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뺑뺑이'로 상징되는 의정 갈등의 한복판에서 넷플릭스 영화 '페인 허슬러'(데이비드 예이츠 연출)를 흥미롭게 봤다. '통증은 통증이다'는 라이벌 제약업체의 슬로건인데 주인공이 벼락 출세한 제약회사도 똑같이 이 캐치프레이즈를 쓰는데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극단적으로 말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생니가 빠지더라도 이 진통제 맞고 보자는 주문처럼 들린다. 이 세뇌 작전 꽤 먹힌다.
윤석열 정부 안 내밀한 구석에서 지금의 건강보험 시스템을 무너뜨려 미국식 개인병원 영리병원 모델로 대체하려 하는 것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마약성 진통제 리베이트를 둘러싼 제약업계의 치부를 드러내는 고발성 드라마다.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제약회사가 개발한 진통제가 짧은 시기 엄청난 성장을 보이며 주식 공개 상장까지 됐지만 부작용이 드러나 상장 폐지된 일을 고발한 에번 휴스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것이라 자연스레 환자와 의사, 제약업계가 병원을 배경으로 물고 물리는 관계에 관심을 갖고 볼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중간 누군가 차 안에서 지켜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휴가 같은 탐사기자 냄새를 풍긴 것이리라.
새로운 마약성 진통제 '라노펜'을 출시했지만 좀처럼 판매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 자나 제약. 고민 많은 영업 담당 임원 '피트 브레너'(크리스 에반스)는 스트립 바에서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만난다. 스트리퍼로 일하던 '라이자 드레이크'(에밀리 블런트)에게서 정신을 쏙 빼놓는 화술을 발견한 것이다.
빈털터리 신세로 딸과 함께 살던 싱글맘 라이자는 그의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딸이 정학 당하고, 얹혀살던 언니네 집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자 피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제약회사 영업직으로 승승장구하며 상상도 못할 큰 돈을 쥔다. 둘의 방법은 중독성 높은 진통제 처방을 남발하도록 법의 테두리를 지키면서 의사들을 획책하는 일이었다. 환자들을 더 막다른 벼랑으로 내몰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내 돈만 벌면 되지 뭐, 눈 한 번 딱 감으면 돼, 넘어가면 그만이다.
드라마 중에도 1985년 세계 최대 오피오이드 제조회사 '퍼듀 파마'가 선보인 새로운 마약성 진통제 '옥시콘틴' 얘기가 나온다. 2020년 기준, 미국에서만 6만명 넘게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으로 목숨을 잃었다. 지난 20년 동안에는 옥시콘틴과 같은 오피오이드 과다복용으로 인해 30만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해리포터'와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의 데이비드 예이츠가 넷플릭스와 의기투합했다. 장르의 매력도 살리지 못했고, 교훈만 강조됐다는 혹평이 따른다.
하지만 미국 사회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진통제 처방의 메카니즘을 폭로하고 고발하는 데 상당히 유효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더 물러설 곳이 없는 절박한 스트리퍼 출신 싱글맘에 던져지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는 점, 일단 굴러 들어온 행운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 화려한 사회적 성공 뒤에 따라 오는 윤리적 딜레마까지 생생히 잡아냈다는 생각이다. 다큐멘터리 기법을 활용해 브레너의 인터뷰 등으로 현실감을 높인 것도 그리 어색하지는 않았다.
극 막바지에 클리닉에 달려간 라이자에게 환자들이 진통제 달라고 달려드는 장면은 상당히 오싹한 좀비 장르로 다가왔다. 환자들의 말로를 사실적으로 따라가며 재앙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려 한 자세도 높이 살 수 있겠다.
이 영화를 마틴 스콜세지의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 비견한 리뷰도 있다.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으로 기능해 온 건강보험이 붕괴되고 영리가 지배적 이념으로 병원 체계에 자리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가 일종의 타산지석으로 던져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봤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부질 없는 기우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