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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면 마을 이름 유래
○ 매월(每月)리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월평,월곡.월명동,매산.탑동(서봉리)의 일부를 합했다.
이 때 월평과 매산의 이름을 따서 매월리라 했다.
▶매월1리 - 월평(月坪)마을
월평의 월은 들판을 뜻하는 들야(野)를 달(月)로
바꿔 표기한 것으로 본다.
1구인 월평은 앞산과 뒷산이 반월을 구성하여 달의 첫자를 따서 "월"을 붙이고
평야지인 마을을 "월평",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을 "월곡", 서쪽에 있는 마을을
"월명"으로 부르고 있는데 통상 매월1구를 "월평"으로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월명 당산 느티나무
▶매월2리 - 매평(梅平)마을
1926년 입면초등학교가 설립된 뒤 흑석 저수지가 터지기 전
담양군 월산면에서 이성운이 정착, 마을이 형성됐다.
옹기점이 있어 점촌으로 불렸다.
매평의 매(梅)는 산을 뜻하는 뫼를
한자(漢字)로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본다.
옹기점이 있어 점촌으로 불리웠으며, 매화 낙지터의 명당이 있다하여 "매"자의
첫자와 평야에 위치하고 있어 매월2구를 "매평"이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음.
매평 당산 느티나무
▶매월3리 - 매산(梅山)마을
조선 순조때 김해 김씨가 정착했다 한다.
매화낙자의 첫 자와 서북쪽에 산이 많아 매산이라 했다고 한다.
매산의 매는 산을 뜻하는 뫼를 한자로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본다.
매화 낙지로서 "매"의 첫 자를 따고 북쪽에 산이 많아 매월3구를 "매산"으로 부르며,
현재에 이르고 있음.
매산리 소나무
○흑석(黑石)리
4백여 년 전 옥천 조씨가 설촌했다 한다.
청송 심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큰 들판이나 산과 연결된 들의 경우
감(아래아, 크다의 옛말, 산의 옛말)+
들>검들>검들이(껌들이)>검덜이>금들이>금들,
검들>껌들>검은들>검은달>검은다리,
검들>껌들>까만들>까막들로 변화했다.
이 마을의 경우 '거믄 돌'을 한자로
'흑석'으로 '금돌'을 한자로 '금평' 두가지로 표기했다.
상흑 하흑 노림을 합하여 1914년 흑석리라 했다.
본래 옥과군 입평면의 지역으로서 검은 돌이 있으므로
"검은들" 또는 "흑석, 금평"이라 하였는데 1908년에 창평군 입면이 되었다가
금평이 검은들로 변하고,"검은들"이 "검은돌"로 오인되어 "흑석"으로 되고,
"상흑리, 하흑리, 노림리"를 합하여 1914년에 흑석리에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흑석 팽나무
○대장(上大)리
▶대장1리 -상대(上大)마을
3백여년전 밀양 박씨가 정착했다.
1914년 대리와 장동 약천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리와
장동의 첫 글자를 따서 대장리라 했다. 윗마을을 상대마을이다.
본래 옥과군 입평면의 지역인데 1908년에 창평군 입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리"와 "장동" "약천"의 이름 일부를 병합하여 대리와 장동의 첫 글짜를 따서 대장리 하고 1구를 통상 대장리 윗마을에 위치하므로 "상대" 또는 "베점"이 "대점"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대점 당산 느티나무
▶대장2리 - 하대(下大)마을
3백여년전 창녕 조씨가 정착했다.
그 후 밀양 박씨, 광산 김씨 등이 입주했다.
대장리의 아랫마을이다. 마을 뒤 미랑산에 절터가 있다.
대장리 1구와 같이 "대리"와 "장동"의 첫 글자를 따 대장리라 하고 2구를
통상 대장리 아래에 위치하므로 "하대, 대판이" 등으로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음.
대판 마을입구 느티나무
○약천(藥川)리 - 약내(藥內)마을
고려 신종 때 한림학사 를 지낸 조통
(고려 중기 학자. 자는 역락(亦樂). 본관은 옥과(玉果).
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고공낭중(考功郎中)이 되었고,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구금되었다.
금나라 사람들이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이듬해 돌아와서
태자문학(太子文學)을 거쳐
지서북면유수사(知西北面留守事)가 되었다.
1199년(신종2) 동경초무사(東京招撫使)로 활동하였고,
좌간의대부 국자감대사성한림학사
(左諫議大夫 國子監大司成翰林學士)로 치사하였다.
최당·백광신 등과 기로회(耆老會)를 조직하여 유유자적하였으며,
이인로 등과 함께 해좌칠현(海左七賢)으로 불렸다.
경(經)·사(史)·백가(百家)에 두루 뛰어났다.
경주 김씨, 남평 문씨, 광산 김씨, 연일 정씨 등이 살고 있다.
돌안으로 불리웠으나 마을이름이 좋지 않아 고쳤다 한다.
동악산이 마을의 주산이므로 약수(藥水), 낙천(樂川)이라 했다.
1914년 장동일부를 합치고 약천리라 했다.
조통이 세웠다는 한림정에 관한 애기가 전하고 있으나
그 위치는 숲이 우거져 있을 뿐이다.
원래 양내(돌안)라 불리웠으나 동명이 나빠서 고쳐보자고 하여 동락산이 부락의 주산이 되었으므로 명산의 생수가 신선하여 "약수"라 "약천"이라 하였고, 1908년에 창평군 입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동 일부를 병합하여 약천리라 하여 곡성군 입면에 편입, 현재에 이르고 있음.
약천 당산 느티나무
○만수(萬水)리
▶만수1리 - 대곡(大谷) 마을
이 마을을 대굴 이라고 불렀다.
큰 마을을 대실 댓골 댓 말 이라하는 경우가 흔하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대곡이라 한 것으로 본다.
1914년 운치 노림 매산 상흑의 각 일부를 합하여 만수리라 했다.
만수리중 윗마을이어서 상만으로도 불린다.
옥과군 입평면의 지역으로서 물이 좋으므로 "만수동" 또는 "만수" "대굴"이라 하였다는데 (만민의 피난처여서 만수라 했다는 설도 있음) 1908년에 창평군 입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의 폐합에 다라 "운치, 노림, 매산, 상흑"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만수리라 하여 곡성군 입면에 편입되었으며, 만수리 중 윗쪽에 위치하고 있어 "상만, 대굴"등으로 불리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대골 당산 느티나무
▶만수2리 - 운치(雲峙) 마을
3백여년전 남원 양씨 양산익이 정착했다.
골짜기를 넘어가는 고개, 구부러진 고개,
산 고개를 구름재라, 구릉재라하여
한자로는 운형(雲形), 운치로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이 마을의 경우 운치로 표기했다.
만수리중 아랫마을이라 하만으로 불린다.
풍수설에 의한 지형이 "운중발용(雲中發龍)"이라 하여 洞명을 "운치"라고 칭해왔는데 언제부터인가 "언재, 운치, 운재"로 불리우다가 부르기 쉽게 "언재"로 현재까지 불리우며, 1914년 만수동과 합하여 만수리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며, 통상 만수2구를 "하만, 운치, 언재"등으로 부르고 있음.
언재 당산 숲
○금산(琴山)리
▶금산1리 - 상금(上琴)마을
3백여년전 창녕 조씨가 탑동(서봉리)으로부터 이주했고,
그 후손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1914년 내금, 외금, 상금, 택촌과
만수동 운봉 탑동 마산의 일부를 합하여 금산리라 했다.
이중 제일 위쪽 마을이 상금, 상짐산이로 불린다.
1908년에 창평군 입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다라 "내금, 외금, 상금, 택촌"과 "만수동, 운봉, 탑동, 마산"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금산리"라 하여 입면에 편입되었는데 원래 금산으로 불리다 동락산의 "락"과 맞추기 위해서 또는 마을 뒷산이 거문고처럼 생겼으므로 "금산"이라고 했다는 설과 함께 6대 면장인 정운학씨가 "금산"으로 바꾸어 제일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 "상금, 상짐산이"로 불리있음.
상금 당산 느티나무
▶금산2리 - 내금(內琴) 마을
4백여년전 전주 이씨가 입주, 대종을 이루고 있다.
금산리의 안쪽 마을이어서 내금, 안짐산이로 불린다.
금산리에서 안쪽에 위치하고 있어 "내금, 안짐산이"로 불리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내금 당산 느티나무
▶금산3리 - 외금(外琴) 마을
3백 여 년전 전북 순창에서 입주한 안동 권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금산리의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어 외금, 외짐산이로 불린다.
임진왜란때 이곳으로 피난을 많이 왔다고 전한다.
금산리에서 마을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외금, 외짐산이"로 부리고 있음.
외금 당산 느티나무
▶금산4리 - 택촌(擇村)마을
5백여년전 전북 남원에서 경주
김씨와 남원 방씨가 마을을 형성했다.
그 후 들어온 청송 심씨가 많다.
가려서 마을을 형성했다는 뜻으로 택촌이라 했다 한다.
장소를 가려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여 "택촌"이라고 불리고 있음.(논어의 이인편 의미 모방)
"澤村, 宅村"의 한문은 맞지 않고 "택말"이라고도 불리웠음.
택촌 당산 느티나무
○서봉(棲鳳)리 - 탑동(塔洞)마을
3백 여 년전 수원 백씨가 지금의 마을 뒷산 석간동에 정착하고
그 후 경주 최씨가 광주에서 입주했다.
이어서 밀양 박씨 박승종(朴承宗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효백(孝伯),
호는 퇴우당(退憂堂). 본관은 밀양(密陽).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다음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89년 봉교(奉敎),
이어 병조정랑 등을 거쳐
1600년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갔다.
1604년 부제학, 1607년 병조판서, 1610년(광해군 2) 형조판서를 거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고,
1618년 우의정으로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였다.
뒤에 영의정(領議政)에올라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하여졌다.
상위(相位)에 오르자 큰 비상을 주머니에 넣어 차고 다니며
<불행한 시대를 만나 조석(朝夕)으로 죽기를 기다리는데
어찌 이 물건이 없어서 되겠느냐>
하고 흐느끼곤 하였다.
1612년 이이첨의 사주로 윤인·이인경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할 때 수위(守衛)하였고,
1617년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반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아들 자흥(子興)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世子嬪)으로서
그 일족이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사실을 자책,
아들 경기 관찰사(京畿 觀察使)와 함께 자결하였다.
반정 뒤 관작이 삭탈되고 가산이 적몰되었으나,
뒤에 철종3년에 신원(伸寃)되었다.
마을에 있던 죽림사가 조선 순조 때 폐사되자
석간동에서 지금의 자리로 마을을 옮겼다.
이후 진주 강씨와 양천 허씨 등이 들어왔다.
1914년 탑동 가마 노동의 각 일부와
전북 남원군 방산리('아마, 지금 강건너 대강면 어느 마을)
일부를 합하여 서봉리라 했다.
봉이 죽림(竹林)에 산다하여 붙여졌다고 전한다.
절터에 탑이 남아있어 탑동이라 했다.
이전에는 봉죽(鳳竹)이라 했다.
창평군 입면의 지역으로서 서봉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탑동""가마"노동"의 이름 일부와 전북 남원군 방산리 일부를 병합하여 서봉리라 하여 곡성군 입면에 편입되었는데 서봉리란 명칭은 마을 뒤에 죽림이 무성하므로 봉이 서식하는 곳이라 하여 동명이 서봉리로 불리운다는 설과 봉이 서식하는 곳이라 하여 동명이 서봉리로 불리운다는 설과 본 면 2대 면장 신봉식씨가 본 부락으로 입주하여 부락 이름을 바꾸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길들일 서(棲)를 써 봉을 길들은다 해서 서봉으로 개칭(본인을 서봉리에 적응시키기 위함) 1955년 1.2구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름.
탑동 당산 숲
○제월(霽月)리
▶제월1리 - 곡촌(谷村)마을
이 마을은 골말이라 불렀다.
군촌 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 마을은 골(골짜기)+마을>골말로 변화했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골짜기 谷(곡)자와
마을 村(촌)자를 써서 곡촌이라 한 것이다.
1914년 군촌 곡천 탑동의 각 마을과
전북 남원군 소견곡면의 신기리 일부를 합해 제월리라 했다.
도산천이 달처럼 둘러싸고 흐른다고 해서 붙였다고 한다.
돌로 보를 만들어 고기를 잡는 살뿌리가 남아 있다.
본래 옥과군 입평면의 지역인데 1908년에 창평면 이비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군촌"과 곡촌" 하천 탑동의 명 마을과 전북 남원군 소견곡면의 신기리 일부를 병합하여 지형이 섬진강(도산천)이 달처럼 둘러싸고 흐르므로 "제월리"라 하여 곡성군 입면에 편입되었는데 군촌 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제월1구를 곡촌으로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골말"이라고 불리웠다고 전함.
곡촌 당산 느티나무
▶제월2리 - 평촌(坪村) 마을
군촌 동북쪽에 있는 앞들이 평평한 마을이다.
제월1구와 같으며, 제월리 중 군촌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앞 들이 평편하여 제월2구를
"평촌"이라 불리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제월3리 - 군촌마을
조선 여난군때 청송 심씨 심광형의 조부가 들어왔고,
심광형이 다시 새터를 잡아 마을을 형성했다.
이 군촌은 1520년대 심광현이 새터를 잡고 군지촌이라 했다.
그가 강학하던 곳이 군지촌정사(민속자료 155호)다.
함허정(涵虛亭)은 조선 중종(中宗) 38년(1543) 심광형이
이 지역 유림들과 풍류를 즐기기 위해 지은 정자로
호연정이라고도 한다.
증손자 심민각이 오래된 정자를
옛 터 아래쪽으로 옮겨 다시 지었으며
5대손 심세익이 고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80년에 수리를 한 것이다.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성은 마루 1칸을 3면을 터 만들었고 2칸 반은 방으로 꾸몄다.
나머지 오른쪽 반 칸은 바닥을 한 단 높여 쪽마루를 두었다.
이 풍광 좋은 곳에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후손들 중에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군촌(군지촌)은 1520년대에 심광정이 자손만대에 영세거주지 새 터를 잡고 "군지촌"이라
촌명을 정하고 자기 서제를 "군지촌정"이라 하였다. 이 마을을 군지라고 한 이유는 고대
순임금이 정한 12주중의 하나를 분주(分州)한 적이 있는데 자기가 낙향함을 순임금의
분주에 비하여 자손이 번영을 이어가라고 군지촌이라 정한 것이 1914년 가운데 "지"
자를 빼고 "군촌"이라 불러 현재에 이름.
군촌 함허정 숲
○창정(昌亭)리
▶창정1리 - 가마동(柯馬洞) 마을
250여년전 청주 한씨가 전북 임실에서 입주했다한다.
1914년 가마 노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창정리라 했다.
큰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을 뜻하는 표현은 많다.
크다라는 옛말은 감(아래아)이었다.
큰 골짜기마을=감(아래아)+골>감아골>가마골>가막골>까막골로 변했다.
한자로 쓰면서 '까막'을 '까맣다'
또는 까마귀를 연상해 까마귀 오(烏)로 쓰거나,
'가마'를 가마솥으로 보고 釜(가마솥 부) 또는 轎(가마 교)로,
소리나는 대로 '加馬', '加幕'으로 적기도 했다.
이 마을의 경우 釜자를 써서 부동으로 하다가,
소리나는 대로 가마동으로 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마을지형이 가마솥모양이라고도 한다.
옥과군 입평면의 지역으로서 창정이라 하였는데 융희 2년(1908)에 창평군 입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다라 "가마""노동"의 이름 일부를 병합하여 "창정리"라 하고 곡성군 입면에 편입됐는데 통상 창정리 1구를 가마솥 모양으로 창정리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가마 '부'자를 따서 "부동"으로 불리다 "가마동"으로 불리워 현재에 이르고 있음.
가마동 느티나무
▶창정2리 - 창정(昌亭)마을
1955년 1월 분구되어 창정리 2구로 됐으나 통상 창정으로 부르고 있다.
창정 당산 버드나무
▶창정3리 - 노동(蘆洞)마을
마을 산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마을의 경우
산골짜기 마을=갈+골>갈의골>갈애실>가랫골>가래골로 변화되었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갈을 갈대로 보고 노동이라 적은 것이다.
창정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창정리 3구 "노동"(창자)로 불리었으나
현재 3구도 "창정"으로 많이 부르고 있다. 1955년 1월 분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입석(立石)리
▶입석1리 - 하립(下立)마을
3백 여 년전 경주 김씨 가 정착했고,
이어 청송 심씨, 인동 장씨(장형용 선조),
천안 전씨, 광산 김씨, 등이 입주했다.
선돌(거석기념물로서 연대(年代)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적은 수에 지나지 않지만, 신석기시대부터 초기 금속기시대에 걸쳐
대부분이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돌은 단독으로 세워진 것이 대부분이고,
때로는 쌍으로 세워지거나 동일장소에
여러 개가 세워지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 규모는 일정하지 않지만,
주로 인공(人工)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높이 1∼2m인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간혹 원래부터 있던 6∼7m 규모의 기둥모양의 큰돌을
선돌로 삼은 경우도 발견된다.
현재 전해지는 선돌에는 제사신앙이 수반되어 있어
부락민의 신앙대상으로 신격화 되기도 하고,
또 특이한 전설 등을 지니고 있어
부락민의 절대 불가침의 대상으로 보호받기도 한다.)
이 있으므로 선돌 또는 입석이라고 했다.
1914년 월산리를 합하여 입석리라 했다.
입석 아래라 하립, 아랫선돌로 불린다.
옥과군 입평면 지역으로서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 또는 "입석"이라 하였는데 융희 2년(1908년 창평군 입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월산리를 병합하여 "입석리"라 하고 곡성군 입면에 편입됨. 한편 입석리 1구를 임석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하립"'아래선돌"로 불리어 현재에 이름
▶입석2리-상립(上立)마을
상립, 웃선돌로 불린다.
옥과군 입평면의 지역으로서 선돌이 있으므로 "선돌" "입석"이라 하였는데 입석2구가 1구
위에 있는 마을이므로 "상립" "웃선돌"로 불리어 현재에 이르고 있음.
상입석 버드나무와 팽나무
○삼오(三梧)리
▶삼오1리 - 궁동(弓洞)마을
5백 여 년전 정씨가 거주했다 한다.
4백 여 년전 밀양 박씨 박경홍이 충북 영동에서 입주, 대종을 이루고 있다.
정묘호란때 순사(殉死)한 박언배(의병장(義兵將)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창의 황주전투 등 수차례 전공을 세우고
인조 10년 안주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가 전사하자 초혼장을 지냈는데,
장례를 하던 날, 부인 이씨가 두 살난 아이를 시숙(媤菽)에게 부탁하고 자결했다.
자결하면서 “지아비가 나라를 위해 죽었는데, 어찌 지아비를 위해 죽지
않을 것인가”란 말을 남겼다고 한다)가 후손이다.
박언배와 부인 완산이씨를 기리기 위한
도지정 문화재 51호 충렬각(박연의 5대손인 박언배가
조선 인조5년 (1627) 정묘호란이 일어난 후 의병장으로 안주싸움에 참가하여
전사하자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완주이씨 또한 뒤따라 목숨을 끊었고
이들의 충(忠)과 열(烈)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과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인 박연을 기리는 오봉사가 있다.
1914년 오리동과 연자 삼응을 합하여 삼오리라 했다.
옥과군 입평면의 지역인데 융희 2년(1908) 창평군 입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리동" "연지""삼응"을 병합하여 "삼응"과 "오리"의 이름을 따서 "삼오리"라 하여 곡성군 입면에 편입되었는데 삼오 1구는 단종 계유년 사육신의 화로 중조 한림공이 사육신과 한날 순절했고 형제 숙질이 함께 죄를 입어 그 여파로 옥과 설산으로 쫓겨와 월명산 아래 오리동에 한 암자를 지어 경학을 힘쓰며 세상사를 뜬구름같이 보고 부귀를 초개같이 여기시어 호 "퇴락"을 "월오헌"이라 했다.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오리동"이라 했다가 그후 언제부터인지 "궁동" "오록굴" 등으로 현재까지 불리움.
궁동 느티나무
▶삼오2리 - 삼응(三應)마을
삼오2리 150년 전 김해 김씨가 입주, 후손들이 살고 있다.
삼오리 1구와 같고 "동" "삼오" "연지촌"과 3개 부락이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고 하여
삼오리 2구를 "삼응리"라 불러 현재에 이름
▶삼오3리 - 연지(蓮地)마을
방죽이 있는데 연꽃이 많아 연지리 연촌 연지촌으로 불린다.
삼응 서북쪽에 있는 부락으로 삼오2구에 속해 있다가 1983년 분구되었으며 인근에 "쌍방죽(연방죽)"이 있는데 연꽃이 많이 피어 연꽃의 못을 본떠서 "연지리"라 하며, 통상 삼오 3구를 "연촌" "연지촌"으로 불러 현재에 이름.
○송전(松田)리
▶송전1리 - 송전(松田)마을
옥과군 수대곡면 지역으로 소나무밭이었다한다.
솔밭, 송전이라 불리고 있다.
1914년 송전 기동 내동 합강의 각 일부와
입면 노동 일부를 합하여 송전리라 하고 옥과면에 속했다.
1983년 송전 1,2,3,4구 4개 마을 모두가 입면에 편입되었다.
옥과군 수대곡면의 지역으로서 소나무밭이었으므로 "솔밭" 또는 "송전"(풍수설에 송학하전형국)이라 불리우고 있는데 융희 2년(1908)에 창평군 입면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송전리" 기동" "내동" "합강리"의 이름 일부와 입면 노동 일부를 병합하여 "송정리"로 개칭, 옥과군에 속하였다가 1983년 2월 행정구역 개편으로 송전 1.2.3.4구 4개 마을 모두가 입면에 편입되었으며, 통상 송전1구를 "송전"으로 부르고 있음.
▶송전2리 - 기동(基洞)마을
샛터골에 터를 잡아서 신기동이라 부르다가 기동으로 불린다.
마을 앞 골짜기를 지금도 샛터골이라 부른다.
▶송전3리 - 내동(內洞)마을
송전리중 안마을이라 내동이라 칭한다.
안골이라고도 불렀다.
임진왜란 의병장인 유팽로(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형숙(亨叔)·군수(君壽), 호는 월파(月坡). 개국공신 만수(曼殊)의 후손으로, 경안(景顔)의 아들이다. 천성이 효우(孝友)하였다고 한다.
1579년(선조 1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옥과현에서 살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대박·안영(安瑛) 등과 함께 궐기하여,
피난민 500명과 가동(家僮) 100여명을 이끌고 담양에서 고경명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여기에서 고경명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는데,
그는 고경명 휘하의 종사(從事)가 되었다. 당시에 기호지방에 돌린 격문을 지었는데, 그 격문이《정기록 正氣錄》에 실려 있다.
호남의병들은 처음에 근왕(勤王)을 목적으로 북상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이 전주를 침입하려 하자 금산에서 적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전투에 앞서, 적의 수만의 병력을 오합지졸인 아군으로써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험한 요지에 분거(分據)하였다가 적이 교만하고 나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 싸움에서 패전하였다.
일단 탈출한 그는 고경명이 아직도 적진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그를 일단 구출하고는 끝내 전사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대사간에 추증되었으며,
뒤에 광주(光州) 포충사(褒忠祠)와 금산 종용당(從容堂)에 제향되었다.
이 때 유장군의 말이 유장군의 머리를 물고
그의 생가인 합강리로 돌아왔다고 전한다.)
의 말을 묻었다는 의마총이 마을 앞 논밭가운데 있다.
송전리 중에서 내부에 있는 안마을이라 "내동"이라 칭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송전리 서북쪽에 위치함. (옛날에는 안골이라고도 불리웠음)
내동 이팝나무
▶송전4리 - 종방(鍾舫) 마을
1932년 황무지에 종연방직에서 뽕나무밭을 만들고,
잠실5동과 주택 다섯채를 지어 옥과 양잠장이라 불렸다.
지형이 배와 같고 배가 입,출항 당시 종이 울린다는 뜻으로 "종방"이라 명명하였으며,
일제 말기 옥과군 송전리로 되었다가 1983년 2월 행정구역 변경으로 입면 송전리로 편입,
송전4구를 "종방"으로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음.
종방 당산 느티나무와 잘린 팽나무
※ 출처 : 인터넷 검색 +입면사무소 자료임.(틀린 부분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사진은 한봉수 갤러리님의 작품에서...
첫댓글 참으로 오래도록 귀하게 우리의 터전이 되어주는 고향
마을마다가 간직한 의미와 내력을 접하며 선조들의 숨결을 느낍니다
이 자료 하나만으로도 동악산기슭 제1집이 기대됩니다
깊이 있고 다양한 자료를 구하시느라 애쓰신 은공이 길이 칭솔될 것입니다
늘 이런 격려에 많은 힘을 얻게 됩니다.
"동악산기슭(제1집)" 발간을 추석전으로 계획을 하였는데 사무실 일도 많아져서 걱정이 앞서고 초조해집니다.
좋은 자료들 선정하여 틀을 잡고 편집하는데 많이 도와 주세요...우선 되는대로 이메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방금 한봉수 갤러리님께도 마을이름 유래와 마을당산나무 사진 확인 좀 해 주시라고 보내 드렸답니다.
고맙습니다...
자랑 스럽습니다. 입면. 종일님.
동악산 기슭 1집 발간 기대됩니다.
네... 고맙습니다.
아마도 이런 자료(당산나무 사진)는 최초가 될 것입니다.
몇년에 걸쳐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발품을 마다하지 않고 노거수(老巨樹)인 고향 마을 당산나무를 촬영하기란 말은 쉽지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은 쉽지 않지요.
이런 귀한 노력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타향살이 하면서 태어난 마을의 유래와 당산나무의 발가벗은 모습과 옷을 입을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한봉수 동악갤러리님께 감사드립니다...
선배님?
이 내용들은 [입면향토지]란 책에 모두 나와있는거 발췌한것 같은데요? 사진은 아니지만.. 내용은 거의 일치해요.
몇몇 마을들의 당산나무들, 입석들, 정자들 세세하게 나와있던데...참고하시길...!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정보였는데 더 구체적인 자료가 있다니 반갑네요...
그 책 좀 구해 주실 수 없으신지요?
택촌, 저희 마을이 500년 전에 형성됐군요! 저희 마을에서 시집가신 분들이 '댁몰(택말)떡'이라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마을 당산나무 사진을 보니, 무심한 세월이 느껴집니다. 70년대 우리 꼬맹이들에게 여름날 풍성한 그늘을 드리워주던 그 많던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마을 생성 500여 년을 함께 했던 사라진 나무들이 그립네요~~
방현기 갤러리님...
반갑습니다. 건강은 어떠신지요.
건강한 몸으로 동악인에게 감명을 주는 글, 예전처럼 가끔 올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리는 많은 팬들을 위해서요...댓글 감사합니다...
고향에 대해 많은걸 알게 해주시는군요 나의 본적인 언재 랑 우리 할머니 께서 문화유씨셔서 유월파 장군제사며 말 이야기 등 등 막연히 듣던 이야기 정리 해주시내요 ㅎㅎㅎ 뿌리를 알고 고향 을 생각 하니 새롭 습니다 항상 노력 하시는 선배님 건강 하십시요 ^^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고 유익한 정보가 삶에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좋은 음악 자주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댓글, 게시글, 운영자님...님이 진정 동악산기슭카페의 주인이십니다...
선배님 고맙습니다
네...감사합니다...
닉네임 변경에 어려움이 있으시면 제게 연락 주세요...(010-4743-1829) 도와 드리겠습니다.
내고향 입면이 자세하게 알고보니 이렇게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마을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나니까 더욱더 애향심이 마음속깊이 듭니다
지기님을 비롯하여 운영자님 모든분들이 각고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동악회가 활성화되지 않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동악카패에서 여러가지를 터득하고 배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운영자님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네...님의 댓글에 힘이되고 많은 격려가 됩니다.
동악갤러리님들과 여러 운영자님들과 함께 보람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초고가 교정까지 어느정도 마무리 된듯합니다.
역사적인 고증과 재확인이 필요한 부분도 있지만 일단 원전(이 초고를 옮겨온 글)이 옳다고 인정하고
진행해도 무방하겠습니다.
초고 작성과 교정에 참여해주신 분들 수고 많았습니다.
한봉수님께서 발품 팔아 촬영한 입면 마을들의 당산나무 사진이 제 위치에 들어 갔다는 말씀이시죠?
확인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박종민 갤러리님께서도 어제 밤 02시 넘도록 초고를 보아 주시고 계시더군요...
너무 좋고 훌륭한 작품들이 많아서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책이 두꺼우면 견적이 많이 나와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