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수교대’ 인정 않는 민주당, 결과까지 책임질 건가
헌법은 정부의 예산 주도권 규정
‘견제’ 대신 ‘통치’하려는 민주당
“국회는 국민 부담을 줄이는 데 치중해야지, 부담을 증가시키는 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취지다.” 1948년 제헌헌법의 기초를 잡은 유진오 박사는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 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는 헌법 제57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차례 헌법이 개정됐지만 이 조항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에선 5년마다 대선에 승리해 집권한 정부가 예산 편성권과 집행권을 갖는다. 새 정부가 공약한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예산을 배정하고 사용할 일종의 ‘공격권’을 부여하는 셈이다. 이에 대해 국회는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정부 예산안을 심의하고, 의결할 권리가 있다. 선거에서 진 야당은 정부가 과도한 예산을 편성해 세금을 축내는 걸 감시하고, 막아내야 하는 수비수로서의 책임을 맡게 된다.
올해 예산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이런 점에서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정권을 잃은 민주당이 168개 거대 의석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정책’을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야당이 장악한 국회 상임위원회들은 ‘윤석열’ 이름표가 붙은 정책이라면 여지없이 심한 칼질을 하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서 방향이 정반대로 바뀐 정책에서 그런 일이 두드러진다.
민주당은 지난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서 탈피해 원전 생태계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 현 정부의 원전 관련 예산 1814억 원을 뭉텅이로 삭감했다. 그 대신 지난 정부가 강조했던 신재생에너지 예산을 그 이상 증액했다. 나라 전체로 봤을 때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해 정부가 전액 삭감한 지역화폐 예산도 야당은 7000억 원 이상 살려내려고 한다. 탈원전, 지역화폐는 각각 문재인, 이재명 브랜드의 대표 정책들이다. 작년 3월 대선에서 민주당의 패배로 국민들로부터 한 차례 평가를 받았는데, 그 불씨를 다시 살려내겠다는 거다.
이명박 정부 때 ‘4대 강’ 예산, 문재인 정부의 ‘세금 알바’ 예산 등 이전 정부에서도 야당이 정부의 주요 정책 예산을 깎으려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올해 국회의 예산 전쟁이 예전과 다른 건 정부 예산에 대한 삭감은 중점 정책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과감하고, 야당인 민주당이 무게를 실은 정책에 대한 증액 규모는 대단히 크다는 점이다.
야당의 공격적 태도가 밀실담합 비판을 받는 국회 소(小)소위원회에서 정부 여당과 마주 앉아 주고받기 딜을 할 때 협상의 우위를 잡으려는 전략이란 분석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극한 대치가 계속된다면 정부는 주요 정책을 추진할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는데, 민주당은 이 대표가 요구한 예산 6조 원을 대부분 얻어내는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이른바 ‘윤재명(윤석열+이재명) 예산’이 출현할 가능성이다.
국민에게 걷은 세금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하는 건 국가 통치 기능의 핵심이다. 내각책임제 국가에선 예산안 통과가 정권에 대한 신임과 직결돼 예산안이 부결될 경우 내각이 사퇴하고, 의회가 해산되는 일까지 벌어진다. 집권세력이 정책 추진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정부와 정당의 명운을 걸어야 할 정도의 중요한 일이란 의미다.
정부와 여당은 5년간 국정에 대해 대선으로 평가받는다. 민주당은 지금 예산과 관련해 야당(opposition party) 본연의 수비수 역할을 넘어 여당(ruling party) 수준의 통치행위를 하고 있다. 이렇게 공수가 뒤섞인 혼전이 계속된다면 국민은 나중에 국정 운영의 책임을 어디에 물어야 할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강한 힘에는 그만큼의 책임도 따라야 한다.
박중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