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컨을 쥔 /박몽구
전쟁은 결코 먼 곳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힘든 하루 일 마치고
모처럼 푹신한 소파에 모로 누워
리모컨을 쥔다
번호를 바꿔 누를 때마다
바뀌는 신세계에 시선을 빼앗긴다
헤프게 가슴 저리는 멜로드라마
통쾌하게 악당들 쓰러뜨리는 액션물
스페인 낯선 거리 보여주는 윤식당
김연경이 시원하게 때리는 배구
키를 누르는 대로
벽 가득 멋진 신세계를 펼쳐준다
리모컨 하나로 세상을 손안에 쥘 수 있구나
돈 한 푼 안 들이고
산토리니 파란 해변 카페에 앉아
황금빛 저녁놀을 즐기고
종편 시사 프로 출연자 입 따라
멋지게 세상사를 칼질해 들어간다
리모컨이 펼쳐주는 신세계 속에서
비몽사몽으로 눈뜬 아침
우편함에 꽂힌 청구서 하나
12월치 아파트 관리비 68만 원…
내가 리모컨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동안
어딘가 숨어 있던 리모컨 한 개
나를 송두리째 쥐고 흔들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누르면 누르는 대로
내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고
티뷔 조선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는 괴물이
보이지 않게
내 안에 숨어 있는 걸 본다
ㅡ계간 《시와사람》(2023,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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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컨을 쥔
와봐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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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7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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