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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묵상글 ( 10/19 22:55, 05:40, 09:15.)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2시반 이전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4시 ~ 05시반, 07시 이후 >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 고인현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 10/19 22:55 )
- 김찬선 신부님: (09:1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40 추가).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아직.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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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19 20:54
2026년 10월 20일 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2,35-38
주인이 혼인 잔치에 갔습니다.
그 시절 혼인 잔치는 여러 날 이어졌으니,
언제 돌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종들은 그저 기다립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 긴 옷자락을 걷어 올려 묶어,
언제든 곧바로 움직일 수 있는 자세입니다.
‘등불을 켜 놓고’ ― 어둠 속에서 문을 잃지 않도록.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기다림의 ‘결’입니다.
이 종들은 무서워서 떨며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올 분이 자기를 사랑하는 주인이기 때문에,
문 앞에서 발소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빠의 초인종 소리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말입니다.
두려운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하지만,
사랑하는 기다림은 마음을 환하게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한복판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종의 자리로 내려와 시중을 든다니요.
이제 종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벗’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와 교부들이 감탄했듯,
우리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최후의 만찬에서 실제로 띠를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러니 기다림의 끝에 있는 것은 심판의 공포가 아니라,
우리에게 시중드시는 사랑의 잔치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눈으로 보면
여기에 인내의 참모습이 있습니다.
인내는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등불을 켜 두는 일’, 곧 희망을 꺼뜨리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가 평화를 낳습니다.
밤중에 오시든 새벽에 오시든 그분은 오시기에,
우리는 서두르지 않아도 되고 절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말합니다.
“절제 있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복된 희망을 기다립시다”(티토 2장).
기다림은 게으름이 아니라, 깨어 있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의 기다림은 두려움인가, 사랑인가?
나는 어둠 속에서도 등불(희망)을 꺼뜨리지 않는가?
나는 언제든 응답할 수 있게 ‘띠를 매고’ 있는가?
나는 그분께서 도리어 나에게 시중드심을 믿는가?
주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당신을 기다리게 하소서.
어둠 속에서도 등불을 꺼뜨리지 않게 하시고,
깨어 기다리는 인내 속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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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19. 15:41
제국의 권세가 벌이는 허망한 놀음!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국과 결탁한 그리스도교는 복음의 참된 메시지를 땅속에 묻어버렸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제국의 권세가 벌이는 허망한 놀음!
2026년 10월 19일 월요일
리처드 신부는 제국의 시선이 어떻게 복음의 해석을 왜곡시켰는지를 성찰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제국과 얽히게 되자, 우리는 더 이상 산상설교의 첫 구절, 곧 "영이 가난한 사람은 복되다"(마태 5,3)를 자유롭게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황제들은 "영이 가난한 이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충성스러운 신민들이었고, 깃발 앞에 경례하며 규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국가 안보’를 절대시하는 체제를 원했습니다. 비폭력에 대한 어떠한 가르침도 사실상 20세기까지 지하로 숨어버렸습니다. 그만큼 제국과 결탁한 그리스도교는 복음의 메시지를 깊이 묻어버린 것입니다. 제국은 위와 아래, 안과 밖, 옳고 그름, 적과 친구를 명확히 구분하는 판단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 병폐가 교회를 얼마나 깊이 물들였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가 있습니다. 1054년, 로마 주교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라틴 교회와 그리스 교회의 전통을 대표하여—서로를 파문하였습니다. 아이러니를 느끼지 못한 채, 양측은 각자 자신들이 "승자"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이분법적이고 승패를 가르는 사고방식의 전형적인 승리였습니다. 서방에는 "신성 로마 제국"이, 동방에는 "비잔틴 제국"이 자리 잡고 있었고, 결국 두 교회는 서로의 대화를 사실상 중단해 버렸습니다.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은 세월이 흐르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스페인 제국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서방 라틴 가톨릭 신앙을 "신세계"에 전하였고, 그 영향은 제가 살고 있는 뉴멕시코 주에도 깊이 스며들었습니다.
이 제국들은 복음을 전하면서도, 위로부터 내려오는 권력 구조나 전쟁 수행, 재물 축적을 위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을 이어갔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체제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해석을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면 사람들은 저를 "이단자"라 부르곤 합니다. 아십니까? 1100년대까지는 대출에 이자를 붙이는 행위가 파문의 사유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말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이 세상의 유일한 "게임의 법칙"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돈벌이 체제와 너무나 밀착되어 있어서, 예수님께서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된다"(마태 19,30; 20,16 참조)고 가르치신 말씀은 우리에게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개인적으로도, 공적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국의 영향 밖에 머물렀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가톨릭 세계에서는 사막의 교부들과 교모들, 켈트 신앙 공동체, 그리고 탁발 수도회가 그러한 예입니다. 개신교 세계에서는 제국과 거리를 둔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재세례파 운동이었으며, 그로부터 메노파, 아미시, 왈도파, 브루더호프 공동체, 그리고 퀘이커 교도들까지 이어졌습니다(비록 퀘이커는 엄밀히 말해 재세례파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그리스도교는 단순한 삶,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태도, 국가 권력에 대한 맹세를 거부하는 자세, 그리고 세속 권력과 체제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이 공동체들은 어떤 국가에 의해 "공인된 종교"로 세워진 적이 없었고, 로마 제국이나 스페인 제국, 혹은 영국 제국의 국교가 누리던 특권을 향유하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그들에게 오히려 유익이 되었습니다. 일단 "공인된 종교"가 되면, 발언에 신중해야 하고, 진리를 자유롭게 선포할 수 있는 능력이 크게 제한되기 때문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미국 남부 복음주의권의 한 그리스도교 대학에서 교수로 있습니다. 제 공동체 안의 많은 이들이 현대 문화가 교회를 장악할까 두려워하는 모습은 큰 아이러니입니다. 사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그리스도교 제국주의의 흐름에 오히려 동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주변의 신자들이 언젠가 힘이 아니라 약함을, 옳음의 주장보다 사랑을 드높이는 날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 Aaron B.
Reference
Adapted from Richard Rohr, “Christianity and Empire,” Conspire 2018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18). Youtube.com.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오래된 돌들이 서서히 언덕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제국의 구조물들은 사라져 가지만, 땅에 뿌리내린 예수님의 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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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20 08:39
- 나와 공동체의 성장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에페소서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민족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던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적개심을 허물고 하나 되고 평화를 이루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리고 오늘 에페소서 끝부분에서는 ‘성전’과 ‘하느님의 거처’가 등장합니다.
서로 다른 민족과 사람들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하느님의 거룩한 거처로 함께 지어진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전으로 자란다는 것 곧 성장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하느님께서 머무실 장소로 바뀌어 간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마음 안에서 미움, 분노, 적개심, 시기심과 질투심,
이기심 같은 것들을 깨끗이 치워버리는 것 곧 정화일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우리는 외적 정화가 아니라 내적으로 정화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렇더라도 이것은 소극적인 성장이고,
적극적인 성장은 우리를 사랑, 평화, 연민, 용서와 같은 덕들로 채우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성령을 모심으로 성령의 궁전이 되게 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개인 성전의 성장이고
오늘 에페소서가 얘기하는 것은 공동체 성전의 성장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의 궁전이 되는 것뿐 아니라
같이 성전이 됨으로써 공동체 전체가 주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같은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고,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그분을 찬양하십시오.”(5장 19절)
수평적으로는 성시와 찬미가와 영가를 서로 화답하는 공동체요
수직적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함께 주님을 찬미하는 공동체입니다.
골로새서에서도 바오로 사도는 비슷한 권고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며칠 전에 비교적 젊은 부부들을 만났습니다.
얘기 중에 어떤 부부가 자기들은 기도를 같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다른 부부들이 참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부러워하였습니다.
같은 입에서 서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수 있고,
그 같은 입으로 같이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있는데
그들은 성시와 찬미가로 서로 화답하고 주님께도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들이 이들처럼 성시와 찬미가와 영가로 서로 화답하는 공동체,
그렇게 함으로써 함께 주님께 찬미를 드리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 공동체의 성장을 권고받고 공동체의 성장을 꿈꾸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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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20. 04:48
우리가 진정으로 깨어 의식해야 할 진리!
로마 군인들의 군복은 미니스커트였습니다. 빠른 속도로 전진하기 위해 그런 군복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긴 치마를 입고 있었기에 바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치마를 걷어 올려 허리에 두른 띠로 매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허리에 띠를 매라는 것은 "곧바로 행동할 채비를 갖추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실제 행동이 없고 그저 기다림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이 분부가 겉으로는 헛된 경종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는 묵상(명상)의 본질을 잘 묘사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묵상 안에서 우리는 완전히 깨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깊은 안식 안에 머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대개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아. 둘을 함께 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할 때만 깨어 있고, 멈추어 가만히 있으면 곧 졸거나 잠들어 버리곤 하기 때문입니다.
한 선승에게 "어떻게 명상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저 바위 앞에 앉아 깨어 있으면서 그것이 조금 자라나기를 기다리시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권고하십니다(마태 24,42; 25,13; 마르 13,33-37; 루카 21,36).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하려면, 유다인들의 혼인 잔치가 대개는 일주일이나 이어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종들이 졸아버릴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종들을 발견하면 그들은 행복하다"는 말씀은 새로운 "행복선언"처럼 들립니다. 루카 복음 6장의 짧은 행복선언 목록에 이것 하나를 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반전은, 주인이 돌아와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 오히려 주인이 그들을 시중든다는 점입니다. 곧 주인과 종의 역할이 뒤바뀌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신 것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한 것"(마태 20,28; 마르 10,45)이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깨어 의식해야 할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고 계신다는 진리!
그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무엇보다도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초대해 주시는 겁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깨어 준비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전한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리의 장벽을 허물어 주시고, 우리를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이끄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나그네나 이방인이 아니라,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 백성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기에, 그분의 시선은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준비는 단순하면서도, 또한 깊은 차원에서, 모든 상황 속에서 그 사랑의 하느님께 시선을 집중하고자 노력하며 그 사랑의 그윽함 안에 머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시고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간절한 갈망을 우리의 갈망으로 받아들일 때, 참으로 복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한 번 나누었던 시입니다만, 시인 조지 허버트의 시 하나를 오늘의 묵상 화두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나를 기꺼이 맞아들이려 하였네
하지만 내 영혼은 뒷걸음쳤네
크고 작은 죄가 많은 탓에
그러나 여전히 멈칫멈칫하는 나를 눈여겨보던
눈치 빠른 사랑은
내가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와 달콤하게 물었네
부족한 것이 혹시 있느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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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0.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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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우정 1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삶 (260924. 01:38)
http://www.ofmkorea.org/ofmkfb/585549
그리스도와의 우정 2 말씀에 굴복하는 자유 (260929. 05:37)
http://www.ofmkorea.org/ofmkfb/585739
그리스도와의 우정 3 그리스도가 다시 태어나는 자리 (261008. 05:18)
http://www.ofmkorea.org/ofmkfb/586084
그리스도와의 우정 4 기도와 삶의 경계가 사라지다. (261011. 02:12)
http://www.ofmkorea.org/ofmkfb/58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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