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석 전 중아일보 대기자
88서울올림픽 개최 3주 전인 1988년 8월 하순 노태우 대통령은 여러 대학의 젊은 교수 10여 명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을 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일본의 조총련이 1980년 이래 해마다 평균 2400억 원의 자금을 한국에 보내오고 있습니다. 최근 8년간 약 2조 원의 돈이 들어왔는데…. 이 돈의 대부분은 대학 운동권의 지원 자금으로 쓰이고 있어요.“
서울대 S 교수가 물었다
-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이고 있습니까? .
”… 여러 갈래로 쓰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우려되는 것은 우수한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켜 언론계에 침투시킨다는 것입니다. 80년부터 현재까지 약 800명이 신문·방송사에 침투해 있습니다. 매년 평균 100명 꼴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젊은이들이 각 언론사에 침투되고 있는 셈이지요.“
”…“
”올림픽을 끝낸 뒤 뭔가 조처를 해야 하겠는데…“라며 뒷말은 흐렸다.
당시 고려대 한 교수는 ”대통령 말을 들으면서 8월 초순 안기부 요원이 연구실로 찾아와 고려대학에서 활동 중인 주사파 학생들의 계보도(系譜圖)를 보여 주던 일이 떠올랐다“고 했다.
88 서울올림픽을 하던 1988년엔 국민이 올림픽을 성공시키는 데 한마음이어서 어느 때보다 활기찼고 그러면서도 평화롭고 질서 있던 때였다. 그런데 대학가는 붉게 물들어 반한(反韓) 정서(情緖)가 무르익어 있었다. 왜 대학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을까? 이것 역시 5·18의 산물이라는 것은 놀라움으로 되돌아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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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사태 직후 김일성 집단은 처녀 젖가슴을 도려내고 임산부의 배를 대검(帶劍) 으로 찌르는 등의 사진을 만들어 대한민국을 ‘인민학살’ 정권으로 몰아, 때마침 열리는 IPU(국제의원연맹) 총회에서 한국 국회를 축출하는 공작에 활용했다.
당시 한국도 국회 대표단을 구성해 북이 다녀간 나라들을 돌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 광주사태란 데모 군중도 무장해 있었던 폭동이었다.
△ 전문적으로 훈련된 집단이 주도한 폭동이었지만 군중은 다수가 시민이어서 군은 무력 사용을 절제했고 이 때문에 진압에 위험이 따랐고 군의 희생이 컸다.
△ 북이 배포한 사진은 90%가 북에서 연출해 만든 가짜 사진이다. 무장 대치했던 10일간의 소요에서 인명 손실이 1백60여 명 선에 그쳤다는 것은 군이 무력 사용을 최대한, 억제했다는 살아있는 증거다. ‘학살(虐殺)이란 당치 않다.
△ 이 사태를 조종 지도한 것으로 보이는 잘 훈련된 북한 공작원에 대한 조사는 현재 진행 중이다.
’제3진영‘으로도 불리던 나라들도 한국 대표단의 이런 설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래서 북한의 한국 국회 IPU 축출 공작은 꺾었다. 그러나 이 사진을 활용한 대남공작을 정부는 놓쳤다. 왜 그리 허술했을까?
1970년대 들어서면서 북의 간첩 작전이 군사기밀 탐지 못잖게 남한적화 공작으로 주력을 옮기고 있었지만, 한국의 관계기관들은 그 부문엔 어두웠던 것일까.
우선 4·19를 기점으로 남한의 규범과 질서를 흔드는 혼란 조성과 주사파 양성 등 공산당식 진지전에 주력을 이동한 북의 대남공작을 헤아릴 수 있는 김일성 지령(88년 이전 것) 중, 대학 공작에 연결되는 일부를 추려 보자.
○ … “남조선에는 고등고시에 합격만 되면 행정부, 사법부에 얼마든지 잠입해 들어갈 수가 있다. 머리가 좋고 확실한 자식들은 데모에 내보내지 말고, 고시 준비를 시키도록 하라. 열 명을 준비시켜서 한 명만 합격된다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니까 각급 지하당 조직들은 대상을 잘 선발해, 가지고 그들이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고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 주어야 한다.”(1973년 4월, 대남공작원과의 담화)
○ … 우리 북반부에서는 민간단체는 없지만, 남조선에는 그 이름도 잡다한 민간단체가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 측이 만든 민간단체도 적지 않다. 남조선 당국자들을 반민족적 분열주의 세력, 독재집단으로 몰아붙이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단체를 만들어 남조선 인민 가운데서 통일의 열망을 쌓아 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1972년 8월, 제1회 남북적십자회담대표들과의 회담)
○ … 남조선에서 들여온 영화, 비디오를 보니까 거기에도 재능있는 작가 예술인들이 많다. 그런데 그중에서 잘 나간다는 몇몇 작가들을 제외하고 절대다수가 실업자나 다름없는 형편이다. 이들에게 혁명적 세계관을 심어 주기만 한다면 훌륭한 걸작들이 얼마든지 쏟아져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지하당 조직원들은 남조선의 작가 예술인들을 더 많이 포섭하여 혁명가로 만들고 그들이 외롭지 않게 똘똘 뭉쳐서 혁명적 필봉을 들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묶어 세워야 한다.(1976년 8월 대남공작원들과의 담화)
○ … 과거에는 학생들에게 군, 입대를 기피 하도록 선동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남조선의 사회환경이 달라졌고 학생들의 의식도 달라졌다. 남조선 군대가 식민지 고용병이고 또 군대의 위상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오히려 자원입대하도록 적극, 교양해야 한다.
대 국군 공작을 보다 성공적으로 벌여나가기 위해서는 학생운동에서 검열되고 단련된 핵심들을 집단 입대시켜서 그들로 하여금 동료 사병들을 의식화하고 포섭하도록 하여 군대 내에 조직을 부단히 확대시켜 나가야 한다. (1988년 8월 대남공작원과의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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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훈령은 1973년 고시 준비생 포섭에서 1988년엔 대학생을 군에 입대케 해 동료 병사를 의식화하는 데 활용하라는 데까지 진전되어 있다. 김일성에 충성을 서약한 주사파 학생들이 대학생 대부분의 의식화에 성공했다는 보고를 사실로 받아들인 김일성의 훈령(訓令)이다.
김일성의 남한 대학 진단은 착오가 아니다. 88년 무렵 남한의 대학은 주사파가 장악해 있었다.
남한의 대학을 붉게 물들인 그 출발은 5·18의 사진이 큰 몫을 담당했다. 북이 제작한 5·18의 사진들 - 군인의 학살이라고 할 끔찍한 사진들은 대입 준비하느라 소설 하나도 읽지 못했던 사회성 제로의 대학 신입생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깡그리 앗아가고 그들 가슴에 몸서리칠 정도의 지독한 미움, 조국과 정치·경제 지도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심었다.
북의 정치 선동, 남한 주사파의 선동은 남한을 지옥으로 그린다. 대한민국을 깨우고 일군 주류세력을 독재, 부패, 억압, 착취, 친일, 친미, 등 거짓과 모략으로 깎아내리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대립과 증오를 키운다. …한마디로 터무니없는 선동들을 고스란히 사실로 믿게 한 것이 이 사진이고 5·18의 과장이고 날조다.
김일성에 충성을 맹세한 주사파가 어린 신입생을 그 무렵 유행하던 MT(멤버쉽 트레이닝)란 이름으로 세뇌하는 것은 이래서 일도 아니게 손쉬웠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런 대학의 실정을 얼마쯤 알고 있었을까?
되돌아보면 놓진 것들이 너무 많이 쌓여있다. 예를 들어 5·18의 진실을 알리는 보도를 통제한 것도 큰 실책이다. 그래서 주사파는 5·18을 맘대로 과장하고 날조해 잔인한 학살로 몰아갔고 학생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광주사태에만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 40년을 억압과 착취로 조작한 역사까지 ….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란이라는 3년의 처절한 전쟁 기간에도 보도를 검열하거나 통제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이 계엄법에 상관없이 이승만 대통령이 남겨준 이런 전례를 따랐더라면, 라는 것이 그래서 아쉬움이다.
북한은 가장 실패한 최악의 체제다. 그러나 선전 선동에서 남한을 압도하고 있다. 단적으로 지금 전라도 사람들의 하나 된 투표는 김정은의 편에 선 선택이다. …김정은은 남한의 국회, 법원 등 많은 것, 중요한 것들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단적으로 박근혜 탄핵의 진짜 배후는 김정은이라는 진단도 있다. 체제의 우열이 정치공작의 성패에 연결되지 않는 것일까.
미국 공화당 원로인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은 “미국과 서구의 문명이 중국 공산주의 체제에 의해 압도되고 지배될 수 있는 심각한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시진핑 체제가 미국 자유 체제보다 나은 것들이 있어서가 아니다. 서구 문명을 파괴하는 공산당의 무한전쟁을 막는 것이 그리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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