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의 중대한 때, 절체절명의 때에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예수님의 수제자라 볼 수 있는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우리 인생들이 두려운 상황에서, 또한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깨어 있지 못하게 될 때 얼마나 연약해 지고 비겁해 질 수 있는지, 어느 정도로까지 악해 지고 돌변하게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구주 예수님의 공생애 시기에 있어 3년 내내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게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복음의 말씀을 들었고 특별 훈련을 받았다고 볼 수 있으며, 더군다나 예수님으로 인한 온갖 구원의 일들,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을 바로 앞에서 생생하고 강렬하게 경험했고, 뿐만 아니라 물 위를 걷게 되고 열병이 떠나가게 되는 등 그 자신이나 그의 장모까지도 이적을 경험했으며, 심지어는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라고 증거되어 있고 실제로 예수님께 파송을 받아 직접 실행했듯이 그 자신부터 친히 예수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아 병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쫓아내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구주 예수님을 부인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로 인한 특별한 경우들이나 사람들이나 사례들이 아닌 한 베드로와 같이 안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누구라도 얼마든지 베드로와 유사한 사례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며, 심지어는 오늘날에도 참 대단해 보이는 직분이나 은사들을 가지고 있고 아주 귀하게 쓰이며 최고로 영향력이 큰 자라 하더라도 순간순간 깨어 있지 못하면, 진정 그 자신의 힘이나 세상적 능력 안에서는 결코 다를 수 없고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베드로가 구주 예수님을 이렇게까지 부인했고 심지어는 역사 상 최고의 믿음의 선배들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다윗은 간음에다 살인 교사와 유사한 죄악까지 범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러한 사실들은 그들의 믿음이 처음부터 부족했거나 아니면 아예 없거나, 또한 그들 속에 하나님으로 인한 은혜가 없거나 하나님께서 주셨고 계속해서 주실 능력과 응답들, 복과 예비들이 결코 작아서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그 누구라도 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할 수는 없는 것이고, 대외적인 상황과 사정들로 쉽게 나약하게 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악한 세력들이 우는 사자들과 같이 삼킬 자들을 수시로 찾고 있고, 게다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까지, 또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살아야 하는 것이기에..
삶의 자리와 인류 역사의 현장들 속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치열하게 깨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고, 결코 자기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 방법과 능력들로는 안 되는 것이며, 진정 하늘의 힘과 은혜가 없이는 언제라도 약해지고 넘어지기 쉬운 것이고, 좀 과장하면 그 누구라도 하나님으로 인한 힘과 은혜를 덧입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이며, 분명한 것은 그러한 힘과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실상 유혹과 시험들, 두려움과 위기들 속에서 감당하고 이기기가 불가능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아래 본문에서의 베드로와 간음에다 살인 교사와 유사한 죄악을 범한 다윗에 있어 그때 당시의 공통점은 가장 큰 두려움과 위기들, 유혹과 시험들 앞에서 깨어 있지 못했다는 것이고, 하늘의 힘과 은혜를 갈망하며 의지하고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며, 따지고 보면 그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 능력과 방법들에 머문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그때 당시 베드로와 다윗이 더욱 깨어 있었다면, 더더욱 치열하게 믿음으로 몸부림치고 결단하며 하늘의 힘과 은혜를 갈망하고 누리게 되었다면 달라질 수 있는 부분들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인데..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때의 베드로와 다윗 뿐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누구라도,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옛 사람과 같이 더 이상 죄악과 세속과 정욕들 등으로 미지근하고 잠자며 병들고 죽은듯한 신앙이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 능력과 방법들도 아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날마다 순간마다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과 권속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담과 하와 때부터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면서 구원에 참예케 될 수 있는 것일 뿐 아니라 죄악들과 싸우고 범한 죄악들에서는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더욱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살아 있는 믿음이 될 수 있도록 미리 구주 예수님에 대해 보이시고 안내하시며 연결될 수 있게 하신 다양한 예표와 모형과 그림자들, 약속과 계시와 상징들 등을 통해서 말 그대로 오실 메시야를 믿고 의지했든지, 또는 오늘날 우리들과 같이 오신 메시야를 믿고 의지하고 있든지 간에..
어쨌든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를 덧입어 죄악들, 연약함들, 두려움들, 문제들, 대적들 등과 싸울 수 있고 능히 감당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이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범한 죄악들에서도 자복하고 돌이킬 수도 있는 것이고, 그로 인한 사함과 나음들, 회복과 역전들도 실제로 가능한 것이며, 더 나아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더욱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도 가능한 것이고, 그것이야 말로 깨어 있고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특히 그와 함께 가면 갈수록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충만케 될 수 있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들이 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믿음이 바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 특히 온갖 은혜와 은사와 응답들, 사함과 나음과 치유들, 승리와 역전과 복들, 이적과 부흥과 열매들에 있어 가장 확실한 방법과 통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래 본문 및 전후에서와 같이 베드로는 구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심지어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부인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며, 근데 참 신기하게도 그러한 베드로는 구원이 취소되거나 돌이켜 진 것이 아닌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후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 강림 사건을 경험한 후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말씀의 신앙으로 견고하게 서서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능력과 이적들에 있어 생생한 도구와 통로가 된 것일 뿐 아니라 순교 당하기까지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사실은 구주 예수님을 부인해도 된다거나 그렇게 해도 아무 일도 없다거나 하는 등과 같은 의미일 수는 없는 것이나 분명한 것은 믿음으로 이미 구원에 참예케 되었고 근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되며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난 자들에 있어 어떤 죄악들이나 계기들로 인해 구원이 돌이켜 지고 취소될 수 있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고, 사실상 구주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역사가, 근원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한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놀랍고 강력한 것인지, 어느 정도로까지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뛰어 넘는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확신할 수 있도록 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마가복음14:71)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3년 12월 8일(금)1/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