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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2-90 (120)
《항우의 출군이 빚은 흉조(凶兆)》
항백(項伯)은 오랫동안 심사묵고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한다."이런 말씀을 드리면
선생에게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신은 권모 술수가 누구보다도 능한 사람입니다.
선생이 한신의 사주(使嗾)를 받고 위장투항을 하신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선생의 말씀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이까 ? "그 말에 이좌거는 정색을 하며 말한다.
"그것은 커다란 오해이십니다. 나는 한 사람의 모사(謨士)일 뿐이지, 나 자신이 무기를 듣고
직접 전쟁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따라서 제가 어떤 말씀을 드리더라도 취사선택(取捨選擇)은 장군 자신께서 하실 일이 아니옵니까 ?"
"음, 그건 그렇지만 ...."항백이 끝끝내 믿지 않은 기색을 보이자, 이좌거는 개탄해 마지 않으며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나는 초패왕의 위덕을 크게 사모하여 이곳까지 왔건만, 이제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구나.
그렇다면 이제 나는 누구를 믿고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 ! )
항백은 그 말을 듣자 자신의 불찰을 크게 깨달은 듯 이좌거(李左車)의 손을 힘차게 움켜 잡는다.
"선생같은 분을 의심했던 것은 나의 커다란 잘못이었습니다. 선생같은 분은 높이 받들어 모셔야 하는
법인데, 일시나마 의심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폐하께서는 선생같이 훌륭한 분이 스스로 찾아 오신 것을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오늘은 늦었으니
내 집에서 술이나 한잔씩 나누시고, 내일 아침 일찍 입궐하여 폐하를 알현하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이좌거는 이날 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다음날 아침에 항우를 만나기로 하였다.
항우는 이좌거가 투항해 왔다는 말을 듣고 어쩔 줄을 모르고 기뻐하며 말한다.
"뭐요 ? 이좌거가 투항을 해왔다구 ? 세상에 이런 경사(慶事)가 있나.
그러잖아도 지금 나의 주변에는 모사다운 모사가 한 사람도 없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몹시 아쉽던 판인데,
이좌거가 왔다니 즉시 모셔들이시오."이좌거가 항백의 안내로 어전에 나오자, 항우는 반갑게 맞아들이며
말한다."나는 진작부터 광무군(이좌거)을 무척 사모하고 있었소이다. 그러기에 진작부터 만나고 싶었는데,
뜻밖에도 찾아와 주셔서 이런 고마운 일이 없구려."이좌거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신은 조왕(趙王)의 버림을 받고 한신 장군을 찾아갔으나, 한신 장군도 저를 처음과 달리 중요하게
써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결국은 자결할 결심까지도 했었는데, 폐하께서 보잘것없는 저를 이렇게
반갑게 맞아 주시니 한없이 감격스럽사옵니다.""선생같이 훌륭하신 분이 그런 설움을 당하게 되신 것은,
조왕이나 한신이 모두 지인지감(知仁之鑑)이 없었기 때문이오.
나만은 선생을 잘 알고 있으니, 오늘부터는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시기 바라오."
이리하여 위장투항한 이좌거는 그날부터 항우가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모사 자리를 차지하고 앉게 되었다.
한편, 한왕은 건곤 일척의 대결전을 눈앞에 두고 한신에게 물었다.
"우리가 항우와의 싸움에서 초전부터 승리를 하려면 지용(智勇)을 겸비한 장수가
선봉장이 되어야 할 것인데, 누구를 선봉장으로 내세우는 게 좋겠소 ?"
한신이 대답한다."신이 조나라에 머물러 있을 때, 지용을 겸비한 장수를 찾던 중에 천만다행으로
두 사람의 효장(驍將)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을 이번 싸움에 선봉장으로 내세우면 초전부터 우리가 대승을 거둘 수 있겠사옵니다."
"오오, 그런 장수가 있다면 내가 직접 만나 보고 싶구려."한신은 즉석에서 두 사람의 장수를 어전으로
불러 왔는데 두 사람은 한결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위풍이 당당한 것이 첫눈에 보아도 효장임이 틀림없었다.
한신은 그들을 한왕에게 소개한다."이쪽은 원요현 태생으로 이름을 공희(孔熙)라 하옵고,
이쪽은 비현 태생으로 이름은 진하(陳賀)라고 하옵니다. 두 사람 모두 지모(智謨)와 궁마(弓馬)에 능한
백전 노장들이옵니다."한왕은 그들을 만나보고 지극히 만족스러워 하면서 즉석에서,
"내 그대들의 출신 지방의 이름을 따서, 공희 장군을 <요후(蓼侯)>에 봉하고, 진하 장군은 <비후(費侯)>에
봉할지니 부디 선봉장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워 주기 바라오. 하고 특별 관작(官爵)을 내려주었다.
이렇게 한왕과 한신의 협력으로 백만 대군의 출정 태세는 착착 갖추어지고 있었다.
대한 (大漢) 5월.
한왕 유방이 백만 대군을 몸소 거느리고 성고성을 떠나 대정도(大征途)에 오르니, 수백 리에 계속되는
군세(軍勢)가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구나 선봉 대장 공희와 진하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을 알뜰하게 위무(慰撫)해 주는 관계로,지나는 고을의
백성들 마다 한나라 군사들을 진심으로 환영해 주어서, 백만 대군은 거침없이 구리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나라 군사들은 구리산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한신의 사전 명령에 따라 요소요소에 부대를 배치하여,
언제라도 싸울 태세를 완벽하게 갖추었다.선봉장 공희와 진하가 한왕에게 품한다.
"대왕의 위덕이 워낙 높으시와, 우리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환영해 주고 있으니, 이는 대왕께서
천하를 통일하실 길조(吉兆)임이 분명하옵니다."한왕 유방이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환영해 주는 것은 오로지 장군과 군사들이 애써준 덕택이지, 어찌 나의 덕이라
말할 수가 있으리오."이 모양으로 군신지간(君臣之間)에 위덕과 노고를 서로 사양하니, 한나라 군사들의
사기는 갈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이러는 동안에도 한신은 많은 첩자들을 여러 곳으로 보내어,
초나라에 대한 교란 작전을 치밀하게 펼쳐나가고 있었다.
한신이 어느 날, 한왕의 고향인 패현(沛縣)에 도착하여 보니, 언덕 위에는 누각(樓閣)이 하나 있었다.
한신은 그 누각을 보자, 아무도 모르게 그 누각위에 현판을 떼어내고 다음과 같은 일련(一聯)의 시를 쓴
현판을 새로 내걸었다.
倡義會諸侯 平將道無收 人心咸背楚 天意屬炎劉
(창의회제후 평장도무수 인심함배초 천의속염류)
나라를 구하고자 제후들이 모여 오니,
장수들은 따르지 않는 자가 없도다.
인심은 모두 초나라를 등지고,
하늘의 광채는 유씨에게 빛나네
指日亡垓下 臨時喪沛樓 劍光生烈焰 馘斬項王頭
(지일망해하 임시상패루 검광생열염 괵참항왕두)
어느 날 해하에서 싸움에 패하여,
때를 가려 패루에서 상을 당하리니.
번쩍이는 검광이 불같이 세차,
항왕의 머리가 잘릴 것이네.
초나라 첩자들이 그 시를 읽어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그 시를 베껴 가지고 부리나케
팽성으로 돌아와 항우에게 보였다. 항우는 그 시를 보고 길길이 날뛰며,
"한신이란 놈이 나를 이렇게나 모독할 수가 있느냐. 내 당장 삼군을 출동시켜 한신이란 놈을
내 손으로 죽여 없애고야 말겠다 ! "하고 전군에 벼락 같은 출동령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 준비도 없이 벼락 출동령을 받은 초군 대장들은 크게 당황했다.
그리하여 계포(季布)와 주란(周蘭)이 급히 달려와 항우에게 간한다.
"폐하 ! 한신이란 자가 누각 현판에 그같은 글을 써붙인 것은 폐하를 노엽게하여 판단을 흐리게 할
목적이 있는 것이 분명하오니, 그 점을 각별히 경계하시옵소서."
그러나 워낙 화가 치밀어 오른 항우에게 대장들의 충고가 귀에 들어올리가 없었다.
"그대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말이 많은가. 나는 천하를 종횡하면서도, 아직까지 이와 같은 수모를
당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한신이란 놈이 번번히 나를 모욕하는데, 이런 놈을 그냥 내버려두면
천하의 제후들이 나를 얼마나 업신여기겠는가 ?
이번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놈을 없애 버릴 것이니 전군은 속히 출동 준비를 하여라 !"
그러자 주란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폐하 ! 지금 유방의 군세는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막강하옵니다.
게다가 한신은 위계가 누구보다도 능한 장수입니다.그러니 우리는 먼저 나가서 싸울 것이 아니라
방어 태세로 있으면서, 군사도 새로 모집하여 보충하고 군량도 풍부하게 비축하면서 군사들의
훈련을 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이렇게 우리가 수비전략(守備戰略)을 세워야 후일을 다시 기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대응 하노라면 그동안 적은 군량도 소비되고 군사들도 피로해질 것이니,
우리가 그때를 보아 총공격을 퍼부으면, 한신과 유방인들 무슨 수로 우리를 당할 수가 있으오리까.
그때에는 성고성과 영양성을 싸우지도 아니하고 절로 입수하게 될 것이오니, 그런 방식을 쓰도록
하시옵소서."주란이 간곡하게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우미인도 긍정의 고개를 끄덕이며 거든다.
"폐하 ! 신첩이 무엇을 아오리까마는, 주란 장군의 간언은 지극히 타당하신 말씀인 줄로 아뢰옵니다."
항우는 사랑하는 우미인조차 그렇게 나오는 바람에, 용기가 크게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부랴부랴 중신들을 불러들여 회의를 열고 말한다."주란 장군은 지금은 싸우지 말고
수비 위주의 작전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데, 다른 장수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
특별히 광무공(廣武公 : 이좌거)의 의견을 듣고 싶소이다."이좌거는 심사 숙고하는 척하다가 대답한다.
"만약 폐하께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비만 하신다면, 한나라 군사들은 폐하를 깔보고 총공격을
퍼부어 오게 될 것이옵니다.팽성이 함락되는 날이면 폐하께서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싸우실 것이옵니까.
그러므로 <수비위주>의 소극적인 전략을 택하시는 것 보다는 그동안 폐하께서 싸워 오신 전략대로
적극적인 공격 위주로 나가셔야 유리하실 것 같사옵니다."이좌거는 항우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부추겨 놓았다. 항우가 싸움을 걸어야만 구리산으로 유인해 갈 계기가 마련되겠기 때문이었다.
이좌거가 주전론(主戰論)을 들고 나오자, 계포와 주란은 크게 못마땅해하였다.
"선생은 우리나라의 실정도 모르면서, 어디다 근거를 두고 그런 주장을 하시오 ?"
그러나 이좌거는 태연히 대답한다."폐하께서 나의 의견을 물으시기에 나는 다만 나의 사견(私見)을
솔직하게 말했다 뿐이지, 반드시 싸우시라고 권한 것은 아니오. 나의 의견을 채택하고 안 하는것은
여러분의 결의에 달려있을 뿐이오.그러나 나로서는 분명히 말해 두고 싶은 것이 있소. 병법에 보면
<수비를 하면 힘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공격을 하면 힘이 갑절로 불어난다>는 말이 있소.
그러므로 최선의 적극적인 공격은 완만하고 대책 없는 수비에 비해 언제든지 유리한 법이오."
이좌거가 거기까지 말하자, 항우는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선생의 말씀은 과연 옳은 말씀이오. 지지리 못나게 수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오.
나는 선생의 말씀대로 선제 공격을 퍼붓도록 하겠으니, 모든 장수들은 그런 줄 알고 출동 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 "하고 서슬이 푸르게 군령을 내린다.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우미인은,
아까부터 불길한 예감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머리를 숙여 항우에게 말한다.
"폐하 ! 신첩이 각별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항우는 우미인의 말에 적이 놀란다.
"아니, 황후가 새삼스럽게 나에게 무슨 부탁이 있다는 말인가 ?"우미인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신첩은 폐하를 모셔 온 지 10년이 가깝도록 아직까지 폐하께서 직접 싸우시는 모습을 제 눈으로
본 일이 한 번도 없사옵니다.그러므로 폐하께서 용감히 싸우시는 광경을 꼭 한 번 보고 싶사오니,
이번만을 신첩을 일선까지 꼭 데리고 나가 주시옵소서. 신첩의 평생 소원이옵니다."그것은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던 부탁이었다. 그런 부탁을 하는 우미인의 얼굴에는 비장한 각오까지 엿보였다.
그렇다면 우미인은 어찌하여 전에 없던 비장한 각오로 남편의 전쟁터로 직접 따라나설 결심한 것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패현 누각에,
臨時喪沛樓 (임시상패루) 때를 가려 패루에서 상을 당할 것이니
劒光生烈焰 (검광생열염) 번쩍이는 검광이 불같이 세차
馘斬項王頭 (괵참항왕두) 항왕의 목이 잘릴 것이네
라는 시가 걸려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미인은 누가 그 시를 써 놓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만약 그 시대로 된다면 남편은 이번 싸움에서
죽게 될 것이 아니겠나 ?그런 비극을 당하게 되면 우미인 자신은 남편과 운명을 같이 하려는 결심에서
종군을 자원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우미인의 내심을 알 길 없는 항우는 아내의 요구를 일언 지하에 거절해 버린다.
"여자의 몸으로 싸움터에 따라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내 반드시 이기고 돌아올 테니
전과 다름없이 대궐에서 기다리고 있어요."그러나 우미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번만은 남편을 따라
나설 결심이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에게 애원하였다.
"폐하 ! 신첩은 폐하를 하늘처럼 받들어 모시는 폐하의 아내이옵니다. 남편되시는 어른의 용감하신
모습을 단 한 번만이라도 직접 보고 싶어하는 것은 모든 여자들의 공통된 소원일 것이옵니다.
신첩이 싸움터에까지 폐하를 따라 나간다면, 폐하께서는 용기 백배하셔서 평소보다 더욱 용감하게
싸우실 수 있을 것이 아니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신첩을 못 따라 나서게 하시는 것이옵니까 ?
간곡히 부탁드리오니, 이번 싸움에는 신첩을 꼭 데리고 나가 주시옵소서."
우미인이 울며 호소하니 항우는 어처구니가 없어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허, 싸움터란 궁시(弓矢)가 난무(亂舞)하는 곳이어서, 어쩌다 잘못되어 화살이라도 맞으면
그 자리에서 죽을 판인데, 그래도 좋다는 말인가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하늘의 뜻인 줄로 아옵니다.
설사 화살에 맞아 죽는다손 치더라도, 남편을 따라 나갔다가 죽는다면 무엇이 원통하오리까 ?
그러니 이번만은 신첩을 꼭 데리고 나가 주소서.""음 ...."
항우는 아내의 비장한 결심을 더 이상 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자신의 용감한 모습을 한 번쯤 보여 주고 싶은 생각도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음 ..... 그렇게까지 소원이라면 이번만은 데리고 나가 주지."
항우는 마침내 아내의 요구를 쾌락하고 즉석에서 부하들을 돌아다 보며 명한다.
"여봐라 ! 이번 싸움에는 황후께서도 동행하실 테니, 항후가 타고 가실 수례를 준비하여라."이리하여
우미인은 오두 마차(五頭馬車)를 타고, 선두로 달려가는 항우를 멀찌감치 뒤에서 따라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날따라 바람이 어떻게나 세차게 부는지, 출발한지 얼마 안 되서 대정기(大旌旗)의 깃대가
바람에 불려 두 동강으로 부러져 버렸다.모든 장수들은 그 광경을 보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항우만은 그런 사소한 일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진군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옥류교
(玉樓橋)를 건너고 있는데, 이번에는 항우가 타고 있는 용마 오추가 느닷없이 서녘 하늘을 우러러보며
별안간,"오호호호"하고 슬프게 울어대는 것이 아닌가 ?
이런 두 가지 일이 연이어 일어나자, 항백과 주란은 흉조(凶兆)라고 여겨, 부리나케 항우의 곁으로
달려와 말한다."폐하 ! 조금 전에는 대정기의 깃대가 부러지더니 이번에는 용마가 까닭없이 울어대고
있으니, 이는 결코 길조(吉兆)라고 볼 수 없사옵니다.
오늘은 진군을 일단 중지했다가, 길일을 택해 다시 발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항우가 감정이 섬세한 사람이었다면,
깃대가 부러지고 말이 슬피 운 것을 매우 불길하게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항우는 성품이 남달리 우직하고 거친 편이라, 길흉(吉凶)따위는 애시당초 염두에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항백과 주란의 간언을 귓등으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대들은 무장(武將)답지 못하게 무슨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가 ?전쟁이란 천하의 대사인데,
바람이 불어도 안 되고, 말이 울어도 안 된다면, 도대체 싸움은 어느 세월에 할 것인가 ?
공연히 쓸데 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행군이나 계속하라."
항우가 호통을 치는 바람에 항백과 주란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나 깃대가 부러지고 용마가 슬피 운 것이 흉조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여, 항백과 주란은 항우의
장인인 우일공(虞一公)에게 다시 한번 간언을 부탁해 보았다.우일공이 선두로 달려 나와 항우에게
말한다."폐하 ! 대정기(大旌旗)의 깃대가 부러지고 용마가 슬피 운 것은 불상지조(不祥之兆)임이
분명하니,오늘은 일단 회군하였다가, 후일에 다시 발군하는 것이 어떠하시겠소이까 ?
그동안 적의 정세를 살펴 두었다가 며칠 후에 발군하여도 결코 늦지 않을듯 하오만..."
그러나 워낙 옹고집인 항우는 장인의 권고조차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장인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그 옛날 주왕(紂王)이 망한 날은 갑자일(甲子日)이었는데, 주무왕(周武王)이 왕위에
오른 날도 똑같은 갑자일이었소.바람에 깃대가 부러지고 용마가 운 것이 뭐가 흉조라는 말씀이오.
우리는 이미 대군을 발동시켰소.
군사를 출전시켰다가 그런 사사로운 일로 회군해 버리면, 세상이 우리를 얼마나 비웃을 것이오.
더구나 그런 사실이 적군에게 알려지면, 적장들은 나를 <천하의 겁쟁이>라고 업신여길 것이 아니오 ?
하니 장인께서는 너무 걱정하시지 마시고 저기 보이는 정자(亭子) 그늘에서 잠깐 쉬어가기나 합시다."
항우는 정자 앞에서 말을 내려 잠깐 쉬며 땀을 씻고 있었다.
마침 그때 젊은 호위 무사 한 사람이 항우 앞으로 달려와 서한을 올리며 아뢴다.
"폐하 ! 이 서한은 뒤따라오고 계시는 황후 마마께서 폐하께 올리는 서한이옵니다. 폐하께서 직접
뜯어 보시라는 분부이셨사옵니다."항우는 그 말을 듣고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황후가 편지를 보내면서 나더러 직접 뜯어보라고 하더라구 ? 그렇다면 이 편지는
사랑의 편지인가 보구나."항우는 우미인이 보내온 편지를 손수 뜯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폐하! 그 옛날 주문왕(周文王)은 후비(后妃)의 간언을 들음으로써 제위(帝位)에 오르시게 되었고,
우왕(禹王)은 도산 부인(塗山夫人)의 충고를 들음으로써 하(夏)나라를 창업하였다고 하옵니다.
자고로 모든 제왕들은 부인의 간언을 잘 들음으로써 나라를 잘 다스려 왔사옵니다.
신첩은 비록 그들처럼 원대한 식견은 없사오나, 간언을 한 말씀 올리고자 하오니,
귀담아 들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한나라 장수 한신은 위계가 신출 귀몰하여 우리는 방비책을 각별히 잘 세워야 할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 견지에서 본다면, 주란 장군의 간언은 진실로 금과 옥조와 같이 중요한 충언이오니, 폐하께서는
그의 간언을 반드시 들어 주시옵소서.대정기(大旌旗)의 깃대가 부러지고, 용마가 슬피 운 것은 결코
범상한 징후가 아니오니, 폐하께서는 고집을 버리시고 속히 회군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항우는 우미인의 간곡한 서한을 읽어 보고 마음이 크게 동요되었다.
이좌거가 그러한 눈치를 채고 재빨리 달려와 항우에게 고한다."지금 패현에서 달려온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한왕은 이미 철군하여 성고성으로 돌아가 버렸고. 한신은 머지않아 철군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고 하옵니다.신이 생각컨데, 한나라 군사들은 병력이 지나치게 많아 군량의 곤란을
크게 겪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 군사를 거느리고 가시기만 하면 적은 저절로 쫒겨가게 될 것이옵니다.
병서에 <병다장누(兵多將累)>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이것은 군사가 지나치게 많으면 오히려
커다란 누(累)가 된다는 뜻이옵니다.폐하는 그 점을 고려 하시어 과감한 결단을 내리시도록 하시옵소서."
우미인의 편지로 마음이 동요되었던 항우는 이좌거의 말에 또다시 용기가 솟구쳐올라,
"선생은 참으로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소이다.... 모두들 듣거라. 우리는 처음 정한대로 나갈 것이니,
전군은 계속 전진하라 !"하고 불호령을 내렸다.
이렇게 행군을 계속한 초군은 패현을 앞둔, 50리 밖에 진을 치고 적정을 상세하게 알아 보았다.
정찰병들이 돌아와 항우에게 보고한다."한왕은 패현에서 60리 가량 떨어진 서봉파라는 곳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또 한신은 구리산 동쪽에 진을 치고 군사 훈련만 맹렬히 시킬 뿐 철군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2-91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