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희망봉
[김찬호 기자]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요하네스버그를
경유해 케이프타운에 도착했습니다.
열흘 남짓, 아주 짧았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여행의 마지막 도시입니다.
거대한 대륙을 비행기만으로 이동하고 나니
조금은 아쉬운 기분도 들었습니다
도착한 날, 케이프타운의 하늘은 흐렸습니다.
첫 날에는 빗방울도 조금씩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는 최고 기온 17도
정도의 좋은 날씨가 이어졌습니다.
어쩌다보니 더위만을 따라 온 여행이었던지라,
이제는 색다른 남반구의 추위와
사람들의 두꺼운 옷차림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 글렌 비치 ⓒ Widerstand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
이곳에 온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희망봉을 보기 위해서였죠. 아프리카의 서남쪽 끝,
대륙의 끝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희망봉에 처음 닿은 유럽인은
포르투갈의 항해사 바르톨로뮤 디아스였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서쪽을 따라 내려오다가,
처음으로 동쪽으로 방향을 튼 곳이죠.
배는 희망봉에서 동쪽으로 향해 대서양을 떠나
인도양으로 나아갑니다.
당시에는 이곳이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전히 아프리카 항해의
반환점으로 인식되고 있는 땅이죠.
실제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고요.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이 곳을 처음에는'폭풍의 곶(Cape of Storm)'
이라고 이름붙였다고 합니다.
제가 방문한 날에도 희망봉
근처에는 거센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파도도 아주 높아 보였죠.
이것을 '희망봉(Cape of Good Hope)'이라
바꾼 것은 포르투갈 왕실이 원양 항해를 장려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죠.
누군가에겐 희망, 누군가에겐 절망
▲ 아프리카의 최남서단, 희망봉 표지판
ⓒ Widerstand
실제로 이후 동방으로 향하는 수많은 함대가
이 '희망봉'을 거쳐 갔습니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유럽의 배가
동방으로 향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니까요.
무역 기지로 활용되던 이 땅은 그러나 차례로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 지배를 겪었습니다.
19세기 말부터는 줄루 왕국과 네덜란드,
영국의 3자가 맞붙는 전쟁도 벌어졌죠.
줄루 왕국은 1879년 영국에 의해 멸망합니다.
네덜란드계 인구가 세운 식민지 국가들도
1902년 최종적으로 영국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남아프리카
식민지는 그렇게 영국의 소유가 됩니다.
이미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장악한 상황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 식민지까지 장악한 영국은
세계의 항로를 지배한 국가가 될 수 있었죠.
남아프리카 식민지에는 '남아프리카 연방'
이라는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 희망봉 ⓒ Widerstand
2차대전 이후에는 남아프리카 연방이 서서히
영국의 손을 떠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만들어진 정책이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였죠.
흑인과 백인의 사회를 완전히 분리한다는
명목 하에 벌어진 인종 차별 정책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가
흑인과 백인의 분리를 추구할 뿐, 차별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실체가 언제나 유색인종에 대한
배제와 혐오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교육과 노동,
주거와 버스 좌석에서까지 유색인종은
차별의 대상이 되었죠.
반공주의를 내세웠던 '백인 국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게 일부 국가가 암묵적인
지원을 보낸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명목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시기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국제 사회의 제재와
규탄을 받았습니다.
한국도 1978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이유로 남아공과
단교하기도 했습니다.
여전한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처
▲ 케이프타운 워터프론트 ⓒ Widerstand
물론 시대는 변했습니다.
1990년 넬슨 만델라의 석방을 시작으로
유색인종 차별 정책은 서서히 폐지되었습니다.
만델라는 199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30년이 흐른 지금도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처는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 빈부의 격차는 남아 있습니다.
주거도, 교육도, 직업 선택의 기회도
유색인종에게는 풍족하게 주어지지 못했습니다.
모든 사회가 그렇듯,
암묵척인 차별은 어디에나 남았습니다.
단 며칠을 머물렀을 뿐이지만,
제게도 옛 흑인 거주 지역과 백인 거주 지역은
여전히 눈에 띄게 달랐습니다.
도로조차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마을과,
사람들이 공원에서 조깅을 하고 있는 마을의
분위기는 분명히 달랐으니까요.
▲ 케이프타운 시내 ⓒ Widerstand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입니다.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나이지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GDP를 가진 나라죠.
나이지리아의 인구가 남아공 인구의
네 배를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프리카에서 가장 선진국의 반열에 든 나라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빈부격차는
심각한 수준입니다.
세계에서 빈부격차가 가장 심한 국가 중 하나죠.
역시 아파르트헤이트와 차별 정책이 남긴
흔적입니다.
때문에 치안 상황도 그리 좋지 않습니다.
특히 요하네스버그의 치안 상태는 여러 괴담 수준의
이야기가 떠돌 정도죠.
괴담은 괴담일 뿐입니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 치안이 안전한
곳과 불안한 곳은 있기 마련이죠.
저는 요하네스버그가 아닌 케이프타운에 머물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시내를 걸을 때면 많이 조심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 케이프타운 시내에서 보이는 테이블 산
ⓒ Widerstand
그런 긴장감을 품고 바라봤어도,
케이프타운은 매우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도시의 앞으로는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가 있습니다.
그 뒤로는 높은 테이블 산이 도시를 감싸고 있습니다.
외곽으로 나가는 해변의 도로도 아름다웠습니다.
이런 풍경을 가진 도시에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아름다운 도시에
남은 차별과 배제의 상처를 생각했습니다.
이 도시를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없는
이 사회의 현실을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만든 풍경과,
사람이 만든 상처가 공존하는 도시.
세상의 끝에서도,
사람이 만든 흔적은 서로 부딪히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의 서해안을 따라 내려오던 배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향합니다.
그들에게 이곳은 세상의 끝,
새로운 바다가 시작되는 땅이었을 것입니다.
케이프타운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미래는 어떨까요.
이들도 그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희망의 곶을 돌아 새로운 바다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을 사는 우리 인류도 그렇게 반환점을 돌아,
새로운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요.
▲ 희망봉의 등대 ⓒ Widerstand
세상의 끝, 대륙의 끝에서 새로운 시작을 상상합니다.
우리가 희망봉을 돌면 만날
수 있을 새로운 바다를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이집트에서 내려온
짧은 아프리카 여행도 끝을 맺었습니다.
여행은 이제 200일을 넘었습니다.
저도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이제 남쪽으로 향하던 길을 틀어, 다시 북쪽으로
향해 보겠습니다.
세상의 끝을 돌아, 여행은 계속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