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농구의 창시자’ 네이스미스 박사는 명문 캔자스 대학의 감독이었다. 그러나 ‘창시자’라는 호칭과 성적은 별개였다. 그는 캔자스 대학 역사상 유일하게 5할 승률을 올리지 못한 감독(55승 60패)으로 남았다. 네브라스카 대학과의 경기에선 48-8로 졌다.
3 트래블링 룰이 바이얼레이션으로 지정되어 통용된 시기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이전까지는 차징(charging)이었다. 이전까지는 트래블링 한 번에 파울 하나씩 적립된 셈이었다.
4 1905년에 심판이 두 명으로 늘어난 것은 거친 플레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2심제가 본격화된 것은 1920년대였다. 그리고 심판이 두 명에서 세 명이 된 배경도 같았다. 1988년 NBA는 거친 수비로 스타들의 돌파가 어려워지자 심판을 한 명 더 늘렸다.
6 사실, 오리지널 셀틱스는 상대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너무 압도적이어서 관중들이 지루해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농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그들은 193승 11무 1패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스트 플레이, 지역방어, 맨-투-맨 수비에서의 스위치 디펜스 등을 개발하는 등 농구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7 최초로 원 핸드 점프슛을 던진 선수는 1930년대 스탠포드 대학을 이끌던 안젤로 루이세티로, 점프해서 밀어 던지는 스타일의 슛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감독들은 ‘미친 짓’이라고 폄하했다. 강백호가 울고 갈 말이다.
920년대에는 한국 농구인들 사이에서‘멋있는 슛’으로 통했던 슛이 있었다. 한쪽 옆으로 발을 끌면서 던지는 슛이었다. 폼 자체가 멋있어 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규칙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트레블링을 부는 심판도 없었다고. 「한국농구80년사」에서 故 이성구 선생은 “좌우간 멋쟁이 슛을 한다는 사람들은 신발의 콧등이 닳아서 발가락이 튀어나오곤 했다”고 회고한다.
101921년 이전까지 실내농구코트에서 백보드는 벽에 붙어 있었다. 간혹 선수들은 벽을 타고 올라가 슛을 성공시킬 수도 있었다. 닌자처럼.
12 마이칸은 트래쉬토크의 달인이기도 했다. 시라큐스와 맞붙은 1954년 NBA 파이널에서 미니애폴리스를 3차전 승리로 이끈 그는 “시리즈는 3승0 패가 됐다. 난 목요일에 있을 4차전을 끝내고 토요일에는 골프를 치러갈 것이다”라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이에 자극 받은 시라큐스 선수들의 선전 때문에 마이칸은 골프를 치지 못했다. 시리즈는 7차전까지 갔고, 미니애폴리스는 간신히 우승했다.
13 한국 최초의 농구중계방송은 1939년 7월, 캐나다 웨스턴 팀의 내한 경기였다. 1차전은 연전이, 2차전은 보전이 상대로 나섰고, 3차전에서는 연전과 보전이 연합하여 경기를 치렀다. 장소는 서울운동장 정구장(동대문 운동장)이었다.
151946년부터 55년까지 뛰었던 ‘팻 프레디(Fat Freddie)’ 스콜라리는 한쪽 눈이 거의 실명상태였음에도 불구, 올스타전에 출전했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던 선수였다. 170cm이 조금 넘는 키였지만 그는 초창기 미국 프로농구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16존 맥클렌든 감독은 속공을 전술의 개념으로 정착시켰다. 네이스미스 박사의 제자였던 그는 테네시 주립대학의 감독을 맡아 3년 연속으로 대학 농구 우승을 이끌었고, 훗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그 외에도 풀-코트 프레스, 포-코너 오펜스의 효과를 검증했다.
18 38년부터 40년까지, 전 일본 농구선수권대회에서 보성전문은 3년 연속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3년 연속 우승한 팀은 대회 원년인 22년부터 23년 3회 대회까지 우승한 도쿄 YMCA 이후 처음이었다. 당시 보전의 핵심은 故 조득준 선생으로, 현 서울 삼성 단장 조승연 씨의 부친이다.
19FIBA의 정식 농구경기에 철제 백보드를 처음 설치한 건 1896년이었고, 목재로 바뀐 게 1910년경이었다. 백보드가 투명한 유리가 되기 시작한 것은 ‘흥행’을 위해서였다. 높은 곳에 앉은 사람들이 백보드 때문에 경기를 잘 보지 못하겠다고 불평을 하기 시작하면서 백보드를 투명한 재질로 바꾼 것이다. 이후 덩크가 경기 중에 자주 속출하면서 안전을 위해 유리의 질이 강화되었고, 탄력 좋은 선수들을 위해 백보드 아래쪽을 더 튼튼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