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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출처: http://blog.naver.com/atena02/220513076228
전쟁의 끝과 반격의 준비
1945년 4월 30일 밤 10시. 치열한 전투 끝에 베를린 중심부의 제국 의회 꼭대기에서 소련 깃발이 휘날렸다. 히틀러는 자신의 벙커 속에서 자살했다. 일주일 뒤인 5월 8일 독일은 항복했다. 유럽의 전쟁은 끝났다. 같은 시간 태평양에서도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4월부터 시작된 오키나와 전투는 80여일의 혈전 끝에 6월 23일 수비군 사령관 우지시마 미쓰루(牛島満) 중장이 스스로 할복 자결하면서 끝이 났다.
맥아더와 니미츠는 큐슈 진공을 준비하였고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소장이 지휘하는 제20공군은 매일 수백여대의 B-29 전략 폭격기들을 일본 상공으로 보내어 모든 도시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만주에서는 독일을 패망시킨 소련군의 거대한 군대가 집결하였다. 일본 지도부는 여전히 강경파들을 중심으로 "1억 옥쇄"를 외치며 호전적인 발언을 일삼았지만 이미 싸울 의지를 상실한지는 오래였다.
▲ 1945년 5월 29일, 요코하마를 폭격 중인 B-29 편대. 이오지마를 점령한 미군은 일본 본토 전역을 공습 범위에 넣게 되면서 전략 폭격만으로 일본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압도적인 미군의 공격 앞에서 일본이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자살 특공대밖에 없었다.
※ 사진 출처 : http://ww2db.com/image.php?image_id=6353
전해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던 중국의 전황도 점차 바뀌고 있었다. 1938년 10월 우한 함락 이래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7년 째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중국 전선은 1944년 5월 하타 슌로쿠(畑俊六) 대장이 지휘하는 지나파견군이 "이치고 작전(一号作戦)"을 발동하면서 한순간에 뒤집어졌다. 약 50만명의 병력을 동원한 일본군 최대 최후의 공세 앞에서 오랜 전란에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허덕이던 중국군은 화중, 화남 전선 전체가 붕괴되는 파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이 황허를 건너 뤼양과 창사, 헝양, 구이린을 거쳐 11월 24일 난닝을 공략하고 12월 10일 중불 국경에 도달하자 중국은 완전히 두쪽으로 갈라졌다. 장제스에게 중국군의 지휘권을 내놓으라고 강요하고 있던 스틸웰은 장제스가 헝양과 구이린을 지킬 수 있도록 지원을 요청하자 고의로 묵살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극단으로 치닫았다. 평소 고집불통으로 "삐딱이 조(Vinegar Joe)"라고 불리던 스틸웰은 자신을 중국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중국에서 모든 미국 자산을 철수시키고 원조를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격분한 장제스는 루즈벨트에게 스틸웰의 해임을 요구했다. "나는 중국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포기할 수 없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시오. 만약 미국이 대여 물자를 회수하겠다면 가져가시오. 중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오." 루즈벨트는 장제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스틸웰의 요구로 북부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수렁에 빠져 있던 중국군 최정예부대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장제스는 옌안의 공산군을 봉쇄할 목적으로 시안에 배치했던 군대에서 약 6만명을 급히 빼낸 다음 광시성 방면으로 투입하여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굶주리고 지친데다 장비도 빈약했던 이들은 전선에 투입되자말자 무너져 내렸다.
본국으로 송환된 스틸웰 대신 웨드마이어(Albert C. Wedmeyer) 중장이 중국 전구의 참모장으로 중국에 왔다. 스틸웰과 마찬가지로, 초급 장교 시절 중국 톈진에서 무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던 그는 스틸웰과는 정반대로 중국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그도 충칭에 도착하고서야 중국의 상황이 얼마나 나쁜지, 또한 영국과 소련과 달리 중국은 미국의 원조 물자를 거의 수령받지 못한채 극도로 약체화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루즈벨트는 입으로는 중국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막상 중국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무기와 군수품, 식량을 제공하는데는 매우 인색했기 때문이었다. 웨드마이어는 장제스에게 충칭을 버리고 윈난성의 성도 쿤밍으로 후퇴할 것을 건의하였다. 장제스는 거절했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많은 손실을 입은데다, 물자 부족으로 공세 한계점에 도달하면서 전진은 멈추었다. 위기는 지나갔다. 버마에서도 중국-영국-미국 연합군이 일년여의 원정 끝에 일본군 제18사단을 격파하고 인도와 중국을 연결하는 "레도 공도(Redo Road)"를 건설하였다. 영국군 역시 남부 버마로 진격하여 랭군을 탈환한 후 태국 국경까지 진격하였다. 극소수의 일본군만이 추격을 피해 태국과 인도차이나로 도주할 수 있었다.
패색이 짙어지는 와중에도 일본군은 마지막 기력을 짜내어 1945년 3월 충칭의 입구인 라오허커우와 즈장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중국군의 강력한 반격에 부딪쳐 "중국의 과달카날"이라 불릴 만큼 참담한 패배를 당한 채 후퇴했다. 충칭과 청두 비행장에서 출격하는 중미연합공군은 우한, 난징, 선양 등 중국 내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도시들과 큐슈까지 날아가 대대적인 전략 폭격을 실시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하지만 이치고 작전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연합국 진영에서 중국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카이로 회담으로 한껏 높아졌던 장제스의 권위 또한 타격을 받았다. 그동안 억눌려 왔던 장제스 정권의 독재와 부패, 무능함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민주동맹을 비롯한 재야 세력과 옌안의 중공은 "민심이 흉흉하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고, 리쭝런의 광시파와 롱윈의 윈난파, 장파쿠이의 광둥파 등 여러 군벌들은 스틸웰과 결탁하여 장제스를 끌어내릴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미국은 장제스에게 공산당과 담판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수많은 정파와 군벌들의 연합 정권이었던 장제스 정권은 파벌싸움이 거세지면서 뿌리부터 흔들렸다. 물론 이들에게 밀려날만큼 장제스는 허약하지 않았지만 자존심에 금이 간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자자 장제스 또한 반격을 준비하였다. 윈난성의 성도 쿤밍에 육군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괴멸 상태로 내몰린 군대의 재편에 착수하였다. 또한 장제스는 1944년 10월 "지식청년군(知識靑年軍)"의 창설을 명령했다. 주로 농촌의 극빈층에서 강제 징집되어 교육 수준도 매우 낮고 영양실조에다 사기가 완전히 땅에 떨어진 기존의 군대와는 차별되는 새로운 엘리트 부대를 만들어 자신의 친위대이자 향후 반격의 선봉에 세우기 위함이었다. 대상은 18세부터 35세까지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신체가 건강한 청년들이었다.
"한뼘의 산천에 한 방울의 피, 일만 청년 일만 장병(一寸山河一寸血,十萬青年十萬軍)"이라는 구호 아래 12월 말까지 약 12만5천여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제201사단부터 제209사단까지 3개군 9개 사단으로 편성되었다. 미국의 원조를 받아 미군의 무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미군 교관에 의해 철저히 훈련을 받았다. 총사령관은 군령부 차장이었던 뤄저잉(羅卓英)이, 군사위원회 고급 참모 황웨이(黃維)가 부사령관 겸 제31군장을 맡았다. 특기할 점은 장제스의 장남인 장징궈가 중장 대우로서 지식청년군의 정치주임을 맡았다는 사실이었다. 차남 장웨이거(蔣緯國)가 독일 육사에 유학한 후 처음부터 군직에 몸을 담고 있던 것과 달리 그동안 장징궈는 장제스의 비서 역할을 맡고 군대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장제스가 그에게 지식청년군을 맡긴 것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후계자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이후 지식청년군은 장징궈의 권력 기반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웨이리황(衛立煌)이 지휘하는 중국 원정군도 버마에서 승리를 거두고 윈난성으로 귀환하였다. 1945년 6월까지 중국 서남부에 집결한 중국군은 4개 방면군과 중국 원정군 등 28개군 약 65만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도 스틸웰이 인도에서 직접 편성한 신편 제1군(신편 제30사단, 신편 제38사단, 제50사단)과 신편 제6군(제14사단, 신편 제22사단) 5개 사단은 미국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완전히 기계화된 중국군 최강 부대였다.
▲ 북부 버마로 진격 중인 중국군 신편 제38사단. 미국식으로 편성된 최초의 중국군 사단으로, 화력과 훈련 등 모든 면에서 일본군과 대등했지만 막상 중국 전선에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
중공 칼을 갈다
1945년 7월 26일에는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과 영국, 소련 삼대 연합국의 정상들이 모여서 독일에 대한 전후 처리와 함께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기나긴 전쟁의 끝도 비로소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앞에 놓인 것은 결코 장미빛 미래라고 할 수 없었다. 첫번째는 중공이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내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 두번째는 소련이었다.
1937년 8월 루산 회담에서 장제스가 "어떤 희생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항해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선언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체결되는 등, 전국적으로 열렬한 항일 의지가 최고조에 달하던 중일 전쟁 초반과는 달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자연스레 열의도 식어갔다. 장제스 정권은 난징과 상하이, 광저우 등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많은 동부의 대도시를 모두 잃고 봉건 문화가 지배하는 서부 내륙으로 쫓겨가면서 급격하게 보수화되었다. 또한 국민당과 관료들, 고위 장성들은 파벌 싸움에 열을 올렸다. 특히 국민당 부총재였던 왕징웨이가 변절하여 일본과 결탁해 난징에서 괴뢰정권을 수립한 것은 중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국민정부의 권위를 떨어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붕괴되지 않고 그나마 결속력을 지탱하는 것은 장제스의 역량이었다.
중공은 제2차 국공합작에서 장제스 정권을 중국의 정통 정권으로 인정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 포기와 지방 정권으로 복종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점차 확대되고 국민정부가 일본의 침략에 저지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붓는 동안, 중공은 일본이 점령하고 있는 내몽골과 허베이성, 산둥성은 물론, 항일 전선과는 관계가 없는 닝샤성과 칭하이성 등 서북 지역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급격하게 팽창했다. 이는 중공의 활동지역을 산시성(陝西省)으로 제한했던 합의 사항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중공이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명목상 국민정부에 복종하기로 합의했을 뿐, 막상 이를 감시하거나 어겼을 때를 대비한 견제 장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쉐량의 시안사변 이후 국민정부과 중공은 원칙적으로 내전 중지와 국공합작에 동의하면서도 세부 사항을 놓고 대립하면서 한때 결렬 직전에 가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나면서 장제스는 거국일치와 항전역량의 집결을 위해 중공이 요구하는 가장 첨예한 문제, 즉 산간닝 변구(陝甘寧邊區 - 대장정 이후 옌안을 중심으로 산시성 북부와 간쑤성 동부, 닝샤성 남부의 경계에 구축한 중공의 세력권)에 대한 독립성 인정과 팔로군이 독자적인 총지휘부를 설치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는 중공을 여지껏 상대해 온 다른 군벌이나 토비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보았고, 훗날 중대한 위협이 되리라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중공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따라서 국공합작은 처음부터 국공이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구조적인 여지를 두고 있었다.
더욱이 중공에는 마오쩌둥이라는 걸출하면서 야심 넘치는 지도자가 있었다. 후베이성 창사의 부농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변변한 학식도 없고, 베이징 대학 도서관에서 사서로 잠깐 일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독학으로 공부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언변과 강력한 카리스마, 특히 주변 사람들을 선동하는데 특별한 능력을 갖춘 그는 대장정 과정에서 저우언라이와 류사오치, 장원톈(張聞天) 등의 지지를 받아 자신을 "후난의 촌놈"이라고 얕보던 소련 유학파 지도부를 누르고 당 주석이 되어 권력을 점차 장악해 나갔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마오쩌둥은 국공합작과 항일통일전선 구축에 찬성하면서도 이는 일시적인 후퇴일 뿐, 계급 투쟁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1937년 11월 12일 간부회의에서 "무산계급이 유산계급을 영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유산계급이 무산계급을 영도해야 하는가? 국민당이 공산당을 끌어들일 것인가? 공산당이 국민당을 끌어들일 것인가?"라면서 어차피 국공 양당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과의 항쟁은 우리 당이 발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우리는 70퍼센트를 역량 확대에, 20퍼센트를 국민당과의 투쟁에, 10퍼센트를 일본과의 투쟁에 사용해야 한다."라며 중공의 주적이 일본이 아닌 장제스 정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내전에 대비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른바 "28인의 볼세비키(소련 유학생 출신 중공 지도부의 통칭)"의 우두머리로서 소련 코민테른 극동지부장이었던 왕밍(王明)이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모스크바에서 옌안으로 돌아왔다.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그는 이념 갈등을 일단 접어두고 국민정부과 연합하여 항일전쟁에 총력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우경투항주의"라고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왕밍은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자신보다 11살이나 많고 정략적으로 훨씬 노련했던 마오쩌둥을 이길 수 없었다.
또한 마오쩌둥은 당원을 교육하고, 당조직을 정돈하며, 당의 기풍을 쇄신한다는 소위 "정풍운동(整風運動)"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이는 마오쩌둥의 주장 이외의 모든 이론을 "종파주의"라 하여 부정하고 마오쩌둥 개인에 대한 절대적인 숭배를 강요하는 적색 테러였다. 그는 자신의 비밀경찰을 이끄는 캉성(康生)을 앞세워 국민당과 가깝거나 당내 경쟁자들, 반동 분자들을 제거하였다. 많은 이들이 비밀리에 살해되거나 대중 앞에서 집단 린치를 당했고 또는 스스로 공개석상에서 굴욕적인 자아비판을 한 다음 한직으로 밀려나야 했다. 반면,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누구도 비판할 수 없었다. 중공은 겉보기에는 여전히 집단지도체제였지만 실제로는 마오쩌둥 한 사람의 일인독재였고 당 지도부에서 그의 권위는 장제스를 능가하였다. 그의 방식은 장제스보다 훨씬 교묘하였다.
▲ 정풍 운동 당시 당 지도부를 모아놓고 연설 중인 마오쩌둥. 이 과정에서 수천여명이 살해되는 등 정풍 운동은 20여년 뒤 중국 전체를 광기에 빠뜨릴 문화대혁명의 전초였다.
1938년 4월 마오쩌둥의 최대 정적이자 권력 투쟁에 패배한 장궈타오(張國燾)가 우한으로 망명했다. 그는 공산당의 이중적인 전략을 폭로했다. 국민정부 내 반공 보수파들이 들끓었다. 장제스는 중공에 대한 불신감을 다시 품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유화정책을 180도 뒤집어 극단적인 반공주의로 되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모든 역량을 항일에 집중하는 상황에서 당장 공산당을 상대로 내전을 시작할 여력이 없는데다 국민정부가 국공합작을 먼저 깨뜨리는 것은 여론의 부담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단 중공에 대해 보다 온건한 타협안을 제안하는 한편, 전시 최고 대의 기관으로 국민 참정회를 조직하면서 전체 위원 150명 중에서 마오쩌둥 등 7명의 공산당원도 포함시켰다. 또한 우한(우한 함락 이후에는 충칭)에는 저우언라이를 수장으로 하는 공산당 대표부가 상주하였고, 최고 군사회의에 저우언라이가 참석할 수 있게 하였다. 장제스는 일본과의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수 없는 이상 중국의 승리는 장기전과 소모전에 있으며, 공산당식 유격전략을 배워야 한다며 저우언라이에게 유격 간부반 과정을 국공이 공동으로 운영할 것과 교관의 파견을 요청하기도 했다. 팔로군 참모장인 예젠잉(葉劍英)을 비롯한 30여명의 공산당 지휘관들이 옌안에서 파견되어 교관으로 활동하였고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약 2천여명의 간부를 훈련시켰다.
하지만 1939년 말부터 공산군이 본격적으로 내몽골과 화북, 창장 하류 일대로 침투하는 한편, 국민정부의 통치 구역도 빠르게 잠식해 나가자 장제스로서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다. 중공의 전술은 희생이 큰 정면 공격 대신, 일본군과 국민정부의 통치 아래에 있지만 비교적 통제가 느슨한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이른바 "해방구"라 하여 지하 조직을 건설하고 정치 공작과 선전을 통해 항일 세력과 친일 괴뢰 세력을 포섭해 나가는 형태로 지배지역을 확대해 나가는 식이었다. 이 경쟁에서 국민정부는 도저히 중공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본군과 정면 승부를 격렬하게 벌여야 했던 국민정부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군대와 행정 시스템이 붕괴된 반면, 공산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국민정부군이 철수한 공백지를 손쉽게 장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본군이 병력 부족으로 대도시와 철도 연선을 장악하는데만 집중했다는 점도 공산군을 도왔다.
또한 마오쩌둥은 민주동맹을 비롯한 국민당과 공산당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군소정당들과 재야세력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해 나갔다. 주로 지식인, 자본가로 구성된 이들은 서구식 민주주의를 신봉하면서 장제스 정권의 일당 독재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헌정의 실시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였다. 이념적으로는 반소, 반공적인 경향이 강했기에 중공과 섞일 수 없었지만, 중공은 국민정부와의 갈등을 이용해 反장제스 공동 전선을 구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동안 중공의 선전처럼 국공합작이 깨진 것이 전적으로 장제스 정권의 반공 노선 탓이라는 주장은 승자의 일방적인 논리일 뿐이다.
군대에 대한 마오쩌둥의 영향력 또한 나날이 강화되었다. 공산군은 옌안의 팔로군 외에도 화중, 화남에서 활동하는 신4군, 내몽골과 만주에서 활동하는 동북항일연군 등 태생부터 전혀 다른 잡다한 계파로 뒤섞인 일종의 연합군이었다. 광대한 중국 대륙 곳곳에 흩어진 채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같은 이데올로기만 공유할 뿐이었다. 따라서 당의 지배력이 예하 부대에 충분히 미칠 수 없었고 결속력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다른 계파를 정리하고 당과 군을 완전히 장악하여 지휘와 통제의 일원화를 실현하였다. 이는 훗날 국공내전에서 불리한 전세를 뒤엎고 승리하게 되는 최대의 원동력이 되었다.
1940년 8월부터 12월까지 전개된 백단대전은 총 40만명이 동원된 공산군 최대의 반격작전이었다. 주더와 펑더화이, 류보청을 비롯한 군지휘관들과 팔로군 병사들은 복잡한 정치와 상관없이 순수한 열정으로 일본과 싸우기를 원했다. 하지만 당을 장악하고 있던 마오쩌둥은 역량 보존이 최우선임을 강조하면서 일본군과의 전면 무장 투쟁을 억제하고 정치 투쟁에만 열을 올렸다. 그러나 스탈린조차 중공의 소극성을 비난하면서 항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요구하고 중국내 여론도 중공에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당 지도부마저 분열되었다.
허베이성 방면의 진지위루(晋冀豫魯) 변구에 대한 일본군 북지나방면군의 대대적인 포위 섬멸전에 대항해 팔로군 사령관 주더와 참모장 펑더화이는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약 20개 연대의 정규군, 비정규군을 동원해 일본군의 포위망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막상 공격 명령이 내리자 원래 계획에 없던 부대들까지 명령과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여 전장이 내몽골과 화북 일대 전체로 확대되었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반격 계획을 수락하기는 했으나, 작전 규모가 당초의 예상을 뛰어넘자 당황하였다. 그는 장시성 중앙 소비에트 시절부터 "당지휘창黨指揮槍"이라 하여 당이 군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면서 군은 당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이유가 어떻든 자신의 지시를 무시하고 군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펑더화이는 호된 비판을 받았고 팔로군은 수동적인 자세로 돌아가 더 이상 이와 같은 대규모 작전을 시도하지 않았다. 물론 최일선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항일 투쟁에 온 힘을 다했으나 당 지도부가 소극적인 이상 소부대 단위로 개별적으로 싸워야 했다. 일본과의 전투는 지지부진한 반면, 화중과 창장 중하류 일대에서 국민정부군과 공산군의 전투는 점점 격렬해졌다.
완난사변과 최악으로 치닫는 국공의 갈등
1941년 1월 안후이성에서 신4군 지도부가 국민정부군의 공격을 받아 괴멸당한 완난 사변은 국공간에 벌어진 최악의 충돌이었다. 신4군이란 1934년 장제스의 대대적인 토벌전(제5차 초공작전)에 쫓긴 공산군 주력이 서쪽으로 후퇴했을 때 창장 주변의 13개 성에 걸쳐 흩어져 있던 잔여 부대를 재편한 부대였다. 이들은 샹잉(项英)의 지휘 아래 국민정부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국공합작 당시 국민정부는 옌안의 공산군에 대해서는 팔로군으로 개편하여 정규군에 편입시키되, 남방의 유격대는 위협적인 존재로 보고 철저하게 괴멸시킬 생각으로 오히려 공격을 더욱 강화하였다. 산시성의 오지에 고립된 팔로군과 달리 이들은 창장 하류를 정치적 기반으로 하는 국민정부의 심장부에서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공 역시 이들을 남방의 혁명운동을 위한 역량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결국 국민정부는 예팅(葉挺)을 군장으로 임명하고 팔로군과는 별도의 조직으로 운용한다는 조건으로 이들을 4개 지대 1만2천명으로 편성된 신4군으로 개편하는데 동의하였다. 예팅은 과거 쑨원의 경호대장을 지냈고 북벌전쟁 중에는 제4군 참모장과 제24사단장으로 "철군"이라 불릴 만큼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공산당이 난창봉기를 일으키자 여기에 가담했다가 봉기가 실패하자 마카오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하지만 코민테른에서 호된 비판을 받자 공산당을 탈퇴하였고 마카오에서 머물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상하이로 돌아왔다. 장제스는 그가 공산주의자이기는 했으나 개인적으로 오랜 친분이 있었고 또한 옌안의 중공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기에 중립적인 인사로 보고 신4군 군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샹잉을 부군장으로, 천이를 정치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장제스는 예팅을 이용해 신4군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팅은 예팅대로 국민정부나 옌안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기보다는 신4군을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만들 계산을 하고 있었다. "신4군"이라는 호칭 역시 예팅이 북벌전쟁 당시 자신이 지휘했던 제4군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지휘권은 샹잉에게 있었기에 예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또한 중공은 팔로군처럼 신4군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할 생각으로 국민정부군이 간부를 파견하여 이들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중공의 남방 유격대는 국민혁명군 신4군으로 개편되어 구주퉁의 제3전구 산하의 정규 부대가 되었지만, 근 10년 가까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증오심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리 없었다. 또한 신4군은 팔로군과 달리 너무 광범위한 지역에 분산되어 있는데다 태반은 토비 출신이었기에 규율도 엉망이었고 지휘부의 통제가 말단 부대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등 엉망이었다. 게다가 "광대한 지역에 새로운 근거지를 만들라"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국민정부와의 협의 없이 당초 정해진 주둔지와 활동범위에서 벗어나 국민정부의 통치구역을 잠식해 나가자 현지에서 충돌하는 일이 점점 늘어났다. 신4군의 세력은 날로 늘어나면서 1940년 말에는 7개 사단, 1개 독립 여단 등 10만명에 달했다.
예팅과 샹잉은 신4군과 중공, 국민정부 사이에서 나름대로 갈등을 조율하려고 노력했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장제스는 예팅의 요청을 일부 수용하여 군비와 무기 지급을 늘리면서도 신4군의 활동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어차피 국민정부와 중공의 주도권 싸움에 근본적인 갈등의 원인이 있었기에 결코 해소될 수가 없었다. 결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국공간의 더 이상의 충돌을 막기 위해 팔로군 지도부에 황허 이남에서 활동 중인 모든 공산군 부대를 우선 양쯔강 이북으로 이동한 후 다시 황허를 건너서 북상하라고 명령하였다. 만약 공산당이 이 명령을 거부한다면 바로 합작이 깨져서 내전에 직면할 판이었다.
당시 전면적인 내전을 하기에는 역량이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 마오쩌둥은 신4군 지도부에게 북상을 수차례 지시하였다. 그러나 신4군은 이동경로 상에 일본군이 가로막고 있는데다 식량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어영부영하다가 당 중앙의 독촉을 여러번 받은 뒤에야 1940년 12월 말부터 각 부대가 차례대로로 북상을 시작하였다. 또한 신4군 본부와 직할 부대 8천여명도 1941년 1월 3일부터 북상하지만 그 과정에서 당초 정한 이동경로에서 벗어나자(중공측은 사전에 승락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항명으로 본 구주퉁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결국 1월 7일부터 13일까지 사방에서 포위 공격을 받아 신4군 지도부는 전멸당했다. 예팅은 포로가 되었고 샹잉은 도주하는 과정에서 부하에게 살해되었다. 이것이 완난 사변이다.
완난 사변을 놓고 국공 양측은 서로를 향해 온갖 비난을 퍼부었지만 냉철하게 보았을 때 어느 쪽도 처음부터 상대를 말살시킬 생각으로 함정을 팠다거나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직접 개입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그보다는 현지 부대들간의 상호 불신과 증오심, 신경과민이 빚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대내외적인 비난에 직면한 장제스는 중공에게 굴복하고 "앞으로 공산당에 대한 군사작전은 없을 것이며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보장한다"고 약속하였다. 마오쩌둥은 정치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신4군 해체를 명령한 국민정부의 지시를 묵살하고 천이(陳毅)를 새로운 신4군 군장으로 임명하여 신4군을 재건하였다. 그때까지 어느 정도 독자성을 유지했던 신4군은 완전히 중공의 통제로 넘어갔다. 같은 시기 만주에서는 관동군이 동북항일연군을 공격해 괴멸시켰다. 동북항일연군은 와해된 채 일부는 시베리아와 연해주로(그 중에는 김일성도 있었다), 일부는 남쪽으로 탈출하여 팔로군에 합류하였다.
이후 국공의 갈등은 한동안 소강상태가 되었고 국민정부군과 공산군이 서로 협력하여 일본군과 싸우는 일도 있었지만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공산군의 세력 확대가 재개되면서 무력 충돌의 횟수는 점점 늘어났다. 한편, 예팅은 충칭에서 억류되어 있다가 일본이 항복한 뒤인 1946년 3월 4일에야 석방되었다. 그는 공산당에 재가입을 선언한 뒤 비행기를 타고 옌안으로 향했으나 도중에 추락하면서 죽었다.
일본은 피부의 병이요, 공산군의 심장의 병이다
그동안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만약 장제스가 평범한 지도자이거나 일본보다 중공을 더 위협적인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다면 청일전쟁에서 리훙장이 그러했던 것처럼 영토를 일부 할양하는 선에서 일본과 적당히 타협하고 전쟁을 끝낸 다음, 중공이 더 커지기 전에 공격하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는 자신이 감내할 수 있을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했다.
중공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1943년 2월 장제스는《중국의 운명(中國之命云)》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일본은 피부의 병이요, 공산군은 심장의 병이다(日本是皮肤之患,共产党是心腹之患)"라며 중공에 대한 적개심과 불신감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시안에 후쭝난이 지휘하는 약 30만명의 병력이 배치되어 산간닝 변구를 포위하고 경제 봉쇄를 단행했다. 여기다 화북에 배치된 일본 북지나방면군이 "삼광작전(三光作戰, 모두 죽이고 모두 태우고 모두 빼앗는다는 뜻)"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시작하자 팔로군은 큰 타격을 입은 채 옌안으로 철수해야 했다. 중공은 존립을 위협받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1943년 말부터 일본이 남방전선의 악화로 화북에 배치된 많은 병력을 남방으로 보내고 또한 이치고 작전을 시작하면서 중공에 대한 압박이 약화되었다. 국민정부군 또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일본과 국민정부의 견제에서 벗어난 중공은 다시 빠르게 세력을 회복해 나갔다. 국민정부군과 일본군 양쪽 모두 심한 상처를 입은 반면, 공격에서 비켜나 있었던 중공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중국군의 지휘권을 놓고 장제스와 대립하고 있던 스틸웰은 본국 정부에 일본군의 공세에 중국군이 무너진 이유는 장제스가 항일보다 공산군과의 싸움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하였다. 또한 장제스가 옌안에 대한 봉쇄를 풀도록 압력을 가해줄 것과, 공산군을 일본군과의 전투에 투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의 주장은 친구였던 마셜의 지지를 받았다. 루즈벨트 행정부는 1944년 6월 부통령 월레스(Herry A. Wallace)를 충칭으로 보내어 장제스에게 중공과의 화해를 권유하였다. 9월에는 헐리(Patrick Jay Hurley) 소장이 대통령 특사로 파견되었다. 그는 충칭과 옌안을 부지런히 오가며 양측의 조정을 맡았다.
미국의 방침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장제스 정권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권으로 인정하면서 기존 체제 속에 중공 정권을 흡수시키고 모든 중국군을 하나로 통합하여 지휘권을 일원화한다는 것이었다. 헐리는 국공 양쪽이 조금씩 양보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낙관했지만 그는 복집한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국민정부는 중공을 합법적인 정당으로 인정하되 공산군을 국민 정부군의 일부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것은 중공이 그동안 건설한 군대를 포기하라는 뜻이므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장제스로서도 이 문제를 덮어놓은 채 중공과 협상할 수는 없었다.
서로 독자적인 정부와 군대를 운영하면서 이데올로기도 전혀 다르고 자신들이 주도하는 세상을 원하는 두 진영이 타협할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정권을 빼앗으려는 쪽과 정권을 쥐고 내놓지 않으려는 쪽, 갈등을 해결할 방법은 중국을 두쪽으로 나누던가 어느 한편이 승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그들이 가진 고정관념에 따라 중국 공산당에 대해 소련과는 무관하며 중국에 있는 여러 정당 중의 하나로만 여겼을 뿐이었다. 루즈벨트는 원칙적으로 중국을 아시아의 새로운 파트너로 삼을 생각은 있었지만, 막상 이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또한 그가 말하는 중국이 곧 장제스 정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더욱이 옌안에 체류하면서 중공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미 국무성 관료들과 저널리스트들은 완고하기 짝이 없는 장제스보다 오히려 마오쩌둥이 더 온화하고 민주적이며 서방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미국은 국공의 뿌리깊은 갈등이나 공산당의 실체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던 것이었다. 수개월 동안 무익한 노력 끝에 헐리도 자신의 임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보다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헐리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본격적인 내전 준비도 한층 가열되었다. 팔로군은 제2차 국공합작 당시에만 해도 3개 사단 4만 5천명에 불과했지만, 1945년 초에는 정규군 91만명과 민병대 220만명의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중공이 직접 지배하거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지역은 약 100만㎢에 인구는 전체 중국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1억명에 달했다. 북쪽으로는 내몽골에서 동쪽으로는 산둥성, 서쪽으로는 닝샤성, 남쪽으로는 하이난다오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 곳곳에 19개의 공산당 해방구가 있었다.
물론 중공의 심장부인 산간닝 변구를 제외하고는 중공이 말하는 해방구의 대부분은 실제로 전투를 통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탈환한 것이 아니라 주로 국민정부 통치구역과 일본 점령지에 침투하여 지하조직을 건설한 양면촌(兩面村)이었다. 따라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중공이 장제스 정권을 위협하는 최대의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1945년 4월 23일 옌안에서 열린 제7차 중공 전국대표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자신만만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실력의 뒷받침 덕분이었다. "새로운 중국이냐, 그렇지 않으면 낡은 중국이냐. 두 개의 미래가 중국 인민과 중국공산당 앞에 놓여 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광명의 운명을 쟁치하고 암흑의 운명을 반대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임무이며 전 중국 인민의 임무이다. 우리는 일찍이 지금처럼 강대했던 적이 없다. 우리 당은 중국 인민의 해방의 중심이 되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 중심이 되고 있다."
또한 "우리 군대(팔로군, 신4군 및 기타 공산군대)를 확충하는 한편, 일본이 점령한 모든 지역에서 광범위하고 자발적으로 반일 무장조직을 조직할 것과 잃은 영토를 수복할 것, 국민당에게는 의존하지 않는다"라는 지시를 당 지도부와 전군에 하달하였다. 그는 중국의 빈곤과 악정, 봉건적인 잔재는 모두 장제스 정권 때문이며 일본과의 전쟁에는 소극적이면서 독재를 강화하고 도처에서 공산군을 공격하고 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국민당의 일당독재 폐지와 모든 당파가 참여하는 연합정부를 구성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는 일시적이고 과도기적인 단계일 뿐 중공의 최종적인 목적은 "마르크스리즘에 의한 중국의 사회주의 혁명에 있다"는 점을 숨기지 않았다. 즉, 마오쩌둥의 전술은 장제스 정권과 국민당을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전 반대와 국공이 대등한 관계에서의 권력 지분을 요구하는 등 한쪽에서는 정치 공세를, 한쪽에서는 대화를 제안하면서 상대를 분열시키는 공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이는 당장은 중국의 패권을 놓고 정면 승부를 벌이기에 승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장제스는 공산당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헐리에게 중공이 독자적인 무력을 보유한 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소위 "연합정권론"이란 허울 뿐이며 결국 정권을 탈취하여 중국 전체를 장악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어차피 국민당이나 공산당, 기타 군소 정당 등 중국의 어떤 정당도 4억 5천만명의 중국인을 대표할 수 없으며, 국민당 일당 독재는 폐지하되 국민의 극소수를 대표하는 정당 연합이 아니라 쑨원의 유지에 따라 현재의 과도기적인 훈정을 중단하고 민주적인 헌법의 제정과 국민 총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장제스의 약속은 1945년 5월 17일 충칭에서 열린 국민당 제6기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식으로 결의하였다. 또한 중공측에게도 서한을 보내어 선거에 참여하라고 촉구했지만 중공은 장제스 정권이 구상하는 어떤 선거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양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4월 초 아무런 성과도 없이 워싱턴으로 일단 돌아온 헐리는 기자회견을 열어 국공 회담의 결렬은 전적으로 중공의 책임이며 미국은 장제스 정권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서 지지한다고 선언하였다. 중공 대표단 역시 국공회담의 중지를 선언한 후 옌안으로 철수하였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소련의 속셈
한편으로, 장제스에게는 속셈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련도 골치거리였다. 중일전쟁 초반 소련은 2억 5천만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군사 원조와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여 중국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미국과 구미 열강이 일본의 눈치를 보느라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의 원조가 없었다면 중국은 버티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은 대단히 교활했으며 철저하게 소련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였다.
1939년 8월 노몬한 전투에서 완패한 일본은 소련의 막강한 군사력을 실감하고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동안 스탈린이 중국을 원조한 목적은 중국의 주권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시베리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위협이 사라지자 원조 또한 중단되었다. 오히려 1943년에는 신장성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국경분쟁을 일으켜 중국군을 공격하는 등 적대적으로 행동하였다.
또한 1945년 2월 소련 크림반도에서 열린 얄타 회담에서는 스탈린과 루즈벨트가 장제스를 배제한 채 소련의 대일 참전 대가로 밀약을 맺었다. 이는 주권 침해이자, 중국의 미래를 불확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 포츠담 회담에 참석한 처칠, 트루먼, 스탈린. 얄타에서도 배제당했던 중국은 포츠담 회담에도 초청받지 못한 채 연합국의 주요국에서 변두리 세력으로 밀려나 버렸다. 이치고 작전의 패배로 중국의 위상이 완전히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 사진 출처 : https://ja.wikipedia.org/wiki/%E3%83%9D%E3%83%84%E3%83%80%E3%83%A0%E4%BC%9A%E8%AB%87
2년 전 테헤란 회담 때만 해도 미국이 소련의 전쟁을 도와준다면 독일이 항복한 뒤에 반드시 일본에 선전 포고하겠다고 공언했던 스탈린은 막상 독일의 패망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태도를 바꾸어 온갖 참전 조건을 내걸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에게 빼앗겼던 남부 사할린의 반환, 쿠릴 열도(일본명 치시마 (千島) 열도)의 할양, 다롄-뤼순항의 조차, 중둥철도 및 남만주 철도의 중소 공동 관리, 중국은 외몽골의 독립과 소련의 보호를 인정할 것, 제정 러시아 시절 만주에서 누렸던 권익을 보장할 것 등. 스탈린의 의도는 제정 러시아 이래 잃어버렸던 극동에서의 영향력을 되찾겠다는 의미였다. 평소 "스탈린의 친구"라고 자처하던 루즈벨트는 스탈린의 이중성을 비난하기는 커녕 즉석에서 동의하였고, 스탈린과 장제스 두 사람 모두와 사이가 나빴던 처칠은 침묵을 지켰다. 스탈린은 크게 기뻐하면서 독일이 항복하고 3개월 안에 대일전쟁에 참전키로 약속하였다.
물론 외몽골의 독립이나 뤼순항 조차 등 중국의 주권과 관련된 부분은 중국의 동의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장제스와 협의를 거쳐야 했지만, 루즈벨트는 장제스에게 일언반구의 언질조차 주지 않았고 '적당한 시기'에 알려주기로 결정하였다. 심지어 스탈린에게 자신이 나서서 중국을 설득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는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장제스가 미국의 요구를 현실적으로 거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소련의 개입이 중국이나 극동에 어떤 영향을 줄 지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
얄타 회담에 초청받지 못한 장제스는 강대국들의 이기적인 행태에 실망감을 감추지 않으면서 회담 결과를 우려했다. 그는 2월 11일 일기에 "결과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중국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루즈벨트가 스탈린과 처칠과 손을 잡고 우리를 모해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며 루즈벨트에 대한 일말의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도 장제스는 여러 루트를 통해 어느 정도 정보를 캐치했으나 포츠담 회담 직전에야 헐리를 통해 밀약의 전모를 통보받을 수 있었다. 장제스는 "뻔뻔하고 예의도 모른다"라며 분노를 터뜨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욱이 포츠담 회담은 패전 독일과 동유럽에 대한 것 외에도 일본에 대한 항복 권고와 전후 처리가 논의되었지만 얄타와 마찬가지로 중국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미, 영, 소 삼국이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결정하였다.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 "국치"라고 적었다.
얄타 회담 직후 서거한 루즈벨트를 대신해 대통령이 된 트루먼 역시 장제스의 편이 아니었다. 전후 유럽과 대일전쟁의 종결에도 정신이 없던 그는 중국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따라서 장제스의 처남이자 행정원장인 쑹쯔원(宋子文)이 이 문제를 놓고 논의하기 위해 워싱턴에 왔을 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였다. 당시 주소련 미국대사이자 대소 온건파(흔히 "대소 봉쇄의 아버지"라고 알려져 있지만)였던 조지 캐넌(George Frost Kennan)은 뒷날 "우리는 장제스 정권에게 충분히 경고했지만 우리의 충고를 무시하였다"라고 회고했지만 이는 사실 왜곡이며 자신들의 오판을 전가하는 것이었다.
칼자루를 쥔 쪽은 스탈린이었다. 재정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던 장제스로서는 미국과 소련이 맺은 밀약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설령 거부한다고 해도 미국이 소련의 편을 드는 이상 소련은 중국을 무시하고 얼마든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만주는 물론, 중국 북부 전체를 장악한 다음 점령 지역을 중공에게 넘겨 중국을 양분할 가능성도 있었다. 서남부로 밀려나 있던 중국으로서는 소련군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상황은 급박했다. 쑹쯔원은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하지만 독일이 항복한 후 동유럽에서 새로 점령한 영토를 관리하는데 모든 정신을 쏟고 있던 스탈린은 쑹쯔원에게 얄타 회담의 밀약부터 수락하라고 압박하였다. 스탈린의 푸대접 속에서 협상은 지지부진했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사막에서 눈부신 섬광과 함께 거대한 버섯 구름이 치솟았다. 인류 최초의 핵실험이었다. 그 위력은 당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TNT 2만톤과 맞먹었다. 그야말로 기존 전쟁의 양상을 바꿀만한 것이었다. 평소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스팀슨(Henry L. Stimson) 육군장관은 마셜 참모총장에게 원자폭탄의 개발에 성공했는데 그럼에도 소련의 참전이 반드시 필요한가 물었다. 마셜은 직답을 회피한 채 어차피 소련은 이미 만주 국경에 대군의 집결을 완료했으며 이제와서 반대한들 소련군의 공격은 막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소련의 참전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소련군이 개입한다면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어 미국 국민의 인명 손실을 줄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마셜의 대답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탈린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만주 침공을 개시하는 8월 8일까지도 집결을 완료하지 못한데다 심각한 병참난에 허덕였다. 또한 스탈린은 어디까지나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맺은 밀약에 의거해 개입하는 것이었다. 만약 미국이 얄타 회담을 부정하고 소련의 참전을 거부할 경우 굳이 마찰을 감수하면서까지 만주를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소련의 대일 참전이란 전략적인 필요성이 아니라 미국의 묵인 아래 극동에서 정치적 이익을 최대한 챙기는데 목적이 있었다.
마셜은 만주와 한반도에 배치된 약 70만명에 달하는 관동군과 중국 전선의 지나파견군 백만명이 일본 본토로 이동할 경우 미군으로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리라 우려했다. 그렇다고 미해군의 역량으로는 대한해협을 장악하여 일본과 한반도를 차단하거나 일본의 항구를 모두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들을 묶어놓기 위해서는 소련군의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다. 태평양 전구의 총 지휘를 맡고 있던 맥아더 역시 이에 찬성하였다. 해군 참모총장인 킹(Ernest King) 제독은 일본 본토를 직접 공격한다면 적어도 백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날 것이며,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본토 상륙 대신 일본의 해안선을 봉쇄하여 물자 유입을 차단하고 전략 폭격을 통해 고사시켜 일본이 스스로 항복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소련군의 참전에 적극 동의하였다.
7월 24일 마셜과 안토노프(Aleksei Innokentievich Antonov) 소련 육군참모총장 사이에 미소 전략 회의가 열렸다. 소련군이 언제 참전할 것이냐를 묻는 질문에 안토노프는 "중국과의 협정에 따라 정확한 날짜가 결정될 것"이며 대략 8월 말로 예상한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그는 마셜에게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계획이 있는가라고 묻자 마셜은 "선박 부족과 보급의 애로로 한반도 상륙 계획은 없다"고 대답하였다.
마셜은 소련의 참전에 대비해 양국 해공군의 작전범위만 논의했을 뿐, 지상 작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약도 두지 않았다. 덕분에 소련군이 어디까지 남하할지는 그들 마음대로였다. 트루먼이나 마셜은 아시아 문제에 아무런 지식도 정보도 없었다. 만약 그들이 좀 더 앞날을 내다볼 줄 알았다면 틀림없이 다른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1930년대 영국과 프랑스의 유화정책이 히틀러의 야심에 날개를 달아주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음에도, 미국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셈이었다. 결국 성급한 결정의 대가는 어차피 미국이 아니라 중국과 한국이 치뤄야 했다.
8월 6일 오전 8시 히로시마에 TNT 2만톤급의 위력을 가진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떨어졌다. 단 한발의 폭탄이 마치 거대한 운석이 직격한 것처럼 한순간에 도시의 태반을 날려버렸다. 10만채 이상의 건물이 전소되었고 14만명 이상이 죽었다. 이는 전쟁의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전부터 미국 내 스파이를 통해 맨하튼 계획을 알고 있었던 스탈린조차도 막상 히로시마 원폭의 결과를 보고받자 그야말로 공황 상태에 빠졌을 정도였다. 그는 즉시 내무인민위원회(NKVD, KGB의 전신)의 우두머리인 베리아(Lavrentiy Beria)에게 국가 최고 우선순위 사업으로서 원자폭탄의 개발에 총력을 다하라고 명령했다.
삼일 뒤인 9일 새벽 0시 150만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했다. 당초 공격예정일은 8월 11일이었지만 일본의 항복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스탈린은 스타브카(STAVKA, 소련군 총참모부)를 닥달하여 앞당긴 것이었다. 준비는 불충분했지만 소련군의 전력은 압도적이었다. 최일선이 돌파되자 관동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같은 날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다. 7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중국전선에서도 이미 4월부터 중국군이 광시성 탈환에 나서고 있었다. 광시성에는 일본군 제13사단과 제22사단, 제58사단 등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전세가 점차 악화되고 연합군이 중국 동부 연안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지나파견군 사령부는 광시성의 포기를 결정하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중국군은 추격에 나섰다. 장파쿠이(張發奎)의 제2방면군이 광시성의 성도 난닝을, 탕언보(湯恩伯)의 제3방면군이 구이린의 탈환을 맡았다.
4월 17일 제2방면군 산하 제46군 제157사단이 난닝 북쪽의 두안(都安)을 탈환했다. 5월 26일에는 제64군이 난닝을 탈환하는 한편, 후퇴하는 적군을 추격해 7월 3일 중불 국경의 요충지인 룽저우(龍州)를 점령하였다. 또한 제46군 주력은 류저우(柳州)를 공격하여 6월 30일 탈환하였다. 제3방면군도 제20군과 제26군, 제94군이 구이린을 삼면에서 포위하여 일본군 제13사단 제104연대와 일주일에 걸쳐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이들을 격퇴하고 7월 28일 완전히 점령했다.
광시성에서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낸 중국군은 "카보네이도 작전(Operation Carbonado)"을 수립하여 광저우와 홍콩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타 전구 역시 중국 전역에 걸쳐 총반격을 준비하였다. D-Day는 9월 초였다. 화북에서는 중공군이 공격에 나서 허베이성과 산시성, 산둥성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이 점령지를 버리고 동쪽으로 철수하면서 국공의 경쟁 또한 더욱 거세졌다.
8월 14일 쑹쯔원은 스탈린을 설득하여 중소우호동맹조약(中蘇友好同盟条约)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중국은 외몽골의 독립을 승인하되, 소련은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국민정부를 승인하며 중공을 지원하지 않을 것, 신장성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보장할 것, 소련군의 남하 한계선과 12월 말까지 중국 경내에서 철수하기로 약속하였다. 그것을 얼마나 지킬지는 전적으로 스탈린의 마음에 달려 있었지만 어쨌든 땅에 떨어졌던 중국의 권위는 다소나마 회복되었다.
다음날인 8월 15일 오전 10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전쟁을 중단한다는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제국 신민'들에게 울려퍼졌다.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또다른 전쟁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국공 양 진영의 역량은 지난 20년 이래 최고조였다. 이 순간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칼을 갈아왔던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드디어 그 칼날을 서로를 향해 겨눌 참이었다.
ps. 그동안 꾸준히 새로운 자료를 모으며 준비했지만 이래저래 바쁘다보니 글 쓰기가 예전보다도 어렵군요. 어쨌거나 첫번째 편은 일단 업로드. 내용은 앞으로도 새로운 자료를 구할 때마다 계속 갱신할 예정입니다.
국공내전은 현대 중국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역사를 뒤바꾸었으며 중국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큰 전쟁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국과 타이완에서도 여전히 민감한 주제인데다 여타 전쟁사처럼 객관적이기보다는 중국인 특유의 문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옆에 있는 우리는 중국 관련 서적들은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지만 주로 경제서적이나 특정 공산당 정치가들의 평전에만 집중하는 실정입니다. 우리와 중국은 역사적으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가깝고도 먼 나라"입니다. 역사서들 역시 청대 이전의 역사서는 많지만 중국 현대사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비록 부족한 점 투성이겠지만 어느 한편에 기울기보다는 가급적 균형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 기술하려고 노력할 생각입니다. 또한 중일전쟁을 쓰면서 못 다한 이야기도 다룰 예정이오니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