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투신, 인간의 완성, 개인과 공동의 행복에 그토록 중요하고 필요한 용서가 왜 그리 힘든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대체로 용서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해답은 ‘용서가 어떤 것인가’보다는 ‘용서는 이런 것이 아니다’ 하는 데서 나온다.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없게 가로막는 문제점은 일단 용서는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금방 해결된다.
용서는 망각이 아니다. ‘용서하고 잊어라’는 충고는 대체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진정한 용서는 그와 정반대다. 진정한 용서는 명심하는 것-이미 일어난 그 일이 삶에 주는 진정한 가치를 아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용서가 곧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을 묻어두어야 한다거나 최소한 없었던 일인 양 가장해야 한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용서는 망각이 아니다. 우리는 아픔과 지난 상흔을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있다. 상처를 잊어버리는 것은 배움의 기회를 무시하고 넘어감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과거의 상처가 은총의 선물로 위장될 수 있다. 망각은 상처가 치유되고 용서가 이루어질 때 가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용서의 부산물이지 필수적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망각할 수는 있지만 한때 우리를 지배하고 제어하던 고통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에서 가능한 것뿐이다. 대체로 기억은 퇴색되지 않는다. 상처를 곰곰이 되새기거나 과장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상처를 잊거나 무시하려는 것도 부자연스럽고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과거에서 배운다. 기억은 성장을 돕고 또한 우리네 에너지 방향을 새롭게 조정하며, 학대의 순환고리를 끊어버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용서와 망각을 혼동할 때 자주 용서하지 못하게 된다 해서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 여자가 내게 한 짓을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은 통상적으로 ‘나는 그 여자가 내게 한 짓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라거나 최소한 마음속에서 이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두 가지가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용서한다는 것은 눈감아준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해쳤다면 그는 분명 우리를 해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삶에 영향을 준다.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가 옳았다거나 피해를 극소화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또한 사면의 한 형태가 아니다. 우리는 용서할 때 누군가를 낚시바늘에서 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그대에게, 사회에, 그들 자신에게, 하느님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그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있다. 그렇다, 용서한다는 것은 신적인 일이다. 용서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함께 나눈는 것이다-그러나 사면은 하느님만이 하신다-그리고 죄인만이 사면을 구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입힌 피해를 우리가 용서한다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가해자의 죄나 책임을 눈감아주거나 사면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용서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들은 아동 학대자, 집단 학살자, 배우자를 구타하는 자, 마약 밀매업자 등 열거하자면 한이 없다.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 용서를 구하지 않을 때는 특히 그렇다. 우리가 용서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된다. 용서하지 않는 데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사람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용서는 가장이 아니다. 용서는 삶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지난 상처를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와 거기서 받은 상처를 ‘하느님의 뜻’으로 돌림으로써 먼지 털 듯이 털어내고 픽 웃으며 버텨나갈 수 없다. 그 같은 사건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은 그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무엇인가를 통해 발견된다. 참된 용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자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지의 철저한 노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용서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루려고 애써 노력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 은연중에 이루어지는 어떤 것에 가깝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치유에 곁들여지는 일종의 부산물인 셈이다. 우리는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고 어루만져져 자존심이 회복될 때 용서하지 않으려고 고집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는다. 용서는 거의 저절로, 자연스럽게, 솔직히, 홀가분하게 이루어진다. 용서는 커다란 자기희생이나 순교를 요구하지 않는다.
용서는 딱 잘라 하는 일회적 결단이 아니다. 용서가 홀가분하게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상처는 현재의 사건으로 인해 재발할 수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치유가 되면서 그런 현상은 점점 줄어들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용서가 비단 의지의 행위, 우리가 행하기로 결단하는 어떤 것일 뿐 아니라 수많은 느낌과 정서적 차원을 지닌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늘 거기에 있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고통스러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기억은 바란다고 해서 없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나약함이 아니라 강함을 보여주는 표지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 분노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힘은 우리의 사랑과 자유에서 나온다. 우리의 용서는 가해자가 누구이며, 그 사람이 나에게 무슨 짓을 했으며, 그가 같은 짓을 되풀이 할 것인지 아닌지에 구애받지 않으며, 설령 그 사람이 무죄로 석방된다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용서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상처에 너무 빠져든 나머지 온통 희생제물이 되어버리는 일이 적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하지 않을 때 가해자를 어느 정도 우리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또는 가해자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부담감을 갖도록-설령 가해자가 그 같은 부담을 인정하지 않더라도-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힐 수 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를 쏟는 그런 방법을 통해 특별해지고 싶은가?
다시 말하거니와 용서는 결코 망각이 아니다. 용서는 눈감아주거나 사면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용서는 가해자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는 것도 해주는 체하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우리가 냉엄한 의지의 행위로 이루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가 그 책임을 인정하든 안 하든 마찬가지다. 이 같은 사실을 이해할 때 사람들이 용서 과정에 발을 들여놓도록 도와주는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참조 문헌:용서의 과정 윌리엄A 메닝거 지음 -바오로딸- |
첫댓글 🌿 🙂↕️~'용서' ~!!
그 단어의 참뜻을 '헬레나'님께서 올려주신 글을
읽고 묵상을 하면서... 마음의 밭갈이를 해봅니다.
정성되이 올려주신 글 ~!!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