들이 점령한 대도시들은 극심한 물자 부족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기에 국민정부군의 전쟁 수행을 돕기는 커녕, 가뜩이나 열악한 병참선에 부담을 가중시켰습니다. 또한 철도와 농촌의 대부분을 점령한 공산군은 국민정부군이 장악한 도시로 식량과 물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하였습니다. 이것이 동북에서 장제스의 패배로 이어졌고 동북의 패배는 국공내전의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즉, 거슬러 올라가면 국공내전과 마오의 승리는 소련군의 만주 침공이 유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한 것은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대일전쟁의 참전을 촉구했기 때문입니다. 두달도 안되어 루즈벨트는 서거했지만 그 뒤를 이은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대소 유화정책을 승계하였고 이 때만 해도 소련에 대한 불신감이나 증오심이 크지 않았습니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자신이 스탈린에 대해 근본적인 불신을 품게 된 것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스탈린의 야심을 직접 확인한 뒤라고 합니다. 트루먼은 소련의 베를린 점령을 묵인하였고 만주 침공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저지할 수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얄타 회담의 삼거두. 루즈벨트는 카이로 회담까지만 해도 장제스의 든든한 후원자였지만, 스틸웰과 장제스의 갈등과 이치고 작전의 패배로 장제스를 경멸하기 시작했고 얄타 회담에서도 철저하게 배척하였다. 덕분에 중국은 완전히 소외된 채 얄타 회담은 물론이고 포츠담 회담에서도 초청받지 못했다.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가 이미 전쟁 막판이고 일본의 패망은 어차피 시간문제임에도 소련의 참전을 요청한 것은 테헤란 회담의 연장선이기는 하나, 단순히 대소유화정책의 결과만은 아니며 중국의 역량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자력으로 중국 내 일본군(지나파견군)을 격파하고 동북과 한반도로 진격할 역량이 있다면 굳이 스탈린에게 참전을 요구할 필요는 없었겠지요. 여기에는 1944년 5월부터 시작된 일본 최대 최후의 공세였던 이치고 작전에서 중국이 완패하면서 중국의 군사적 취약성을 드러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중국군이 약하거나 장제스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주변 상황이 엉뚱하게 흘러간 결과이기도 합니다. 스틸웰이 북부 버마를 침공한 상황에서 무다구치가 중부 버마에 대한 역공을 시작하면서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직면한 스틸웰은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을 무시하고 중국군 유일의 전략 예비대인 "Y군"을 전용합니다. 장제스는 "Y군"의 재편이 완료됨과 함께 1944년 여름부터 독자적으로 전략적 반격에 나설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으나 반격을 취소해야 했고 일본군의 공세가 시작되었을 때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을 상실합니다.
약 30만명에 달하는 최정예부대가 장제스의 수중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중국군은 뤄양과 창사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며, 헝양에서 일본군이 고전할 때 측면을 공격하여 격퇴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국 전선의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겠지요. 하지만 스틸웰이 북부 버마에 매달려 있는 동안 중국은 동부와 중부를 완전히 상실한 채 거의 패배 직전에 몰린 채 서남부로 밀려납니다. 스틸웰 자신은 승리자가 되어 언론의 서포트 라이트를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중국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죠.
만약 남방 전선에서 연전연패를 당하고 있던 일본이 전략적으로 의미가 없는 이치고 작전에 매달리지 않았다면, 또는 무다구치의 원정이 없었다면 어떠했을 것인가. 루즈벨트가 얄타 회담에서 굳이 스탈린에게 매달렸을 것인가. 얄타 회담에서 장제스를 초청했다면 소련군이 동북을 일방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을까. 루즈벨트가 장제스와 중국을 존중했다면. 얄타 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스탈린이 맺은 밀약의 내용을 장제스가 진작에 알았고 사전에 대응 방안을 마련했다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
더 시간을 되돌려서 중일전쟁이 없었다거나 시안사변이 없었다면. 더 나아가 장제스가 1934년에 양쯔강 중하류에서 공산군을 서북으로 밀어내지 않았다면. 중공의 대장정은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을 때 이들이 안전한 곳에 숨어 있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있었다면 중일전쟁 초반에 최일선에 놓인 채 호된 타격을 입었을 것이며 서북과 화북에 거대한 세력권을 형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동북으로의 레이스 따위는 감히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물론 이는 누구도 처음부터 의도한 바가 아니며, 누구도 이런 결과가 초래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겹쳐 있는가를 본다면 국공내전은 실로 역사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진정한 나비효과의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국공내전은 1946년 6월 24일 정전 협상 결렬과 장제스가 해방구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전면전으로 폭발합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마셜의 마지막 조정이 있었으며 1947년 1월에야 완전히 결렬되어 저우언라이와 중공 협상단이 난징에서 철수하면서 대화가 단절되지만 통상 국공내전은 이 순간에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이 과정에서 장제스는 끊임없이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의 군사 고문인 웨드마이어는 전략적으로 불리하다며 동북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으며 마셜은 무력 사용을 결단코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습니다. 장제스 주변에서도 옌시산처럼 당장 중공과 영토를 맞대고 있는 군벌은 내전에 찬성한 반면, 리쭝런과 펑위샹, 롱윈, 리지선 등 장제스와 사이가 나쁜 군벌들은 내전에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국민정부는 강력한 결속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중일전쟁 이후의 중국 사회는 1930년대와 많은 차이가 있었으며 이전의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 어느 때보다도 오픈된 사회가 되었습니다. 지식인들은 장제스의 독재 성향을 비판하는 한편, 내전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공산당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지만 같은 중국인끼리 싸우기보다 오랜 전란에서 벗어나 부흥과 재건, 근대화되고 강력한 민족주의 국가로 거듭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장제스가 이전처럼 비밀경찰과 총칼을 앞세워 국민들의 목소리를 억지로 누르는 것은 분명 시대착오적인 행태였습니다.
반면, 마오는 철권통치를 하면서도 단순히 국가 폭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군중이 스스로 움직여 자신의 전위대가 되도록 적절하게 활용하였습니다. 마오의 선동술과 군중 조직 능력이야말로 다름아닌 그가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자, 그렇게 많은 상처를 남겼으면서도 죽은 뒤에도 국민들에게 여전히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죽어서 신으로 추앙받는 경우는 딱 두 사람 뿐으로, 한 사람은 관우 또 한 사람이 마오입니다.
장제스 자신도 내전이 가져다 줄 리스크를 몰랐을 리는 없습니다. 국공내전은 노예제의 존속과 경제적 모순이 남부의 연방 탈퇴에 이어지면서 시작된 남북전쟁과 달리, 불가피한 전쟁이 아니었으며 실상 장제스와 마오쩌둥 두 사람의 권력 다툼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아예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장제스가 정전협정을 깨뜨리고 전면 공격에 나선 이유는 중공을 그대로 둔다면 결국 정권 자체가 중공에게 넘어가리라는 공포심 때문이었습니다. 장제스의 가장 큰 실수는 중공의 정치적 역량은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면서 군사적 역량은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는 점입니다. 또한 어떤 일이 있어도 중국을 양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라는 강력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자신의 취약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내부를 다지는데 우선했다면, 동북을 중공에게 내주고 대신 관내를 굳혔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밴드오브브라더스>로 잘 알려진 역사 학자이자 작가인 스티브 엠브로스(Steven Ambrose)의 <만약에(What If?)>라는 책에서도 한 챕터를 할애합니다. 엠브로스는 장제스가 중공을 동북으로 몰아넣었다면 중공 지도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의 경제를 말아먹었을 것이며 결국에는 본토에 흡수 병합되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장제스가 끝까지 동북에 집착한 이유는 동북이 중국 유일의 거대한 공업지대였기 때문에 중공이 이곳을 차지할 경우 경제력에서 본토를 압도하고 여기를 발판삼아 반격에 나설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엠브로스는 마오가 대약진운동과 문혁에서 보여준 모습을 통해 동북 역시 파산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는 일방적인 가정에 불과합니다. 중공 지도부에도 엄연히 많은 경제 전문가들이 있었고 마오가 절대 권력을 쥐게 된 것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했기 때문이기에 바꾸어 말해서 내전이 없었다면 마오 혼자서 전횡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소련은 동북을 본토로부터 분리 독립시키려고 했을 것이며 중공이 자립할 수 있도록 원조를 제공했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장제스가 우려했듯이 중공이 동북을 발판으로 본토를 침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미국 또한 이를 지켜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국공내전 동안 미국은 애매한 태도를 고수했는데 이는 내전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장제스가 무리하게 선제 공격을 하면서 내전의 명분을 상실하였고 미국과 장제스의 입장이 모순되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중공이 선제공격을 했다면 트루먼은 단순히 중국 내부의 문제로 보지 않고 소련의 대리 전쟁으로 취급하여 훨씬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것입니다. 이는 한국전쟁에서 증명되었습니다.
장제스는 군사적으로는 월등히 우세했지만 내전의 명분을 상실하면서 결속력이 매우 취약했으며 국민적 지지 기반도 상실합니다. 또한 광대한 전선에 걸쳐 전략적으로 매우 방만한 공격을 일삼으면서 어느 쪽에서도 우위를 확보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군사적 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중공의 승리는 분명 놀라운 것이지만 그들이 탁월한 전략을 구사했다기 보다 장제스가 치명적인 실수를 반복하면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공내전은 군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주목할 만한 것이 없으며 현대적인 무기가 사용했다는 점을 제외하고 항우-유방 시대의 전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남북전쟁보다도 형편없었습니다. 무리한 진격으로 병참이 끊어진 국민정부군은 여기저기 고립되었고 타성에 젖은 장군들은 주동적으로 싸우기를 거부했습니다. 장제스와 일선 장군들의 불신과 갈등이 극에 달하면서 장제스는 마구 간섭을 일삼아 장군들의 충성심을 더욱 떨어뜨립니다.
▲ 국공내전 폭발 당시 양측의 비교.
장제스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기 전에 과감하게 황허 이북을 포기하고 화중과 화남을 굳히는 쪽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국방부장으로 국민정부군 제일의 전략가였던 보충시(白崇禧)는 전황이 점점 악화되자 장제스에게 병참을 고려하여 동북과 화북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방안을 제안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제스는 한번 물러나면 도미노처럼 전 전선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하여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1948년 초까지도 팽팽했던 전세는 동북에서 결판이 나면서 한순간에 붕괴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장제스의 권위에 마지못해 싸우던 일선 부대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채 줄줄이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모든 전선이 일시에 무너지게 됩니다.
▲ 국공내전 과정에서 국공의 군사력 격차. 3대 전역의 패배를 기점으로 공산군은 대량으로 투항한 국민정부군을 편입하여 양적으로 압도한 반면, 국민정부군은 통치 구역에서도 징병 시스템의 미비함으로 병력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강제로 징집당한 병사들은 싸울 의지가 있을 리 없었고 줄줄이 탈영하거나 투항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미국마저 등을 돌리고 추가 원조를 거부하자 1949년 1월 21일 장제스는 하야를 선언하였습니다. 이는 상황을 호전시키기는 커녕 국민정부의 분열상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장제스를 대신하여 총통이 된 리쭝런은 장제스만큼의 권위가 없었습니다. 또한 장제스는 뒤로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여 리쭝런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습니다. 3개월 후인 4월 22일 공산군이 양쯔강을 일제히 도하했을 때 국민정부군은 단 하루만에 와해됩니다. 그나마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부대들마저 지도자들의 분열상에 실망한 나머지 줄줄이 중공에 투항하는 등 변변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했습니다.
국민정부군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양쯔강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은 결코 공산군의 우세함 때문이 아니라 이런 내부적인 분열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장제스가 보충시의 건의를 받아들였다면, 또는 하야하지 않고 끝까지 지도자로 남아 있었거나 반대로 완전히 손을 뗀 채 해외로 망명했다면 양쯔강은 지켰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남북 대치 상태가 된 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겠지요. 어쩌면 남부의 우세한 경제력으로 북부를 제압했을 지도 모르죠. 반대로 국민정부의 분열상이 더욱 악화되어 결국 남베트남처럼 내부에서부터 붕괴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누가 알까요.
이 모든 가정을 제쳐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공내전의 승자가 마오가 아닌 장제스였다면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장제스와 마오 두 사람의 통치 철학이 어떤 면에서 비슷하고 어떤 면이 다른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오는 국가 폭력을 통해 전통적인 봉건주의를 하루 아침에 때려부수었습니다. 장제스 또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했지만 마오는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면서 조직적이었습니다. 그는 강제로 토지를 몰수하여 무상 분배했으며 여성을 가정에서 해방시켰고 공자를 비롯한 모든 종교는 우상 숭배라 하여 금지시켰습니다. 이는 중국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구습과 인습을 타파한 것이지만 방법이 강압적이었기에 극심한 혼란과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입으로는 "사회주의를 통해 모두가 잘 사는 이상 사회"를 말하면서도 정작 경제 정책에서는 서구의 침략을 막고 사회주의 혁명을 전 세계로 전파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농업과 경공업을 희생시키는 대신 군수산업과 중공업에 집중 투자했으며 중국을 군국주의 사회를 만들어 국민들의 끝없는 고통을 강요하였습니다. 심지어 사치 향락을 금지한다며 인민이 입어야 할 옷과 머리 스타일까지 구석구석 간섭하고 제약을 하였습니다.
부국강병과 봉건주의 파타라는 원칙에서는 장제스 역시 마오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방법론에서 훨씬 점진적이었습니다. 시장 경제를 원칙으로 하면서 중앙이 개입하는 계획 경제는 제한적이었으며 토지는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이것은 보다 온건하면서 합리적이었지만 대다수가 소작농이었던 중국 농민들과 현실의 부조리함을 비판하던 지식인들의 눈에는 차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국공내전의 승패를 갈랐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당대 서구의 관찰자들의 눈에는 깐깐하고 괴팍한 장제스보다 마오쩌둥이 훨씬 온화하고 부드러워 보였습니다. 이런 이미지가 국공내전 과정에서 미국이 장제스와 마오 두 사람을 놓고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갈등을 벌였던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막상 마오가 정권을 쥐자 장제스 이상으로 철권을 휘두릅니다. 카리스마와 추진력, 집요함에서는 장제스를 훨씬 능가했던 그는 자신의 능력을 오직 절대 권력의 구축에만 활용하였습니다. "백화제방 · 백가쟁명(百花齊放 · 百家爭鳴)"이라 하여 비판을 허용한다고 하고서 막상 눈치없는 비판자들은 우파로 몰려 숙청당합니다. 그의 체면에 조금이라도 손상을 가하는 자는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조석으로 바뀌는 변덕 덕분에 류사오치와 린뺘오 등 그의 후계자가 되려고 했던 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국공내전의 패배 이후 서구에서는 장제스를 단지 무능하고 부패한 "실패한 권력자"로만 규정하였지만 근래에 와서 공과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죠. 청조 말이나 베이양 정권 시절의 군벌 출신 권력자들과 비교했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민족주의자였으며 그가 추진했던 근대화는 단순히 서구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부국강병과 함께 중국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이었습니다. 또한 마오쩌둥처럼 서구를 맹목적으로 배척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았습니다. 그가 통치했던 이른바 난징 10년이라고 불리는 1930년대는 중국의 부흥기였습니다.
물론 장제스는 엄연히 많은 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 이상으로 높이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장제스 정권은 군벌연합정권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주, 자본가와 같은 기득 세력들의 권익을 보장해 주어야 했습니다. 특히 관료 조직 구석구석에 뿌리 박고 있는 부정부패와 나태, 방만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장제스 정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천년 동안 중국 사회에 항상 존재해 왔던 것입니다. 이는 낙후된 사회가 초래한 결과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장제스와 마오, 두 사람이 새로운 중국에서 서구식의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전통적인 중국 사회에서 태어나 봉건적인 구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들이 성인이 된 뒤에 어떤 사상을 접했고 어떤 교육을 받았건간에 근본적으로 이 한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대 모든 중국인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구습에서 탈피하는 것은 단순히 지도자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성숙해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마오가 "삼반운동" "오반운동"이라 하여 부패한 관료들을 총살하는 등 부정부패를 근절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정작 중국 사회라는 근원은 바꾸지 못했기에 오늘날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결국 나라를 뒤엎는다고 사회를 통째로 바꿀 수는 없으며, 그보다 얼마나 비판을 허용하고 사회적 감시 체제를 인정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할 수 있죠. 서구 선진국들 또한 모든 이와 같은 발전 과정을 밟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합니다.
만약 장제스가 1950년대 이후의 중국을 통치했을 때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누구도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팩트를 중심으로 몇가지 가정은 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저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첫째로, 장제스 정권은 오래 가지 못한 채 1960년대에 중국은 민주화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장제스 정권은 마오 정권보다 훨씬 취약했습니다. 장제스는 절대 권력자가 아니었으며 국민정부는 다양한 정치적 연합세력들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수많은 견제와 비판을 받았습니다. 장제스의 난징 정권은 독재 정권이지만 외부로부터 오픈된 정치 체제이기도 합니다. 언론은 정부의 통제 아래 놓여 있으면서도 꾸준히 여기에 도전하였습니다.
장제스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것이 아니라 총칼로 권력을 쥔 사람이지만 1947년에 국민대회(우리의 국회) 선거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총통을 선출한 것은 단순히 총칼로 국민들을 통치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정권의 합법성을 얻기 위해 서구식 민주주의를 점진적으로 받아들인 결과입니다. 바로 이 점이 중공과 다른 점이죠. 중국은 오늘날까지도 정치는 혁명 자제들로 구성된 소수의 엘리트들이 독점하며 국민의 정치 관여를 철저하게 차단합니다.
따라서 국공내전의 승리가 장제스의 위상을 일시적으로 높였겠지만 그의 독재는 오래지 않아 대내외적인 비판에 직면했을 것입니다. 장제스가 제아무리 권력욕이 강하다고 해도 우리가 1980년대에 그러했듯 한동안 진통을 겪은 후 후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 강제로 쫓겨났겠지요. 마오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지만 장제스는 적어도 대륙에서는 그렇게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지배했는가가 아니라, 어떤 체제인가입니다. 장제스와 마오 모두 독재를 지향했지만 기본적으로 장제스의 중국은 열린 사회였고 마오의 중국은 닫힌 사회였습니다. 장제스 시절이 "자유를 얼마나 누릴 수 있는가"의 문제였다면 마오 시절은 아예 "그 자유가 있는가의 문제"였습니다. 마오가 저질렀던 최대의 실책인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은 적어도 장제스 치하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장제스가 아무리 독재를 했다고 해도, 우리의 민주화 운동처럼 인민의 손으로 독재자를 끌어내리는 것은 더 나은 세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무력으로 정권을 쥔 마오쩌둥은 이전에 이룩한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렸습니다.
만약 국공내전에서 장제스가 승리했다면 군벌 시대의 혼란으로 되돌아 갔을까.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난징 정권 말기에 이미 중국은 신해혁명 이래 오랜 정치적 분열상과 봉건적인 부분을 상당부분 극복하고 있었습니다. 국민정부는 군벌들을 대부분 정리한 상태였으며 남은 군벌들 또한 1930년대처럼 지방에 할거하면서 무력으로 중앙에 도전하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국공내전은 그 마지막 단계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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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톈안먼에 걸린 사진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톈안먼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하게 된 것은 국공내전에 승리한 마오가 대규모 군중 동원과 정치 선전을 목적으로 완전히 개조했기 때문입니다. 장제스는 군중 동원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톈안먼을 이런 식으로 개조하지는 않았겠지요.(게다가 수도가 베이징이 아니라 난징이니)
둘째로, 아시아 경제의 중심은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 되었을 것이다.
전후 일본이 폐허를 딛고 일어난 것을 전적으로 주변의 정치적 상황이나 미국의 도움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일차적으로는 그들이 가진 역량과 희생 덕분입니다. 하지만 극동에서 공산주의 세력이 부상하여 일본이 최일선에 놓이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의 부흥은 분명 훨씬 늦어졌을 것입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해 응징 차원에서 아예 농업 국가로 경제를 재편할 생각도 있었으나, 국공내전의 상황이 악화되자 공화당의 보수파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대소 봉쇄를 위한 아시아의 최일선으로 삼자는 안이 강력하게 제기됩니다. 따라서 점령정책 또한 일본에게 훨씬 유리하게 바뀌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배상금 요구를 포기하고 오히려 적극적인 원조 정책을 시작합니다.
중일전쟁이 승리한 중국은 일본이 점령지에 남기고 간 막대한 자산을 배상금의 일부로 획득한데다 미국은 중국의 부흥을 위한 다양한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추진합니다. 국공내전 동안 미국 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제공한 각종 경제 원조와 현물 자산은 최대 6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며, 같은 기간 마셜 플랜으로 미국이 서유럽의 부흥을 위해 제공한 원조가 모두 합하여 100억 달러 정도라는 점에서 엄청난 액수입니다. 중일전쟁 동안 제공된 원조는 20억 달러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중국으로서는 전례없는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죠.
장제스는 어떠한 내부적 개혁도 거부한 채 이 돈을 중국의 부흥에 쓰는 대신 내전에 활용하지만, 만약 그가 내전 대신 개혁과 부흥에 주력했다면 중국은 분명 폭발적인 성장을 했을 것이며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능가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1970년대에는 총 GDP에서 영국과 독일은 물론이고 구 소련조차 능가하고 미국 다음의 경제대국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1950~60년대 세계 경제는 전례없는 호황을 누리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마오는 죽의 장막을 친 채 서방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내부 투쟁과 자력갱생에 매달렸습니다. 덕분에 중국은 40년이라는 시간만 허비한 꼴이 되었습니다.
또한 오늘날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극심한 빈부 격차, 농민공 문제, 부정부패, 모럴 해저드는 덩샤오핑이 추진한 개혁개방이 만들어낸 부작용이기도 합니다. 덩샤오핑은 이른바 "선부론(先富論)"이라 하여 "일부 사람을 먼저 부유하게 하라(讓一部分人先富起來)"라고 말합니다. 즉, 모두가 동시에 부자가 될 수는 없으므로 부자가 될 수 있는 사람부터 부자가 되면 낙수 효과에 의해 자연스레 중국 전체가 부유해 질 것이라는 논리인데, 말은 그럴싸하지만 이로 인해 부가 일부지역, 일부계층에 집중되는 편중 현상을 심화시켰습니다.
단물은 권력에 가까운 고위 관료나 이들과 결탁한 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만이 차지하였고 절대 다수는 오히려 이전보다 삶이 어려워졌습니다. 지도층 치고 부정부패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단 한명도 없는 반면 하루에 1천원을 못 버는 극빈층이 3억명 이상입니다. 짧은 기간 고도 성장하면서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와졌지만 의식 수준이 뒤따르지 못하여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배금주의, 모럴 해저드가 팽배합니다. 국가는 잘 살지만 국민은 못 사는 나라. 이는 물론 중국만이 아니라 우리의 얘기이기도 하지만 그 정도를 따진다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 또한 있습니다. 중국은 경제만 개혁개방했을 뿐 정치는 여전히 폐쇄적이며 감시와 비판이라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그럼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우선 한국전쟁은 없었거나 일어났다고 해도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베트남전과 달리,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외세를 끌어들여 일으킨 전쟁입니다. 김일성은 중국 대륙에서 마오가 승리를 굳히자 여기에 고무되어 본격적으로 스탈린에게 무력 통일을 주장하면서 남침에 필요한 무기를 요구합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시큰둥했지만 마오의 승리, 김일성의 거듭된 요청, 이승만의 호전적인 태도로 남침에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면서도 전제 조건으로 마오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국공내전이 지지부진했거나 마오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면 김일성 또한 그의 야욕과 상관없이 스탈린로부터 남침에 필요한 지원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일성이 소련과 상관없이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없는가. 그는 자력으로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역량과 지지기반이 너무나 약했습니다. 오랫동안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 전쟁을 벌여왔던 호치민은 제네바 협정 이전부터 베트남 전체에 걸친 저항 조직을 구축했으며 사실상 자신의 역량만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는 프랑스를 물리쳤습니다. 그 또한 외부의 원조를 받기는 했으나 투쟁 역량의 원천은 베트남 인민들에게 있었기에 김일성보다 훨씬 덜 의존적이었습니다. 반면, 김일성은 국내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없었고 해방과 동시에 38선이 그어지면서 남한내에 자신을 지지하는 지하 조직을 구축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겼을 뿐더러, 상호 불신감과 증오심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였습니다. 동서독은 통일이 된 반면, 우리는 통일은 고사하고 여지껏 변변한 대화조차 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뿌리깊은 증오심이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전쟁이 없었다고 통일이 되었을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남북의 증오심은 지금보다 훨씬 덜했겠지요.
나무 위키라는 사이트에서는 장제스가 이겼다면 우리가 미국 대신 중국에 예속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던데, 우리가 미국에 정치적으로 예속된 이유는 다름아닌 미국에 의해 해방되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재정적, 안보적인 이유로 정치적인 예속 관계가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미국과 중국은 엄연히 다른 존재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 경제권에 편입될 수 있어도 정치적으로는 별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는 한중 수교 이후 이미 중국의 거대한 경제권에 상당 부분 편입되어 있는 현실이죠. 이는 결국 시기의 문제일 뿐, 경제대국을 이웃에 두고 있는 소국으로서는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폐허에서 일어선 것은 단순히 미국의 원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가진 역량 때문입니다. 우리는 미국의 원조에 철저하게 의존했던 남베트남이나 필리핀과는 다르며, 미국의 원조는 제한적이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이 덜 간섭하고 덜 관심을 가졌던 것이 우리가 자력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막대한 원조는 지도부의 모럴 해저드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독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장제스가 몰락한 것이나, 남베트남이 부정부패에 시달리다 결국 와해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웃에 일본이라는 경제 대국을 두고 있으며 고도 성장기 초반 일본의 하청을 받아서 돈을 벌었다는 점에서 일본이 중국으로 바뀐다고 한들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한국전쟁이 없고 남북한의 관계가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았다면 지정적인 위치를 활용하여 중국-일본-러시아-미국 4대 경제 대국 사이에서 허브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남북한의 긴장 상태로 인해 이런 지정학적인 유리함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유리한 점은 경제 규모에 비해 과도한 군비 투자를 할 필요가 없는 점, 코리아 리스크로 발목을 잡힐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코리아 리스크가 상당 부분 해소되기는 했으나 1990년대까지도 한반도는 중동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로 꼽혔습니다. 이런 리스크가 외국인 투자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어 북한에서 무력으로 위협할 때마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철수하고 주가는 폭락했으며 국민들은 패닉에 빠져들었습니다. 오늘날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을 발사해도 우리 사회는 담담합니다. 이에 대해 몰지각한 일부 세력들은 아직도 구태의연한 생각에 사로잡혀 "국민들의 안보 의식이 부족하다"운운하며 질타하지만 실로 무책임한 소리일 뿐입니다. 외부의 긴장을 자신들의 이익에 악용하려는 집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수많은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어쨌든 실제 역사에서 이긴 쪽은 마오쩌둥이요, 패배한 쪽은 장제스입니다. 장제스의 패배는 천재지변도 아니고 외세의 개입 때문도 아닌 전적으로 본인의 실책입니다. 제아무리 장제스에게 우호적인 사람이라도 이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승리했고, 좀 더 오랫동안 통치했을 때 중국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어차피 상상일 뿐이죠.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도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