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게 하지 못함의 은총과 사회권
사도 9,31-42; 요한 6,60-69 / 부활 제3주간 토요일; 2024.4.20
오늘 복음은 요한복음 6장의 결론으로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 사건과 이로 말미암은 군중의 반응과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무리하는 내용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군중이 떠나가자 열두 제자만 덩그러니 남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 하고 결단을 촉구하며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께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 있으신데, 주님을 두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68) 하고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루살렘이 위치한 유다 지방은 물론 갈릴래아 지방과 사마리아 지방 등 당시 이스라엘의 전 지역에서 늘어나 퍼져 나가는 선교적 상황을 전해줍니다. 그 무렵에 사도 베드로가 중풍에 걸려 누워 있던 애네아스를 일으켜 세우고, 병 들어 죽은 타비타를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어서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도 도울 수 없었던 제자들이 드디어 믿음을 회복하자 기적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 마지막으로 발현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풍어의 기적과 그 결과로 나타난 물고기 153마리의 선교적 표징이 마침내 가시적이고 사회적으로 나타난 것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영원히 살게 되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명백한 표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체성사, 더 정확히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 또는 성찬례의 근거이며 또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조건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란 예수님께서 살아가셨던 지향과 보여주셨던 모범을 닮아 살기만 하면 얻어지는 은총을 말합니다.
중세와 근세에 가톨릭교회에는 이 말씀과 이에 따라 이루어지는 성찬례의 거룩한 변화에 대한 순명만 강조되었을 뿐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저 미사 중의 빵과 포도주는 성체와 성혈로 변화된다고만 가르쳤을 뿐입니다. 성체성사의 재료인 빵과 포도주의 실체적 변화란 성령에 의한 개입으로서 이를 믿는 신자들에게도 일어나는 거룩한 변화임을 설득력 있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이 변화를 마치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라도 되는 것처럼 과도하게 강조한 탓에, 이에 항의성 질문을 던진 브루노가 화형을 당했고(Giordano Bruno, 1548~1600) 대희년을 맞아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식적으로 복권시키고 사과한 데에서도 나타나듯이, 성체성사를 둘러싼 논쟁은 지루하고 답답하게 흘러갔습니다.
20세기 중반에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과 이를 “믿지 못하겠으면 떠나라.”는 추상같은 요구에 대해서 베드로가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한 이래, 비로소 제대로 된 응답을 내 놓은 계기였습니다. 이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이 지녔던 문제의식은 중세에 일어났던 수많은 종교 재판, 개신교로 인한 분열, 무신론 세력으로 변한 노동자 세력의 이탈, 신앙을 불신하고 이성을 앞세운 시민 세력의 이탈 등으로 인해 가톨릭교회가 고립되어 버린 원인에 대한 성찰을 기본적으로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아울러 성체성사를 통한 영원한 생명의 기운을 받지 못한 인류 물질문명이 초래한 비인간화의 위기에 대한 성찰도 쏟아냈습니다. 기술적으로 찬란하게 발달한 인류 물질문명과 산업화 그리고 자본주의 발달이 과연 인간의 행복과 인격 성숙 그리고 인류 평화에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성체성사의 진리가 “믿지 못하겠으면 떠나야 하는” 중대한 계시라면, 이를 통해 얻어지는 ‘영원한 생명’의 실체에 대해서도 설득력 있는 이성적 설명이 뒤따라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에 대한 설명은 인류의 물질문명이 직면하고 있는 사회적 위기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서 나왔습니다. 이 가르침의 주요 원리만 살펴보아도 설명의 골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 존엄성, 사회적 공동선, 재화의 보편 목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보조성 그리고 연대성 원리 등입니다. 특히 사회적 공동선 원리가 영원한 생명이 가리키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사회적 진보에 적중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중풍에 걸려 팔 년 동안이나 침상에 누워 지내던 애네아스를 일으켰는가 하면, 병들어 이미 죽은 도르카스를 살려내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제자 시절에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얻게 되리라고 보증하신 ‘영원한 생명’의 사회적 실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하고 죽은 이를 소생시키는 기적을 여러 차례 일으키실 때 목격했던 베드로가 이번에는 직접 치유와 소생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리따와 사론 그리고 야포에 살던 주민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사도 9,35. 42) 그 결과로 교회는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온 지방에서 평화를 누리며 굳건히 세워지고 주님을 경외하고 살아가면서 성령의 격려를 받아 그 수가 늘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사도 9,31)
오늘날에도 베드로 사도가 증거해 보인 ‘상하게 하지 못함’의 은총으로 병자들이 낫고 죽은 이들까지 살려냄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믿음이 살아나고 세상의 평화가 굳건해지며 교회가 성령의 격려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사회적 공동선을 증진시키는 데 있습니다. 이 목표에 대해서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에서는 ‘전인적(全人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인’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할 ‘통합적이고 연대적인 인도주의’라고 이름하였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서문) 여기서 전인적이라 함은 육신 사정과 직결된 경제적 차원만이 아니라 정신 사정은 물론 영신 사정과도 관련 있는 문화적 차원이고 영적인 차원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뜻이고, 보편적이라 함은 한 사회의 기득권 계층이나 엘리트 계층만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포함한 모든 사회 구성원까지 그 혜택이 미쳐야 한다는 뜻입니다.
‘전인적(全人的)이고 보편적(普遍的)인’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할 ‘통합적이고 연대적인 인도주의’라는 이 이름에 담긴 개념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영원한 생명’의 현대적이고 사회적인 번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교황청 정의평화평의회에서는 이에 관하여 이렇게 천명한 바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은 교도권의 신중한 성찰의 열매이며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구원의 은총에 충실하고 인류의 운명에 사랑의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8항)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은 이 문서의 도움으로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영원불변한 복음의 말씀에 비추어 이를 해석하며, 성찰 원리와 판단 기준과 행동 지침을 세울 수 있을 것”(간추린 사회교리, 11항)이라고 상황 분석과 해석 그리고 성찰-판단-행동의 사명을 당부하였습니다. 이러한 당부에 따라서 우리 사회의 현실을 관찰하면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행한 치유와 소생의 기적 사건이 지닌 ‘상하게 하지 못함’의 은총은 사회권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장기간 권위주의 체제 아래 살면서 한국인들은 ‘자유권’에 대해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시민의 머릿속 생각이나 하고 싶은 말을 통제하려 하거나, 시민의 통신 내용을 도청하거나, 시민의 인신을 마구잡이로 끌고 가서 억류하거나, 정부 × 체제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시민을 탄압하거나, 언론기관을 직간접적으로 억압하거나, 집회 × 시위 × 결사를 사전적으로나 사후적으로 제약하는 체험을 장기간 해 왔기 때문입니다. 양심 × 사상의 자유, 신체의 자유, 언론 × 집회 × 시위 × 결사의 자유, 통신 비밀의 자유 등 자유권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민의 의식 속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으며 행동 준칙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사회권’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추상적이고 막연합니다. 물론 한국 정부가 가입한 국제사회권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United Nations)은 여성에 대한 차별 금지 및 평등 대우(제2조, 제3조), 근로할 자유와 근로에 대한 기회(제4조), 공정한 임금 및 적정 수준의 근로조건(제7조),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파업할 권리(제8조), 사회보장(제9조), 모성 및 연소자에 대한 특별 보호(제10조), 적절한 식량, 의복 및 주거에 대한 권리(제11조), 기본적 의료 × 보건 서비스를 받을 권리(제12조), 교육을 받을 권리(제13조), 문화생활과 과학 발전에 참여할 권리(제15조) 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국 헌법도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제31조), 근로의 권리(제32조), 근로자의 자주적인 단결권 ×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제33조),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제34조),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제35조), 보건권(제36조) 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시민이 육아 × 교육 × 주택 × 의료 등에서 기본적으로 보장을 받지 못하면 그의 삶은 언제든지 불안하고 피폐해 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 보장이 없으면 시민은 자신의 삶을 주도하기 어렵고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정치 × 경제 ×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체적 선택을 하기 어렵습니다. 불법하거나 부당한 국가권력이 행사되는 경우에도 침묵하거나 굴종하기 쉽습니다. … 정치적 민주화의 요체가 자유권이라면 사회적 × 경제적 민주화의 요체는 사회권입니다. 이제 연대와 공존의 원리가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 되었고, 그 법률적 표현이 사회권입니다.”(조국, 사회권의 현황과 과제, 편집자 서문 중에서)
교우 여러분!
성체성사의 교리를 사회 현실에 비추어 그리고 교도권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알아들어야 합니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는 역대 교황들이 반포한 사회적 가르침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개인적 능력과 노력으로만 이 사회권 과제들을 해결하도록 과중한 짐을 짊어지어 온 것이 이제까지 우리 사회의 냉엄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제가 성장해도 경제양극화 현상은 커져만 갔고 여기서 뒤처진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살을 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현재 선진국 그룹이 OECD 안에서 한국의 자살률이 가장 높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의 사회적 실체는 사회권이 정부와 국가의 보장으로 누리게 될 복지국가입니다. 그래야 질병에 취약하고 사회적 죽임에로 내몰리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이 떳떳하고 당당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희망찬 내일을 기약하며 사회적 공동선에도 이바지할 수 있게 됩니다. 이미 우리와 경제 수준이 비슷한 여러 나라들이 실행하고 있는 이 목표야말로 선의의 모든 이들과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여 부활 신앙으로 앞당겨야 할 사회적 책무이자 소명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