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三寶)는
불보. 법보. 승보의 3보(三寶)를 이르는 말로,
보(寶)는 귀중하다는 뜻이다.
불보(佛寶)는
부처님들을 의미하며 깨달았다는 뜻이다.
법보(法寶)는
부처님이 말씀한 교법(敎法)으로 모범이 된다는 뜻이다.
승보(僧寶)는
교법(敎法)대로 수행(修行)하는 자(者)를 말하며
화합(和合)이란 뜻이다.
불법승(佛法僧)은,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제자(승려)" 로 흔히들 알고 있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의 불법승은 3개가 아닌 하나로,
한마음 즉 일심 (一心)이다.
노고추(老古錐)의 최고봉인 원효 스님은,
일심(一心)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의지할 것도 없다고 했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歸一心源),
널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를 해야 한다.(饒益衆生)
이는 결국, 일심으로 보살이 되라는 뜻으로
불법승이 하나인 일심인 것으로 단정지었다.
그럼에도 최근 일부 불자들은
마치 3보가 “출가한 스님”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원효 스님은
승보(僧寶)는,
무량한 공덕을 담으며
여실하게 수행하는 자(者)라고 한정했다.
(無量功德藏 如實修行等)
나아가 승보는 중생으로 하여금 의심을 없애고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며
부처님의 종자(種子)를
끊어지지 않게 하는 자(者)여야 한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에 의해
승려들은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몰래 마을에 가야 할 정도로
그 위상이 노비와 다름이 없었다.
요즘은 승보(僧寶)는커녕 중놈들이 너무 건방지다.
어쩌다 지금은 승려들에게
3 배(三拜)의 예를 취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하나의 관행으로 굳어지는 폐해를 낳았다.
칠순의 노인에게도 3배(三拜)를 받는 중놈들은
출가와 동시에
카스트제도의 최상위 계층인 브라만 신분이 돼어
부처님 전에 보시하는 재가자들을 하인 대하듯 한다.
수행과 마음공부를 해야 할 승려들에게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하심(下心)은 찾아볼 수 없다.
3,4,6대 조계종 종정이셨던 고암 스님은
신자들에게 큰절을 못 하게 하고 악수만 했다.
유마경(維摩經)에 이르기를
무엇이 여래의 종자(種子)인가?
신체가 있음이 종자가 되며,
무명과 생존에 대한 집착이 종자가 되며,
탐욕과 화냄과 어리석음이 종자가 되며,
전도가 종자가 되며,
번뇌가 종자가 되며,
마음가짐(七識處)이 종자가 되며,
삿된 법이 종자가 되며,
괴로운 것이 종자가 되며,
선하지 아니한 길이 종자가 된다.
즉 62 종의 사견(邪見)과
일체의 번뇌가 다 부처의 종자(種子)가 된다.
사견(邪見) 즉 잘못된 견해는,
사실을 알지 못해 혼미하여
잘못 아는 어리석음과 무명과 함께 생겨난다.
사실(事實)은 눈에 보이는 진실이고
진실(眞實)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이다
중생들의 번뇌는,
관찰(見)로서 제거해야 할 번뇌들이 있다.
단속으로서 제거해야 할 번뇌들이 있다.
받아들이고 용서함으로서 제거해야 할 번뇌들이 있다.
인내로서 제거해야 할 번뇌들이 있다.
피함으로서 제거해야 할 번뇌들이 있다.
버림으로서 제거해야 할 번뇌들이 있다.
수행으로서 제거해야 할 번뇌들이 있다.
산목숨을 죽이면 자비종자(慈悲種子)를 끊어지고,
도둑질을 하면 복덕종자(福德種子)가 끊어지고,
음욕(淫慾)을 하면 청정종자(淸淨種子)가 끊어지고,
거짓말을 하면 진실종자(眞實種子)가 끊어지고,
술을 마시면 지혜종자(智慧種子)가 끊어진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삶은 철저한 인과응보법칙에 좌우된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삶과 후생(後生)의 종자가 결정된다.
그러니 행복한 미래를 위해
나는 항상 귀한 복덕의 종자를 심어야 한다.
주인이 담배를 피우면
함께 사는 반려견은 암 발병률이 6배나 높다.
최근 의과대학 증원에 반대하여
저항에 대한 결의를 보이기 위해
일부 교수들이 삭발 시위를 했다.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기는
유교문화가 남은 중국에서도
정부에 투쟁하는 삭발을 한다.
투쟁을 위해 삭발(削髮)을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중국뿐이다.
일본에서는 저항보다 사죄의 의미로 삭발을 하며,
이란에서는 여성들이 국가권력에 대한 항의 표시로
가위로 머리카락을 상당부분을 잘라내는 시위를 한다.
머리카락은 잘라내도 다시 금방 자라기에
그런 어리석은 시위는 안하는 게 좋다.
아버지가 삭발시위를 하면
자식에게도 그 종자(種子)가 전해진다.
노고추(老古錐)란,
장인(匠人)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함으로 인해서
단련되고 다듬어져서
끝이 닳아 무디어진 송곳이란 뜻으로,
불교에서는 무섭게 정진하는 단계를 넘어
원숙한 경지에서 노니는 도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마철저(磨鐵箸)는 수행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노고추(老古錐)는 수행자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바닷가의 몽돌들이
수많은 세월의 파도에 부딪치면서 둥글어 지듯이
세속의 삶도 그와 같다.
이 세상은 중중무진연기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란,
이 법계(세계)가
단순한 평면적 연기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중 삼중으로 얽히고설킨
연기관계(緣起關係)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곧 인연이 겹치고 겹쳐 끝이 없다는 뜻이다.
서로 인연되어 만난 사람들끼리는
서로 존경하며 존중하고 아끼면서 살아야
좋은 종자(種子)가 달리게 된다. <쇳송. 3319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