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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의 장막’ 걷고 소련과 ‘데탕트’… 美 초강대국 만든 외교 달인
[헨리 키신저 1923~2023]
‘탈냉전 외교거목’ 잠들다
헨리 키신저 前 美국무장관 타계
‘힘의 균형 통한 현실주의’ 소신… 베트남 정전 협정 주도 노벨평화상
100세 맞은 올해까지 영향력 발휘… “지나친 강대국 중심 외교” 비판도
강대국 간 긴장 완화를 통해 ‘냉전의 열전화’를 막았던 미국 외교의 ‘살아 있는 전설’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 헨리 키신저 협회는 이날 “키신저 전 장관이 코네티컷주(州)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밝혔다.
키신저 전 장관은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핑퐁외교를 통해 ‘죽(竹)의 장막’으로 가려져 있던 중국과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고, 소련과는 ‘데탕트(détente·긴장 완화)’를 조성하는 등 국제질서를 바꾸고 미국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반열에 올린 외교의 거목이다. 일각에선 지나친 강대국 중심 외교로 약소국의 비극에 눈을 감았다는 비판도 있다.
● 두 정부에 걸쳐 안보보좌관-국무장관
15세 때 유대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키신저 전 장관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다. 1923년 독일 바이에른주에서 유대인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나치의 탄압이 심해지자 1938년 가족과 함께 미 뉴욕으로 이주했다. 당시 영어를 한마디도 못 했지만 공장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학습해 이주 2년 만에 뉴욕시립대(CUNY)에 진학했다.
회계사가 되려던 그의 꿈을 바꿔놓은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독일 정보 수집 임무를 맡은 그는 연합군 점령지에서 나치 대원들을 색출하는 데 공을 세워 청동무공훈장을 받았다. 키신저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은 “박해받던 유대인이 20대 초반 나치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휘두르며 키신저는 권력지향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세계관을 갖게 됐다”고 분석했다.
키신저는 1969년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하면서 본격적인 외교무대에 섰다. 이후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1977년까지 국무장관을 지내며 약 8년에 걸쳐 세계 질서를 혁명적으로 바꿨다.
1969∼1977년 미국 리처드 닉슨 행정부와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 걸쳐 국가안보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는 재임 때는 물론이고 퇴임 후에도 전 세계를 누비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1971년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을 만나 적대적이던 미중 관계 개선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AP 신화 뉴시스
키신저 전 장관은 1969년 냉전시대의 라이벌인 소련과 핵군축 협상을 시작했다. 쿠바 미사일 사태를 거치며 짙어진 핵 공포 속에 추진된 미소 데탕트는 1972년 미소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타결로 이어졌다. 1971년에는 두 차례 중국 방문을 통해 이듬해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毛澤東) 주석 간 첫 미중 정상회담을 끌어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4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 키신저 전 장관은 포드 대통령과 함께 박 전 대통령을 맞았다. AP 신화 뉴시스
한반도 문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1975년 9월 유엔 총회에서 그는 “북한 및 북한의 동맹국이 대(對)한국 관계 개선 조치를 취하면 한미도 상응 조치를 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키신저 자신이 주도적으로 기획한 미중, 미소 데탕트의 흐름 속에 주변 강대국을 움직여 한반도 냉전 구조를 깨려는 제안을 한 셈이다.
그가 탈냉전을 추구한 것은 ‘강대국 간 힘의 균형을 통한 불완전한 평화가 전쟁보다 낫다’는 현실주의적 소신 때문이었다. 정치학자 로버트 캐플런은 키신저를 가리켜 “미국이 펼치고 싶은 게 아닌, 펼쳐야만 하는 외교정책을 펼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 ‘강대국 중심’ 외교에 대한 논란도
키신저 전 장관은 1973년 미군 철수와 남북 베트남 정전협정 체결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해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4차 중동전쟁이 벌어지자 중동 각국을 활발하게 오가며 중재 활동을 벌여 휴전을 이끌어냈다. 외교적 중재를 위해 여러 국가들을 번갈아 방문하는 ‘셔틀외교’라는 말도 이때 만들어졌다.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러 정권에 걸쳐 대통령 외교자문으로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9·11테러 대응 자문을 맡았고,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전쟁을 지지했으며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땐 크림반도의 러시아 할양을 통한 서방과 러시아의 긴장 완화를 촉구했다.
2007년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환대를 받고 있다. 두 사람은 1990년대부터 정기적으로 만남을 이어왔다. AP 신화 뉴시스
하지만 강대국 중심 외교에 대한 논란도 적지 않다. 키신저 전 장관은 남북 베트남 정전협정을 위해 민간인 50만 명의 사망으로 이어진 캄보디아 폭격을 승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중 데탕트를 위해 중국의 지원을 받은 파키스탄의 방글라데시 학살을 묵인했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2017년에는 미국과 중국이 북한 정권 붕괴와 주한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빅딜’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올해 7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도 회동했다. AP 신화 뉴시스
키신저 전 장관은 최근 하버드대에서 열린 대담에서 “상황은 언제든 쉽게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남길 유산(legacy)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내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말했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윤다빈 기자
“美中, 분리된 길 가면 안돼”… 100세 맞은 올해 100번째 訪中도
[헨리 키신저 1923~2023]
키신저 환대했던 시진핑, 美에 조전
中 매체 “미중관계에 살아있는 화석”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7월에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는 등 11월 29일(현지 시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신냉전 시대를 막기 위해 미중 긴장 완화를 위한 활동을 이어왔다. 시 주석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에게 조전을 보내 애도를 표했고, 가족들에게도 위로의 뜻을 전달했다.
7월 키신저 전 장관의 방중 당시 시 주석은 그를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라고 부르며 극진히 환대했다. 또 “키신저 전 장관이 100세를 맞아 100번째 중국을 방문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중국은 키신저 전 장관과 리상푸(李尚福) 당시 국방부장(장관)의 만남도 허락했다. 당시 미국은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과 리 부장의 회담을 중국에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거절당한 상황이었다. 중국이 키신저 전 장관을 각별히 여긴다는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블룸버그통신은 “중국이 미국과 대화를 위해 키신저를 통역사로 받아들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9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와이탄(外灘) 금융서밋에서도 미중 ‘디커플링(decoupling·경제 분리)’을 우려하며 “양국 모두의 생활 수준을 떨어뜨릴 것”이라면서 “양국은 분리된 길로 가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5월에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와 100세 생일 기념 인터뷰를 하며 “현재 미중 모두 정치적으로 양보할 여지가 별로 없지만 미중 관계를 풀기 위해 미국이 중국 지도자들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과의 대화를 중시해온 그의 별세 소식에 중국중앙(CC)TV는 30일 키신저 전 장관의 생애를 돌아보는 1분 57초 분량의 영상을 보도했다. CCTV는 “그는 미중 관계 발전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화석(活化石)’”이라고 평가했다. 셰펑(謝鋒) 주미 중국대사는 이날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를 통해 “역사는 미중 관계에 기여한 100세 어르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며 “키신저는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가장 소중한 오랜 친구로 남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북한의 비핵화를 포함한 한반도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올해 1월 미국 뉴욕을 방문한 정몽준 아산정책연구원 명예이사장과의 오찬에서 “북핵 문제는 한국과 미국이 굳건한 공조를 통해 슬기롭게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비핵화에 대해서는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필요하고, 중국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고 한다.
그는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을 찾아 ‘미국의 전략’이란 보고서를 작성해 윌리엄 엘리엇 백악관 정치고문과 폴 니츠 국무부 정책국장에게 제출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미국이 소련을 상대로 적극 대처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그의 보고서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응 방향을 결정짓는 기초 자료가 됐다.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도쿄 납치 사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그는 김 전 대통령 구명 조치에 나선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베이징=김기용 특파원, 고도예 기자
헨리 키신저, 1923∼2023
말년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구부정하고 어눌했다. 때로 말을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래도 ‘올빼미 눈’이라고 불려온 그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지난달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을 비판하고 중동지역의 분쟁 확산을 경고하는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지난해 19번째 저서를 내고 최근까지도 각종 강연과 기고 활동을 해온 키신저의 행보는 100세라는 나이에도 거뜬히 계속될 듯 보였다.
▷‘미국 외교의 전설’, ‘죽(竹)의 장막을 열어젖힌 미중 외교의 상징’, ‘동서 데탕트 외교의 주역’…. 30일 타계한 키신저에게 따라붙는 헌사는 끝이 없다. 국익을 앞세운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냉전시대 미국 외교의 밑그림을 그려낸 게 그다. 스스로를 역사가라고 칭했던 그는 1, 2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의 역사와 세력 구도, 메테르니히와 비스마르크 같은 인물에 천착했다. 핑퐁 외교로 중국을 끌어들여 소련과의 세력 균형을 시도한 외교 구상에는 이런 역사적 식견이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부터 베트남전쟁, 아랍과 이스라엘 갈등, 중남미 정쟁까지 키신저가 현직에서 다뤄 보지 않은 글로벌 외교 현안은 없다. 기록해야 할 내용도 많았는지 그가 생전에 낸 회고록들의 분량만 3800페이지에 달한다. 퇴임 후까지 합쳐 그가 조언한 미국 대통령은 12명. 닉슨 행정부 때부터 유지돼온 대중 정책 기조를 뒤집어버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조차 그에게 조언을 구했고, 중국과의 물밑 통로로 그를 활용하려 했다. 트럼프가 북한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한 과정을 놓고 “1971년 닉슨 방중을 성사시킨 키신저의 방식을 따라했다”는 학계 분석도 있다.
▷미국 외교안보를 좌지우지해온 거목이 100세까지 장수한 기록은 전례 없는 장면들을 연출해냈다. 50년간 봉인되는 기밀문서들이 그의 눈앞에서 해제돼 버린 것이다. 비정부기구(NGO) 등의 요구에 따라 국무부가 공개한 수천 페이지 분량의 녹취록에는 “소련이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넣는다고 해도 그것은 인도주의적인 우려이지 미국이 걱정할 바가 아니다” 같은 냉혹한 발언들이 담겨 있었다. 미국의 대만 정책 선회 같은 민감한 결정 과정부터 기자들과 나눈 밀담까지 그대로 공개된 것은 그에게는 꽤나 민망한 일이었을 것이다.
▷키신저가 95세부터 인생의 마지막 과업으로 삼았던 것은 인공지능(AI)이 세계 외교안보에 미치는 영향 연구였다. 그는 올해 에릭 슈밋 전 구글 CEO와 함께 쓴 책에서 핵무기보다 대응이 어려운 AI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이를 관리할 국가기구 설립과 전략 독트린 마련 등을 제언했다. 여기저기서 전쟁이 터지는데 미중 갈등은 심화하고 신기술의 위협까지 커지는 세상, 키신저의 경륜과 조언이 그리운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다.
이정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