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사실주의의 한 형태다. 용서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 우리네 삶 속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한다. 용서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으며, 상대방의 행동이 얼마나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하는 사실을 부정하고 무시하고 축소하고 눈가림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는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의 상처로 인한 흔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해 왔는지 알게 되고 살아오면서 자신을 얼마나 괴롭혔는지를 깨닫기 시작한다.
용서는 이제 더 이상 가해자에게 보복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할 수 없을 때도 있지만 에너지가 고갈된 저녁이면 상처가 아물고 좀 더 나은 일을, 곧 우리 자신의 삶을 끌어 올리는 적극적 방법을 도모하게 된다. 우리는 앙갚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눈에는 눈으로 앙갚음한다고 해서 잃어버린 것이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용서는 우리가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 쏟아붓는 헛된 노력을 중단할 때 찾아오는 내적 평화를 받아들이게 한다.
용서는 우리가 학대와 불의에 희생당한 제물 이상의 존재임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학대를 되새기는 증오나 원한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가해자를 벌하는 무기로 또는 사람들을 멀리 떼어놓아 다시는 우리를 해치지 못하게 하는 방책으로나 전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고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말아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에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가주어라.
(마태 5,38-41)
여기서 필자는 예수님께서 명령을 하달하기보다 오히려 사실을 진술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도 이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비폭력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인격적 고결성을 잃지 않으면서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았다. 이런 일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악을 선으로 갚아 적을 뉘우치게 하는’ 수단이 된다.
잠시 예수님의 말씀을 음미해 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가주어라.”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는 로마 제국이 그 군대로 점령하여 군사통치를 감행했다. 그리고 군법은 로마 병사가 시민에게 군 장비를 지워 오 리까지 끌고 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니까 지금 하고 계시는 말씀은 진실로 자유로운, (곧 비폭력적이고 용서하는) 사람은 짐을 들고 요구받은 거리를 가주는 정도가 아니라 법과 병사의 명령에 매이거나 영향을 받지 않은 (곧 자유로운) 까닭에 기꺼이 오 리를 더 가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병사와 시민 어느 쪽이 진실로 힘이 있는가? 두 배의 거리를 가주고, 속옷까지 내주고, 다른 뺨도 내주는 것은 자기 학대나 속죄의 표현이 아니라 힘과 참된 자유의 표현이다.
용서는 숨고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보복하겠다는 따위의 쓸데없는 일을 이제는 그만 하겠다는 결단이다. 용서는 우리가 자신에게 자행한 일들이 가해자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않는 반면에 철저하게 피해를 입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깨달음이다. 용서는 부모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나가서 벌레들이나 밟아 죽이려고’ 덤비는 어린아이 같은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용서는 진정한 해방이다. 용서는 우리를 풀어주어 우리의 삶을 발전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고통과 회한으로 몰아가는 과거의 끔찍한 사건에 매이지 않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유로워져서 진실로 자라고 성숙 되는 좀 더 나은 길을 추구 한다. 지난날의 학대에 대한 공포에 얽매여 있는 미숙하고 겁에 질린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기보다 우리가 마땅히 실현해야 할 모습을 지향하게 된다.
용서는 우리의 삶을 해방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은 놀라운 일들로 가득차게 되며, 우리는 철학자 우나무노가 일깨워 주듯이 저마다 자기 안에서 조금이나마 ‘기쁜 소식’이 선포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한다. 우리가 일단 용서와 그로 인한 자유를 선택하기만 하면 새로운 삶이 우리를 기다린다. 우리의 상처와 손상과 흉터는 예상치 못한 놀라운 선물을, 새롭게 시작하는 자유를 가져온다. 집회서는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마음의 기쁨은 사람에게 생기를 주고 쾌활은 그의 수명을 연장시킨다. 근심을 멀리하고 네 마음을 달래라. ...슬픔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고 슬퍼해서 이로울 것이 없다. 질투와 분노는 수명을 줄이고 근심 걱정을 하면 빨리 늙는다. (집회 30,22-24)
용서는 상처가 치유할 수 있으며 흔적으로 늘 남아 있는 상처가 원래보다도 더 튼튼한 새살을 돋아나게 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감동적 부활성야에 그리스도의 상처는 부활초에 새겨진 5개의 향덩어리로 표시된다. 그리고 사제는 “눈부시고 장엄하게 빛나라”고 선언한다. 용서는 우리의 상처를 그리스도의 상처에 결합하게 한다. 우리가 자유로워져서 우리의 고통이 구원의 힘을 가질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울”(골로 1,24) 수 있도록 해준다.
용서는 우리가 우리의 가해자를 존중하고 스스로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도록 한다. 용서는 또한 우리를 해방하여 가해자의 무례한 행위가 너무나도 커 보인 나머지 우리가 받은 상처로 그 사람을 규정하지 않도록 해준다. 우리를 이 같은 이해와 깊은 동정심으로 이끌어 주는 것은 오직 용서와 자유와 사랑이다.
용서는 지난 사건과 연관된 부정적 감정을 모두 풀어주게 한다. 용서는 지난 상처가 우리네 삶 속에서 유발시키는 괴상하고 유해한 반응, 반복적 학대의 순환고리로 이어지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용서는 적극적 자존심의 표지이자 원동력이다. 용서는 그리스도인이 윤리적 명령 또는 도덕적 의무로 지켜야 하는, 사랑하라는 계율에 대한 응답 이상의 것이다. 용서는 이 적극적 자존심에서 비롯되며 이 자존심을 강화시켜 준다. 용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천부적 가치와 자기 진가 때문에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랑할 가치가 있으며 그 사실을 아는 존재다.
끝으로, 용서는 하나의 과정이다. 용서는 우리가 이를 악물고 해내는 냉정하고 감정이 없는 의지 행위가 아니다. 용서는 시간이 걸린다. 아니, 치유하는 데 시간이 걸리며 이 치유에서 용서가 나온다. 용서는 우리가 맞바로 해내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나는 무엇이다. 상처에 소금뿌리기를 중단하고 무엇이든 필요한 조처를 취하면 상처는 치유된다. 이 같은 치유가 이루어지도록 허용할 때 용서도 아울러 이루어졌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용서할 것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참조 문헌:용서의 과정 윌리엄 A. 메닝거 지음 -바오로딸-
첫댓글 🌿🙂↕️~ '용서'의 과정,,,!! 연속으로 용서의 세부적인 내용으로, 그 중요함을 글로 봉동 공동체에 나눔을 하시는 '헬레나' 지기님께 성령의 특별한 빛으로 꼭 필요한 은총을 가득하게 ~~~
내려주시길 ~~~ 기도드립니다.~(🙏)~아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스테파노님께도 은총이 가득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