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떡국>
동양의 삼국 한•중•일은 늘 싸운다. 역사 싸움, 땅 싸움으로 날을 샌다. 이 싸움의 근원은 단순하다. 가까이 있어 그러는 거다. 이웃에 있으니 싸우는 일이 잦은 것이다. 멀리 있어 봐라. 싸울 거리가 별로 없다. 아니다, 이웃사촌 이상이다. 땅 파서 국가를 ‘이사’할 수도 없으니 천륜의 의형제도 맺을 수 있다. 설날에, 이 세 나라가 한 상에서 떡국을 나눠 먹는 상상을 해본다. 근거 없는 상상은 아니다.
새해를 맞는 설 풍습은 동양 삼국이 비슷하다. 오랫동안 서로 영향을 미치며 살아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경을 삶의 기반으로 살아온 민족이라는 공통점에서 생겨난 유사성이 더 많다. 설날 음식도 비슷한 것이 많은데, 떡국이 그 중 하나이다. 일본은 된장이나 가다랭이로 맛을 낸 국물에 찹쌀떡을 넣은 오조니를 먹고, 중국에서는 쌀로 만든 경단을 국물에 넣은 탕위앤을 먹는다.(중국은 남과 북이 조금 다르다. 밀 생산이 많은 북부 지방은 만두를, 쌀을 재배하는 남부 지방에서는 탕위앤을 주로 먹는다.) 이 동양의 떡국들은 평상시에는 잘 먹지 않다가 설날에는 꼭 챙겨 먹는 것이 같다. 새해에 복을 부르는 음식이라는 관념도 비슷하다.
동양 삼국의 설날 음식이 떡국인 것은 먼 옛날 각 민족의 조상들이 매우 유사한 음식을 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떡국의 역사를 살짝 들여다보자.(여기서는 한국의 떡국만 다루는데, 이만으로도 일본과 중국의 떡국이 절로 보일 것이다.)
밥이 주식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고려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떡이 주식이었다. 곡물로 밥을 짓기 위해서는 쇠붙이의 솥이 필요한데, 고려시대 이전 쇠붙이는 귀하여 무기로나 쓰였지 솥을 만드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삼국시대의 유물에 시루가 많이 보이는 것이 그 이유이다. 도정 기술의 문제도 있다. 쌀이나 보리의 겉겨를 깨끗이 벗기는 기술을 가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곡물을 돌확에 갈아 거친 가루로 만든 후 시루에 찌는 기술이 오랫동안 주식 조리법으로 전해졌다.
떡이 주식이었을 때의 조상들은 마을 단위의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그 공동체는 대체로 혈연이 중심이었다. 지금처럼 가장과 그 직계 자손으로만 구성되는 핵가족의 ‘집안’ 개념은 없었으며 마을 공동체 전체가 ‘한 집안’이라 여기고 살았다. 마을 전체 구성원이 공동으로 생산하고 고루 수확물을 나누었으며, 따라서 공동취사를 하였다. 그때 공동취사로 만들어진 음식은 당연히 떡이었다. 공동의 조상신과 자연신을 모시고 살았으며, 그 제물도 떡이었다.
떡이 주식이었던 시대에 떡국은 어떻게 탄생하였을까. 별미로 조리하였을까? 그렇지 않다. 떡은 식으면 쉬 굳는다. 또 잘 말리면 오래도록 보관할 수도 있다. 딱딱하게 굳은 떡은 그냥 먹기가 힘들다. 떡을 다시 부드럽게 만드는 방법으로는 물에 넣어 데우는 것이 가장 쉽다. 또 물이 들어가니 양이 늘어나기도 한다. 떡을 저장해두었다가 물에 데워서 국처럼 내놓는 음식, 즉 떡국은 떡이 주식이었을 당시 가장 흔히 먹었던 음식이었을 것이다.
설날 차례는 조상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행사이다. 조상이 일상에서 즐겨 먹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음식을 올린다. 조상신이 잘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그 조상의 음식을 후손들이 나눠 먹으며 그 오랜 공동체 정서를 서로 확인한다. 그러니까 떡국은 아주 먼먼 옛날부터 오랫동안 조상들이 주식으로 먹어, 식재료가 바뀌고 도정기술과 조리도구가 발달하여 밥이 주식이 되고 난 다음에도, 조상신을 기리거나 공동체 의식을 되살리는 행사, 그 중에서도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행사인 설에는 꼭 내놓아야 하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떡국 유래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밥은 담장을 넘지 않지만 떡은 담장을 넘는다. 떡은 나눠 먹는 음식이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떡에 대한 이 관념은 같다. 그래서 설에는 떡을 나눈다. 특히 떡국을 앞에 두고 그 수천수만 년의 공동체 정서를 다진다. 한중일의 정상들이 설날 아침에 모여 떡국 한 그릇씩 나누는 상상을 해본다. 형제처럼 서로 덕담을 나누는. 내가 몽상가인가.
* 설 무렵이면 항상 올리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