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연중 제27주간 월요일>(2022. 10. 3. 월)
(루카 10,25-37)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1)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루카 10,27).” 라는 계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비유입니다.
<동시에 이 비유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는 계명을
설명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이웃 사랑 실천’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2) 이 비유에는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할 때, 이웃인 사람과 이웃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면 안 되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루카 6,32-34).
‘원수 같은 사람’도 ‘나의 이웃’입니다.
3) 이 비유에는, “사랑은 생각이나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비유의 바로 앞에 있는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씀과(28절)
이야기의 끝에 있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37절),
생각만 하지 말고, 또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30-32).”
여기서 ‘어떤 사람’이 노상강도를 당해서 초주검이 되었다는 상황은
좁은 뜻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넓은 뜻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살이는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인생’이라는 여행은 혼자서 하는 여행이 아니라,
사랑 받으면서, 또 사랑하면서, 하느님과 이웃과 함께 하는 여행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건이나 사고를 겪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일을 겪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그런 처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의도적으로 만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사제’와 ‘레위인’을 등장시키셨을까?
왜 하필이면 사제와 레위인일까?
그저 단순히 착한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일까?
아니면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사제와 레위인을 등장시키신 것은
성직자들의 위선을 꾸짖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마태 23,3)” 위선자들이었고,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버린 범죄자들이었습니다(루카 19,46).
아마도 그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에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칠 텐데, 자기들은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어떻든 사제와 레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그냥 지나가 버린 것은, 그 사람이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에 강도당한 사람이 잘 아는 사람이었다면, 또는 친한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그냥 가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만일에 강도당한 사람이 가족이었다면,
다른 일을 모두 포기하고 무조건 달려가서 도왔을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이어서 그냥 지나갔더라도,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강도당한 사람을 가엾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하느님, 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라고
기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엾게 여기기만 하는 것은,
또 아무것도 안 하면서 기도만 하는 것은,
정말로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일이고, ‘악한 일’입니다.
실천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실천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3-35).”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셨을까?”
그것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이 서로 적대관계였기 때문이고,
서로 상대 민족을 원수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인이 실천한 선행은, ‘이웃 사랑’을 실천한
일이면서 동시에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일입니다.
(당시에 사마리아인들도 하느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마리아인은
‘이웃 사랑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비유 속에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을 보면, 일반적인 선행보다 훨씬
더 큰 사랑 실천, 즉 사랑하는 가족을 돌보는 것 같은 실천입니다.
그것은 사랑 실천의 기준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의 처지에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원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해서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기준으로 해서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주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의 눈에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수호천사로 보였을 수도 있고, 하느님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인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일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호천사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의 대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선행과 사랑 실천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어떤 보상을 주시겠지만,
그렇게 누군가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고, 하느님의 대리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보상이고 은총입니다.
사랑 실천을 한 뒤에 우리 마음속에 가득 차는 기쁨과 보람은,
바로 그것을 나타내는 표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실천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실천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