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님)故 김 오 랑 중령 추모식을 기다리며
12.12 쿠데타를 기억하십니까?
자신들의 추악한 욕망을 위해서라면 국가의 사직이며 민족의 안위 따위야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들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조차 없었던 전두환과 추종 정치군인들의 반역, 헌정이 유린당하고 역사가 배반의 피에 조롱당하며 거꾸러져야 했던 그해 1979년, 12.12 쿠데타를 기억하십니까?
참군인 故 김오랑중령을 기억하십니까?
이미 하루 전부터 자신에게 닥쳐올 피의 잔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무장반역도들의 무차별 총기난사에 맞서 국가와 민족과 직속상관을 위해 결연히 참군인의 길을 걸어간 그리운 그 이름 故 김오랑중령을 기억하십니까?
12.12 쿠데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김소령이 떠나고, 통탄할 비극으로 눈마저 실명한 채 오열하던 신혼의 사랑하던 아내도 의문의 죽음으로 떠나고, 부모 형제들과 그가 죽음으로 지키고자 했던 직속상관 정병주특전사령관마저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된 채 한을 안고 그의 곁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정의가 불의에 짓밟혔던 잘못된 역사는 바로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불의가 호의호식 할 때, 정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마땅한 역사적 평가마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이름으로 훈장을 수여합니다.
우연한 죽음이 아닙니다. 다시는 이런 반역의 음모가 발호치 않도록 온 몸으로 산화한 장렬한 희생이었습니다. 국가와 군이 나서 통렬한 반성과 함께 최고훈장 추서를 통해 명예회복과 추상같은 교훈으로 새겼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해 수치와 분노는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만 갑니다. 이에 온 국민의 이름으로 가장 큰 훈장을 수여하고자 합니다. 금년 12월 12일 28주기 추모식과 함께 김오랑추모사업회는 앞으로 김오랑중령에게 국민 모두의 애절한 사랑을 녹여 참군인평화상을 훈장과 함께 수여할 예정입니다.
김오랑추모사업추진위원에 동참해 주십시오.
추모사업회에서는 상징적으로 1212명 추진위원의 동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명예로운 참 군인이 있습니다. 그 명예가 뒤늦게나마 빛남으로써 몇몇 정치군인들의 추악한 발자취로 땅에 떨어졌던 대한민국 국군의 자긍심을 다시 세우고, 미래 후배군인들의 표상으로 삼고자 합니다. //
(박무님)김오랑중령은 누구인가?
육사 25기였던 김오랑 중령은 79년 정병주 특정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동기생 중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던 김 중령은 일찌감치 비서실장직에 오르면서 장래가 촉망됐던 군인이었다. 그는 신군부에 의해 12.12 사태에 가담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끝까지 뿌리치며 상관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살신상관 보호 군인정신'의 귀감이 되고 있다. 79년 12월 13일 새벽 0시 15분께. 중무장을 한 군인 10여명이 성남에 위치한 특전사령관실로 쳐들어 왔다. 맨 앞에서 인솔하는 사람은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의 지시를 받은 3여단 15대대장 박종규 중령. 김 소령 육사 선배였던 박 중령은 김 소령과는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절친했던 사이였다. 박 중령은 사령관실로 통하는 비서실에 도착한 후 부하들에게 "갈겨"라며 명령을 한 후 출입문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자 출입문이 열렸다. 김 소령은 권총으로 응사를 하면서 사령관실 안쪽에 있는 내실 쪽으로 밀려났다. 그곳에서 소지하고 있던 실탄을 모두 쏘며 저항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집중 총격을 받은 김 소령은 배, 허벅지, 등에 M16 실탄 6발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정 소장은 왼쪽 팔에 총상을 당했다. 김 소령은 반란군으로부터 직속상관이 체포되는 것을 막으려 끝까지 항전하다 수적으로 우세한 반란군에 사살당한 것이다. 신군부 총탄에 맞아 사망한 김 소령은 부대 뒷산에 묻혔다가 80년 2월 육사 25기 동기들의 항의와 노력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김 중령의 장조카 김영진씨는 그날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삼촌의 죽음 이후 온 집안이 풍비박산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81년에는 비명에 간 막내아들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김 중령의어머니가 눈도 감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고 82년에는 조카를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한 삼촌마저세상을 떠났다. 91년에는 충격 때문에 실명한 김 중령의 부인도 자신의 아파트에서 떨어져 숨졌다(타살의혹) 김영진씨는 숨진 삼촌이 90년에 중령으로 추서됐지만 최소한의 명예회복일 뿐이라고 말했다. //
(들녁소리님)故 김오랑 중령 추모 유감
이미 28년 전 1979년 12월 12일은 그 사건이 긍정 적이던 부정적이던 격동의 민족사에서 잊을 수 없는 큰 획을 큰 사건이었음을 부정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1979년 10. 26. 사태로 18년간 유지되어 오던 박 정희 군사 독재정권이 종결되고 이른바 서울의 봄이 전 세계적인 관심을 집중 하는 가운데 이러한 인류사적 기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반동적 사건이 이른바 신군부에 의해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반민주적이고 반역사적이며 반민족적면서 반인륜적인 행위에 대해서 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자신을 산화한 김 오랑 중령의 애국적인 행위를 보면서 뜻 있는 인사들은 식민지 노예사회의 사대 매판이 지배 하는 전면적 절망 상태에서나마 일루의 희망을 발견 하게 되게 되기 때문이다.
올해의 추모식은 12.12. 오후 2시에 동작동 국립묘지 동편 29번 묘역 한구석에 자리한 “육군 중령 김 오랑의 묘”앞에서 조촐하게 진행 될 예정이다. 추모식은 일산의 김용환(추모사업 회장)의 집전으로 진행될 것이다.
지난해 추모식에는 제주로 고인의 조카 되신다는 김 영진(51세)씨와 그분의 자제되는 김 명주군(24세)이 분향재배 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고인의 군 선배 되신다는 김 광해(바른사회만들기운동본부 대표 총재)님과 박 흥식(부정부패추방실천 시민회 상임 대표)님의 헌화에 이어서 평화재향군인회(광주 3. 부산 2. 경기4) 회원들의 헌화로 간단히 끝이 났었다.
허나 올해는 더욱 조용하게 치루어 질 것 같다.
대한민국이라는 부패와 당파세상이 대선이라는 진흙탕 잔치에 정신이 없는 상황에 그 누가 이 초라한 정의를 기억하려 하겠는가?
28년이라! 그 기간은 김오랑을 향한 기억의 가는 끈을 놓지 않았던 동지에게는 어둠과 고통의 세월이 였고, 애써 침묵하고 외면하였던 양심들은 개인의 영달과 안위만을 쫓았던 소인배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12. 12사태와 지난 28년의 기억이 찬란한 영광으로 기억하고 보상받는 이가 있으니 오장육부가 뒤틀리지 않을 수 없다.
강 재구 소령이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터지는 수류탄을 온몸으로 감싸고 살신성인 한 것이나 김 오랑 중령이 부대의 모든 간부들이 반란세력화 되었을 때, 상급자인 특전사령관(정병주)을 위하여 반란세력에 기꺼히 목숨을 내던진 것은 창군 이래 대한민국 국군의 양대 귀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강 재구 소령의 살신성인은 단순히 인도주의적 발상이었다 한다면 김 오랑 중령의 충성심은 단순히 상관만을 엄호한 것을 지나 국가체제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본연의 군인정신의 발로로 보다 차원 높은 것으로 이해된다 할 것이다.
창군 이래 군부 내의 하극상 사건이 4,000 여건이 넘어서 군부의 지도 이념이 위험 수위를 이미 넘었고 사도(師道)가 땅에 떨어져 공교육이 무너져 가고 있는 마당에 수구보수 세력은 전시작전권 환수 자체까지를 본능적으로 반대하고 뉴 라이트임을 자처하는 분들은 일제 식민지 통치의 합리화에 열을 올리고 있는 어이없는 현실에 어리둥절하고 만다.
독재자는 이미 갔고 절차상 민주주의는 상당히 진전 되었음에도 독제가 남긴 체제는 그대로 엄존하면서 이사회 구석구석을 구태의연하게 지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민주화 운동에 목숨을 걸고 이에 종사해온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 조소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는 사회풍조에서 또 다시 절망 하게 된다.
2007. 11. 26
첫댓글 너무 무식으로 열내지 말고 냉수로 열 좀 식히세요. 보세요. 정승화가 12월 13일부로 김재규의 쿠데타를 완성시킬 목적으로 김재규 부하를 특전사령관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김재규의 부하의 부하들이 신군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인지요? 12월 12일에 신군부라는 것이 존재하였었나요? 김재규의 부하 정승화가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에 신군부라는 것이 존재하였었느냐는 말입니다.
최규하 권한대행을 거의 차기 대통령으로 임명하다시피하였고, 김종필씨의 대통령 선거 출마 자격을 박탈하였는데도 양김씨는 찍소리도 못하였죠? 인류 역사에서 그 이상의 권한을 가졌던 무인을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정승화는 군복을 입고 차기 대통령을 자기 권력으로 내정하였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께서는 먼저 군복을 분명하게 벗은 후에야 대선 후보가 되셨던 것이고, 군복을 벗기 전에는 자기 임무에만 충실한 군인이었습니다. 제가 분명하게 목격하였습니다.
정승화의 권력은 김재규가 자기 심복 삼기 위해 만들어준 권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장군님의 리더십은 솔선수범의 군인정신에서 비롯된 리더십입니다. 그 누구도 저한테 전두환 장군님을 존경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애국정신으로 무장된 그 어른을 보면 정신이 맑아져 저 스스로 그분을 우러러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분을 아는 모든 군인들이 그분을 우러러보고 지지하였기에 거기에 그분의 리더십의 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수요일과 일요일에 교회 못가게 하는 고참의 명령에 대해서는 공병삽으로 무수히 구타당하면서 맞섰었습니다.
그 어느 고참도, 그 어떤 구타도, 그 어떤 위협도 저를 굴복시킬 수가 없었기에 저도 그 세계에서는 유명했었습니다. 어떤 고참이 일요일에 교회 가지 말라는 악의의 명령을 내렸을 때 그 명령에 불복하면 반란일까요?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는 고참의 명령에 우선하는 계명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참들이 저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제가 많이 맞았지만 나중에는 모두 제가 옳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장군에 대한 저의 존경은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군인은 나라를 위해 존재핟다는 것을 보여주셨기에 그 군인정신을 우러러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계급을 존경한 것이 아니라, 인격을 존중한 것입니다.
저에게 고참의 명령과 하나님과의 계약 중에서 단 하나만을 선택하여야 했던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12.12 사태 때 애국군인들을 김재규 부하들의 불법적인 명령과 구국의 부름 중 하나만을 선택하여야 했던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입니다.
고참의 명령과 하나님의 계약 아주 우스운 비유군요.. 제가 현역 군의관시절 저에게 위생병 신병이 한명 있었지만,그신병이 제7일안식일교라서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 예배를 원한적이 있습니다. 그신병이 저에게 간청하였고 저는 토용일 잠시 짬을 내어 부대내 교회에서 기도할수있도록 배려를 해줬습니다. 토요일 군훈련이나 작전인데 혼자 안식일이라고 예외일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배려를 해줬고 그신병도 수긍했습니다.
님이 인용한 병사간 고참의 명령은 부대 지휘관의 명령도 아니기에 하나님의 계약과는 대적할 째비도 못되는겁니다.
공수부대 최고지휘관이 김재규 부하였을 때 과연 그 부하들을 신군부라고 부를 수 있는가요? 그리고, 김재규 부하들에게 합수부장 체포령을 내릴 권한이 있을까요? 그리고 김재규 부하들이 합수부장을 체포하라고 보낸 체포조를 과연 반란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요? 그리고 김재규 부하들이 보낸 체포조가 오히려 김재규 부하들을 체포하였을 때 과연 그들을 반란군이라 부를 수 있을끼요? 반란을 일으킨 쪽은 김재규와 그 부하들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실 만큼 님의 낯짝이 두꺼울 수 있을까요? 그 상황에서 김재규와 그 부하들의 반란을 막을 다른 선택이 가능하였을까요?
가짜 학도에게 묻고싶군요.김재규가 정승화계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병주 특전 사령관과 쿠테타를 일으키려 했나요?
만약 님이 당시에 군인이었다면 정승화를 앞잡이로 내세운 김재규의 군사반란 막지 않았을 것입니까?
이미 김재규는 합수부에 체포되어있고.정승화는 정식 계통을 통해 체포가 가능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 일당이 선체포 후 재가 이유가 뭡니가?도주의 우려가 있었나요?
그 다음날로 정승화가 김재규의 쿠데타를 완성시키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합수부장과 보안사령관직에서 해임된 후에 정승화 체포가 가능한가요? 님은 환자를 돌볼 때 일단 환자가 죽기를 기다려 치료하면 된다는 논리를 치료합니까? 광주병원에서는 그런 논리로 환자를 돌보나요?
상관을 지킨 김오랑 소령을 신군부 일당은 소총으로 사살 시켰습니다.신군부 일당이 과연 정당한 행위였는지 묻고싶군요.
김재규와 정승화 부하들끼리의 충돌이었는데 누가 신군부였다는 말인가요? 정승화가 김재규 부하를 특전사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재규 부하 휘하의 공수부대 장교들끼리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누가 신군부였다는 것인지 설명 바랍니다.
유치한 비유를 대는 역사학도:: 고참이 일요일에 교회 가지 말라는 명령에 불복했다고 그것을 반란에 비유한건가요? 군사반란이란 기존 체제를 전복하려고 ㅛㅣㄴ군부들이 작당하여 최고 통치권자의 허가도 없이 무력으로 어지럽히는것을 반란이라 합니다.
그러니깐 광주의사의 논리는 응급환자가 병원에 실려왔을 때 그 환자 치료 재가를 노무현에게 받아온 다음에야 치료할 수 있다. 환자가 치료를 빨리 받지 못해 죽건 말건 대통령 재가 없이는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인가요? 님은 국법을 그렇게 이해합니까? 그런 미개국 국법이 지상에 존재하는가요?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의 국법에서는 응급환자 치료는 전문가인 의사의 재량과 판단에 일임되어 있기에 응급환자 치료를 받기 위해 일일이 대통령 재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위한 합동수사본부장의 직위가 바로 그런 권한을 가진 직위였습니다. 합수부장이 시해사건 연루 혐의자 연행을 하는데
대통령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법이 없어요. 그런 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합수부 업무에 관한 한 그 최고책임자가 합수부장입니다. 전두환 합수부장이 예우상 대통령 재가를 신청해 놓고 연행을 시도한 것은 그런 국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국가 국법에는 그런 법률이 없어요. 미개인의 두뇌 회전을 돕기 위해 이런 예를 들어 드립니다. 518사기꾼들의 고발로 지금 제가 사법 혹은 수사 당국의 수사를 받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수사당국에서 노무현의 재가를 받고 저를 수사합니까? 수사본부 책임자에게 일임되어 있는 업무라면 대통령 재가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광주병원에서는 응급환자가 실려올 때
노무현의 재가가 있어야만 의사가 환자 치료를 할 수 있다면 이미 광주병원은 민주주의 국가 병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님이 그런 의료법이 있다고 우긴다면 님은 의료법도 모르면서 의사자격증을 딴 것입니다.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위한 합동수사본부장이 시해사건 연루 의혹자를 수사할 때 대통령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법률이 어디에 있는가요? 그런 법률은 존재하지 않아요. 님이 환자에 대한 예우로서 대통령 재가를 요청했다 하더라도 바로 그것이 그런 국법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검찰이 변양균 수사할 때 그것이 반란이었는가요? 삼성비자금을 수수한 노무현을 곧 검찰이 수사할텐데
그것을 님은 반란이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어떤 수사기관장이 국법이 부여한 임무에 종사하는 것은 반란이 아닙니다. 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장은 국법이 부여한 임무를 성실히 준행하였을 뿐인데, 어떻게 그것이 반란이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가요? 설명 바랍니다.
바람이하는말/ 지금의 기무사와 국정원과 검찰의 기능을 가진 기관이 대통령 시해사건 합동수사본부였습니다. 지금 기무사 사령관과 국정원장과 검찰총장이 매번 수사할 때마다 노무현에게 재가를 받는지요. 그것은 민주주의를 모르는 소리입니다. 민주주의는 노무현같은 독재자가 독불장군 노릇하며 모든 것을 결정하는 행정 체제가 아닙니다. 민주주의 행정에서는 전문가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대통령 시해사건에 관한 한 합수부장이 수사 전문가였습니다. 합수부장이 피의자를 연행할 때 대통령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법이 존재했었나요?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바고님이 마치 그런 법이 있기라도 했었던 것처럼 주장하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