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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2-93 (123)
《(虞兮虞兮 可奈何 : 우혜 우혜 가내하)》
장량(張良)이 대답한다."두 분께서 이처럼 부탁하시니 내 어찌 거절할 수가 있겠소.
그러나 퉁소를 불어서 신효(神效)를 거두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걸맞는 노래가 따라야 하는 법이오.
가사(歌詞)는 물론 내가 짓겠지만, 퉁소의 곡에 따라 그 노래를 불러 줄 가수(歌手)도 백여 명 가량
연습을 시켜야 하오.그러므로 아무리 빨라도 준비 기간이 4,5일 걸릴 것이니 원수는 그동안
포진(布陳)을 단단히 쳐 놓고 기다리시오."한신은 장량의 권고대로 군량을 풍부하게 비축함과 동시에,
번쾌를 산상에서 적의 동태를 계속 정찰하며 관망하도록 시키고, 관영을 초군 진지 좌우에
매복시켜 놓았다.이렇게 항우가 나타나기만 하면 즉각 생포해 버릴 태세를 갖춰 놓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항우는 성녀산(聖女山)기슭에 진을 치고, 날마다 적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알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계포와 항백이 달려와 아뢴다."지금 우리는 군량도 떨어져 가고, 마초(馬草)도
떨어져 가고 있어서, 군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옵니다. 이런 때 적이 쳐들어 오면 우리는
속수 무책으로 무너지게 생겼습니다.
하오니 목전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우선 철수하는 것이 상책일 것 같사옵니다."
항우는 그 보고를 받고 기가 막혔다."우리가 지금 적에게 물샐 틈 없이 포위되어 있는데,
어디로 철수하자는 말인가 ?""폐하께서는 친위대 8천 명을 거느리고 이곳을 먼저 떠나시어 형주,
양양을 거쳐 강동(江東)으로 가시옵소서. 그러면 저희들도 뒤따라가, 강동에서 재기(再起)를 노리도록
하겠습니다."적의 포위망을 어떻게 돌파할 수가 있을지, 그게 문제가 아니오 ?"
항우의 입에서 이처럼 나약한 말이 나올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러기에 계포는
크게 낙심하여 대답한다."8천여 명의 친위 부대만은 아직도 사기가 꺾이지 않았사오니,
적의 포위망을 뚫고나가는 데는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옵니다.폐하께서는 지금까지 보여 주신
용력(勇力)으로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우후(虞后)를 모시고 뒤따라 철수하겠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항우는 비장한 어조로 말한다.
"그러면 내일 밤 야음(夜陰)을 틈타 철수하기로 합시다."
이리하여 항우는 전군에 철수 준비령을 내렸다.
때마침 고향이 그리워지는 가을철인지라, 초군 병사들은 지루한 싸움을 뒤로 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에 부풀어, 모두들 <싱숭생숭>마음이 몹시 산란하였다.
초군 병사들은 철수 준비를 서두르며, 자기들끼리 서글픈 말을 지껄여대고 있었다.
"제길헐, 싸움에 이기고 있었다면 별 탈이 없을 것인데, 이건 마냥 지고만 있으니 어느 세월에 고향으로
돌아가 볼까나 ?그나저나 전쟁통에 고향에 부모처자는 생사조차 모르고, 우리는 배를 곯고 있으니,
이런 신세로 어떻게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한나라 군사들을 뚫고 나갈 것인가 ?"
"그러게나 말이야 ! 이번 싸움에서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
때마침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달빛은 휘엉청 밝은데 풀벌레 조차 <씨렁씨렁> 울고
있었다.이렇게 병사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삼삼 오오 무리 지어 고향 생각에 잠겨 있는데,
홀연 저 멀리 산 위에서 퉁소 소리가 바람을 타고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게 웬 퉁소 소리야 ?"초군 병사들은 하나 둘 하던 말을 멈추고 아득히 들려 오는 퉁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폐부를 파고드는 듯이 애절한 퉁소 소리였다.모두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노라니까,
가슴을 먹먹하게 하고 눈물을 흘러내리게 할 슬프고 애절한 퉁소소리는 저절로 이를 듣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애간장(肝腸)을 녹이는 것이었다.초군 병사들은 가슴이 메어 오는 슬픔을 느끼며,
아득히 들려 오는 퉁소 소리에 정신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윽고 퉁소가락에 맞추어 노래 소리가 여기저기서 아득히 울려 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九月深秋兮 四野飛霜 (구월심추혜 사야비상)구월의 가을은 깊어 사방 들에는 서리가 날리고
天高水凅兮 寒雁悲愴 (천고수고혜 한안비창) 하늘은 높아 물은 말라 가고 기러기떼는 슬피우네
最苦戌邊兮 日夜疆場 (최고술변혜 일야강장) 싸움은 마냥 고달퍼서 밤과 낮이 모두 괴로운데
披堅執銳兮 骨立沙岡 (피견집예혜 골입사강) 적은 세차게 몰아쳐 와서 모래 언덕에 백골을 쓰러뜨리네
難家十年兮 父母生別 (난가십년혜 부모생별) 고향을 떠나 어언 십여 년 부모와 생이별을 했고
妻子何堪兮 獨宿閨房 (처자하감혜 독숙규방) 처자식인들 얼마나 외로우랴 가도가도 독수 공방인 것을
故山膄土兮 孰與之守 (고산수토혜 숙여지수) 메말라 가는 고향의 밭은 그 누가 가꿀 것이며
隣家酒熟兮 誰與之嘗 (인가주숙혜 수여지상) 이웃집에 술이 익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마실것인가
白髮倚門兮 望穿秋月 (백발의문혜 망천추월) 늙은 부모는 문간에 기대어 가을달만 처량히 바라보고
穉子涕飢兮 沮斷肝腸 (치자체기혜 저단간장) 어린것은 굶주림에 울어 애간장이 끊어질 노릇이네
胡馬嘶風兮 尙知戀土 (호마시풍혜 상지련토) 말이 바람에 울부짖음도 또한 고향을 그리워 함이려니
人生客久兮 寧忘故鄕 (인생객구혜 영망고향) 나그네 길이 아무리 오래기로 어찌 고향을 잊고 지내리오.
슬픈 노래는 옥퉁소 가락을 타고 끊길 듯 이어지며 한없이 계속되어, 이를 하염없이 듣고 있는 초군
병사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말할 것도 없이 폐부를 후벼파는 슬픈 곡조의 욱퉁소를 불고,
가을 달밤에 고향 생각에 빠져들도록 처량 맞기 그지 없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장량(張良)과
그의 부하들이었다.이렇게 장량과 그의 부하들이 계명산을 오르내리며 옥퉁소를 높고 낮게 불며
노래를 함에 따라,그 여운은 때로는 만학(萬鶴)이 구천(九天)에서 흐느껴 우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철석 간장을 속속들이 녹여 내는 것 같이 들리기만 하였다.
더구나 달빛은 밝고 바람은 차거워서 퉁소 소리와 노랫소리는 초군 병사들의 오장 육부를
자꾸만 파고들어 이들은 고향 생각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노랫소리에 심취한 초군 병사들은 눈물을 흘려가며 저희들끼리 중얼거린다.
"천지 신명께서 우리를 살려 주시려고 신선을 보내 퉁소를 불게 하심이 분명하지 않은가 ?"
"조만간 한군이 쳐들어 오면 제대로 먹지도 못한 우리가 어떻게 싸울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 이젠 초군도 끝났어.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는데 개죽음 당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러려니 천지신명께서는 우리를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저렇듯 애절한 가락을 들려 주시는 것이 아닌가 ?
이제 우리가 이런 계시를 무시하고 끝까지 이번 싸움에 나서는 것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 아니겠나 ?때마침 달이 밝아 고향으로 떠나기도 적절하니, 나는 군영을 벗어나 몰래 고향으로
떠나겠네."몇몇 병사가 이런 말을 하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누군가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좋은 생각이야. 우리가 도망을 가다 붙잡히기로, 한왕은 설마 우리를 죽이기야 하겠어 ?
그러니 더 이상 주저말고 모두들 고향으로 가기로 하세 ! "
상황이 이렇다 보니, 초군 병사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와 갑옷을 던져 버리고 총총히
고향 하늘이 보이는 길로 떠나기 시작하였다.그러더니 순식간에 그 수효가 불어나 나중에는 10여 명씩,
20명씩 공공연하게 떼를 지어 나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밤이 삼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그처럼 충성심이 강했던 항우의 친위대 병사들은 거의 모두 고향으로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계포와 종리매 항백등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당황하며 중군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삼경을 넘긴 시간으로, 항우는 우미인과 함께 깊은 잠에 잠긴채 아무리 인기척을
하여도 대답조차 없었다.항백은 한숨을 쉬며 계포, 종리매에게 묻는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친위병들조차 모두 뿔뿔이 달아나 버려서 이제는 우리만이 남게 되었소.
만약 한나라 군사들이 이런 때 쳐들어 오게 되면 주공은 포로가 되어 생명을 건질 수가 있겠지만,
우리들은 죽음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오.그렇다면 우리들도 군사들과 같이 도망을 갔다가
후일 좋은 때에 다시 모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는 데. 장군들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
계포와 종리매도 한숨을 쉬면서 대답한다."아닌게 아니라, 모두가 여기서 함께 죽는 것은 그야말로
개죽음이오. 우리도 병사들 처럼 도망을 갔다가, 후일을 기약하기로 합시다."
이리하여 초나라 대장들조차 자고 있는 항우를 그냥 내버려둔 채, 제각기 보따리를 싸들고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그리하여 항백은 친구인 장량을 찾아 가기로 하고, 발길을 한군의 진영을 향했다.
나름 항백의 생각으로는 자신이 한왕과 처남 매부지간이므로 잘만 하면 항우를 대신해, 후일 초왕후
(楚王后)로 책봉되어 영화를 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조차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주란과 환초는 도망가는 동료들을 눈물로 비웃으면서,
"명리에 눈이 어두워 의리를 배반하는 자는 개만도 못한 놈들이다. 우리 두 사람은 주공과 생사를
끝까지 같이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초나라를 지키리라."
하고 말하며 남아 있는 군사 8백여 명을 규합하여 진중을 굳게 지켰다.
이렇듯 초패왕 항우는 이미 바람앞의 등불의 신세가 되어 버렸건만, 주란과 환초만은 끝까지 남아
있었으니, 이것을 불행중 다행이라고 하여야 할까 ?도대체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 ?
항우는 밤 사이에 이변(異變)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우미인과 함께 잠을 자다가 문득 잠결에 들으니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지 않은가?
"아니, 이게 웬 초나라 노랫소리냐 ? 내가 지금 고향에 돌아왔더란 말이냐 ?"
항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보아도 잠을 깬 곳은 틀림없는 군영(軍營) 막사가 아니던가 ?그리하여 항우는,
"밖에 누구 없느냐 !하고 큰소리로 사람을 불렀다.그러자 주란과 환초가 부리나케 달려와 울면서 아뢴다.
"폐하 ! 한신이란 놈이 간밤에 산상에서 퉁소로 초나라 노래를 불러대는 바람에, 우리 군사들이 산란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 고향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8천여 명에 달하던 병사들은 물론, 계포와
종리매조차도 달아나 버려서, 이제 남은 군사는 우리 두 사람과 8백여명의 결사 대원들 뿐이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기절 초풍을 할 듯이 놀랐다."뭐야 .... ? 계포와 종리매까지 달아나 버렸다구 ? "
"그러하옵니다. 폐하. 모두 달아나 버려서 이제는 적을 막아낼 수가 없사오니, 폐하께서도 몸을
피하셔야 하옵니다."항우는 그 말을 듣고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한다.
"세상에 이럴 수가 ! 세상에 이럴 수가 ....! 오오, 하늘이 정녕 나를 버리신다는 말인가?"
그 탄식성이 너무도 비통하여 환초와 주란조차 흐느껴 울기까지 하였다.
우미인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항우와 함께 듣고,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온 몸을 떨고만 있었다. 항우는 그러한 우미인을 돌아보며,
"내가 당신과 함께 창검과 화살이 난무하는 적의 포위망을 뚫고 무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당신은 내가 적의 포위망을 뚫고 싸움을 하는 틈을 보아서 허술한 곳으로 스스로 도망을 쳐라.
이제 내가 당신과 헤어져 어디론가 도망을 갈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구나.
당신과 더불어 부부의 정을 나눠 온지가 이러구러(이럭저럭) 7, 8년 천군 만마의 진중에서도
떨어지지 않았던 우리였건만 이제 기약없는 이별을 하려니 가슴이 메어 오는구나 !"
하고 말하며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었다.항우에게는 나라가 망하게 된 목전의 위기도
슬픈 일이었지만, 내 몸같이 사랑하는 아내와 영원히 헤어진다는 것은 더 한층 슬픈 일이었던 것이다.
우미인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땅에 쓰러져 울기만 하였다.
숨막히는 슬픔이 계속되자, 항우는 아내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말한다.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몸. 당신은 속히 일어나 살 길을 찾아가거라 ! "
우미인은 정신없이 흐느껴 울다가, 문득 얼굴을 고즈녁이 들어 남편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나무라듯 말한다."폐하 ! 지어미가 지아비를 내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신첩더러 도망을 가라고
하시옵니까 ! 신첩은 폐하의 말씀이 너무도 원망스럽사옵니다 ! "
항우는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씹어 삼키며 냉정한 어조로 아내를 달래듯이 말한다.
"당신은 아직도 젊은 몸이니, 어디를 간들 살 길이 없겠는가 ? 나를 생각지 말고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거라."우미인은 탄식하듯 말한다.
"신첩은 오랫동안 폐하의 은총을 입어 오면서, 언제든지 폐하와 생사를 같이할 결심을 해왔사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혼자만 살 길을 찾아가라고 하시니, 그 무슨 무정한 말씀이시옵니까."
항우는 가슴이 메어와서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한다."나라가 망했으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할 몸이다. 그러나 앞길이 구만리 같은 당신까지 나를 따라서 죽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
항우는 그 한 마디를 씹어 던지고 부랴부랴 갑옷을 추스려 입고 밖으로 달려 나가 애마(愛馬) 오추의
등에 올라타며 박차를 가했다.아내를 내버려둔 채 자기만이 죽을 길을 찾아 나서려는 것이었다.
항우가 우미인을 내버려두고 혼자 적진을 향해 돌파하려는 것은 어쩌면 우미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인지 모른다.그러나 항우가 말 위에 올라 아무리 박차를 가해도, 오추는 웬일인지 그 자리에 선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바로 그때,
우미인이 허둥지둥 쫒아 나와 항우의 옷소매를 움켜 잡으며 애원하듯 말한다.
"폐하 ! 아무리 떠나시더라도 신첩의 이별주(離別酒)를 한 잔 드시고 떠나셔야 할 것이 아니옵니까 ?"
"오오, 당신이 주는 이별주라면 내 어찌 마다 하겠는가. 어서 술을 가져오거라."
우미인은 몸소 술상을 들고 나와 마상의 항우에게 이별주를 따라 올리며 말한다.
"폐하께서는 신첩의 선녀무(仙女舞)를 무척 좋아하셨으니, 마지막으로 선녀무를 한 가락 추어
올리겠나이다."그리고 우미인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려 가며 아리따운 몸매로 선녀무를 너울너울
추기 시작하였다. 우미인의 선녀무는 그야말로 천하의 일품이었다.
그녀의 사뿐사뿐 옮기는 발걸음에서는 삼현육각(三炫六角)이 소리 없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고,
기나긴 옷소매를 허공에 높이 치켜 올릴 때에는 선녀가 바야흐로 우화등선(羽化登仙) 하려는 것 같아서
그지없이 아름다웠다.그러면서도 그 춤에서는 슬픔이 안개처럼 솟아올라 보여서, 손에 술잔을 든 채
우미인의 선녀무를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항우의 눈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연실 흘러 내렸다.
항우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가며 춤을 추고 있는 우미인(虞美人)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문득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춤사위에 맞추어 즉흥시를 읊기 시작하였다.
力拔山兮 氣蓋世 ( 역발산혜 기개세 )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천하를 덮건만
時不利兮 騶不逝 (시불리혜 추불서) 시세가 불리함에 말조차 나가지 않네
騶不逝兮 可奈何 (추불서혜 가내하) 말이 나가지 않으니 이를 어쩔 것이냐
虞兮虞兮 可奈何 (우혜우혜 가내하) 우야 우야 이를 어쩔 것이냐
虞兮虞兮 可奈何 (우혜우혜 가내하) 우야 우야 이를 어쩔 것이냐
항우가 즉흥시를 슬프게 읊고 나자, 우미인은 춤을 추어 가며 화답(和答)을 한다.
漢兵已略地 (한병이약지) 한나라 군사가 이미 점령하였는지
四方楚歌聲 (사방초가성) 사방에서 초나라 노랫소리 들려오네
大王意氣盡 (대왕의기진) 대왕의 기력은 다하고 말았으니
賤妾何聊生 (천첩하요생) 나 홀로 어찌 더 살아가리오
항우와 우미인은 이별이 서러워 노래를 주고 받으며 언제까지나 헤어질 줄을 몰랐다.
부부의 애절한 이별을 눈물로 지켜 보던 주란과 환초는 먼 동이 터오는 하늘을 손으로 가르키며
항우에게 아뢴다."폐하 ! 동이 터오기 시작하니, 적의 무리가 언제 덤벼올지 모르옵니다.
어서 빨리 떠나셔야 하옵니다."항우는 그제서야 아내에게 달래듯 말한다.
"적들이 몰려오기 전에 나는 어디론가 떠나가야만 하겠다. 당신도 속히 피신하여 목숨을 보존토록 하라.
우리들의 운명이 다하지 않았다면, 언제 어디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우미인은 항우의 옷소매를 부등켜잡고 울면서 호소한다.
"낭군 혼자만 떠나시면, 저더러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시옵니까 ?"항우가 대답한다.
"당신은 얼굴이 아름다워 유방도 당신만은 결코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죽을 걱정은 하지도 마라."
그러자 우미인은 몸부림을 치며 앙탈하듯 외친다.
"신첩은 폐하와 함께 도망을 가다가 적의 손에 붙잡히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결심이옵니다.
설사 육신이 진토가 되더도 혼백만은 폐하를 따라서 초나라로 돌아가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흔들었다."그것은 안 될 말이다. 아무 죄도 없는 당신을 내 어찌 나와 함께
죽자고 할 수가 있겠는가 ? 나는 도망을 치다 죽을 결심이지만, 당신까지 죽게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미인은 항우의 옷소매를 움켜잡으며 다시금 애원하듯 말한다.
"정말로 그러하시다면 신첩의 마지막 소원을 하나만 들어주시옵소서."
항우도 <최후의 간청>만은 거절할 수가 없어서,"이 판국에 무슨 소원이 있단 말이냐.
그것만은 들어 줄테니, 어서 말해 보아라."하고 재촉하였다.우미인이 말한다.
"바라옵건대 폐하의 보검(寶劍)을 신첩에게 이별의 정표로 내려 주시옵소서. 신첩은 어디로 가나
그 보검을 폐하로 알고 받들어 모시겠사옵니다."눈물겹도록 슬픈 아내의 마지막 간청이었다.
아무려니 항우도 그것만은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풀어주면서 말한다.
"그런 소원이라면 어찌 들어주지 않겠냐. 어서 받아라."
우미인은 보검을 받아들고 나더니, 비장한 어조로 항우를 힘차게 부른다."폐하 ! "
"무슨 일이냐 ? ""신첩이 폐하를 따라 나서면 폐하는 저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실 것이옵니다.
그러기에 신첩은 이 자리에서 죽기로 결심하였으니, 폐하께서는 이 순간부터 신첩을 잊으시고
신속히 피신 하시옵소서."
우미인은 그 한 마디를 남기고 그자리에서 항우로부터 받아든 보검으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것이었다.
우미인이 항우에게 이별의 보검을 달라고 한 것은 스스로 자살을 하기위한 구실이었던 것이었다.
말릴사이도 없이 벌어진 참극을 눈앞에서 당한 항우는 말에서 뛰어내려 우미인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였다.그러자 한참을 지켜보던 주란(周蘭)이 다가와 항우를 잡아 흔들며 간한다.
"폐하께서는 이 판국에 천하 대사를 잊고 슬픔에 잠기실 때가 아니옵니다. 사태가 위급하오니
속히 이 자리를 떠나셔야 하옵니다."
항우는 눈물로써 우미인의 시체와 작별 하고, 8백여 기의 부하들과 함께 울면서 도망길에 올랐다.
얼마를 앞으로 가니, 한군의 포위망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자 항우는 일행을 두 패로 나눠, 항우가
먼저 포위망을 뚫고 나가는데. 한나라 대장 관영이 많은 군사들로 앞길을 막아선다.
항우가 폭풍처럼 달려 나가 관영과 싸우기를 10여 합, 관영이 힘에 부쳐 도망을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추격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 길만 달려나갔다.
이때 번쾌가 산상에서 이 광경을 보고 붉은 깃발은 사방으로 휘두르니, 이번에는 한나라 군사들이
사면 팔방에서 일시에 들고 일어나는 것이었다.한편, 주란과 환초도 항우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한장(漢將) 조참이 유가, 왕수, 주종, 이봉 등의 네 부장들과 함께 총공격을 퍼부어 오는 것이었다.
주란과 환초는 결사적으로 싸워 적들을 가까스로 물러가게 하고 뒤를 돌아 보니, 이제는 남아 있는
병사라고 해 보아야 고작해야 20여 기만 남았을 뿐이 아닌가 ?
"이제 앞으로도 적군을 수없이 만나게 될 터인데, 20여 기로서야 어찌 그들을 막아낼 수가 있을 것인가 ?
그렇다면 적의 손에 처참하게 죽느니 차라리 내 손으로 죽어 버리자 ! "
주란과 환초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해 마지 않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니, 나머지 20여 명의
친위대의 남은 군사들도 두 사람을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2-9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