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을 찾아서
신세를 져라, 그리고 갚아라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43호(2023.06.15)
김광일(경영84-89)
MBK 파트너스 대표
스승 곽수근 이름 딴 장학사업으로 10억 기부
“인생 고비마다 받은 은혜 되돌려주는 것”
1학년때 뽑은 장학생 변하는 모습 흐뭇
대담·글 : 하임숙 (영문91-95)
채널A 보도본부 부본부장
머리는 좋고 집은 가난했던, 그 시절 많은 서울대생 중 한 명이었다. 교수를 꿈꾸며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어느 날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 됐다. 이미 회계사 자격증이 있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회계사가 요즘처럼 기업 경영의 감시자 역할을 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문가로서 사회에 기여하는 직업이 뭘까. 변호사였다. 조영래(법학65-69)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선배들이 등불이 됐다. 그렇게 변호사가 된 뒤 10년간 신나게 일했다. 한국 최대 로펌에서 인수합병(M&A) 전문가로 명성을 날렸다. 어느 날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왔을 때 망설이지 않았다.
한국의 토종 1호 사모펀드(PEF) 운영사로 현재는 아시아 최대 PEF로 커진 MBK파트너스 김광일 대표 이야기다.
이미 많은 언론에서 PEF 대표로서의 그를 다뤘기 때문에 홈플러스, 한미캐피탈, 롯데카드, HK저축은행, 네파, 오스템임플란트, 메디트 등 성공한 투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모교에 누적 10억원의 장학금을, 그것도 스승 곽수근(경영73-77) 경영대 명예교수의 이름으로 내놓은 기부자 김광일을 만나 본다.
-성공한 사업가가 모교에 기부를 하는 사례는 종종 있습니다만 본인 이름이 아닌 스승의 이름으로 기부를 하는 건 매우 특이한 일인데요.
“사실 제 인생의 고비마다 교수님을 찾아가 상담하고 길을 결정했습니다. 어느 길을 가라고 가르쳐주시진 않았지만 시간과 마음을 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셨죠. 선한 영향을 주신 거죠. 제가 특별한 게 아니라 교수님이 특별하신 거예요. 저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을 옆에 두셨거든요. 그러니까 교수님의 호를 딴 ‘덕송 장학금’은 제가 영광스럽게도 선점한 겁니다(서울대는 경영대 학생 중 선발된 사람들에게 덕송 장학금에서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교수님과 인연의 시작은요.
“교수님이 73학번인데 서울대에 첫 부임한 뒤 제가 1호 조교였습니다. 대학원 석사 과정에 회계학 전공으로 들어간 거죠. 저하고 10살 정도 차이 나는데, 당시엔 교수님처럼 공부해서 대학 강단에 서고 연구하는 게 제 꿈이었어요.”
-어쩌다 학계에서 업계로 방향을 트셨나요.
“저 진짜 공부 잘 했거든요. 공부는 너무 재미있었고 교수님들도 저를 되게 예뻐하셨어요. 한 학기를 마치자 어느 정도 투자해서 어떤 길을 걸으면 교수가 될 수 있겠다, 감이 오더라고요. 그런데 당시엔 다들 가난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였는데 과외하면서 대학원도 다니고 집에 생활비도 좀 드리려니 도저히 끝까지 갈 자신이 없는 거예요. 마침 누님이 독일에 공부하러 가겠다 해서 더 여유가 없었고요. 그렇다고 대기업 직장인은 되기 싫고…. 전문가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직업군이 뭘까 고민하다 변호사가 괜찮겠다 판단했어요.”
-당시에 이미 회계사 자격증을 따셨다면서요.
“사실 돈만 벌려면 그냥 회계사 하면 됐어요. 부모님을 안정적으로 모실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전문직업인이면서도 민주화투사로서 역할을 했던 선배 변호사들을 보며 저도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교수님께 변호사 시험을 보겠다는 말이 도저히 입에서 안 떨어지더라고요. 첫 조교가 한 학기 만에 전공도 바꾸겠다 해야지, 당연히 조교도 그만두겠다 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웠겠어요.”
-처음 교수님 반응은요.
“제 형편을 너무 뻔히 아니까…. 한참을 바라보더니, 그것도 잘 할 것 같다며 한 번 해봐라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이미 제가 조교도 아닌데 어느 날 전화를 걸어와서 ‘너 고시공부하면 돈도 없는데 OO에 취직해라’ 하시더라고요. 어느 투자자문사 경리과 대리로 취직시켜주신 거였어요. 저는 일주일에 두 번만 나가서 전표 정리만 하면 나머지 시간을 제가 마음대로 쓸 수 있었어요. 덕분에 과외에, 전공을 바꾼 대학원 공부에, 고시공부까지 다 했습니다.”
-몸이 세 개이신 건가요.
“그렇죠, 힘들었죠. 되게 힘들다 보니 첫해 시험은 2차에서 떨어졌어요. 그땐 세상이 참 암담하더라고요. 펑펑 울면서 289 종점에서 신림사거리까지 걸어갔어요. 부모님은 연세가 계속 드시고 몸도 안 좋으신데, 돈도 벌어야 하고 고시공부는 쉽지 않고…. 그때도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전화 통화 말고 얼굴은 1년 반 만에 뵈었는데 점쟁이에게 묻듯 ‘어째야 좋겠습니까’ 했어요. 교수님이 그렇다고 점쟁이처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시진 않고 다만 방향을 알려주셨어요. 교수님이 ‘변호사 시험 보겠다고 할 때 네 눈이 호랑이 눈처럼 이글이글 불탔는데 오늘은 그게 안 보인다. 그 마음을 다시 살릴 수 있으면 계속 하고, 아니면 그만 둬라’ 하시더라고요. 순간 벼락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 다음해에 2차까지 붙었습니다. 기적 같았죠.”
-첫 기부의 시작은 언제였나요.
“2009년, 제가 교수님 만난 지 20년 되던 해였어요. 당시엔 돈이 별로 없었을 때라 2000만 원을 갖고 시작했습니다. 돈이 너무 작아서 교수님께 여쭤봤어요. 교수님 이름으로 장학 사업을 하고 싶은데 너무 적어서 혹여 누를 끼치지 않을까 싶어서요. 교수님이 하라고 하시더니 며칠 있다가 이메일을 주셨어요. ‘광일아, 하는 건 좋은데, 니가 돈도 많지 않을 테니 중간에 힘들면 그만해도 돼’라고요. 본인 이름의 장학회가 시작된 뒤 어느 날 사라지면 사실 안하느니만 못하잖아요. 그 말씀이 가슴에 너무 남아서 그게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제가 당시에 ‘교수님 제가 그래도 할 때까진 해 볼게요’ 했어요. 나중엔 교수님 정년퇴직 때까지만, 하다가 이제 교수님 은퇴하신 뒤에도 하고 있네요. 교수님도 나중에 5000만 원 보태셨고요.”
-기부액의 총 목표액이 있나요.
“없습니다. 이게 약간 ‘대나무 물주기’ 같은 건데요. 2000만원부터 시작해서 돈이 생길 때마다 1000만원, 2000만원, 많은 땐 5000만원, 나중에 돈 좀 벌었을 땐 1억 원, 이런 식으로 보태서요. 그러니까 14년 동안 쌓인 거라서요. 금액이 목표가 아니고 우리 장학금만의 목표는 있어요. 일단 우리 장학생이 되면 장학금 수여 기간을 떠나서 평생 모임에 나와야 합니다. 또 장학생들이 언젠간 받은 금액의 두배를 장학금으로 기부하는 겁니다. 통상 2000만 원 정도 받는데 4000만원씩 내놓으면 장학금이 시스템으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물론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1세대 장학생이 직장에서 자리 잡고 가정을 안정적으로 꾸린 뒤 돈을 내놓기까진 아직 멀었겠네요.
“그렇죠. 1세대가 아직 30대 중반이니까. 저희가 반기에 한 번씩, 1년에 두 번 정도 모입니다. 감사한 것은 1년에 1~3명 뽑는 이 장학생들이 대부분 다 다른 일을 하고 있어요. 공무원, 방송국 PD, 로스쿨 졸업생, 스타트업 직장인 등 엄청 다양해요. 저는 교수님이 저한테 해주셨듯이 제가 이 학생들에게 공감해주고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그러면 이들은 스스로 그 다음을 향해 걸어갈 힘을 얻어 가더라고요.”
-겉은 장학 사업이지만 사실은 멘토 역할을 하시는 거네요.
“제가 학생들에게 정기모임만 아니라 수시로 찾아오라고 해요. 교수님도 학교에 계실 땐 연구실로 오라 하셨고, 저도 아무 때나 오라 그러는데 다 오지는 않더라고요. 마음이 아프고 좌절하면 찾아오더라고요. 원래 그렇잖아요. 잘나가면 문자로 안부만 간단히 묻고요. 찾아오는 학생은 제가 일보다 우선권을 둬서 밥도 사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곤 해요. 놀라운 건 1학년 2학기 때 선발된 이 장학생들이 학교 졸업할 때는 못 알아보게 변해서 나가요. 하고 싶은 일, 공부하는 내용, 사람의 성격까지 다 바뀌어 있어요. 제가 그 과정에서 조금의 영향은 줬겠죠.”
-장학생이 누적 총 몇 명인가요.
“저희 장학회 멤버가 올해로 30명쯤 됐습니다. 09학번이 1기 멤버잖아요. 이제 2학기에 23학번이 들어오거든요. 놀라운 건 자기들끼리 멘토링을 해요. 제가 멘토링 하듯이 경험도 전공도 직업도 다양한 선배 기수들이 후배들을 만나서 상담하고 들어주고 이끌어주곤 합니다.”
-타 장학회가 본받을 만한 운영 사례네요.
“제가 우리 스승님께 도움 받지 않고서는 무슨 수로 이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도 2개나 보고, 혼자 다 헤쳐 왔겠습니까. 항상 필요할 때, 절박할 때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줬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잖아요. 그런 점에서 늘 교수님께 은혜를 갚고 싶었고, 장학금 만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동창신문이니, 혹시라도 신문을 볼 재학생들에게 한 말씀해 주신다면.
“자신의 능력, 가능성, 내게 다가올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작은 어려움이 와도 넘어서기 쉽지 않아요. 오히려 더 깊은 좌절에 빠지기 쉽죠. 그런 점에서 스스로 자존감을 챙겨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남에게 신세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서울대생들이 통상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려 하는데 곽 교수님이 늘 제게 해주신 말씀은 ‘남에게 신세를 많이 지라’는 거였어요. 베푸는 게 아니라. 그 대신에 꼭 기억하고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거예요. 복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고 사람한테서 온다고, 정말 힘들 때 누군가 나서서 도와준다 하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해준다면 그게 다 복이 오는 거라고요. 그럼 감사히 받고 나중에 여유가 될 때 신세진 사람에게가 아니라 사회에 똑같이 돌려주면 된다고요.”
김 대표는 워낙 크게 기부하는 사람들이 많은 마당에 인터뷰 대상이 된 사실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다. 또 자신이 아니라 곽수근 명예교수가 인터뷰를 했어야 한다고 끝까지 아쉬워했다. 하지만 곽 교수로부터 김 대표, 또 장학생으로 이어지는 선한 영향력의 선순환 고리는 장학금 규모를 떠나 그 끝이 누구에게 닿을지 예측할 수 없기에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