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即是空 空即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
부처님께서 사람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목표는 언제나 해탈입니다.
해탈이란 괴로움이 없는 상태, 두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질문을 하던 부처님은 그 질문자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에
열반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에게 그 길을 인도할 수가 없겠다고 판단하면
부처님은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하셨습니다.
공사상은 대승불교(마하야나)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전에는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근본불교(테라밧다)가 있었습니다.
대승불교가 나오기 직전에 소승불교에서는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아니다. 이것이 바른 가르침이다’
이렇게 동쪽이니 서쪽이니 북쪽이니 여러 학파로 나누어 다투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하나로 절대화해서 서로 주장을 했던 겁니다.
대승불교 초기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동쪽이라 할 수도 없고
서쪽이라 할 수도 없고 북쪽이라고 할 수도 없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다가 ‘공(空)’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공을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시면 잘못됐어요.
정확하게는 ‘정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것도 시간과 공간을 무시하고는 정해질 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이 정해지면 어떤 방향이 정해진다는 뜻입니다.
■ 예문 1
우리가 보는 삼라만상은 모양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이를 색(色)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색은 어떤 실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 합니다.
제법이 공하다고 합니다.
어두운 밤에 귀신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보면 귀신은 없습니다.
귀신이 아니라 환상입니다.
남편이 부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 남편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내 마음이다.
남편이 그런 상(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편에 대한 상(相)이 내 마음에 들고 내에게 이익이 있으면 좋게 보이고,
내가 싫어하면 밉게 보여 나쁜 상이 그려진다.
하늘에서 비가 내릴 뿐인데 소풍가는 사람은 나쁜 날씨고,
모내기 할 사람은 좋은 날씨가 된다.
날씨는 다만 날씨 일뿐이다.
공 (空)입니다.
좋은 날씨다, 나쁜 날씨다는
저마다 자신이 그렇게 그릴 뿐인데
이것을 일체유심소조(一切唯心所造)라고 한다.
■ 예문 2
사람은 날씨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좋은 날씨가 있고, 나쁜 날씨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색(色)이다.
날씨는 좋은 날도 없고 나쁜 날도 없다. 즉 공(空)이다.
색이 공한 줄 알아야 한다.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미워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사라진다.
비가 내리면 소풍가는 학생은 짜증이 나지만,
비를 기다리는 농부에게는 즐거운 일이다.
비는 그냥 내릴 뿐 좋고 나쁜 것이 없는 공이다.
단풍 든 가을 산이 좋으면 내가 기분이 좋다.
가을 산이 기분이 좋은 게 아니다.
그래서 살면서 가능한 기분 좋은 마음을 내야한다.
마음에 근심과 걱정이 없고 기분이 좋은 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어떤 인연이든 만나서 같이 살 바에야 기분 좋은 마음을 내며 살아야 한다.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기분 좋게 살아야 한다.
좋아할 수가 없는 데 어떻게 좋아할 수 있느냐?
이는 불법을 몰라서 그렇다.
불법에는 좋아 하고, 미워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나쁘다고 할 것이 없다.
■ 예문 3
식탁에 컵이 놓여 있을 때 이 컵이 새 거냐? 헌 거냐? 하고 물으면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다.
이 컵이 무겁냐? 가볍냐? 할 때도
무겁다 할 수도 없고 가볍다 할 수도 없고.
이 컵이 좋은 거냐? 나쁜 거냐 할 때도 좋다고 할 수도 없고,
나쁘다고 할 수도 없어요.
컵 자체는 그 어떤 속성도 없다.
그러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냐? 아니다.
인연을 따라서는 큰 게 되기도 하고,
작게 되기도 하고, 무겁게 되기도 하고
가볍게 되기도 하고 새것이 되기도 하고
헌 것이 되기도 하고 좋은 것이 되기도 하고
나쁜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럴 때 ‘이 컵은 그 어떤 속성도 없다.’고 하는데
이처럼 특정한 것에 속성이 없는 것을 공(空)이라고 합니다.
공이기 때문에 온갖 것이 다 될 수가 있어요.
크게 될 수도 있고, 작게 될 수도 있고, 무겁게 될 수도 있고.
가볍게 될 수도 있고. 그것을 공이라 하기 때문에
공(空)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 예문 4
남편과 내 단점만 닮은 자녀들이 마음을 힘들게 합니다.
이 질문자는 남편과 자식을 미워하고 있다.
남편과 부인이 생각이 다르고,
나와 남편이, 나와 자녀들이,
나와 친구와, 나와 시댁 사람들과 모두 생각이 다릅니다.
옳고 그름은 없습니다.
이것을 제법이 공(空)하다고 말합니다.
옳다할 것도 그르다 할 것도 없는 것이다.
서로 생각과 습관이 다를 뿐입니다.
남편과 자식을 미워하면 과보가 따름니다.
자식들이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습니다.
질문자는 남편에서 참회를 해야 합니다.
내 기준에 따라 남편을 미워했을 때 남편에게 참회 기도를 하면
남편에 대한 옳고 그름이 사라지고 남편이 공성(空性)이 됩니다.
더나가 남편입장에서 보면 남편이 하는 짓은 다 옳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업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이 다른다.
■ 예문 5
“인연으로 어떤 것이 생기고 없어지며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을 ‘공’이라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식물의 싹이 씨앗, 흙, 습기, 온도 등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싹이 튼다.
싹이 본래부터 씨앗 속에 들어 있은 것이 아니고 습기나 온도 속에 들어 있던 것도 아니다.
또 어딘가에 따로 있다가 나타난 것도 아니다.
싹은 인연에 의해 생기는 것처럼 인연에 의해 없어져 버린다.
이러한 논거로 싹 자체의 실체가 없다고 하며
같은 방법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언어 곧 ‘공’이라는 것은 말일 뿐이다.
말도 인연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며,
말을 만드는 여러 가지 인연들이 목구멍, 입술, 혀, 이빨, 코 속에 본래 들어 있던 것도 아니고
어딘가 따로 있다고 나타난 것도 아니다.
따라서 말 자체도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다.
따라서 ‘공’하다고 해봐야 말이 공한데 공하다고 할 수 있는가?
불이 있어야 태울 수 있고 칼이 있어야 벨 수 있는 것처럼
말이 있어야 공하다고 부정할 수 있을 것 아닌가?
혹 다른 모든 것은 ‘공’하지만 ‘공’하다는 말은 ‘공’이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닌가?
이미 모든 것은 공하다고 한다면 말도 그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다.
‘공’하다는 말이 ‘공’이 아니라면 ‘공’하다고 주장 할 수 없다.”
■ 예문 6
공이란 단순히 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에 크다고 할 것이 없고,
작다고 할 것이 없고,
옳다고 할 것도 없고
그르다고 할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조건에서는 그렇게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거나 괴로워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주장을 할 때는 순간적으로 상대적인 것을 객관화시켜 버립니다.
‘내가 그렇게 인식했구나.’라고 보는 게 아니라
‘이게 옳다. 사실이다,’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주장을 하는 거예요. 우리의 일상은 늘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공한 줄 알면 마음에 괴로움이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존재 자체는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 작다,
크다라고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인식하는 대로 말할 수는 있지만
절대적 성질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서로 다를 뿐이지 누가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논쟁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누가 맞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은 믿음이 다르구나.’라고 바라보면 됩니다.
출처 : 법륜 스님 <즉설즉문> 등 글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