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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 시모음 스크랩 '키다리 아저씨'
better 추천 0 조회 123 05.04.20 06:57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그 해 여름에 큰 태풍이 온 나라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남해안으로 상륙한 태풍은 중부지방을 지나면서도 그 기세가 수그러들 줄 모르다가 대관령을 넘어 동해안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사망자와 실종자 수가 지금껏 태풍 중에 두 번째였다고는 하지만 수해대비시설이 과거보다 많이 나아진 것을 감안하면 피해가 제일 큰 태풍이라고 해도 달리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소녀가 살던 마을도 수마를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강이 범람하고 산사태가 나서 어른 여럿과 아이 하나가 죽었습니다. 어른 여럿 중에 두 사람이 소녀의 부모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아이는 소녀의 남동생이었지요.
  소녀의 집은 마을에서 제일 윗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개가 자욱하게 마을을 덮고 있기라도 하면 소녀는 꼭 구름 위에 서있는 것 같아서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 집 만한데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지관이 명당이라고 한 자리를 아부지가 사기 전에 울타리 말뚝부터 박았거든."
  가끔 술을 먹고 들어오실 때면 어김없이 하는 얘기 또 그 얘기였지만 그럴 때마다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과 소녀는 서로 눈을 맞춰가며 맞어! 맞어요! 하며 아버지의 기분에 북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바람이 흉흉 불고 빗줄기가 아버지의 팔뚝보다 더 굵게 퍼붓던 날 밤, 우지끈! 꽝! 하며 산사태가 소녀의 집을 덮쳤습니다. 건넌방에서 혼자 주무시던 할머니는 다행히 화를 피하셨지만 안방에서 같이 자던 아버지와 어머니, 소녀와 동생은 순식간에 토사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에게 참사를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이 삽이며 괭이를 들고 와 구조작업을 펼쳤지만 반으로 부러진 기둥 아래에 몸이 끼어있던 소녀만 간신히 구해냈을 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소녀도 팔이며 다리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소녀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땐 추석이 지난 늦가을이었습니다. 그 동안 소녀는 대처에 있는 큰 병원에 입원해 있었지요.
  마을 풍경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담장이 허물어진 채 있는 집들도 있고 논 군데군데 물길에 누운 벼들이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지만 들녘은 작년 가을처럼 온통 황금색 물결이었습니다. 집에 뛰어가서 엄마아! 하고 부르면 엄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뛰쳐나오실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한달음에 달려간 소녀의 집은 예전 집이 아니었습니다. 토사가 무너뜨린 안방은 아예 허물어 축대를 세우고 할머니가 기거하시는 건넌방 쪽에 부엌을 새로 냈습니다. 다아 소녀가 입원해 있는 동안에 마을 어른들이 군청의 지원을 받아 해놓으신 일입니다.
  소녀는 그제야 지난 여름에 겪었던 악몽이 정말 다시는 꾸고싶지 않은 꿈이 아니라 자기네 가족에게 닥친 현실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소녀는 울음보가 터져 땅에 주저앉고 맙니다. 그래도 엄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오지도 않고 아버지의 걸걸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개구쟁이 남동생이 목소리를 째며 놀리지도 않습니다. 대신 뒤따라온 할머니만, 어서 들어가자! 어서! 하고 채근만 하실 뿐이었습니다.
  이제 할머니와 소녀,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할머니도 산사태가 나던 날 밤에 마을까지 참사를 전하러 가다가 몇 번이나 넘어지셔서 기력이 전 같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부엌일도 거의 소녀가 떠안아야 했습니다. 소녀는 그래도 좋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까지 곁에 없는 지금, 할머니라도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날도 소녀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숙제를 서둘렀습니다. 빨리 끝내고 집 옆, 텃밭에 나가있는 할머니가 돌아오시기 전에 밥을 앉혀놔야 합니다. 그런데 문을 열어놨는데도 방안이 여간 어두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소녀는 마루로 나가 상을 펴기로 합니다.
  국어숙제가 끝나고 이제 산수숙제만 남았습니다.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고 공부가 많이 밀렸었지만 오늘 오전에 선생님으로부터, "참 똑똑하구나! 벌써 다 따라왔네!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지금처럼만 해라?" 하고 칭찬을 들은 터입니다.  

  소녀는 선생님의 칭찬을 떠올리며 의욕을 갖고 문제를 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셈에 빠져 턱을 괴고 눈길을 허공에 두었을 때, 아니, 방이 비좁아 그동안 마루에 쌓아둔 구호물품에 두었을 때, 뭔가 소녀의 셈을 깨뜨리는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동화책들이었습니다. 구호품으로 같이 왔다가 다른, 먹을 만한 구호품이 얼추 가벼워지자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녀는 숙제를 잠시 멈추고 생각 없이, 그야말로 생각 없이 그 중에 한 권을 집어듭니다. 책 제목은 '키다리 아저씨'였습니다.
  '키다리 아저씨', '진 웹스터' 원작의 '키다리 아저씨'는 '주디'라는 아가씨가 후견인인 '키다리 아저씨'와의 편지교류를 통해 고아로 자라온 자신의 불행했던 삶을 딛고 보다 긍정적이고 사려 깊은 아가씨로 변모해 간다는 서간소설이자 성장소설입니다. 또한 작가는 주디를 사랑하고 주디 역시 사랑을 느끼는 '저비스'란 청년이 사실은 그동안 자신을 후원해준 '키다리 아저씨였다는 행복한 결말도 독자들에게 선사하지요.
  소녀는 숙제를 마저 해야 하는 것도, 밥을 앉혀놔야 하는 것도 깜박 잊어버린 채 책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여러 날 동안 성장소설 '키다리 아저씨'는 소녀의 손에서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해가 바뀌고 이제 소녀도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교복 입은 모습을 부모님에게 보여드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자신의 사진을 잘 코팅해서 부모님의 산소에 묻어드리는 것으로 서운함을 덜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소녀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작년과는 다르게 올 여름은 비가 너무 안 온다고 사방에서 난리들입니다. 소녀는 학교에서 나오다가 아침에 다짐을 두던 할머니 말씀이 떠올라 시장에 들렀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부모님과 동생이 산사태에 참변을 당한지 딱 일 년이 되는…….
  집에 돌아오니 할머니는 아직 안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마루 위에 웬 흰 봉투가 놓여있어서 뜯어봤더니 돈 십 만원과 한 장의 편지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은희야! 
  오늘이 제사지?
  마음이 아프겠지만 힘내렴.
  교복 입은 네 모습을 보니, 다른 아이들과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깔깔거리며

  오가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더구나.
  사람 人이란 서로 의지하라고 그렇게 만들었다는구나.
  한달에 한 번씩, 얼마간이라도 이렇게 놓고 갈 테니 유용하게 쓰렴.
  네가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이니 너무 부담 갖거나 의아해 하지 말고.
  나도 너를 보며 의지가 많이 되거든.
  그럼 또 보자.

 

  소녀는 처음에 무섭기도 하고 편지 내용처럼 부담도 되었습니다. 

  '누구지? 소인이 안 찍힌 걸 보니 동네 어른인가?'
  그러나 편지는 자신이 누구라고 밝히지 않는 것이 뭔 상관이냐고 말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때부터 매달 한 통씩, 편지는 어김없이 소녀에게 배달되었습니다. 가난했던 두 사람에게 돈도 돈이었지만 돈과 함께 들어있는 편지는 소녀에게 여간 큰 힘이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부턴가 편지는 그냥 안부편지가 아니었습니다. 소녀의 성장에 맞춰 사물을 바라보는 눈을 조절하고 있는 편지는 이제 소녀의 은근한 즐거움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편지를 놓고 나오는 집배원 아저씨와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마루 위에 놓여져 있는 편지를 발견한 소녀는 허겁지겁 돌아 나와 집배원 아저씨의 소매를 잡아 세웠습니다. 순간적이나마 편지의 주인공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나는 모른다. 우체국장님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았거든. 그냥 읍내에 사시는 분이라고만 알아라."
  그날 밤, 잠자리에 누운 소녀는 자기 전에 자기와 관련이 있을 법한 읍내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정말 누구지? 아빠하고 술 동무이셨다는 방앗간집 아저씨? 그 옆집에 정육점 아줌마? 그 옆엔 구둣방, 꼽추아저씨…….'
  꼽추아저씨에 이르러 소녀는 상을 찡그립니다. 그 아저씨는 읍내에서 소녀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꼭 흐물흐물 웃는 것 같아 여간 기분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소녀는 얼른 다음 사람을 떠올립니다. 그러다 아! 선생님! 하며 눈이 동그랗게 떠집니다. 혹시 선생님들 중에?
  소녀는 벌떡 일어나 서랍을 열고 초등학교 때 성적표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성적표 중에 하나, 거기에는 편지의 주인공과 똑같은 글씨가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달하며 성적이 특히 우수함' 이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의 주인공은 바로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것입니다. 

  소녀는 뛰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루로 나갔습니다. 마루 기둥에 기대서 하늘을 보니 반달이 보름달 못지않게 환하게 떠있습니다. 상현달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른쪽 반달은 상현달, 왼쪽 반달은 하현달, 상현달 동생이 초승달, 하현달 동생이 그믐달이라고 그 선생님에게 배웠습니다.
  달빛이 강아지가 꼬리 흔들 듯 소녀의 발에서 놉니다. 소녀의 발이 간지러운 듯 달빛을 물 삼아 뜨락 위에서 물첨벙을 칩니다. 
  '키다리 아저씨…….'
  선생님도 키가 크십니다. 선생님들끼리 배구시합을 할 때 그 큰 키가 쑤욱, 올라가면 꼭 장대 같았습니다.
  "키다리 선생님……."

  소녀는 선생님을 그렇게 나지막이 불러봅니다. 훨씬 더 정감이 서립니다. 선생님이야 나이가 마흔이 넘고 가정도 있으시니 소설 속 주디처럼 사랑에 빠질 수는 없지만 존경하는 마음은 주디보다 자신이 훨씬 더 할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둡니다.
  그때부터 소녀는 정말이지 더 열심히 살았습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할머니도 더 열심히 라는 느낌으로 모셨습니다.
  할머니는 소녀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습니다. 그렇지만 소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마을어른들이 나서서 장례를 주관해 주시고 문상객 중엔 키다리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선생님이 다가와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위로를 해주셨을 땐 정말이지 그대로 안겨 엉엉 울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서럽게 응석도 부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은근한 즐거움을, 자신의 은근한 비밀을 그렇게 슬픈 자리에서 풀어놔선 안 될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소녀는 마을 어른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읍내에 작은방을 얻어 학교에 다녔습니다. 물론 여전히 편지는 매달 소녀에게 어김없이 배달되었습니다.
  어느덧 소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처에 있는 대학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학자금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소녀가 졸업할 때까지 학기마다 과 사무실로 전달되었지요.
  소녀는 선생님의 그런 마음을 이해했습니다. 읍내에서야 가능했지만 소액환이 들어있는 편지를 보내자면 아무래도 자신을 밝혀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박봉의 선생님 월급으로 학기마다 그렇게 큰돈을 마련해 주시는 것에 대해서는 소녀도 처음으로 부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꼬박꼬박 타고 있는데 말이지요. 그렇지만 다른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으로 알고 아끼고 아껴서 자신의 생활비로 썼습니다.
  세월이 또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소녀는 지금 선생님을 뵈러 가는 길입니다. 자신도 선생님이 된 지금 선생님을 뵈러간다고 생각하니 걸음이 허공 위에 붕 하고 떠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남자의 팔을 꼭 잡았습니다. 남자요? 그렇습니다. 소녀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습니다. 교생실습 때 만난 선생님인데 키다리 선생님처럼 키도 훤칠하고 건실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에 대한 열정이 대단합니다. 게다가 둘은 올 가을에 길일도 잡아놨습니다.
  사실 결혼하기에 소녀 나이는 요즘 추세로 보아 좀 이른 편입니다. 이제 스물넷이니까요. 그러나 가족이 없는 소녀를 생각하면 소녀의 결정이 이해도 됩니다.
  반백의 선생님이 온화한 미소로 그들을 반깁니다. 선생님은 이제 소녀가 다녔던 읍내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으로 재직 중이십니다.
  차가 나오고 덕담이 오고가다가 잠시 대화가 끊겼을 때 소녀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비밀을 풀어놓기 시작합니다.
  어떨 땐 눈이 충혈 되기도 하고 어떨 땐 신이 나서 음성이 높아지기도 합니다. 성적표에 쓰인 글씨를 보고 선생님이 그분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대목에선 선생님도 눈이 휘둥그레 해지십니다. 

  "선생님? 저도 선생님처럼 살 거예요. 이이에게 내락도 받아놨고요."
  여전히 선생님은 미소만 짓고 계십니다.
  "그런데 선생님에게 청이 하나 있어요. 오는 결혼식 때……, 선생님이 제 아버지가 돼 주셨으면 해요. 선생님하고 같이 예식장에 들어가고 싶어요. 그렇게 해주실 거지요?"
  소녀의 말을 듣던 선생님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갑니다. 아니, 굳어진다기보다 난처한 표정입니다.
  "내……, 그분의 부탁대로 끝까지 비밀을 지키려고 했다만……, 너와 손잡고 결혼식에 입장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랍니다. 물론 소녀의 충격이 훨씬 더 해서 입이 벌어진 채 다물 줄을 모릅니다.
  "그분은 바로……, 구둣방 송씨 아저씨다."
  번갯불에 놀랐는데 뒤이어 천둥소리가 고막을 때린 격입니다. 소녀의 표정이 그만 화석처럼 굳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어느 한 순간, 소녀의 눈빛에 스치고 지나가는 실망감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네가 받은 충격을 이해한다. 그러나 너에게 소중한 그분이 나나 송씨 아저씨, 둘 중 누구라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중요한 것은 언제나 네 곁에 그분이 있었다는 것이지.
  그해 여름에 송씨 아저씨도 아내와 딸을 잃었어. 그만 강물에 휩쓸려서 말이야. 처음엔 같이 따라 죽으려고 했다는구나. 몇 번이나 모질게 마음도 먹었다고. 그러다 네 소식을 우연히 접하게 되곤 먼저 보낸 식구들에 대한 애정을, 미처 다 주지 못한 애정을 너에게 쏟기 시작한 거야. 평생 구두만 만졌으니 손이 여간 곱았어야지. 그래서 비뚤비뚤하게 쓴 편지와 돈을 가져오면 내가 다시 대필을 해서 우체국에 갖다놨지. 그렇게 따지자면 나나 송씨 아저씨 외에도 우체국장님이나 집배원아저씨, 그리고 마을 분들도 다 그분이 아니겠니? 언제나 네게 고마운 분들이었으니 말이야.
  사람이 산다는 건 살아야 할 몫이 있기 때문에 사는 거야. 나는 송씨 아저씨가 자신의 몫을 너에게 뒀다는 것을 고맙게 생각해. 그분의 외양은 꼽추지만 내면의 향은 여간 좋은 것이 아니거든. 나도 그 향에 취해서 가끔 술을 같이 하곤 하는데, 네 얘기만 나오면 그분의 눈은 무지개를 본 소년처럼 빛나지…….
  자, 내 얘기는 얼추 다 한 것 같구나. 그래도 네가 나와 같이 입장하고 싶다면, 내……, 그리 하마."
  결혼식은 대처 큰 예식장에서 열렸습니다. 교장선생님의 청첩으로 마을사람들도 버스를 대절해서 참석했지요. 물론 예전 우체국장님, 집배원 아저씨도 계셨습니다. 그렇게 다들 모이니 동네잔치가 따로 없습니다.
  이윽고 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딴! 따안! 딴! 딴! 바그너의 '로엔그린'에 나오는 결혼행진곡인가요? 음악에 맞춰 신부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 옆에는……, 송씨 아저씨가……, 신부의 손을 올려 잡고 같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결혼식장이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신부측 하객들은 다들 뜨악한 표정들이었고, 신랑측 하객들은 아예 경악한 표정들입니다. 심지어 신랑측 하객들 사이에선, "꼽추 딸이었어?" 란 소리도 새어나왔습니다.
  신랑이 송씨 아저씨로부터 신부의 손을 건네받아 주례선생님 앞에 섰어도, 사회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정숙을 부탁드려도, 좀처럼 웅성거림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그러자 그때까지 가만가만 미소만 짓고 계시던 신랑측 부모님이 손을 맞잡고 걸어나와 하객들 앞에 섰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미소만 지은 채 말이지요. 신기합니다. 소리들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결혼식도 어느덧 성혼선언이 끝나고 주례사 차례입니다. 주례선생님은 천천히 하객들을 둘러본 다음 조심스럽게 주례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저는 신부가 초등학교 사 학년이었을 때 담임을 맡았습니다. 신부측 사람이 주례를 보는 것에 대해 하객들께서도 의아해 하실 줄 압니다. 보통 신랑측에서 주례를 모시니까요. 그렇지만 신랑뿐만 아니라 신랑 부모님까지 간곡하게 부탁해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주례로서 신랑, 신부에게 물론 덕담도 해주겠지만, 그보다 먼저 여러분에게 아름다운 얘기 한 토막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줄 얘기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잠시 말씀을 끊고 허공을 쳐다보셨습니다. 마치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하고 재단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윽고 선생님의 말씀이 이어졌습니다.

  "언제였지요? 아주 큰 태풍이 우리 나라를 할퀴고 지나간 적이 있습니다. 보통 태풍은 육지에 상륙하면 세력이 줄어들기 마련이지만, 이 태풍은 기세 등등, 중부 내륙 지방에 이어 영동지방에도 큰 피해를 입히고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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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5.04.20 23:27

    첫댓글 태풍 매미 예긴 줄 알았네여 끝까지 읽던 중에 반전되는 부분은 실화이던지 아니던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뭉클한 스토리가 아직도 눈시울이 적셔 질수 있다는 것, 산다는 의미를 느끼게 해주는 한편의 또다른 삶을 보게 되어 기쁨입니다.

  • 05.04.21 15:43

    이제사 다 읽었네요...숨 가쁘게 읽었습니다....오늘도 감동 먹는 날^^*

  • 작성자 05.04.22 11:37

    뽀루뚜까 아저씨의 글방에서 옮긴 글입니다.

  • 05.04.22 14:23

    눈물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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