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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함
수 5:1-9
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수 5:1-9 / 요단강 서쪽에 사는 아모리 왕들과 지중해 해변을 따라 죽 이어지는 지역을 다스리는 가나안 왕들은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요단강 물을 말리셔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강을 건너게 하셨다는 소문을 들은 까닭이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강 서쪽으로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그들은 정신이 아득하였다. 2) [길갈에서 거행한 할례] 그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라. 그 칼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를 베풀어라.' 3)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는 대로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언덕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 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를 베푼 까닭은 다음과 같다.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남자들, 곧 전사들은 모두 다 할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원수들과 싸우다 죽었다. 5) 그런데 애굽에서 나오지 않고 광야생활 중에 태어난 자들은 할례받지 못하였다. 6)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마음먹으셨다. 선조들에게 주시겠다고 이미 약속하신 적이 있었지만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에게만은 결코 그 땅을 구경조차 못하게 하겠노라고 마음을 먹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구경도 못한 채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야만 하였다. 즉 그들은 광야에서 열심히 싸움을 치르기는 하였으나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였다. 단 한 사람도 그 땅을 구경하지 못하였다. 7) 그래서 애굽에서 나온 그들의 대를 잇는 새 세대가 광야에서 할례를 받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여태껏 할례를 받지 못한 까닭이다. 8) 모든 백성들이 할례를 받았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천막에서 할례받은 곳이 아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9) 그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오늘에야 비로소 너희가 애굽에게 당한 수모를 벗어 버렸구나'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그곳을 길갈이라고 부른다. 길갈은 `굴러가다' 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랑생활을 하다가 요단 강을 건넜습니다. 요단 강을 건넌 사건은 마치 홍해를 건넌 것과 비슷합니다. 홍해 사건은 애굽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의미한다면 요단 강은 광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의미합니다. 홍해는 모세의 지팡이가 물을 칠 때 갈라졌으며 요단 강은 언약궤를 멘 사람들의 발에 물이 닿자 갈라졌습니다.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더라(1)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요단 강을 말리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너도록 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가나안 족속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요단 강이 넘칠 만큼 차오른 시기에 하나님이 이런 기적을 행하셨기에(3:15), 더욱 놀랍고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할례를 행하라(2-8) 요단 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출애굽 당시의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지만 광야에서 모두 죽었으며, 이제 광야 40년 생활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 앞에 모이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창 17장). 그 이유 때문에 여호수아는 가나안에서의 유월절 행사를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이는 마치 모세가 유월절 절기의 첫 행사 전에 애굽에서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했던 것과 같습니다(출 12:43-49).
길갈(9) 길갈이라는 명칭은 ‘구르다’라는 의미의 히브리어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그 장소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으로의 여정 가운데서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함으로써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 버린’ 그 현장으로 인식됩니다. 이 수치는 애굽에서의 종살이에 대한 수치로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땅에 정착하는 것으로 끝나게 될 수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적용: 할례가 갖는 중요한 의미는 구별입니다. 그 구별은 몸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를 강조합니다(롬 2:29).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당신의 마음의 할례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위급할 때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실존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언약의 백성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 설 교 >
강을 건너는 사람들
여호수아 5:1-9 / 조 인 목사
1. 여러분은 할례를 받았습니까?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난 남자는 태어난 지 8일 만에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의 끝 부분의 표피를 잘라내는 것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할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표시였습니다. 또한 위생적인 목적으로 할례를 행하기도 했는데, 단지 육체의 위생을 너머 영적인 위생, 즉 하나님의 백성은 영적으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표시가 바로 할례였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드디어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금 길갈(Gilgal)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절,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v.2, At that time the LORD said to Joshua, "Make flint knives and circumcise the Israelites again.") 그러면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4-5절,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에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v.4-5, Now this is why he did so: All those who came out of Egypt--all the men of military age--died in the desert on the way after leaving Egypt. All the people that came out had been circumcised, but all the people born in the desert during the journey from Egypt had not.)
3. 여러분, 40년 전에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탈출하자마자 그때 이미 20세 이상 되는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출 12:43-51) 그러나 그 다음 해부터 광야 생활을 하는 40년 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남자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으며, 40년 전에 할례를 받았던 남자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이미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로서 한번도 할례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4. 그런데 왜 하나님은 지금까지 가만히 계시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할례를 받으라고 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상 할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할례는 성도의 구원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이 강을 건넌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한 이후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강을 몇 번 건넜습니까? 두 번 건넜습니다. 첫 번째 강은 40년 전에 건넜던 홍해였고, 두 번째 강은 40년 후에 건넜던 요단 강이었습니다.
5. 그런데 성경은 홍해 사건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4절,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1 Corinthians 10:1-4, For I do not want you to be ignorant of the fact, brothers, that our forefathers were all under the cloud and that they all passed through the sea. They were all baptized into Moses in the cloud and in the sea. They all ate the same spiritual food and drank the same spiritual drink; for they drank from the spiritual rock that accompanied them, and that rock was Christ.) 무슨 뜻입니까?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은 곧 그들이 세례를 받은 사건이었다는 뜻입니다.
6. 그리고 그들이 마신 물을 내뿜은 반석은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로, 구약의 출애굽 1세대가 홍해를 건넌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물을 마심으로써 세례를 받은 사건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물로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가 무엇입니까? 세례를 물로 베푸는 것은 우리의 죄가 물에 의해 깨끗이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우리가 물에 빠져 죽은 죄인이었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즉, 우리가 죄의 물에 빠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음을 증거하는 표시가 곧 물 세례입니다.
7.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가운데 들어갔음에도 죽지 않고 살아나온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 오던 애굽 군대는 그 홍해에 빠져서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죽음의 홍해에서 살아났으니,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처럼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곧 그들의 죄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체험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홍해의 물로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8. 그런데 바로 이 홍해 사건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 역시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라는 표시였습니다. 즉.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구원함을 받았다는 표시가 바로 할례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홍해를 건넘으로써 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육체에 행한 할례나 홍해를 통한 세례나 동일한 구원의 표시입니다. 출애굽 1세대는 할례와 세례를 다 받은 셈인데, 이를 영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9. 그런데 출애굽 2세대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지금까지 할례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강을 건넌 적도 없습니다. 40년 전에 1세대가 홍해를 건널 때 2세대는 아직 어렸거나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때 할례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세대는 강도 건너야 했고, 할례도 받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요단 강을 건너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들이 요단 강을 건넌 후에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10. 이것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1세대에서 2세대로 바꾸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1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든 2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를 1세대에서 2세대로 바꾸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1.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누구든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앞서 홍해에 세례의 의미가 있었듯이, 2세대 역시 반드시 물로 세례를 받아야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홍해를 건넌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지금 그들로 하여금 굳이 육지가 아니라 요단 강을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출애굽 2세대는 요단 강을 건넘으로써 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12.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할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단 강을 건너자 마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40년 전의 경우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할례와 세례는 동일한 구원의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았으므로 세례를 받았고, 세례를 받았으므로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를 영적으로 말하면, 출애굽 2세대 역시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13. 그렇다면, 이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출애굽 2세대로 하여금 굳이 강을 건너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을 건너야 한다, 즉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출애굽 1세대이든지, 출애굽 2세대이든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번의 강을 건너야 했던 것처럼, 오늘날 어떤 인간이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례는 곧 할례이기도 합니다.
14. 물론, 오늘날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실제로 육체의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육체의 할례를 받아서 구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할례는 그림자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할례가 보여주는 실체는 무엇입니까? 바로 홍해를 건넌 사건, 또한 요단 강을 건넌 사건이 이미 세례를 보여주었듯이, 구약의 할례는 신약의 세례를 보여주는 그림자였습니다. 즉, 신약의 세례가 곧 실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15.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세례를 받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그 마음의 할례가 곧 세례입니다. 로마서 2장 28-29,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Romans 2:28-29, A man is not a Jew if he is only one outwardly, nor is circumcision merely outward and physical. No, a man is a Jew if he is one inwardly; and circumcision is circumcision of the heart, by the Spirit, not by the written code. Such a man's praise is not from men, but from God.)
16.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인하여 부패하고 더러워진 인간의 마음이 깨끗하게 씻음 받는 이 마음의 할례가 진짜 할례입니다. 구약시대의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의 표피만 잘라냈지만, 이 마음의 할례는 인간의 마음속 깊이 박혀 있는 모든 죄를 다 잘라내는 할례이기 때문에 진짜 할례입니다. 그리고 이 진짜 할례를 받아야 인간은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잘라내진 그 마음에 성령님이 비로소 거하기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할례가 무엇입니까? 바로 세례입니다.
17.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진짜 마음의 할례, 즉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받았던 물 세례 자체가 구원의 수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저절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음의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할례에 대한 표시가 무엇입니까? 바로 물 세례입니다.
18.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는 반드시 물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마음의 할례를 받아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표시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물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한 번은 강을 건너야 합니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물론, 물 세례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가 분명하다면, 강을 건너는 물 세례를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표시해야만 합니다.
19. 이렇게 물 세례를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는 사실상 홍해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 가나안 땅은 밟아보지도 못하고 죽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반석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홍해에서 건짐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홍해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물 세례에 담긴 영적인 의미입니다.
20. 그래서 우리 인간이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악의 물에 빠져 죽어가던 비참한 존재였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는 결코 그 물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였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써 나를 그 물에서 건져내셨음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강을 건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강을 건넌 자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 즉 구원을 받은 자이며, 그 구원의 표시가 곧 물 세례입니다.
21. 그렇다면, 여러분은 모두 물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모두 마음의 할례를 받으셨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마음의 할례를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v.2, At that time the LORD said to Joshua,)여러분, 여기에서 말하는 ‘그때’는 언제입니까? 1절,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라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v.1, Now when all the Amorite kings west of the Jordan and all the Canaanite kings along the coast heard how the LORD had dried up the Jordan before the Israelites until we had crossed over, their hearts melted and they no longer had the courage to face the Israelites.)
22.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 강을 건너온 일 때문에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은 이미 40년 전의 홍해 사건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셨는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요단 강마저 기적적인 방법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래서 원주민들은 이제 꼼짝없이 죽게 생겼기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원주민들을 공격하기만 하면 무조건 승리할 수 있습니다.
23.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시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성결하라는 것입니다. 할례에는 위생적인 목적이 있는데, 특히 이스라엘 백성은 영적으로도 거룩하고 청결해야 합니다. 그들은 가나안 정복이라는 큰 일을 앞에 두고 흥분하지 말고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 역시 어떤 일을 행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건강하고, 깨끗한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도는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는가를 항상 먼저 살펴야 합니다.
24. 두 번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만 의지하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자가 할례를 행하면 며칠 동안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떻게 할까요? 그들은 당장 공격해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은 제대로 방어도 하지 못한 채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그들을 공격하면 확실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필 이때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즉시 순종했습니다.
25. 만약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지금은 공격할 때인데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니 참 이해할 수 없고, 답답한 하나님이라고 불평하지 않았을까요? 또한 설령 할례를 행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불안해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남자가 할례를 행하면 회복될 때까지 며칠 동안 잘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당연히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움직일 수 없는데, 만약 이때 적들이 쳐들어오면 나는 어떻게 하지? 그래서 우리는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조급하고 불안해하지 않습니까?
26.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전혀 불평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또한 전혀 불안해하지도 않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8절,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며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v.8, And after the whole nation had been circumcised, they remained where they were in camp until they were healed.)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믿음을 가지고 낫기를 기다렸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은 실제 원주민들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지켜주셨습니다.
27. 여러분의 인생에 조급함이 있고, 불안함이 있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서두르지 말라, 조급해하지 말라, 불안해하지 말라, 나를 믿으라, 그리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해야 합니다. 전쟁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내가 마구 덤빈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28. 특히 할례를 행하는 첫 번째 이유처럼, 우리 성도는 먼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강을 건넌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런 자기 성찰의 과정 없이 내 욕심만 앞세우면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여러분, 정말 강을 건넜습니까? 정말 마음의 할례와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늘 겸손하게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을 강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이 허우적거리고 있는 이 고난의 강도 능히 건너게 해주실 것입니다.
갈, 굴러가는 곳
수 5:1-9
❚기복신앙의 특징
무당이 푸닥거리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푸닥거리’가 뭔지 아시지요? 사전에 보면 “무당이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고 부정, 살 따위를 푸는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살풀이’라고도 하지요. 무당이 부정을 타거나 살이 낀 집에 가서 돈 받고 한 바탕 푸닥거리를 하는 것입니다. ‘살’이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일까요? ‘역마살’이라는 말처럼 무슨 살이 낀다고 하지 않습니까? 본디 이 말은 나쁜 귀신이 들어와서 사람을 해치거나 못된 짓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무당종교의 특징은 전형적인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이란 오직 복을 비는 데만 목적이 있는 종교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무당종교가 하는 일이 딱 두 가지라는 말입니다. 하나는 부정 타거나 살이 낀 집에 가서 푸닥거리를 하여 부정과 살이 물러가도록 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그 집에 복이 굴러들어오도록 하는 일입니다.
기독교처럼 살아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당종교(=샤머니즘)에 있을 수 없습니다. 무당종교는 오직 복은 굴러들어오고 화는 몰아내는 데만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당은 푸닥거리를 하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훠이 훠이, 잡신은 물러가라, 액운은 물러가라!” 어떻게 비슷합니까? 그럴 때 그 집 식구들은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저 우리 집안에 모든 액운은 물러가고 복만 굴러 들어오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이게 바로 무당종교의 특징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얼핏 보면 이와 비슷해 보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건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출애굽 후 광야40년 방황을 마치고 이스라엘 백성이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바뀌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영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데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여호수아 3장과 4장에 보면 넘실거리는 요단 강물을 하나님이 말려버리셔서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밟고 건너갑니다. 마치 출애굽 때 하나님이 홍해바다를 가르신 사건을 연상케 하는 감격적인 장면이지요. 그런데 여호수아 4:19~22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같이 읽지요.
19 첫째 달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쪽 경계 길갈에 진 치매 20 여호수아가 요단에서 가져온 그 열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2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들은 무슨 뜻이니이까 하거든 22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하나님은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물이 마른 요단 강 한 가운데서 돌 열두 개를 가져다가 길갈이라는 성읍에 세워두어라. 그 돌들은 기념물이 되어 나중에 후손들이 ‘할아버지, 아버지, 이 돌 열두 개가 왜 여기 서있어요?’ 하고 물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요단 강물을 마르게 하시고 우리 민족이 마른 땅을 건너 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사실을 말해주라”고 말입니다. 이 위대한 기념물, 하나님의 위대한 기적과 역사를 기념하는 열두 개의 돌이 서 있는 곳이 바로 길갈이라는 성읍입니다.
이 길갈은 여리고 동편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성읍이라고만 알려져 있지 오늘날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때 길갈에 세운 기념물인 열두 개의 돌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고 말입니다. 그러니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는 성지순례를 가더라도 길갈에 가볼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도 가볼 수 있고, 벧엘도, 여리고도 가볼 수 있는데 길갈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니 가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길갈이 갖고 있는 영적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 길갈이 갖고 있는 영적 의미에 대해 말씀을 나누도록 합시다.
❚길갈, 굴러가는 곳
이제 오늘 본문인 여호수아 5:1을 다시 봅니다.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면 요단강 동쪽 편에서 요단강을 건너 서쪽 편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 요단 서쪽에 사는 아모리 족속의 왕과 해변에 사는 가나안 원주민들의 왕은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습니다. 우리말로 바꾸면 간담이 서늘해졌다는 뜻입니다. 정신 줄을 놓았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실거리는 요단 강물을 배타고 건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강물이 다 말라 마른 땅으로 건너왔다는 말을 들으니 간담이 서늘해지고 무서워서 정신 줄을 놓을 수밖에요. 혹시 모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역사로 홍해 바다도 가르고 그 무서운 애굽 군대도 다 전멸시키고 이곳에 왔다는 소식도 들었을지 말입니다. 더 무섭고 두려웠겠지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2절). 부싯돌을 칼처럼 날카롭게 만들어 그것으로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신 것인데 ‘할례’란 남자의 포피(包皮)를 잘라내는 예식, 오늘날로 치면 포경수술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중요한 것은 창세기 17:10에서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면서 그 상징으로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신 데서 시작됩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오늘날의 포경수술은 단순히 위생적인 이유에서 받지만 성경에 나오는 할례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언약을 상징하는 아주 중요한 신앙적 예식인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할례를 아주 중요하게 여기고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한 것처럼 남자아기가 태어나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반드시 행합니다. 자,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서 열두 개의 기념 돌을 세우게 한 뒤 할례를 베풀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 까닭이 바로 4절부터 나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출애굽을 할 당시 이스라엘 남자들은 다 할례를 받은 상태였겠지요? 그런데 광야에서 죄와 불순종 때문에 40년 동안이나 방랑하는 동안 모두 죽고 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제외하고 말이지요. 헌데 광야에서는 도저히 아기들에게 할례를 베풀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현재 이스라엘 남자들 중에 할례를 받은 사람은 단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할례를 베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유뿐 아니라 더 중요한 영적인 이유가 나옵니다. 8~9절을 보세요.
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할례를 받으면 아무래도 꼼짝 못하고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습니까? 직접 받아보신 분들이나 아들을 두신 부모들은 다 아시지요? 헌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낫기를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겪은 온갖 수모와 고통을 이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온 순간 다 떠나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우리 한글 성경에는 안 나타나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겠다고 하실 때 ‘떠나간다’고 번역된 말이 히브리어 원어에 보면 ‘갈랄’이라는 동사입니다. ‘갈랄’은 ‘구르다, 굴러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 장소를 ‘갈랄’이라는 낱말과 발음이 비슷한 ‘길갈’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길갈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됩니다.
우리 교회 점심에 가끔 도루묵 반찬이 나옵니다. 우리 효자교회 별미라고도 할 도루묵 이름의 유래를 아십니까? 도루묵을 옛날에는 ‘묵’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먹을 만은 하지만 별로 맛있는 생선이 아니라 인기가 없었답니다. 그런데 선조(宣祖) 임금이 임진왜란 때 피난을 가다가 함경도에서 너무 시장할 때 이 ‘묵’이라는 생선을 먹어 보니 맛이 천하일미거든요. 그래서 “이 생선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묵’이라고 한답니다.
선조는 이런 맛있는 생선 이름이 ‘묵’이라니 당치 않다고 하며 앞으로 은어(銀魚)라고 부르도록 명령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궁중으로 돌아온 선조가 이 생선 생각이 나서 다시 먹어 보니 옛 맛이 아닙니다. 그래서 은어라는 이름을 취소하고 옛날대로 도로 ‘묵’이라고 부르게 하라는 어명이 내려서 ‘도로묵’ 또는 ‘도루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명이나 동물, 생선 이름의 유래 중에 발음을 따서 지은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길갈’이라는 지명도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 떠나갔다는 뜻에서 ‘갈랄’이라는 동사의 발음을 따 지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재미있지요?
❚굴러가는 곳, 굴러오는 곳
그러므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길갈’이라는 지명은 어떤 영적 교훈을 가지고 있는가? 길갈이라는 지명의 뜻이 구르다, 굴러가다는 의미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길갈은 그야말로 굴러가는 곳이며, 동시에 굴러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첫째, 길갈은 ‘굴러가는’ 곳입니다. 수치가, 고통이, 실패가 굴러가는 곳입니다. 길갈의 유래가 애굽의 수치가 굴러가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무엇입니까?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당한 온갖 설움과 수치입니다. 압제와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 400년 종살이의 수치와 설움이 길갈에서 한 순간 굴러가 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수치와 설움은 찾아옵니다. 그 누가 수치를 당하고 싶겠습니까? 어떤 집사님이 교회를 안 나오셔서 심방을 갔습니다. “집사님, 교회 그렇게 열심히 나오시더니 요새 왜 교회 안 오세요?” 그러자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저 부끄러워서 교회 못 가겠어요. 제법 잘 되던 사업이 한 순간에 망하고 나니 교회 가면 사람들이 다 알 텐데 부끄러워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교회 갑니까?” 물론 저는 “집사님 교회에서 아무도 집사님 손가락질 하거나 수군거릴 사람 없어요. 성도들이 다 집사님 위해 기도할 테니 이럴수록 교회 나오셔야지요” 하고 권면했습니다만 우리에게도 이런 일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가 이런 부끄러움을 당하고 싶어 당하겠습니까? 하지만 갑자기 닥쳐오는 실패와 수치, 설움과 고통은 정말 우리 힘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이겨 내기는 더욱 힘듭니다.
하지만 오늘, 하나님이 바로 이곳에서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너의 모든 수치가 지금 이 순간 모두 굴러갈 것이다. 지금 네가 당하는 모든 부끄러움, 설움, 실패와 고통이 이 순간 떠나갈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길갈에서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이 장소가 여러분의 길갈이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당하는 모든 수치와 설움과 고통이 한 순간 떠나가고 굴러가는 장소가 되기 바랍니다.
이것은 무당종교 같은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단순히 액운이 물러가고 살이 물러가는 푸닥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설움 당하고 수치를 당할 때 나와 함께 울어주시고, 내 모든 아픔을 아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인격적인 하나님이 내 모든 수치가 굴러가고 내 모든 아픔과 시련이 떠나가길 바라시는 줄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 길갈은 또한 ‘굴러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축복이 굴러들어오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다”라는 말이 있지요? ‘넝쿨당’, 얼마 전 끝난 드라마(많은 이들이 같이 울고 웃으며 본)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아니라 ‘넝쿨째 굴러온 호박’은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고 나니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베푸시는 복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로 이 순간, 이곳 길갈에서 우리의 모든 수치가 굴러가고, 우리의 모든 고난과 실패와 근심걱정이 떠나가고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 오듯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굴러들어오게 될 줄 믿습니다! 물론 무조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할례를 받았습니다. 7절에 ‘할례 없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 것처럼 언약 없는 자는 복도 없습니다. 언약은 계약이요 약속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복을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상호 계약을 맺는 것이 언약입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길 약속하는 성도들에게 이 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마음의 할례를 받아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베풀어주시는 복과 은혜가 넝쿨째 굴러들어오는, 바로 이곳이 여러분과 저의 길갈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
여호수아 5:1-9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에 진을 친 다음에 몇 가지 의식을 가졌는데, 그 첫 번째가 요단강 가운데서 가져온 12개의 돌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할례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대로 길갈에 세운 열 두개의 돌들은 ①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②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③하나님의 능력을 세계 열방에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계 열방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는 그 자리에 나와 우리의 자녀들이 있기를 소원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의식인 할례를 행한 것을 중심으로 말씀드림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또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12개의 돌로 요단강 도하를 기념하는 일이 끝나자 여호수아를 불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2절과 3절을 읽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지 2년이 좀 지나서 바란 광야에 머물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불러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12지파에서 뽑힌 12명의 건장한 청년들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40일간 가나안의 지형과 군사력과 토지 등을 자세히 조사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의 모든 상황이 현재 이스라엘의 모습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는 부정적인 보고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들의 보고를 듣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애굽에서 차라리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불신앙을 보시고 크게 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보고를 한 10명의 정탐꾼들을 재앙으로 죽게 하시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던 20세 이상 된 모든 백성들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출애굽 1세대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들이었습니다. 출애굽 1세대들의 비극 때문에 광야에서 태어난 2세대들은 할례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다시"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이 말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중에는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제 하나님과 좋지 않았던 관계를 정리할 시간이 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언약의 표인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후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명령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진입해 있는 그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들로 인정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와 언약을 맺겠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멸망의 길로 달려간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나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가나안의 풍요와 축복을 누리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1세대들이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졌지만 개의치 않으시고 지금 현재 순종하고 따르는 백성들과 손을 잡으셨습니다. 할례를 통해서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순종하며 주님께 나오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과거에 어떤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탕자를 먼발치에서 알아보고 달려가서 끌어안고 입맞추고 결정적인 것은 인장반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아들이 밖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묻지 않고 다시 아들로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길갈에 진을 치고 있는 백성들에게 할례 행할 것을 원하신 것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 없는 백성이 되어 가나안의 더럽고 타락한 문화에 휩쓸려 살다가 멸망할 것인지, 아니면 할례 받고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중요한 기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회복하고 가나안의 축복도 보장을 받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적인 풍요와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불행과 실패와 낙심과 절망과 저주와 죽음과 지옥의 운명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시기까지 순종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행복과 승리와 기쁨과 희망과 축복과 생명과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축복의 길, 승리의 길, 행복의 길, 다시 말해서 살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삽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유대의 관원인 니고데모가 어느 날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분인 줄 압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지 않으면 이러한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의 관심은 영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에게 영생의 비밀이 있음을 알고 달려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노력을 한다 해도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죄 사함의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변화될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변화되지 아니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천국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라도 언제나 지옥과 같은 삶을 살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할례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몸은 교회에 있지만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람들입니다. 주일마다 예배는 드리지만 예수는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는데 내려오시던 중 그의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사흘 길을 찾아 나선 끝에 성전에서 서기관들과 논쟁하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여러분 속에 주님이 계십니까? 진짜 예수님을 만난 감격이 풍성합니까? 깨끗이 청소되어서 마귀가 일곱 귀신을 데려올 상황은 아닙니까? 예수 없는 목사, 예수 없는 권사, 예수 없는 집사는 아닙니까?
거듭나야 합니다.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이 죽어 장사지낸바 되고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함께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인 체험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식들이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습관적인 신앙으로는 안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나의 의가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나의 지식이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나의 명예가 나의 물질이, 나의 자존심이 나를 구원해주지 못합니다. 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거듭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욥이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었을 때, 즉 하나님과의 영적인 만남이 있었을 때, 그의 축복은 열려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살길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입니다. 세례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축복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
9절을 읽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례를 마치고 낫기를 기다릴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셨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본래 이 땅의 이름은 '기브앗 하아라롯 산'(할례산)이라고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하자 그곳의 이름을 길갈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길갈'이란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수치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아픈 기억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이방 백성들에게 당한 조롱과 비웃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극적인 기적들을 통하여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연단 과정이었지만 애굽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도 광야를 헤매고 있다"고 하는 비웃음으로밖에 보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렇게 오랫동안 광야에서 헤맬 것이면 차라리 애굽에 남아서 우리의 종노릇이나 할 것이지 그러면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살 수 있을 것인데"라는 비아냥이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는 그 날,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되는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랫동안 기다리던 가나안 땅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제 광야 생활의 수고가 끝났습니다. 이제 애굽의 수치는 굴러갔습니다.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풍요는 실제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 믿으면 아멘! 합시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세례 받은 우리들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는 반드시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애굽의 수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과거의 죄악의 습성들, 술 취함과 방탕함, 음행과 사치 등에 빠져 방황하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광야의 수고를 가지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까?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신 분이 계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할렐루야!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광야의 모든 수고는 끝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애굽의 수치, 세상의 모든 수치들은 다 사라지고 오직 천국의 축복들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서 애굽의 수치가 다 사라지셨음을 믿으십니까? 광야의 수고가 다 끝나셨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독립기념관에서 느낀 일-수치스런 역사를 대물림하지 말자)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애굽의 수치, 광야의 수고를 물려주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 모두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여 가나안의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길갈에서 행한 할례
성경 : 수 5:1-9
찬송 : 259(193),250(182)장
수 5: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수 5: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수 5:3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수 5:4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죽었는데
수 5:5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다만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길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
수 5:6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맹세하사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우리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리라 하시매 애굽에서 나온 족속 곧 군사들이 다 멸절하기까지 사십 년 동안을 광야에서 헤매었더니
수 5:7 그들의 대를 잇게 하신 이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할례를 행하였으니 길에서는 그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였으므로 할례 없는 자가 되었음이었더라
수 5:8 또 그 모든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머물며 낫기를 기다릴 때에
수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미국의 33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말년에 워싱턴의 한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할 때의 일입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자각한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불안과 초조로 인해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대의 유명한 복음 전도자였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자신의 병실로 초청했습니다.
“목사님, 임종을 앞둔 지금 내 마음이 두렵고 초조하며 불안합니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자신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복음을 제시하였습니다.
“대통령각하,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은 각하를 바로 영원의 세계인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각하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각하가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 피의 공로를 의지해서,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하는 믿기만 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이제 나는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하직할 때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중요한 일을 시작할 때마다 충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보통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때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거나 자기 주위를 정리하는 등의 준비를 합니다. 이스라엘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한 가지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 적진에 뛰어들었으며 가나안 정복을 앞둔 중요한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지금 각종 무기를 준비하고 정신력을 배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전쟁 준비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전투력을 감소시키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수 5:2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이것은 누가 보더라도 무모하고 괴이한 의식임에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 사람의 거부 의사도 없이 진지한 모습으로 그 의식을 계속 진행시켰습니다. 길갈에서 행한 할례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 무슨 교훈을 우리들에게 주는 것일까요?
1.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이란 대 과제를 앞두고 있는 그들이 할례를 행한 것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정립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할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 그에게 명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찾아가십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반갑게 맞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항변을 했습니다.
“하나님, 제 나이가 몇입니까?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나이가 아닙니까? 아내 사라도 경수가 끊어졌는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을 주시지 않으셨으니 지금까지 모든 재산을 관리해 왔던 가정총무인 다메섹 출신 엘리에셀을 저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제 인생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무슨 말이냐? 내가 너의 몸에서 난 아들을 반드시 줄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아들을 줄 것인데 너의 후손은 이 하늘의 뭇별과 같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사건을 두고 창세기 15: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창조주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반드시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인치는 징표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땅에는 수많은 종족과 수많은 백성들이 존재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그 백성의 표로 할례를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행히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광야 생활 중에 할례가 중단되었던 것입니다(민14:26-35). 그러나 이제 가나안 정복이라는 숙명적인 과제를 눈앞에 주고, 그들은 필수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재정립하고 그의 권속이 되는 의식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진정 그들의 전쟁은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삼상17:47)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하여 승패가 좌우된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에,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확립하기 위하여 할례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 백성임을, 그리고 우리의 생사가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져 있음을 고백하고 인정하여 올바른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립해야 합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운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2.육을 버리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적진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행하는 두 번째 의미는 육적인 생각과 수단을 모두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 5: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여기에서 “길갈”이라는 단어를 잘 살펴보면 ‘ㄹ’ 받침이 연달아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ㄹ’ 받침을 발음해 보면 자연스럽게 혀가 굴러갑니다. 마치 산 정상에서 돌을 던지면 계속해서 구르고 굴러가듯이, 애굽에서의 수치와 고통스러운 상황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바로 이러한 것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무엇 하나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직업 선택의 자유도, 거주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바로 왕이 명하는 대로 일해야 했고 평생 동안 노예살이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의 우상 숭배하는 현장에 참여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자손들 또한 이 노예생활의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저들에게 애굽에서 나오게 하사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의 증거로 이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여호수아 장군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는 상황 자체가 할례를 행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막 요단강을 건넜고 그들의 목전에는 가나안 땅에서 가장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아주 급박하고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면 보통 그 상처가 낫기까지 7-10 일 정도가 지나야 됩니다.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 군대의 모든 남자들이 그 기간 동안에는 전투력을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예가 창세기에서 나타납니다. 야곱이 숙곳이라는 곳에 있을 때 디나가 히위 족속 하몰의 아들 세겜이라는 추장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아니한 족속이기에 서로 통혼할 수 없다고 거절하니 그들이 기꺼이 할례를 받겠다고 자청하게 되었고 스스로 할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장 아파할 제 3일에 레위와 시므온이 각기 칼을 가지고 그 성을 기습하여 모든 남자를 죽이고 디나를 찾아오면서 그 성에 있는 것들을 노략질하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장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적의 침입에 아무런 대항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음으로 할례를 행한 것은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육적 수단을 모두 표기한다는 것(골 2:11), 즉 인간적인 술수나 물리적 무기에 대한 의존을 탈피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뢰한다는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간혹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육의 옷을 겹겹이 걸칩니다. 욕망과 위선과 술수 등 갖가지 인간적인 노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인이라면 중대하고 시급한 일일수록 먼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의 육적 소욕을 제어해야 할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진 자,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더욱더 크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진정 하나님은 육을 내세우는 자에게는 승리를 주지 않습니다. 그분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자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주십니다. 때문에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3.신앙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적진에서 할례를 행한 것은 그들이 한 하나님을 섬긴다는 공동체 의식을 갖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다 같은 할례를 행함으로 그들은 피로써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한 신앙의 공동체임을 고백했습니다. 즉 그들이 하나인 것을 하나님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확실한 전쟁준비였으며 철병거나 군마보다도 더 위력적인 전투력 증강이었습니다. 이것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었습니다.
이 할례는 신약적인 의미로 파악해 볼 때 오늘날의 세례로 예표 됩니다. 세례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다는 공개적인 의사표시인 것입니다. 이제는 세상과 구별되어 예수의 십자가로 피 값을 주고 사신 바가 된 존재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된 친교 공동체에 소속됨을 확증합니다.
오늘 신앙의 공동체인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 힘이 심히 미약하여 사회를 계도하기 보다는 오히려 끌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빛과 소금의 역할을 행해야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앙 공동체로서의 본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 될 때 강력한 힘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길갈에서 다 같은 할례를 받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전쟁을 앞두고서 할례를 행하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그분에 대한 전적 의뢰, 그리고 신앙 공동체 의식을 갖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그 중요한 시간에 할례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실로 어리석어 보이는 그것이 오히려 강한 신앙적 결속과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그런 순종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우치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목숨만큼 소중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선포될 때 “주님 제가 이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