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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요한 16,29-33
하느님은 뽑으실 때도 목숨을 거신다
역사상, 그리고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성직자의 부조리와 추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따른 그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쫓아내는 게 옳을까요?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를 데리고 다니실 때 세상 사람들이 가리옷 유다를 어떻게 보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마도 당신 사도로 존중해 주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그 응답에 대한 가치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 얘기는 잘 안 하지만, 저는 대통령 탄핵에 관한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민이 뽑아 놓았으면 임기 동안에는 그 책임도 국민이 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이것이 성숙한 시민의식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성직자를 뽑아주시든, 우리가 정치인을 뽑던, 하느님 앞에서 결혼 서약을 하던
그 선택에 관한 무게에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은 더 그렇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뽑는 분이 아니십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아내를 몹시도 사랑한 그는 아내가 남겨 놓고 간 하나뿐인 열 살을 갓 넘은 그의 아들을 더욱 사랑하고 정성을 다해 돌보았습니다만 아들마저 병을 앓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된 피츠제럴드는 그의 여생을 유명한 미술작품을 수집하며 그 슬픔을 달래려 노력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도 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난 뒤에 어떻게 재산을 처분할 것인가를 유언으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언에는 그의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밝혀 두었습니다.
그가 많은 돈을 드려 수집한 미술 소장품들을 경매에 부치라는 지시가 그 유언서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경매가 시작되자 제일 먼저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제목의 작품으로서 지방의 한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외아들을 그린 볼품없는 그림이 부쳐졌습니다.
그 그림은 인기가 없어 아무도 응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고 조용히 말했습니다.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그는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늙은 하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그림을 샀습니다.
그때 피츠제럴드의 유언을 집행하는 변호사가 경매를 중지시켰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피츠제럴드의 유언장을 읽었습니다.
“누구든 내 아들의 그림을 사는 사람이 내 모든 소장품을 갖도록 해 주시오.
이 그림을 선택하는 사람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임이 틀림없으므로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뽑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고 유치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성 마티아 사도를 뽑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냥 뽑기로 뽑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뽑으실 때는 전 재산을 거십니다. 목숨을 거십니다.
사제들은 당신의 목숨인 성체성사를 주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뽑은 이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만약 가리옷 유다와 같은 사람이라면
어때야 할까요? 미국의 생물학자 레인(Glen Rein)은 어떤 식의 기도가 암세포의 성장을 가장 억제하는지 실험해보았습니다.
우선 다섯 개의 세균배양 접시(petri dish)에 각기 똑같은 수의 암세포들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런 다음 한 심리치료사에게 다섯 가지 방식으로 기도해보도록 했습니다.
1. 암세포들이 자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 정상적으로 자라도록 해 주세요.
2. 암세포가 세 개만 남도록 해 주세요.
3. 신의 사랑과 연민이 암세포에 미치도록 해주세요.
4. 암세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을 보내주세요.
5. 암세포들을 파괴시켜주세요.
어떤 기도가 효과가 있었을까요? 결과는 이러했습니다.
1. 암세포들이 자연의 질서를 다시 회복해 정상적으로 자라도록 해 주세요.
암세포들의 성장속도가 39% 떨어졌다.
2. 암세포가 세 개만 남도록 해 주세요.
암세포들의 성장속도가 21% 떨어졌다.
3. 신의 사랑과 연민이 암세포에 미치도록 해주세요.
2번처럼 성장속도가 21% 떨어졌다.
4. 암세포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연민을 보내주세요.
아무 효과가 없었다.
5. 암세포들을 파괴시켜주세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저도 봉사자들을 뽑아놓고는 가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만두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일단 뽑는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뜻입니다. 창조했으면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잘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한다고 끌어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잘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이것이 뽑아 준 사람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암세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창조자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무리 구제 불능이라도 회개하여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이 마치 자녀를 낳는 것과 같게 합시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를 뽑으실 때 목숨을 거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사도행전 1,15-17.20-26
요한 15,9-17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의 종류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일차적 욕구 충족에서 오는 인간적이고 세상적 기쁨,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기쁨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기쁨입니다.
개인적으로 언제 진정으로 참 기쁨을 느꼈던가 돌아봅니다.
즐기는 운동이나 취미활동에 몰입할 때의 기쁨도 컸습니다.
목표했던 바를 성취한 것에 대한 기쁨도 컸습니다.
그런데 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약점이나 한계를 조금씩 극복해 나가는데서 오는 기쁨, 좀 더 쉽게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게 된 데서 오는 기쁨, 손톱만한 봉사지만 이웃들에게 작은 기쁨을 선물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기쁨, 사목적 헌신과 그 결과에 따른 보람에서 오는 기쁨...
결국 참된 기쁨은 육체적인 기쁨, 세상적인 기쁨을 넘어서는 기쁨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심연에서 느끼는 기쁨,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쁨, 영혼과 정신의 기쁨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최종적으로 추구해야 할 기쁨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복음 15장 11절)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란 표현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존재 자체가 주님께 기쁨이랍니다.
그분께서 간절히 바라시는 바가 기쁨 충만한 우리의 삶이랍니다.
성경 전반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는 기쁨과 환희입니다.
한 인간이 구원과 자유를 선물로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구원과 사랑이 선포되고 체험되는 곳에서는 기쁨이 샘솟습니다.
우리는 교회 전례 주년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축제를 지냅니다.
예수님 관련 축일들, 성모님 축일들, 여러 성인들의 축일...이런 축일들은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 기쁨이 얼마나 본질적인 측면인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기쁨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은총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주님의 현존과 다스림이 가져다주는 행복입니다.
기쁨은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동시에 충만케 해줍니다.
인간을 고무시키고 치유시킵니다.
인간 스스로를 완성시켜나가게 합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는 어떠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 기쁨이 있습니까?
구성원들은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그 기쁨은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며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기쁨의 원천이 되고 있습니까?
“내 기쁨은 주님, 나는 그 길을 따라 주님께 달려가네. 기쁨은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나를 돕기 때문에, 그 길은 아름답다네. 주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아무 주저없이 내게 당신을 계시하시네.
그분은 친구처럼 자신을 낮추시네. 내가 그분께 기댈 수 있도록 그분은 나와 같은 존재 되시네. 그분은 나의 자비시므로 그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네.”
(솔로몬의 찬미가)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마티아 사도 축일 강론>
(2024. 5. 14. 화)(요한 15,9-17)
<사도 직무, 신앙인들의 임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9-10).”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6-17).”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사도 1,23-26).”
1)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베드로 사도는 ‘사도 직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사도 1,21-22).”
‘우리와 동행한 이들’이라는 말은, ‘사도의 자격’을 뜻하고, ‘부활의 증인’이라는 말은 ‘사도의 직무’를 뜻합니다.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사도가 되려면 ‘동행’, 즉 ‘함께 함’이 중요하다고 그것만 강조한 것으로 보기가 쉬운데,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중요합니다.
긴 시간 동안 함께 하더라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후보자 가운데 하나였던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이라는 사람도 분명히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했지만, 적어도 마티아보다는 믿음과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에 사도로 뽑히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믿음과 사랑을 ‘끝까지’ 지키는 일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예수님을 믿었고 사랑했지만, 중간에 그 믿음과 사랑을 버렸습니다.
‘끝까지’ 가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가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2)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제비뽑기’ 라는 방식을 사용한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이상한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도 오늘날의 우리가 교황 선출 때에 사용하는 ‘투표’ 라는 방식을 본다면, 이상한 방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투표’ 라는 방식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간들이 결정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투표’ 라는 방식을 사용해도, 투표하는 사람들을 성령께서 인도해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비뽑기에도 성령의 인도가 작용한다고 믿는 것이 옳습니다.
방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성령께서 인도해 주시는 일이라고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요셉과 마티아 가운데 한 사람을 사도로 뽑기 전에 공동체가 함께 ‘기도’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됩니다.
그 기도는, 마티아가 사도로 뽑힌 일은 주님께서 교회의 기도에 응답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교황 선출 투표 때에도
‘기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3) 열두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들의 증언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사도들이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삶과 죽음’은 그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하느님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부활 체험’을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체험들도
사도들의 증언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모든 신앙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또는 하느님 나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믿음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로, 즉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인으로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서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모든 신앙인의 임무’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생활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혼자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어가야 하는 나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