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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 2-94 (124)
《영웅의 몰락》
항우(項羽)는 주란과 환초가 자결한 사실도 모르고, 1백여 기의 부하들과 함께 한군의
포위망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만 달려 나갔다.그리하여 회하(淮河)에 당도하니, 마침 물가에
나룻배 한 척이 있었다."모두들 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자 ! "
몇 번의 나룻배 행보로 항우를 비롯한 남은 백여 명의 친위대는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10여 리를 더 달려 음릉(陰陵)이라는 곳에 당도하니, 산길은 두 갈래로
갈려져 있어서, 어느 길이 강동으로 가는 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마침 늙은 농부 하나가 밭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었다.
항우는 농부 곁으로 달려가 다급하게 물었다."여보게 ! 강동으로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
"....."농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항우를 멀거니 바라보기만 하였다.그리고는 마음 속으로,
(이 사람이 비단 전포(戰袍)에 황금 투구를 쓴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이 아닌게로다 !
그렇다면 혹시 초패왕이 아니런가 ? 초패왕이라면 우리네 백성들을 무던히도 괴롭혀 온 인물이니,
이런 자를 구해주었다가는 천벌을 받게 되리라...)
늙은 농부는 이런 생각이 들어, 대답을 아니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항우는 다급한 어조로 다시 묻는다."이 사람아 ! 나는 초패왕일쎄. 한나라 군사들에게 쫒겨
강동으로 피신하는 길이니, 길을 빨리 알려 주게 ! "농부는 상대방이 항우라는 것을 확신하자,
"강동으로 가는 길은 왼쪽 길이옵니다."하고 일부러 엉뚱한 길을 가리켜 보였다.
항우는 농부의 말을 믿고 그 길로 달려 가다가 깊은 수렁에 빠져 무진 애를 먹었다.
가까스로 수렁에서 빠져나와 얼마를 더 달려가다가 우연하게도 그 지방 태수(太守)인 양희(楊喜)를
만나게 되었다.양희는 한 무리의 군사를 몰고 급히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항우는 크게 기뻐하며 양희(楊喜)에게 애원하듯 말했다."여보게 양희 장군 ! 그대는 과거에
나의 부하가 아니었던가 ? 나는 지금 강동으로 가는 길이니, 그대도 나와 함께 강동으로 가기로 하세.
내가 강동에서 재기(再起)하는 날에는 자네를 만호후(萬戶侯)에 봉해 주기로 하겠네."
양희가 냉소를 하면서 대답한다."당신은 현사(賢士)들의 충간(忠諫)을 듣지 않았다가
오늘날 이꼴이 된 게 아니오 ? 당신이 강동으로 도망을 간다 한들 어떻게 재기를 할 수 있단 말이오 ?
나는 이미 한왕(漢王)에게 귀순하여 당신을 잡으러 나온 길이오.그러나 옛날의 의리를 생각해
당신을 차마 내 손으로 잡아 갈 수는 없구려. 당신도 나처럼 한왕에게 귀순하여 오래도록
부귀와 영화를 누리도록 합시다."항우는 양희에게 <항복권고>를 듣는 순간, 모욕감이 열화같이
치밀어 올랐다. 그리하여 장창을 번개같이 휘둘러 양희를 찔러 죽이려고 하니, 양희가 몸을 번개같이
피하며 정면으로 대들었다.두 장수가 무섭게 싸우기를 20여 합, 항우가 양희의 머리 위로
최후의 철퇴를 내려갈기려는 바로 그 순간, 벼락같이 양무, 왕익, 여승, 여마통 등의 맹장들이
일시에 함성을 울리며 항우에게 덤벼들었다.항우는 그 많은 한군 대장들과 단독으로
싸우기 시작하였다.생사를 걸고 싸우는 무서운 싸움이었다.
항우의 용맹이 어떻게나 뛰어났던지 7,8명의 맹장들과 싸워도,오히려 항우가 유리해 보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포, 팽월, 왕릉, 주발 등이 한꺼번에 몰려와 항우에게 덤벼드는 것이었다.
항우는 그들을 상대로 10여 합을 더 싸우다가 승리할 가망이 없어 보이자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동쪽으로 비호같이 달아나기 시작하였다.항우가 타고 있는 <오추>는 천하의 명마인지라,
그를 따라잡을 장수는 아무도 없었다.항우는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깊은 산길을 한없이
달려 나갔다. 그리하여 5, 60리쯤 쫒겨가 뒤를 돌아다보니, 그를 따라오는 부하는 불과 50여 기에
지나지 않았다.항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니, 어느덧 해는 서산너머로 저물어
가는데,문득 깨닫고 보니, 모두들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부하들이 항우에게 아뢴다."말도 말이지만, 우선 저희들이 배가 고파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사옵니다.
적들이 여기까지는 쫒아오지 못할 것이니, 오늘 밤은 가까운 민가(民家)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야간 행군을 무리하게 계속하다가는 어떤 불상사가 있을 지 염려 되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아득한 숲속에 가냘픈 불빛이 하나 보였다.
"저기에 인가가 있는 모양이니, 저기로 가보자."일행이 말을 끌고 불빛을 찾아가 보니,
그 집은 여염집이 아니라 흥교원(興敎院)이라는 고원(古院)이었다. 그곳은 뜰 앞에 시냇물이
흘러가고 있고, 마당가에는 기암 괴석들이 층층을 이루고 있었다.
안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오건만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항우는 바위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부하에게 말했다."칼이 무뎌졌으니, 여기서 내 칼을 좀 갈아 다오 ! "
그러나 부하들은 일어날 생각도 아니 하고 주저앉은 채 대답한다.
"지금은 한 걸음도 움직일 기운이 없으니, 저녁이나 먹은 후에 칼을 갈아 드리겠습니다."
어명을 거역하는 것은 참형(斬刑)에 해당한다. 그러나 항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를 따라온 그들의
충성이 너무도 고마워, 누구 하나라도 벌할 생각이 없었다.그렇다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칼만은 미리 갈아 두지 않을 수가 없기에, 항우는 몸소 물가로 걸어가 자기 칼을 손수 갈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장군이 된 이후로 자기 손으로 칼을 갈아 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항우는 칼을 다 갈고 난 뒤에, 애마 <오추>에게 물도 손수 먹여 주었다.
이렇게 부하 군사들 조차도 꼼짝도 할수 없도록 피곤에 지쳐 있었던 것이다.
항우는 말에게 물까지 먹여 주고 나서 홍교원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후원으로 들어가 보니 4,5명의 호호 백발 노인들이 화롯가에 둘러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 원에는 사람이 이렇게나 적으니 웬일이오 ?"항우의 질문에 노인들이 대답한다.
"이곳의 원생(院生)들이 20여 명이나 있었으나,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모두들 피난을 가버리고,
우리 같은 늙은이들만이 원을 지키고 있다오.
그런데 귀공은 누구시길래 이 밤중에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항우가 대답한다."나는 초패왕이오. 싸움에 져서 몸을 피하며 오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소."
노인들은 그 말을 듣고 일제히 땅에 엎드리며 말한다."폐하이신 줄도 모르고 대죄를 지었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항우는 그들을 일으켜 앉히며 말한다.
"그대들은 속히 일어나 밥을 지어 주시오. 우리들은 지금 하루 종일 싸우기만 하였지,
밥을 먹어 보질 못하였소.그리고 지금 밥을 지어 준다면, 고마움의 표시로 강동에 돌아가는 길로
백섬의 쌀로써 갚아 드리겠소."노인들 중에 유식한 노인 한 사람이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이곳은 초나라의 경계 안에 있는 땅이옵니다. 저희들이 폐하께 진지를 지어
올렸기로, 어찌 황공하게도 보상을 바랄 수 있으오리까. 진지를 넉넉히 지어 올릴 터이니, 마음껏
드시옵소서."
그리고 노인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저녁상을 차려 왔는데, 식탁에는 온갖 산채(山菜)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항우와 그 부하들은 노인들 덕택에 여러 날 만에 밥을 배불리 먹고,
그날 밤을 편히 쉴 수 있었다.이렇게 잠자리에 들게 된 항우는 새벽녘에 있었던 사랑하는 아내,
우미인(虞美人)과의 이별시(詩)의 마지막 구절이 자꾸 되뇌어지어,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우야 우야 이를 어쩔 것이냐 虞兮虞兮 可奈何(우혜우혜 가내하)
홍교원 노인들에게 저녁 대접을 받은 항우는 진종일 적장들과 싸우느라고 무척 피곤하였으나,
우미인과의 사별(死別)의 슬픔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에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잠이 들게 되었는데, 잠은 이내 꿈으로 변해 버렸다.
꿈에..항우는 저멀리 지평선에서 아침해가 기운차게 솟아 오르는 것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황금빛 태양이었다.
항우는 연실 눈을 비비면서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고 보니, 홀연 유방이 오색 영롱한 구름을 타고 나타나, 그 찬란한 태양을
가슴 그득히 품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광경을 보는 순간, 항우는 유방으로부터 태양을
빼앗으려고 천방지축 정신없이 달려갔다.그러나 항우가 유방을 따라잡는 순간,
유방이 항우를 발길로 걷어차 버리고 저 멀리 서쪽하늘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유방이 태양을 안고 사라진 서쪽 하늘가에는 상광(祥光 : 상서러운 빛)이 찬란하게 비쳐 오고 있었고,
별안간 하늘과 땅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그윽하게 진동해 오고 있었다.
(아아, 내가 유방에게 태양을 빼앗기고 말았단 말인가 ! )
항우는 발을 구르며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다가, 자기 고함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남가일몽(南柯一夢)이었다.항우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비통하게 탄식하였다.
"아아, 나의 천하통일의 희망은 이제 끝나는 모양이구나 ! "
마침 그때 밖에서 군사를 불러 모으는 고각(鼓角 : 북소리) 소리가 나더니 별안간 함성이 요란스럽게
들려오고 있었다.알아보나마나 항우와 그의 부하들이 숨어 있는 홍교원(興敎院)이 적에게 포위 당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항우는 무장을 갖추기가 무섭게 밖으로 달려나와 무작정 숲속으로 말을 달렸다.
어느덧 먼동이 훤하게 터 오는데, 한나라 군사들은 가는 곳마다 들고 일어나 함성을 지른다.
항우는 적병들이 함성을 지르거나 말거나, 쏜살같이 말을 달리고 달려나갔다.
이처럼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데 문득 적장 관영이 앞을 가로 막으며 소리쳤다.
"항우야 ! 어디로 가느냐. 너는 이미 독 안에 든 쥐로다. 네 목을 나에게 맡겨라 ! "
항우는 말을 멈추며 관영을 노려보다가 다음 순간 결사적으로 관영에게 덤벼들었다.
그리하여 10여 합쯤 싸우고 있는데, 이번에는 양무, 여승, 자무, 근흠 등 맹장들이 한꺼번에 합세해
오는 것이었다.항우는 세불리(勢不利)를 깨닫고 다시 쫒기기 시작하였다.
만약 추격해 오는 자가 있으면, 쫒겨가면서 한 놈씩 처치해 버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장들은 더 이상 추격해 오지 않았다.이렇게 뒤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50리쯤 달려가니
오강(烏江)이 나타났다.항우는 그제서야 말을 멈추고 강물을 굽어보았다.
강물은 무심히 용용하게 흐르고 있건만, 이를 쳐다보는 항우의 심정은 마냥 처량하기만 하였다.
(이제부터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할 것인가 ?)갑자기 밀려오는 아득한 생각에 행방이 묘연하여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 산과 들에 우글거리는 것은 오로지 적군뿐이 아닌가 ?
바로 며칠 전만 하더라도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천하를 호령하였던 항우였다.
그때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의 앞에서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야말로 자신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의 유일 무이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
그러나 그토록 많았던 부하들과 수많은 억조 창생은 모두 어디로 갔으며, 그토록 넓던 봉토는
어디로 가고, 이제는 갈 곳조차 없는 신세가 되어 버렸단 말인가 ?
항우는 산과 들에 득실거리는 적병들을 눈물로 바라보며 혼자 탄식해 마지않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 한들 적의 포위망을 어찌 벗어날 것인가 ! 어젯밤의 꿈으로 보아 나의 운명은
이미 끝장임이 분명하도다 ! 오오, 하늘이 정녕 나를 버리시는구나 ! )
그제서야 뒤를 돌아다보니, 자기를 따라온 부하는 겨우 28기에 지나지 않았다.
항우는 그들을 모아 놓고 말한다."나는 군사를 일으킨 지 8년간 수백 번을 싸워 왔지만,
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이렇게 나에게 굴복하지 않은 장수는 한 사람도 없어, 마침내 나는 패왕의
자리를 차지했건만, 오늘날 내가 이 꼴이 된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 나를
버렸기때문이다.사태가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내 마지막으로 세 번만 더 싸워 보겠다. 세 번을 싸워서
지게 되면, 하늘이 기어코 나를 버린 것이니, 나를 후세에 용기가 없는 놈이라고 부르지 마라."
"....."28기의 부하들은 머리를 숙연히 수그린 채 말이 없었다.항우가 다시 말한다.
"내가 혼자서 적의 포위망을 뚫고 나갈 테니, 너희들은 뿔뿔히 흩어지어, 포위망을 벗어나면 동산(東山)
밑에 숨어 나를 기다리거라."부하들은 그제서야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저희들은 최후까지 폐하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항우는 부하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적진을 독살스럽게 노려보았다.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는 항우의 마음은 이미 생과 사를 떠난 해탈(解脫)한 성인(聖人)의 모습이었다.
항우는 마침내 <오추>에게 박차를 가하며 적진 속으로 질풍 노도와 같이 돌진하였다.
그리하여 마주 달려 나오는 적의 대장 하나를 단 칼에 베어버리니, 뒤따라 오던 군사들이 혼비 백산하며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 버린다.항우가 최초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달려 나가니, 이번에는 제 2의 포위망이
앞을 가로 막았다. 그러나 적장은 양희였고, 양희는 항우를 보기가 무섭게 제풀에 쫒겨가 버린다.
항우가 두 번째의 포위망을 뚫고 동산에 와 보니, 28기의 부하들이 그곳에서 항우를 감격의 눈물로
반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적은 어느 새 또다시 3면으로부터 항우를 포위해 오고 있었다.
항우는 적진을 노려보며 부하들에게 비장한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닥치는대로 적을 격파하는 수밖에 없다. 너희들은 모두 나의
뒤를 따르라."항우는 명령을 내리자마자 비호같이 달려나가 싸웠다. 그리하여 적장 이우와 도위, 왕항
등을 한칼에 베어 버리고 덤벼오는 병사들도 수백 명을 베어버렸다.
그러자 뒤이어 적장 여승과 양무가 수천 군사를 몰고 달려 나온다.그러나 그들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여승과 양무는 10합도 채 싸워 보지 못하고 줄행랑을 놓아 버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부대가 달려나왔다. 그러나 그들도 항우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 했다.
이날 항우는 연달아 아홉 번을 싸워, 적장 아홉 명을 죽이고 덤벼들던 적군 병사들도 여러 백명을
죽였지만 항우 자신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날이 저물어가자 적들은 모두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러자 남은 부하들이 땅에 엎드려 항우에게 감격의 큰절을 올리며 아뢴다.
"폐하께서는 세 번만 싸우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아홉 번을 싸우셔서 적의 대장 아홉을 참살하셨고,
적병들도 수천 명을 제압하셨습니다. 폐하야말로 사람이 아닌 천신(天神)이시옵니다."
항우가 쓸쓸하게 웃으며 대답한다."내가 아무리 용맹스럽기로 천운(天運)이 따르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구나. 우선 오늘 밤 잠잘 곳을 찾아가 보자."일행이 오강(烏江) 북쪽 강가에 도착해 보니,
동산 고을의 정장(亭長)이 강가에 배를 대놓고 있다가 항우를 보자 말한다.
"강동이 좁은 땅이라고는 하오나, 지광(地廣)은 천 리가 넘사옵니다. 그곳에 가시면 수십만 군사를
쉽게 양성할 수 있사오니 폐하께서는 강을 속히 건너도록 하시옵소서.
만약 적들의 눈에 띄면 이나마도 건너기가 매우 어렵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항우는 배에 오를 생각을 아니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을 수연히 바라보며 탄식한다.
"하늘이 이미 나를 버리셨는데 강을 건너가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그 옛날 강동에서는 8천명의
친위 부대가 나를 따라와 주었지만, 이제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으니, 내 무슨 면목으로 강동땅을
다시 밟을 것이냐."이렇게 말을 하는 항우의 두 볼에서는 구슬 같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정장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폐하께서는 생각을 달리 하시옵소서. 자고로 승부(勝負)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고 하옵니다.오래지 않은 일로 유방은 수수 대전에서 폐하에게 대패하여
30만 군사들을 송두리째 잃었습니다. 그로 인해 수수 대강은 군사들의 시체로 메워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왕은 끝까지 절망하지 아니하고 혼자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갔다가, 오늘날 다시 일어서게
된 것이옵니다.폐하의 오늘날의 신세는 지난날 한왕의 신세와 다름이 없사온데 무슨 까닭으로
체념을 하신다는 말씀이옵니까.옛글에 <큰일을 도모하는 자는 조그만 일에 구애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폐하께서는 지금의 상황을 다시 통찰하시고 어서 강을 건너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항우는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그대의 말이 옳다 하기로 나는 강동 땅에는 발을 들여놓지 못하겠네 !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게 만든 내가 무슨 면목으로 수다한 그들의 부형들을 만날 수가 있을 것인가 ?"
정장은 더 이상 도강을 권할 수가 없어서 망연히 서있기만 하였다.
그러자 항우가 정장의 어깨를 다정한 손길로 두드려 주며 다시 말했다.
"그대의 후의(厚意)에 보답할 길이 없음이 매우 안타깝구나."그리고 애마 오추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이 말은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명마일쎄. 나는 오랫동안 이 말을 타고 수백 번의 싸움터를 달렸지만,
가는 곳마다 나를 당해 낸 적이 없었다네.이 말을 그냥 내버려두면 반드시 유방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므로, 그대의 후의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이 말을 자네에게 주기로 하겠네. 이 말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게."정장(亭長)은 깜짝 놀라며 사양한다.
"폐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시옵니까 ? 폐하의 애마를 어찌 소신이 받을 수 있으오리까 ?"
"아니야. 나는 이미 이 말을 가질 자격이 없게 되었기에 그대에게 주려는 것이네.
사양 말고 어서 받아 주게."그러자 <오추>도 주인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항우의 말을 알아들은 듯이,
항우의 얼굴을 쳐다 보며 큰소리로 울부짖는 것이었다.
항우는 오추의 고삐를 잡고 얼굴과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한다."너와 나의 인연은 오늘로써
끝이 났는데, 우리가 이제 무슨 미련을 가질 것이냐. 그동안에 너는 나를 위해 너무나도 수고가 많았다.
오늘부터는 새 주인을 따라가, 여생을 편히 보내도록 하거라.
나는 죽든 살든 간에 너의 공로를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것이다."
오추는 주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듯 얼굴을 푹 수그리고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항우는 그런 오추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비록 말 못하는 축생(畜生)이지만,
전야에서 생사 고락을 같이 해오는 동안에 정신적으로 완전히 통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바로 전날에는 목숨같이 아끼던 우미인과의 사별(死別)한 판국에, 이제 사랑하는 오추와도
생별(生別)을 하자니 항우의 비통함이 극에 달했다.항우는 오추의 목덜미를 정답게 두드려 주면서 말한다
"오추야 ! 너는 내 말대로 정장을 따라 오강을 건너가거라. 너와 나의 정의(情誼)가 남달리 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회자 정리(會者定離)라고, 우리들이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된 것 같구나."
오추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여보게 정장 ! 어서 오추를 데리고 강을 건너가게."
항우의 명에 의해 오추를 배에 태우려 해도, 오추는 한사코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러자 항우는 자기 자신이 오추의 고삐를 끌어당겨 주며,
"평소에는 내 말을 그렇게나 잘 듣던 네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도 애를 먹이느냐 ?"
하고 나무라니 오추는 그제서야 순순히 배에 오른다.
오추는 배에 오르기가 무섭게 항우가 있는 방향으로 얼굴을 돌린다.
이윽고 배가 떠나가자, 항우는 강가에 우뚝 서서 떠나가는 오추를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있었다.
배는 점차 항우에게서 멀어져서 이제는 서로가 알아보기가 어렵게 되었을 바로 그때,
선상의 오추는 별안간 괴상한 울음 소리를 두세 번 지르더니, 그대로 어둠속에 묻힌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죽어 버리는 것이었다.오추의 자살은 참으로 영묘(靈妙)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항우는 먼 빛으로 그 광경을 목격하고 가슴을 움켜잡고 울었다.
마침 그때, 횃불을 손에 치켜 든 한나라 군사들이 대거 몰려왔다.항우는 말도 타지 못한 채,
남아있는 28명의 부하들과 몰려오는 적들과 좌충 우돌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어둠 속에서
수백 명의 적병을 쓰러뜨렸다.그바람에 항우 자신도 전신에 10여 군데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2-95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