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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 초기 한국 민중의 삶
이 글은 1970년대 중반에 일본의 진보적 잡지 <세까이(世界)>에 연재됐다. 연재의 끝에는 늘 ‘TK生’이란 필명만 붙어 있을 뿐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 글의 저자가 누구인지 캐려고 혈안이었다.
이 책은 세까이 연재를 모아 일본의 출판사 암파(岩波)가 1984년 내놓은 것을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한국의 출판사 한울림이 번역해 출간했다.
저자 ‘TK生’은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다. ‘사상계’ 편집장을 지낸 그는 1972년 10월 일본 유학을 떠나 20년간 망명 같은 생활을 하며 1973년부터 1988년까지 이 글을 썼다. 지명관 교수는 2008년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창비를 통해 정식으로 출간했다. 지 교수는 노무현 정부 시절 KBS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책은 지 교수 본인이 스스로 ‘TK生’을 드러내기도 전인 1985년 1월에 한국에 번역됐다. 그만큼 생생하다. 당시 이 책을 한국에서 낸 출판사 ‘한울림’은 ‘유신선포에서 민청학련까지’라는 작은 제목을 달았다.
출판사 한울림은 이 책을 내면서 “유신이 선포된 지 10여년이 됐고 5공화국이 탈유신을 선언하고 나선 지도 어언 5년이 됐다. 그동안 발표된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적 분석의 글들은 거의 정치권력의 내면사에 치중했다. 유신 당시의 민중의 생활이나 감정 상태를 전달하는 글들에 대한 욕구가 보다 절실하다. 이 글은 여러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일본인 기자가 정리했다”고 썼다. 이 책은 유신 초기 한국 민중들의 삶을 날 것으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상일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2008년 <지식인의 오만과 편견-세카이와 한반도>(기파랑)라는 책으로 지명관 교수의 이 책을 비판했다. 한 교수는 세카이 창간호인 1946년 1월호부터 1989년 12월호까지 한국 관련 기사를 분석해 세카이가 '북한-선 남한-악'이란 흑백논리로 당시의 한국사회를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세카이의 한국 인식에 지명관의 '통신'이 결정적 악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통신'을 "황당무계한 유언비어로 반정부 활동과 민중혁명을 촉구한 글"이라며 '통신'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팩트'의 부정확성을 지적했다."
지명관 교수는 "진실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폭압적 정권에 맞서느라 부정확한 정보가 확대 해석됐을 수 있겠지만, 학문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와 별개로 '통신'은 긴급조치 하에서 달리 선택할 수 없었던 치열한 싸움의 수단이었다"고 못 박았다.
그런 지명관 교수도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찍었다고 고백하면서 “MB, 네거티브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문화일보 2012년 3월 16일자) 참 재밌는 나라다.
1972년 11월 : 비판과 거절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 하에 한 친구가 <한국의 상황에 대한 보고>라는 영문서류를 보여 줬다. 어떤 외국인 선교사가 자국에 밀송한 보고서를 복사했다.
10월17일 특별선언으로 대통령은 새 헌법에 지지나 반대 등 모든 활동을 금지했다. 계몽활동은 해도 좋다고 했다. <10월 유신>을 찬양하며 <한국식 민주주의>를 창도하자는 플래카드다.
어떤 지역의 목사들은 모두 경찰서에 불려가 이번의 변동을 지지하는 활동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했다. 특히 국민학교 선생들은 관할 지역을 순회하면서 어린이들에게 대학에 다니는 그들의 형들이 말하는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고 유신을 지지해야 한다고 소문내게 시켰다. 그래도 교회는 한국에서 강력한 요새다.
1973년 1월 : 교회를 습격하다
1972년 12월 27일 박정희는 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비상계엄령도 72년 12월 14일 오전 0시를 기해 해제했다. 그러나 신문사와 방송국은 기관원이 검열을 계속 중이다.
2-3일 전 친구로부터 어떤 목사의 체포를 들었다. 전북 전주시 남문교회의 은명기 목사 사건이다. 72년 12월 13일 수요일 예배 뒤 은명기 목사와 신도들은 교회에 남아 철야기도에 들어갔다. 경찰은 교회에 난입해 신도들을 해산하고 비상계엄령 해제직전인 밤 11시 은 목사를 설교단상에서 끌어내 연행했다.
10월 어느 날 전북도지사가 방문해 계엄령 불가피성을 신도에게 설명해 달라고 부탁해왔다. 은 목사는 개헌지도위원으로 위촉받았지만 거절했다.
은 목사의 혐의는 “피고인은 60년 4월 11일 이래 남문교회의 목사로 재직하면서 71년 4월 민주수호전북협의회 결성준비위원 등을 지냈다. 71년 11월 19일 남문교회 청년회 명의로 함석헌, 장준하를 초청해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10월 유신을 위한 개헌안과 계엄령 선포에 반대했다. 10월 유신은 국민투표로 통과될 것이며 비상계엄령은 남북통일을 구실삼아 정권연장을 꾀하려는 하나의 조치”라고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했다는 거다. 은 목사에게 서약서를 써주면 석방하겠다고 제의했으나 본인은 거절하고 있다.
1973년 2월 : 여공들의 합창
은명기 목사는 병보석으로 일단 석방됐다. 계엄령 하에서도 끊임없이 동요한 사람들은 방적공장 지대의 여공들이었다. 한국의 노동조합은 거의 CIA 통제 아래 있다. 그래서 노조는 오히려 정부정책의 지지, 노동쟁의의 억압을 위해 일하고 있다.
대한모방 진정서 투쟁 등을 소개한다. 진정서는 김성섭 대한모방 사장을 수신으로, 제목은 ‘일요일에 18시간 노동을 강요하는 행위’로 돼 있다. 진정 내용은 “토요일 저녁 6시부터 일요일 낮 12시까지 18시간 연속노동을 강요하는 명백한 근로기준법 위반”을 다루고 있다. 진정서는 “법 위반 뿐 아니라 인도적으로도 잘못됐고, 힘없는 우리 여성 근로자들의 정상적 건강에 큰 위협”이라고 밝혔다. “휴일 휴식은 신이 정한 신앙적, 인도적 계율이기 때문에 어떤 이유로든 침해당할 수 없다”고 밝혔다. 진정서는 요구조건으로 “18시간 중노동의 즉각 철폐와 기숙사에서 사용자에 의한 강제예배 중지” 등을 요구했다.
대한모방 여성 노동자들은 진정과 함께 뿌린 유인물에서 “부당한 잔업과 임금도 소급해 청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1973년 2월 14일자 <모든 원조를 바랍니다>라는 제목의 전단은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우리 대한모방 기숙사생들은 1973년 2월 7일 저녁과 8일 아침에 기숙사 안에서 집단으로 농성하면서 요구한 바 있다.
우리 여성노동자 고성신 등 4명은 영등포경찰서에 연행돼 조사 받았다. 그 뒤 2월 12일 대한모방은 우리들을 해고했다. 회사는 1973년 2월 13일 오전 9시30분에 이 사실을 통고하면서 5분 이내에 퇴사하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소지품을 회사에 둔 채로 입은 채로 나와야 했다.”
1973년 7월 : 분별없는 정치
김철의 통일사회당은 1973년 6월 30일 다른 군소정당과 함께 해체됐다. 개정 정당법의 25개 지역의 법정 지구당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형규 목사가 내란죄로 체포됐다. 부활절 집회에서 400매의 정부비판 유인물을 살포했는데 그 내용은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였다. 정부는 그에게 “8만 명의 신도를 이끌고 주앙방송국과 중앙청을 점령하려고 했다”고 발표했다.
1973년 8월 : 노골적인 권력
1973년 7월 13일 밤 전신에 상처를 입은 채로 김대중씨가 서울 집으로 돌아왔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미국에 망명했다. 김형욱은 막대한 재산을 긇어 모았고, 그 뒤 여당의 국회의원이 됐다. 71년 박정희가 김대중과 대결했을 때 김형욱은 야당에 정치자금을 조금 대주었다.
어떤 수산학자는 울산공업단지로 인한 바다오염을 연구발표하자, 문교부는 1973년 7월 28일자로 대학교수의 연구결과를 정부의 사전허가 없이 발표할 못하도록 지시했다. 어느 교수는 한국의 라면이 인체에 해로운 제품임을 입증했다. 계속해서 먹이면 설험용 생쥐가 죽어버린다는 사실을 발표하려고 했다. 발표 직전 CIA가 압력을 넣어 취소했다.
한국에는 야당이 없다. 야당이면서도 자유롭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더 집권자에게 가까운 사람이다. 신민당 당수라는 유진산의 전국적 별명은 ‘사꾸라’다. 71년 선거 때 최종 순간 서울의 자기 선거구를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장모 씨에게 팔아넘겼다. 그로 인해 서울에서 유일하게 여당 당선자가 나왔다. 유진산은 전국민의 분노를 샀고 김대중의 매서운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유진산은 1년도 안 돼 슬그머니 누군가의 후원으로 복귀했다. 유진산과 인척인 민주통일당의 양일동씨도 똑같이 ‘사꾸라’로 규탄 받는다.
1973년 여름 여야 국회의원들은 일본이나 미국에 <10월 유신> 설득여행을 나섰다. 유진산은 하와이 까지 갔지만 미국 본토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앞서 상륙한 야당의원들이 미국 교포들로부터 수모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여야 의원들의 미국 설득여행에는 대학교수들도 끼어 있었다.
1970년 한국의 미녀라 불리운 정인숙이 살해돼 소란스러웠을 때 그 오빠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그러나 지금 그는 물론이고 그녀와 그의 일가족의 행방은 묘연하다.
1973년 9월 : 개인숭배의 열광
박정희 개인숭배. 어느 외국인 기자라 미발표된 원고로 나에게 보여준 것에는 ‘아시아에서의 하나의 새로운 영웅숭배’라는 제목의 글도 있었다. 김대중 사건에 사설도, 코멘트도 신문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선우회가 1973년 8월 14일자 “8월 14일 오전 1시”라고 글 쓴 시간까지 밝힌 <소감>이라는 칼럼을 실었다. 조선일보 주필 선우휘는 다음날 아침 서울시내에 배달된 조선일보(제10판)에서 자신의 칼이 울었다고 썼다.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 5명의 청년이 떳떳히 자수하고 나와 법정에 서 주기를 바랬다. 김대중 사건은 무리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닌만큼 누가 저질렀건간에 우리에게는 명예롭지 못하다. 신이여! 이 국민에게 용서와 축복을!
선우휘는 CIA 조사를 받고, 조선일보는 1973년 9월 13일자에 한 일본인의 <언론인으로서의 반성>이란 특별기고를 강제로 받아야 했다.
1973년 10월 : 적반하장
유정회 소속 김용성 의원의 발언부터 보자. 김용성은 이전 야당기관지 <민주전선>의 편집인이었다. 김용성 편집인은 <민주전선에>에 김지하의 유명한 장편시 ‘오적’을 실어 체포됐다. 그런데 10월 유신이 되자 어느새 유정회 속에 들어가 열렬한 충성파가 됐다.
“김대중씨는 일본에 간 다음 반정부 반국가 활동을 했는데 일본 정부는 묵인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에 공식사과를 받아내야한다. 정부는 일본에 공식사과를 요구한 적이 있는가?” “일본에서 가장 과격하게 김씨 문제를 제기하는 자민당의 한 의원은 3.1운동 당시 조선국 사령관의 아들이다.”
여당인 공화당을 대표로 발언한 민병기 의원은 전 고려대 교수로 한 때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다. 민병기는 지금은 변신해 정부에 붙었다. 민병기는 국제법을 전공한 학자로 한일조약반대의 선두에 섰던 사람이다. 민병기는 김대중 사건으로 박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일본의 좌경정치가들이라고 말해, 많은 지식인들을 분개케 했다.
대자보가 각 대학에 나붙었다. 가장 활발한 곳이 고려대학교였다. <민우(民友)>지로 인해 간첩으로 체포된 노동문제연구소 김낙중 연구원 사건이 있었다.
1973년 11월 : 가스실 이야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최종길 교수가 CIA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CIA는 화장실에서 투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누구도 믿지 않는다. 고문에 의한 죽음이다.
1973년 10월 17일 서울 법대 시위와 동맹휴교 등의 사태에서 법과대학 간부교수 6인이 협의했는데 그 자리에서 최종길 교수는 “이번엔 교수도 마땅히 학생들 편에 서야 하고, 학생들을 처벌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누군가 밀고했다. CIA는 가족에게도 시신을 보여주지 않고 화장해 버렸다. 의사인 그의 아내가 시신을 보면 참혹한 고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삼선개헌이 있던 1969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연새대 시위를 지도한 학생회 간부가 연행됐고 시내의 CIA 분실에서 취조받다가 빌딩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거다.
최 교수의 죽음도 발생 일주일 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학생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하자 겨우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적발’이라는 큰 기사와 함께 보도됐다.
1973년 12월 : 개각 후
1973년 12월 5일 전격 뉴스가 전해졌다. ‘유류 등 7개 품목, 가격 대폭 인상’ 발표였다. 아무 예고 없이 반드시 물가를 안정시키겠다고 계속 말해왔던 정부다. “석유류 30%, 배합사료 25.5%, 전분 42%, 나이론사 32.6%, 판유리 25.5%, 우유 15%, 분유 10.8%, 설탕 16.7%, 비료 30%”
한 사람은 1905년 카쓰라 태프트 비밀협정을 상기시키면서 일본과 미국의 한국처리를 우려했다.
한국에는 고교생까지 데모를 하면 군대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어 정부가 전복된다는 신화 같은 말이 있다. 이번 서울이 동덕여고에서 시작한 고교생 데모가 전국으로 파급될 기미를 보이자 1973년 12월 2일 결국 유류부족이라는 이유로 중 고등학교는 ‘조기 동계방학’에 들어갔다.
박정권은 이미 바닥에서부터 붕괴하고 있는데도 이들의 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원래 최종길 교수는 다소 혈압이 높았다. 급하게 ‘서독 간첩사건’을 발표했는데 너무 급조해 앞뒤가 안 맞아 웃음거리다. 1973년 10월 23일 ‘유럽거점 대규모 간첩단 적발’이란 발표에서 김성수씨는 수배인물이고 ‘연락원’이다. 이 발표에 본인은 물론 본인을 아는 재서독 한국인들도 놀랐다. 독일의 교회신문이 하의하자 한국 영사관이 사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김씨 자신이 1973년 11월 20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낸 해명서에는 “이재원의 지시로 70년 이래 3회에 걸쳐 일시 귀국해 김장현에게 지령을 전달하고 보고를 접수했다는데 김장현은 동향인이고 등산친구로 아는 사이일 뿐이다. 독일서 결혼한 뒤 부모 방문을 위해 70년 7월말부터 9월까지 단 한번 갔다왔다”고 밝혔다.
어떤 신문학교수가 쓴 <기자협회보 1973년 6월 22일자에 쓴 위의 글 때문에 이 교수는 투옥됐고 <기자협회보>는 주간에서 월간으로 격하됐다. 외국에서 들어온 간행물은 신문이건 잡지이건 보통 만신창이가 된다. 페이지가 완전 삭제되거나 가위로 잘려나가고 때로는 검게 칠해져 있다.
민주수호청년협의회 대표 이재오와 김정태, 최일전, 김달수 등 젊은 민주인사들이 체포구금돼 간첩이라고 자백하도록 고문 받고 있다. 김정태는 총상으로 중태다.
유류와 에너지 파동, 경공업과 상업이 마비되고 있다. 대량 해고와 노동자 처우의 악화가 심각하다. 일본인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는 극단으로 치닫는데 이것을 CIA와 경찰이 비호하고 있다. 일본인 투자업체가 93%를 점하고 마산 수출자유지역은 생지옥이다. 5만 여공이 1일 10~12시간 휴일도 없이 월평균 만3천원을 받고 있다. 일급제로 고용계약이 없는 조건이라 가차 없는 해고의 위험이 있다.
1973년 11월 초 일본인 회사의 여공 천명이 해고에 항의 곤봉을 들고 일인을 습격했다. 일인은 도피하고 CIA 요원과 경찰이 동원돼 여공들을 진압했다.
잎담배의 질을 판정 수납량의 할당을 결정하는 전매청 직원들의 특혜와 부정이 심하다. 수납예산이 한정돼 다수의 농민이 피해를 당한다. 1973년 11월 초 충북 청풍에선 100여 농민이 전매청에 몰려가 집단 항의했다.
1974년 1월 : 작은 승리
경남 창원에선 일본공장이 들어가야 할 공업단지 건설을 반대하는 농민들이 불도저 앞을 가로막았다. 박 대통령의 출신지 구미공단에선 일본인 기술자와 한국인 노동자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 곤봉을 가진 200명의 한국 노동자가 일본인 기술자들의 숙소인 아파트를 습격했다. 구미에선 한일간 마찰이 끊이질 않는다.
1973년 12월 19일 오후 이화여대 학생 10명이 김포공항에서 ‘기생관광’ 반대 데모를 했다. 이런 데모는 일본 여성들도 한 적이 있다. 동경 하네다 공항의 기생관광 반대 데모가 그것이다. 한일 연대투쟁이다.
1973년 12월 29일 문공부장관은 ‘관광행정 부조리 개선’을 명령했다. 실제 호텔들은 외국인 관광객이 60%로 격감했다.
1973년 11월 5일 지식인 15명이 발표한 ‘시국선언’에 서명한 유일한 불교인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에세이를 언급한다. 법정은 73년을 보내는 소감을 <맑고 선하게 불타는 그 눈>이란 제목으로 썼다. 그 눈은 농민의 눈이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존중하며 사는 그들은 단지 대지의 신의를 믿을 뿐이다. 이 눈에 비하면 정부의 ‘특혜’로 산업시찰단에 동원된 교수와 학생들의 눈은 어두웠다.”
1973년 12월 26일 저녁 김종필 총리는 모든 라디오와 TV에 나와 1시간 40분 동안 방송했다. ‘대하연설’이라 부르는 그 연설은 한마디로 서울에서 30마일도 안 되는 곳에 공산군이 있다는 것이다.
1973년 12월 3일 교회의 일반 신도로는 처음으로 데모를 전개한 서울의 교회가 있었다. 그들은 애국가와 찬송가를 부르며 전진했다. 그래서 경찰에 22명이 체포됐다.
이후락의 몰락 후 정부는 그가 런던으로 갔다고 발표했지만 영국대사관은 사실 무근이라고 반박했다. 스위스가 아닌가 추측한다. 스위스에 그의 아들이 유학 가 있어 이전에 외화도피를 빈틈없이 해두었다. 그러나 먼저 출국한 가족과 함께 파리에 있다는 것이 최근 지배적 결론이다.
김종필은 김대중 사건 이후 혼란을 둘러싸고 이후락을 추방했고 이제 이후락은 되돌아오기 위해 또 혼란을 원한다. 이후락이 사라진 뒤 박종규 경호실장은 박정희의 제1 측근이 됐다. 박종규는 마산 출신으로 마산 자유항의 반을 지배한다. 일본인 투자는 박종규를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지방 전기, 신문, 라디오 등 모두가 그의 영향에 있다. 최근 마산대를 인수해 이름을 경남대로 바꿨다. 뉴욕에서 장사하던 동생을 불러와 학장에 앉혔다. 미국과 일본 학자들을 초청해 한국의 어용학자와 함께 대 심포지움을 개최했다.
태국 전 수상의 아들 나론 키데카쵸룬이 1973년 12월 27일 서울에 와 있다. 그는 데모 학생 4백명을 살해한 태국의 족벌 무단정치의 3인자다.
경찰도 CIA도 말단으로 갈수록 박정권이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고 직감하고 있다. 전국이 박정권의 감옥이다. 그러나 서울 시민은 용감하다. 어디서나 박정희가 더 해먹진 못하리라는 말이 일상 얘기된다. 택시 속에서도, 음식점에서도, 다방에서도 어디서나 들린다.
1974년 1월 8일 김종필이 부산에서 유조선 진수식의 테이프를 자르게 됐다가 돌연 취소되고 긴급조치가 발표됐다. 그 이유는 여당인 공화당에서 이탈자가 나왔다. 정구영 박종태 등이 탈당 성명을 발표했다. 청와대 안이 강경 온건 양파로 나눴다.
< 민족학교>는 1973년 12월 28일 <항일 문학의 밤>을 열었다. 주최자인 장준하, 백기완 은 체포됐다. 그날 저녁 2백명 정도 들어갈 대성빌딩 강당에 천명 넘게 모였다. 데모대의 학생들은 한국 신문보다 일본 신문을 주로 읽었다. 일본의 신문을 침묵하도록 만든 것은 일본의 소위 친한파 정치가와 재계와 한국의 박정권과 합작이다.
1974년 1월 17일 기독교회 목사들이 낭독한 선언문은 “국민을 우롱하는 1.8 조치의 철폐와 개헌논의의 자유, 유신체제의 폐지”를 내용으로 한다. 선언문 때문에 11명이 체포됐지만 5명은 석방됐다. 고문에 굴복해 반성문을 썼기 때문이다. 선언장에 모인 목사는 5명인데 순교적 태도였다. 체포된 11명 중 2월에 결혼할 예정인 사람도 있다.
노동자 속에 들어가 있던 목사들이 CIA와 어용노동조합의 압제 하에서 벽에 부딪혔던 것처럼 자폭과도 같은 선언문 발표가 있었다.
영등포에 있는 한국모방 1200여 여성노동자(남성 300명)는 어용노조의 지부장을 쫓아냈다. 새 지부장을 뽑았지만 정부의 탄압으로 폭력사태로 발전했다. 신구 기독교 노동문제협의회는 1974년 1월 5일 성명에서 “한국모방 노조지부장 지동진(33)가 회사 안에서 회사 사장 등에 의해 집단구타 당했다. 1971년 3월 18일 한영섬유 공장장이 폭력배를 매수해 김진수(24)를 드라이버로 찔러 죽였다. 그러나 한영섬유 사장과 공장장은 3년이 지난 지금도 구속되지 않고 있다. 유림통상과 태광산업(현 크완진섬유)는 노조 간부를 구타해 전치 3주가 나왔다. 유림통상은 노조간부 5명, 태광산업은 32명을 해고했다”고 밝혔다.
1974년 1월 21일 신문에는 어용노조인 한국노총의 반박 공고문이 나왔다. “일부 종교인의 직책을 망각한 노동조건 침해행위를 엄중히 경고하면서... 우리의 조직력을 동원해 이를 분쇄한다는 노총의 결의를 분명히 한다.”
1974년 2월 : 국민적 영웅
1974년 여금 ‘엑스폴로 74’라는 기독교 세계대회를 한국에서 열겠다는 자들은 원천이 밝혀지지 않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 조직가 중 김모 목사는 박정희가 3선개헌을 하든 부정선거를 하든 영구집권 하든 변함없이 박정희를 당당히 지지해온 인물이다. 개헌청원서에 서명한 사람들은 모두 장준하와 관계를 심문 당했다.
1974년 2월에도 한 문학인의 작은 저항이 있었다. 19회 현대문학 신인상 소설부문 수상자 이제하가 수상을 거부했다. 1974년 1월 26일 적발된 재일 북한공작원에 포섭돼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소설가 이호철 사건도 있었다.
연세대 치대생 100여명이 거의 전원 연행됐다. 이들 연대생 7명에게 군사재판소가 선고했지만 실제 법정엔 6명밖에 없었다. 연행 1주일 뒤 집으로 1명의 연대생의 시신이 운반됐다. 무참한 죽음을 당한 학생이 부재재판을 받은 학생이 아닐까? 한다. 지금 가족은 완전히 연금돼 있다. 경찰이 24시간 감시하고 있다. 외아들이란 얘기도 있는데 아들을 잃어도 울 자유조차 주지 않는다. 전기고문으로 죽었다고 한다.
1974년 3월 : 정치적 상징주의
1974년 3월 2일 비상고등군법회의는 장준하 백기완을 각각 15년10개월, 12년형을, 연세대 학생 7명을 5년에서 7년의 형을 언도한다. 보통군법회의에서 서울대 의과대생 3명이 7년에서 10년형을 받았다.
지금 한국을 방문중인 소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한국의 초대로 파리에서 한국으로 왔다. 정부는 그가 반공적 작가라서 안심했다. 그러나 게오르규는 1974년 3월 22일 이화여대 강당에서 3천명의 젊은이들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생각지도 못할 반향을 불렀다. 강연 주제는 <시인이 고뇌하는 사회는 병등 사회다> <진실이 있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글로 써야 한다> 등이었다.
우선 게오르규는 다음의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수난 속에 살아온 사람 앞에서는 누구라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합니다. 지상에서 한국인처럼 고뇌하는 민족도 없을 것입니다. 한국인에게 느끼는 나의 존경심으로 인사말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게오르규의 강연은 3, 4회 계속됐지만 그 내용은 신문에 얼굴을 내밀 수 없었다.
1974년 4월 : 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1974년 4월 4일 아침 신문과 3일 밤 10시반 방송은 <데모 주동 최고 사형> <위반 교는 폐교처분도>라는 부제를 달고 도배했다. 박정희의 담화는 ‘반국가 지하조직 확증을 잡음’ ‘공산분자 조종, 국론분열 책동’이란 제목으로 달렸다. 정부 기관지 서울신문은 민주학생총련 관련활동 일체금지라는 큰 부제가 붙었고 청와대 대변인의 발표에는 ‘프롤레타리아혁명 기도’라는 제목이 붙었다.
민중 민족 민주선언서의 끝에는 결의문으로 “부정부패 원흉 처단, 근로대중의 최저생활 보장, 노동악법 철폐하고 노동운동 자유 보장” 등 6개 항을 담았다.
엑스폴로 74 그룹과 같이 특별히 보호받는 무리도 있다. 그들은 1974년 8월 ‘성령폭발’인가 하는 ‘엑스폴로 74’라는 대회를 서울서 열었다. 이 대회 고문에는 전 국무총리이고 현 국회의장인 정일권이 버젓이 끼어 있다. 정일관은 한국전쟁 때 육참총장으로 많은 부정을 저질렀다. 정인숙이 살해되자 그의 아들이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순교는 이미 시작됐다. 1974년 1월 22일 대구의 한 공원에서 한 노동자가 자살했다. 그는 죽음으로 항의했다. 1973년 4월 일하던 철공소에서 손가락 3개를 잃었다. 보상은 겨우 5만원. 치료를 위해 가재를 털어 15만원이나 썼다. 그는 해고됐다.
오늘 신문에 어느 메리야스공장의 사장과 공장장을 구속했다는 기사가 있다. 제목은 <11시간 노동에 월 2천원>이었다.
1974년 2월 9일 아침 서울 최대의 교회인 영락교회 기도회에서 신도 한 명이 성서와 찬송가를 든 채 휘발유를 몸에 뿌려 분신자살했다. “박정희는 물러가고 유신체제를 철폐하라”고 크게 외쳤다. 분신한 사람의 형은 목사다. 영락교회는 당구그이 지시대로 죽은 이는 크리스챤이 아니고 죽음의 동기도 확실치 않고 유서도 없다고 발표했다. 이 교회는 돈 많은 교회로 항상 체질적으로 용기 있는 행위를 하지 못한다.
1974년 5월 : 남아 있는 자
1974년 4월 3일 학생봉기 이후 수많은 젊은이들이 옥중에서 고문 받고 있다. 서대문 교도소에는 약 300명이 넘는 학생들과 그들의 선배들이 수감돼 있다.
중앙정보부 과장의 압력으로 74억원씩이나 거저 받아쓰는 세상이다. 검찰총장이 이 독직사건의 전모를 명확히 밝혔다. 신문기자를 체포한 김모 검찰총장은 마침 이 사건 발행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다. 그 당시 부장은 이후락이었다. 김종필은 이 사건의 보도를 묵인하고 내심 좋아했다. 문공부 장관은 김 총리 계열의 사람이다. 박정희는 지금까지 김종필, 이후락의 양두마차를 교묘히 조종해 왔다. 김종필은 이후락의 부하를 축출하는데 진력하고 있다. 74억원 사건과 동일한 수법으로 은행에서 700억원을 인출한 사건이 있었다. 주범은 큰 백화점 사장인 박모라는 남자로 기독교를 매수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74년 부활절 메시지 끝에 영어로 “사망한 25세 여성에게 여러분들은 무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수배된 서울대생의 여자 친구의 얘기다. 그녀는 남자친구의 행방을 몰라 혹독한 고문 끝에 죽었다. 옷을 벗겨 학대해 죽였다. 강간을 해도 취조과정의 하나라 간주한다. 카톨릭계의 서강대에서 학생들이 체포되지 미국인 신부는 단식을 했다.
한국 국민은 이번 일본인 체포사건의 진전을 보고 일본을 경멸하게 됐다. 김대중 사건 때 나타난 한일 양국의 유착과 일본 정부의 약한 자세는 한국민의 일본에 대한 이미지를 가일층 악화시켰다. 그들의 눈에는 인권도 국민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기업의 이익만이 중요한 것인가.
“학생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에게 얘기했다고 합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설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를 당국에 신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학생이 CIA 끄나풀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더 이상 교육자 일수 없습니다.
밤에 김대중의 집에 쿠데타계획이 적힌 문서가 투입됐다. 당국이 조작한 것이다. 김대중은 그것을 경찰에 보냈다. 그러자 이것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가족 전체를 괴롭힌다. 시인 김지하도 소설가 남정현도 옥에 가두고 있다. 연세대 한 학장, 여공들 속에서 활동한 여성목사도 옥중에 있다.
1974년 6월 : 유언비어
각 신문사는 ‘방위성금’을 모으고 있다. ‘방위성금’의 행방이 모호하다. 장성급은 박정의 특별 배려로 사치하고 있다. 국민들 봉급이나 수입에서 ‘방위성금’을 강제로 공제한다. 74년 6월 6일 아침 대통령 관저 부근의 상공을 비행중인 미군 헬리콥터가 한국군의 발포로 추락했다.
며칠 전 어떤 무허가 운동화 공장의 종업원 13명이 전신마비 직업병으로 쓸러져 대대적 보도가 있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읽고
1972년 10월 계엄령을 발포하고 박정권이 집권한 이래 한국에선 입을 열면 꿰매고 귀를 기울이면 자르고, 눈을 바로 뜨면 찌르는 삭풍이 불고 있다. 이 책은 불퇴전의 결의를 가지고 싸우는 한국 민중의 집합적 노력의 결정이자 일본의 민주주의자에 대한 양심적 호소다. 이 통신이 전하는 1년 반 동안의 박정권의 행적을 보고 독자는 우리선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권력이라고 악덕한 성격은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만큼 이성을 잃고 악덕의 응집물로 나타난 권력은 없었을 것이다.
대량의 결식아동, 혹사당하는 일본진출기업의 여성노동자의 참상을 알고서, 내 마음은 비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