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한 사회가 혁명적 변화에 맞닥뜨리면, 신구 세력 간 쟁투는 그 균형이 깨질 때까지 계속된다. 매우 격렬한 혼란과 충돌, 파괴와 몰락, 폭력과 희생이 뒤따른다. 이 지점에 놓인 어느 사회든, 경중은 있을지언정 과정 없이 지나간 건 거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동학혁명 1차 봉기는 급격한 변화를 맞아들이는 필연의 과정으로 바라봐야 한다. 수백 년 동안 억압당하던 민중이, 썩을 만큼 썩어버린 구체제와 침략적 외세를 향해 처음으로 총구를 겨누었기 때문이다.
1894년 음력 3월20일(양력 4월25일) 동학농민군은 전라도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촌(현 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전국적 전개를 알리는 무장(茂長) 포고문을 선포하며 기포했다. 이어 호남 창의소 총대장인 전봉준(1855~1895)이 단상에 올라 국난을 당하여 의로움을 외치고 의병을 일으키자는 창의문(倡義文)을 낭독했다. 농투성이들이 명실상부 혁명군으로 거듭나는 의식이었다.
“인륜이 있기에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가 망하는 도다. 보국안민의 방책을 생각지 아니하고 밖으로 향제(鄕第)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 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그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일지라도 나라에 몸 붙여 사는 자라 국가의 위망을 좌시할 수가 없다. 팔로(八路)가 동심하고 수많은 인민이 뜻을 모아 이제 여기에 의기(義旗)를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라.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하지 말고 각자 그 업에 안착하여 다 같이 태평세월을 빌고 함께 임금의 덕화를 입게 된다면 천만다행으로 생각하노라.”
전봉준은 농민군의 전열을 정비하여 전북 무주와 장성으로 진격하면서 혁명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고 백성의 동요를 막고자 저잣거리에 이 글을 써 내걸었다. 몰락양반(잔반)의 후예인 전봉준은 다섯 살 때부터 한문 공부를 시작하여 열세 살 때 한시를 지은 문장가였다. 그래서 “인륜이 있기에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라는 글로 시작하는 이 창의문은 읽는 이의 피를 끓게 한다.
천민으로 태어나면 평생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하는 세상, 청나라와 일본 등 외세를 끌어들여 의존하려는 사대사상, 탐관오리들의 발호, 삼정의 문란…. 전봉준은 이런 것들을 뜯어고치기 위해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사상과 국방을 튼튼하게 하고 백성을 안심시키는 정치를 해달라는 보국안민사상이 혁명의 기본정신이었지만 농민군은 개화파가 끌어들인 일본군에 의해 대다수 전사하거나 처형된다. 수천 명의 사망자를 낸 동학농민전쟁의 패배 이후 조선은 국권을 잃고 만다.
3월 23일 혁명군이 '동도대장(東徒大將)' 깃발을 앞세워 고부에 입성한다. 정연한 행군행렬이 5리가 넘었다고 전한다. 위용도 엄정하다. 며칠 전까지 장흥 역졸들에게 험한 고초를 겪던 고부 백성들에게, 이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군대처럼 보인다. 온 고을이 회한으로 눈물범벅이다. 피해를 치유하는 게 최우선이다. 불에 타 집 없는 백성에게 우선 식량을 나누어 준다.
그제에서야 살벌하고 지옥 같던 고을이, 가난하나 평화롭던 예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탐관오리의 수탈이 없는, 같이 사는 세상이 당장에라도 손에 잡힐 듯하다. 총을 들고 맞서 싸워야겠다는 핏발서는 의기가, 온몸에 감각으로 전해온다. 전봉준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전망을 다시 제시한다. 군사를 일으켜 전주와 서울을 점령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절절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틀 후 백산에서 동학혁명군의 대의를 천하에 선포하겠다고 한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혁명전쟁에 들어선다고 설파한다.
3월 25일, 당일 아침부터 백산에 흰옷 입은 농민이 모여든다. 간단한 봇짐에 짚신을 꿰고 황토물들인 두건에 죽창 들고 오는 사람, 숨겨두었던 화승총을 메고 오는 사람, 무기가 될 만한 병장기라면 무엇이건 들고 오는 사람으로 백산 가는 길과 나루터가 온통 북적인다. 모인 숫자가 8천에 육박한다. 북쪽의 태인, 금구, 원평, 김제, 전주 방면과 남쪽으론 정읍, 고창, 흥덕, 무장, 부안, 영광 등에서 온 농민이다.
대회는 혁명을 결행하자는 의식이다. 이는 죽고 사는 전쟁이 전제다. 창의소가 짊어져야 할 현실의 무게다. 백산 대회를 통해 혁명군 지휘체계를 명확히 한다. 상명하복의 수직 체계가 아닌 수평적 연대다. 모든 사안은 협의를 통해서 결정된다. 각 부대 통솔권은 해당 지역 대표가 갖는다. 격문을 지어 만천하에 포고한다. 아울러 4대 명의와 농민군이 지켜야 할 12대 명의를 제시한다. 의군으로서 지켜야 할 행동강령이다.
읍내에서 주둔한 3일 후 대군을 몰아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군대 체계를 재구성하면서 모두의 바람대로 전봉준이 대장, 손화중과 김개남이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이 총참모가 되었다. 최경선이 영솔장에 송희옥과 정백현 등이 비서가 되었으며 대장기에는 보국안민(輔國安民) 4자를 큰 글자로 쓰고 거듭하여 격문을 지어 사방에 전하였다.
격문: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자 함이라.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 밑에서 고통 받는 민중들과 감사와 수령의 밑에서 굴욕을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갑오 삼월, 호남 창의 대장소 재 백산
결기 충만한 격문이다. 모든 이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한다. 그 울림은 지금까지 살아있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은 동학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아울러 '안으로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고자 함이다'라는 문장은 '반봉건 반외세'라는 동학혁명의 핵심을 명쾌하게 규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