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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2. 2. 큐티
여호수아 5:10 ~ 15
가나안 땅에서 유월절을 지키다
관찰 :
1) 역사상 세 번째의 유월절
- 10절. “또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 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일을 경험했기 때문에 담대해졌습니다. 그러나 현실 상황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막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지만 현재는 남의 땅이었습니다. 남의 집 앞마당에 와서 할례를 행하고, 또 잔치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십 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큰 무리가 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가나안의 족속들이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이에 가나안의 족속들이 동맹을 맺어 밤에 기습이라도 해 온다면, 사실 이스라엘에게는 속수무책인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할례를 행하여 자신들의 표피를 할례산에 묻었습니다. 게다가 유월절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들은 지금 역사상 세 번째의 유월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첫번째는 애굽에서 출애굽 직전에 지켰고(출 12:3-28), 두번째는 시내 광야에서 시내 산을 떠나기 직전에 지켰습니다(민 9:1-5). 그 후 가데스 바네아 사건(민 14:26-35)이 일어났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그러뜨린 이들에게 유월절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유리 방황하던 38년 기간 동안에는 할례없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유월절 역시 지켜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길갈에서 이스라엘의 수치를 굴러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할례를 전 이스라엘이 행하게 되고, 유월절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목숨을 건다고 해도 가치가 있는 절기가 되는 것이었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절기는 감격과 감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2) 만나가 그치다
- 11절.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의 소산물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는 때는 보리 추수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넘어서 길갈 지역의 넓은 지역에 있는 보리밭에서 보리를 추구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미 그 땅을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에 먹는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인 무교병을 먹고, 또 볶은 보리를 먹었습니다.
- 12절.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 이스라엘은 출애굽 하면서 날마다 아침에 만나를 수거하여 그것으로 식량을 삼았습니다. 그것이 가나안에서의 첫 유월절날 까지 이어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는 내려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만나가 자연적 순리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만나를 주우러 나갔던 수십만의 아낙들이 당황하며 빈손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상상해 보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들은 이제 하늘의 양식으로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수고하고 싸워서 그 땅을 점령하여 가나안에서의 소출로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그런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가나안에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3) 칼을 든 여호와의 군대 대장
- 13절.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 이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통해 그들의 수치가 굴러가게(길갈)하고 유월절까지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그렇기에 나름 담대함으로 그들이 무찔러야 하는 여리고로 진군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적인 모습은 훈련이 잘된 강한 군대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데, 아이도 있고, 가축도 있고, 무장도 변변히 되지 않은 채의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부족한 상황에서 여호수아는 나름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생각하면 당연히 믿음으로 나아가면 되는데, 현실의 문제들이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바르게 따르기 위해서 고민하며 여리고를 향하여 가고 있는 그러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이스라엘을 향하여 서 있는 모습이 관찰되었고, 보고가 들어간 것입니다. 너무나 당당히 서 있는 그 사람을 향하여 다른 이들이 두려워하고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담대히 그에게 나아가서 물었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편이냐? 아니면 가나안 족속의 편이냐?”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 14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 담대히 묻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그 사람은 자신의 정체를 밝혔습니다. 자신이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오셨다는 말에 즉각적으로 땅에 얼굴을 대고 절을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전쟁의 진면목이 하나님의 성전을 대행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비록 250여만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군대 대장이 오셨다는 말에 즉각적으로 가장 존경스러운 자세로 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 15절.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천사가 아니었습니다. 만일 천사였다면 여호수아가 이렇게 절을 했을 때 자신에게 절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경배를 받을 자격을 부여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 여호와의 군대 대장은 가브리엘도, 미가엘도 아닙니다. 이분은 구약 시대에 간헐적으로 자신의 종들을 찾아오셨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셨습니다. 주님은 여호수아에게 오셔서 이 중요한 성전에서 함께 하심을 알려주시고 격려해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에서 ‘신’은 ‘거룩’과 상반되는 온갖 죄악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정결예식을 했듯이 이제 약속된 하나님의 땅을 되찾기 위해 나아가는 순간 다시금 거룩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악을 상징하는 신을 벗고 거룩한 곳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함으로 가나안 정복의 전쟁은 시작된 것입니다.
가르침 :
1)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그 후손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고, 그럼으로 인하여 유월절도 지키지 못한 채 38년의 방황을 했던 이스라엘. 그들의 수치는 단지 이집트의 노예생활을 했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진짜 수치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할례를 행하게 되고,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모세가 모압 광야에서 얼마나 열심히 말씀 교육을 시켰는지를 알게 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 교육을 받은 이들이기에 여호수아와 더불어 요단강을 도강하고 맨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할례를 행하게 되고, 유월절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2) 이제 할례로 행하고 유월절도 지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나안 정복의 효시로 여리고로 진격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부족하다고 여겨지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름대로 말씀대로 지킨다고 지켰지만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을 벗어 거룩한 곳에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를 다시금 격려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세상의 신을 벗고 거룩한 곳에 나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3) 부족하지만 그래도 60만 장정 군대의 대장인 여호수아는 자신의 군대의 힘을 믿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수행해야하는 전쟁의 진면목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군대의 대장이 내려왔다는 말에 그는 즉각적으로 경배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지도자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상적 지위나 신분의식 때문에 순종하는 것을 주저한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지도자가 아니거나 불순종하는 지도자에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우를 범하지 않도록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의 겸비함을 언제나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거룩하여야 할 것을 다시금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또 그들의 전쟁을 격려하시기 위해서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셔서 여호수아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용 :
1) 무엇을 하던지 사람의 일로서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관점을 언제나 소유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행하는 이스라엘의 상황은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상황에서 행한 일들이었습니다. 대적들이 코 앞에 있고, 그들의 행위를 뻔히 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연합하여 공격하면 끝~~. 대책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방벽이 없었기에 아무 부족이라도 화살부대를 끌고 와서 화살을 몇 천발, 혹은 몇 만발만 쏘아도 줄줄이 무너질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가장 우선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칫 하나님과의 관계는 뒷전으로 두고, 일에만 집중할 위험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런 부분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언제나 제일 중요한 우선순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루의 가장 중요한 시간에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찬양함이 빠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모시고 사는 존재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성령의 전입니다.
2) 하늘의 양식인 만나가 끊어졌습니다. 세상에서의 양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양식이 끊어지면, 하늘의 양식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는 세상의 양식을 사는 삶을 배워야 하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해야 250여만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었기에 그들은 치열하게 그 땅을 점령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서 만나를 내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양식이 되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그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하늘의 양식이 공급되도록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굶지 않고 하늘 양식인, 주님의 살과 피인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3) 주님의 관점은 언제나 거룩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이 덕지덕지 묻은 신발을 벗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발을 벗기 싫어서 주님의 임재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면 죽음입니다. 패배입니다. 망함입니다. 나의 더러움을 벗어버리는 것을 억울해 하거나 불편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대로 사는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