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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개석은 연설할 때면 늘 더듬었다.
에··· 말하자면··· 식으로 지루하게 만든다.
그러나 측근을 훈계할 때는 청산유수였다.
사이사이 끼어드는 냥시피 란 욕설만 빼면
내용도 잘 째인 연설.
한바탕 퍼붓고는 돌아갈 때 금 벽돌을 한 장씩 들려 보냈다.
나는 장제스의 신설 사관학교에 끼어들고 싶었지만
공산당과는 원수지간인 백러시아의 동맹국,
청나라를 소련이 반길 리 없었다.
그래서 풍옥상에게 연락했다.
“신설 사관학교에 교관과 학생을 보내는 게 어때?”
원래 역사에서 풍옥상과 장제스는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다.
장제스는 고전했고 한때 사면초가에 몰려
패망을 각오했을 정도.
덕분에 장제스의 북벌도 늦어졌었다.
1929년의 대공황 여파로 불황을 맞은 일본은
그 틈을 비집고 대륙진출을 결행한다.
바로 상해 사변.
그러나 풍옥상과 장제스가 협력한다면
일본의 남경진출을 막을 수도 있으리라.
둥베이는 후청이,
상해는 장제스가 틀어막으면 밀본의 대륙진출을
아예 무산시킬 수 있을지도 몰랐다.
1924년 6월 16일,
신설 군관학교 개교행사가 거행되었다.
소재지가 광저우에서 40여리의 황포도黃埔島였기에
국민당 육군군관학교라는 정식 명칭대신
황포군관학교로 불리게 된다.
6개월의 속성 훈련과정을 운용한 이 학교는
5년간 6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31년 10월에 폐쇄된다.
개교하자 양산박을 방불케하는
다양한 인재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1924년 봄, 잡지 신청년에
황푸군관학교 학생모집 공고가 실렸다.
“광저우에서 15㎞ 떨어진, 초목이 무성한 작은 섬이
중국 혁명을 완수할 열혈 청년들을 기다린다.”
신 청년은 인기잡지였다.
발간되기 무섭게 서점에 달려가는 청년들이 널려 있었다.
소련과 함께 군관학교 설립을 주도한 쑨원도
각 지역대표들에게 우수학생 추천을 당부했다.
근거지가 남방인 국민당은 북방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반면에 공산당은 미미하나마 북방과 남방에 산재해 있었다.
전국 당원들에 통지문을 보냈다.
“건전한 청년들을 선발해 황푸로 보내라.”
중국에 공산주의를 처음 소개한 이대조는
베이징에서 황푸행을 권했다.
후난성의 마오쩌둥은 상하이에서 응시자격을 심사했다.
입소문 빠른 나라가 중국이다.
국·공 양당이 함께
군관학교 학생을 모집한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황푸로 가자. 到黃埔去”
는 구호가 전국에 요란했다.
그 열광적인 반응에 놀란 북방군벌 오패부가
“황푸 응시생은 발각 즉시 총살해도 좋다”
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난세의 청년들이다 보니 열정이 어마어마했다.
조국의 미래, 민족의 미래가 자기 어깨에 있다 자부했다.
“신해혁명은 미완이다.
군벌을 타도하지 않는 한 혁명은 요원하다”
식자들은 모든 것을 군벌 탓으로 돌렸다.
혁명의 성공이 새로운 군벌을 탄생시킬지 모른다는 생각은
끼어들 겨를도 없었다.
이윽고 대륙에 풍운을 몰고 올 괴짜들이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저마다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산시 山西성에서 중학을 갓 졸업한 두율명은
신청년에 난 군관학교 설립소식에 흥분했다.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을 군인으로 만들 수 없다며
창고에 가둬버렸다.
평소 두율명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던 젊은 과부가
사다리를 들고 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훗날 국민혁명군 최초의 육군상장은 다른 사람 몫이었다.
사람은 가끔 자신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허시河西촌 소학교 교사 쉬샹첸徐象謙은
상한 돼지고기를 먹고 복통에 시달렸다.
밖에 있는 시간보다 화장실에 쭈그리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책이라도 보지 않으면 악취를 견디기 힘들었다.
하루는 엉덩이와 씨름하며 신청년을 뒤적거리다
군관학교 모집기사를 읽었다.
몇 달 전 수업시간에 신해혁명을 소개했다는 이유로
사퇴압력이 심할 때였다.
쉬샹첸은 사직원 대신 똥물을 끼얹고 교단을 떠났다.
양자강을 건너는 배에서 소동파의 시를 읊조리던 중
“이제부터 미래를 향해 전진하겠다”
며 향전向前으로 개명했다.
상하이에 도착해 생도 선발위원 마오쩌둥 앞에서
예비시험을 치르고 본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광저우로 향했다.
예쁜 유부녀에게 ‘방앗간 뒤에서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다
마을에서 쫓겨난 후베이 소년 린뱌오 林彪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군인이나 되겠다” 며 형들과 함께 광저우행 열차를 탔다.
교장이 된 장제스도 환골탈태 했다.
일기에 금주, 금연, 금색 禁色을 다짐했다.
결국 금색에는 실패했지만
술 담배는 죽는 날까지 입에 대지 않았다.
교장 취임 8개월간 46차에 걸쳐
학생과 교관들을 모아놓고 군인의 의무와 책임, 혁명군의 신앙,
군인이 총을 소지하는 이유, 기율과 복종, 군인의 단체생활’ 등을 강의했다.
훗날, 중공 원수 쉬샹첸의 회고에 의하면
종이 한 장 안 보고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강의에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고 한다.
소련 지원으로 세워진 학교라는 특성에도 불구하고
무산계급 훈련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도의 75%가 지주와 중농, 관료 자제였다.
상하이의 지원자들은 천치메이의 조카 천궈푸를 비롯하여
우익이나 청방 조직원이 대부분이고
학교 내부에는 소련고문들의 바람과는 달리
쑨원주의 연구회를 비롯한 반공그룹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생도들은 교장 장제스에 충성하면서
장제스 파벌에 힘을 실어주었다.
신생 군관학교는 생도들뿐만 아니라 행정부와 교관단 역시
역동적 움직임을 보였다.
대외적으로는 합작을 선언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은 저마다 세력 확장에 골몰하고
생도들 역시 쑨원주의 연구회와
청년군인 연합회로 갈라져 대립했다.
풍옥상 계열 등 중립을 취하는 무리에는
후청의 군통 요원도 있었다.
중도파 교관단이 맡은 것은 제식훈련과 전술 등
정치색이 없는 과목들.
혁명과 고담준론에 식상한 사람들은
중도파를 찾았다.
그 곳에 가면 과학기술과 해외소식 등
무언가를 얻는 생산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생도 진 두수는 군통 요원이었다.
상해 출신인 그의 장기는 청방시절의 무용담.
예나 이제나 싸움 이야기는 어디서나 인기였다.
“조계 경찰은 말입니다.
대개가 방회 소속입니다요.
프랑스 조계의 경찰간부 황금영은 청방회원입니다.
영국 조계 경찰은 대도회에서 쥐고 있고...
사건이 생겨도 서로의 피해를 줄이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 마련이지요.”
사건 해결은 뒷전이고 조직 보호가 우선인 이들은
애꿎은 범인을 만들고
진짜 범인인 조직원은 빼돌린다 했다.
일단 은혜를 입은 자들은 충성을 맹세하고...
방회회원들은 저마다 개별 입교했기에
교내에 청방회원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본인들도 잘 몰랐다.
전모를 아는 사람은 교장뿐이었다.
청방 지도자 천치메이의 제자이며 두월생 등
간부들과 친분이 있는 장제스 교장.
그러나 그는 일체 함구했다.
황포 군관학교 개교와 함께
봉천의 군통 사무실도 바빠졌다.
청나라 이후 대륙의 지배자였던 군벌들의 세력균형에
변수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각 성마다 있던 무비학당의 아류인 군관양성소가
하나쯤 더 생겼다 해서 긴장할 일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황포는 단순한 군사학교가 아닌 정치학교.
국공합작을 내세우며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선
소련이라는 배경도 만만찮았다.
그 짐작은 이윽고 사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황포 군관학교가 곳곳에 분교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생긴 분교는 광동성의 바로 옆 광서성의 조주潮州.
이후 거의 반년마다 하나씩 생긴 분교는 남녕南寗, 장사長沙, 무한武漢으로
확산되며 점점 그 범위를 넓혀갔다.
그중 무한분교는 여자 생도까지 받아들여
생도 1,200명 중 200명이 여자였다.
호북성의 무한은 장강 상류로 흘러드는
여러 지류들이 합쳐지는 민강이 끝나고
본류인 양자강이 시작되는 곳이다.
이곳에서 동정호로 가는 물이 광동으로 이어지고
하류의 구강에서 파양호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이었다.
신해혁명의 도화선이 된 첫 봉기가 이곳에서 일어난 것도
각 지역과의 교류가 활발해 새로운 문물에 개방적인
지역특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당대의 신사조,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 또한
어느 지역보다 높았다.
황포 군관학교의 생도와 교관들은 표면상
공산당, 국민당 중도파라는 모양새지였만
사회 의식이나 혁명 이데올로기와 무관한 청방회원은
모든 계파에 고루 침투해있었다.
청방의 관심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었고
힘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천치메이의 조카, 천궈푸(진과부) 천리푸 형제의
성씨 첸Chen의 머릿글자를 따 CC단으로 명명된
장제스의 친위조직은
황포출신의 청방원들을 기반으로 탄생하게 된다.
다이리(대립)의 남의사와 더불어
살인, 테러, 음모를 꾸며온 비밀결사. CC단에 대해 기사를
검색해보면 공포 그 자체였다.
이들은 공식조직이 아닌 비선조직에 가까웠다.
국민당의 정보기관은 당 중앙 집행위원회 조사통계국이 있었고
군의 특무조직도 따로 있었다.
군통 사무실에 모인 작림과 공동모왕
그리고 나는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황포 군관학교가 벌써 다섯 개로 늘어났어.
6개월마다 졸업생이 천 수백 명씩이나 쏟아져 나오고.”
“기세가 대단하네.”
“문제는 이들 간의 유대의식이야.
소위 동창생이라는 건데 이해로 묶인 방회의 그것보다
결속력이 더 강하다는 거야.”
졸업생들은 국민당 산하의 각 부대에서 3년간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직속부대가 빈약한 국민당은 졸업생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상당수는 동맹을 맺은 풍옥상 등 기존 군벌부대로 배속되었다.
황포 졸업생들은 국민당 부대와 군벌 부대에 고루 배치되었고
이들 간의 유대는 이후의 모든 전투에서 변수로 작용한다.
“근데 생도들 중에 청방 회원이 많다는 소문이야.
교장부터가 청방 회원이나 다름 없으니
그런지도 모르지.”
“그냥 그렇게 된 건가?
아니면 누군가가...?”
“그거야 누구도 모르지.
하지만 두월생이라면 그 정도 심모원려도 가능할 거야..”
권모술수는 마키아벨리, 재력은 로스차일드,
잔인하기로는 알 카포네라는 소문의 두월생이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물론 모든 군벌 부대에 청방이 침투할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 없다는 것이
누구보다도 두월생을 잘 아는 우리의 생각이었다.
“그럼 우리도 지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작림이 물었다.
“황포에는 군통요원도 많으니까 필요하다면 그래야지.
쑨원주의 연구회라는 우파 조직과
공산당 지지파인 청년군인 연합회로 대립 중인데
청방은 양쪽 모두에 고루 있다는 거야.
일종의 보험인가?”
“호기심 왕성한 청년들이니 저마다 관심사는 다를 수 있지.
청방에 정치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청방 방침은 일단 졸업해라.
그래서 어디든 부임해라.
연락은 그 이후부터다. 이런 식이지.
그러니 교내의 생도들 행동은 자발적인 걸로 봐야 할 거야.”
그러나 한 평생을 이미 살아본 내 경험은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 속삭이고 있었다.
학창시절의 인연은 평생의 인연으로 이어지고
그 시절에 배어든 생각 또한
평생을 지배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들은 잊고 있었다.
저마다의 위치로 흩어진 이들은
청방과의 의리를 지키려고 나름의 노력은 하리라.
그러나 CC단이나 남의사에 소속된 청방 회원이
공산당에 소속된 회원과 같은 태도로
조직의 명령에 복종하리라는 믿음은 지나친 과신이었다.
이들은 개인적 소신과 조직에서의 책임
그리고 방회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방황하며 나름의 선택을 할 것이다.
최선의 선택을 할지라도 조직과 방회의 기대에 어긋날 수 있고
그때는 처벌이나 보복의 위협 앞에 놓이게 될 것이었다.
바르게 산다 해서 무탈하게 지낼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황포를 주목하는 것은 우리나 소련만이 아니었다.
관동군 또한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산업계, 암흑계 등 다양한 관점에서
대륙의 세력분포를 분석하는 일본이
가장 민감하게 지켜보는 것은 군벌들의 세력균형이었다.
6개월마다 천 수백 명씩 장교들을 쏟아내는
정치군사학교는 당연히 그들의 관심을 끌었다.
광주 시가지는 일본 특무들의 활동무대로 변해갔고
광저우 13호실이라는 아지트도 구축했다.
공산당과 국민당의 세력 다툼을 지켜보는 눈은
후청의 군통과 청방에 더해 13호실까지 셋으로 늘어났다.
까치는 버마재비를 노리고
버마재비는 울고 있는 매미를 노리는 형국이었다.
영웅의 자격은 무엇인가 ?
황하가 범람하면 수백 리에 걸친 농토를 홍수가 덮치고
가을이면 영근 이삭을 탐내는 황충 떼가 천리를 휩쓴다.
주기적인 한발, 수해, 충해로 기근이 닥치면
숱한 유민이 생긴다.
이들 유민에게는 밥을 주는 자가 곧 주인이었다.
누군가가 한 마을 몇 십 명을 먹이는 데 성공하면
이웃마을 유민들까지 몰려 삽시간에 늘어난다.
이윽고 감당하기 버거운 규모로 커지면
더 유능한 지도자 밑으로 몰려간다.
유민의 무리는 그런 식으로 갈수록 커져간다.
이때 백만 명을 먹여 살릴 기량을 갖춘 자가 나타나면
일컬어 영웅이라 했다.
이 영웅들끼리 각축을 벌이다
그중 하나가 새 왕조를 세우는 것이
중국의 전통적 역성 혁명.
전국에 산재한 청방회원이 몇 명인지는
방주인 두월생조차도 모른다.
수십 개의 분타를 수시로 들고 나는 머릿수를 제대로 알기는 어렵기 때문.
그러나 일단 유사시에 동원할 수 있는 회원이
적어도 10만 이상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들의 식솔들까지 감안하면 얼추 백만에 육박하는 수.
이 정도면 가히 영웅의 조건에 걸 맞는 규모로 손색이 없었다.
20만 이상의 병력을 거느린 군벌도 있지만
병사 대부분은 생계형 입대자,
끈끈한 유대로 뭉친 청방에 비해
결속이나 충성심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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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서의 주력, 변방군 10개 사단이
하루아침에 풍옥상에게 넘어간 사건은
세상을 놀라게 했고 군벌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CC단의 진씨 형제 역시 이 사건을 주시하고 있었다.
“10개 사단 병력이 통째 깃발을 바꾸었어.
이게 과연 단기서의 본심일까?”
진과부의 말에 두 살 아래인 진립부가 콧방귀를 뀌었다.
“생선을 마다하는 고양이 봤어?”
진과부가 주억였다.
“그렇지? 아무래도 뭐가 있는 거야.”
“덕분에 대군벌로 올라서긴 했지만
풍 독군이 사건 배후는 아니라고 봐.
원체 권모술수와는 거리가 먼 양반이니까.?”
이번에는 진립부가 끄덕였다.
“난 변방군을 인수한 풍 독군이
느닷없이 후청과 동맹을 맺은 사실이 마음에 걸려.”
“직예파 영역과 국경을 맞댄 후청과 우호관계를 맺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진과부의 반문에 진립부는 고개를 저었다.
“풍 독군은 민주적 사상을 가진 진보파 군벌이야.
황실 체제인 후청과는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기 어려운 인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흠, 어쩐지 냄새가 나지 않아?”
“뭔가 거래가 있었다는 얘긴가?”
“그게 합리적 의심이지.
혹시 후청과 풍 독군 사이에 뭐가 있었다는 건가?”
“쿠데타를 꾀하던 관동군은 단기서에게
후청 국경을 위협하는 임무를 맡겼어.
병력이 외곽으로 쏠리면 봉천은 경계가 느슨해지고
그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작전이었지.
하지만 단기서가 병력을 풍 독군에 넘기는 바람에
관동군은 닭 쫓다 지붕만 쳐다보는 개 꼴이 되어버렸지.“
CC단은 관동군의 쿠데타 모의음모를
이미 샅샅이 파악하고 있었다.
“가장 큰 이익을 본 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론에 따르면...”
“후청이 의심된다...?”
“그렇지.”
“하지만 그들이 무슨 재주로...?”
군통의 존재를 모르는 그들의 추리는 벽에 부딪쳤다.
장개석의 특무조직 CC단이 창설되면서
황포출신 청방회원들이 대거 발탁되었다.
특무활동에는 아무래도 거친 기질을 가진 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후대의 사가들은 국민당 북벌에
황포 군관학교 출신들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황포출신들이 군을 장악했다는 의미로
받아 들였지만 그 평가에는 좀 더 깊은 함의가 있었다.
난마처럼 얽힌 수백 개의 군벌들을
하나씩 각개 격파해 북벌을 달성하려 했다면
적어도 십년 이상의 세월이 필요했으리라.
그러나 장개석은 불과 3년 만에 북벌을 달성하고
대륙을 통일했다.
게다가 큰 전투도 거의 없었다.
호호탕탕 진격하던 북벌군의 기세가 잠시 주춤한 것은
군벌들이 연합해 반 장개석 전쟁을 선포했던 때뿐이었다.
그러나 반 장군 내부에 균열이 생기면서
그나마도 흐지부지 되었고 북벌은 기세를 이어갔다.
북벌을 단시일에 성공시킨 동력은 무엇인가?
치밀한 첩보활동의 성과였다.
자금이라는 당근과
목숨을 위협하는 채찍을 휘두르는 특무활동의 성과였다.
남의사와 CC단을 주축으로 20만 명이 넘는 대조직으로
급성장한 특무조직의 근간이 황포출신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가 청방이라는 것은
교장 장개석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몰랐다.
국민당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온 기반인
특무조직의 핵심이 청방회원이라는 사실은
중국이라는 나라의 뿌리와 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삽화였다.
두월생이 청방을 이끄는 한,
후청과 청방은 결코 끊어질 수 없는 숙명적 동반자로 나란히 할 것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