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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鑑戒(감계)》^^
1. 머리말
한반도의 역사는 5,000년이 이어왔고 앞으로 무궁하게 이어 갈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역사의 감계로 삼아야 할 것이다.
감계 鑑戒란 교훈이 될만한 본보기, 지난 잘못을 거울로 삼아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하는 경계이다.
지나간 우리의 역사를 살피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자.
극히 일부분의 역사적 단면을 살펴 봄으로 우리의 일반 상식을 보충하고
애국하는 마음을 고양 高揚하는데 일조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 선덕여왕의 지혜
뛰어난 智慧와 豫知力의 知機三事
선덕여왕은 632년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지기(知幾)라는 말은 어떤 일이 현상으로 일어나기 전에
미리 그 조짐을 안다는 뜻이다.
-선덕여왕의 지혜와 예지력-
<<삼국유사>> <선덕왕이 세 가지 일의 기미를 알아채다善德王知幾三事>
뒷 부분에서 오른쪽에서 일곱번째 줄.
이미 드러난 현실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법인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안다는 것은
어지간한 지혜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이다.
지기삼사 중 첫 번째 일화는 다음과 같다.
당나라 태종이 붉은빛, 자주빛, 흰빛의 세 가지 빛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온 일이 있었다.
여왕은 그림의 꽃을 보고는
“이 꽃은 필경 향기가 없을 것이다.”고 말하면서
씨를 뜰에 심도록 하였는데, 꽃이 피어 떨어질 때까지
과연 여왕의 말처럼 향기가 전혀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놀랍게 여겨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모란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란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매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의 배우자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타난 지기는 초능력적인 예지라기보다는
선덕여왕의 세심한 관찰력과 뛰어난 분석적 판단력이다.
꽃에는 으레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인데
그 그림에는 벌과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았으니
향기가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 일화 속에는 당태종과 선덕여왕의 수준 높은
지혜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당태종은 남편 없이 혼자 사는 여왕을 향기 없는
모란에 비유해 은근히 조롱하고, 당태종의 의도를
간파한 선덕여왕은 ‘향기로운 황제의 사찰’ 분황사를 설립하며
그의 공격에 한수 높게 대응한다.
일찍이 남다른 지혜를 보여 준 선덕여왕은 왕이 된지 5년 째 되는 해에
개구리 울음을 듣고 적을 물리침으로서 사람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한다.
경주 성진리 강가에 있던 영묘사라는 절의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어댄 일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이상히 여겨 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왕은 급히 각간이었던 알천, 필탄 등에게 명하여
정예병 2,000명을 뽑아서 속히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찾아가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모두 죽이라고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각각 군사 1,000 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었다.
부산(富山)이라는 산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00 명이 와서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이고 또 뒤따라온 후속부대 1200 명도 모두 죽였다.
여러 신하들이 놀랍게 여겨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개구리가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 분황사 석탑 : 분황사도 선덕여왕때 건립된 사찰이다.
-여근곡 안내판-
왕이 대답하기를,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의 형상이다.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경(陰莖)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 빛은 서쪽을 뜻한다.
그러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또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다.
백제의 군사가 신라의 여근곡에 숨어 있으므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러움과 슬기로움에 탄복하였다.
선덕 여왕의 지혜로 신라는 백제군을 간단하게 무찔렀다.
신라로서는 크게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쉽게 적병을 무찌른 셈이다.
여근곡(女根谷)은 실제로 경주 근교 건천에 소재한 골짜기로
그 모양이 여성의 성기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여근곡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옥문지(玉門池)의
‘옥문’과 여근곡(女根谷)의 ‘여근’을 연결시키고
‘성난 개구리’와 ‘백제군’을 연관시켰다.
-여근곡-
여기에 ‘여성=음=백색=서쪽’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적용하여
적군의 위치를 정확히 지목해낸다.
마지막으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다.” 라고 말한 부분은
이 일화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 화랑세기의 내용처럼 신라시대는 남녀관계가 매우 개방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 황남대총 옆 황남리 고분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신라 토우는
나체와 과장된 성기, 성교 중인 모습 등 화랑세기 처럼 표현이 거침없다.
이런 토우는 다산을 염원하는 의례적 목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등에서 출토된 다양한 형태의 신라 토우는 나체와 과장된 성기, 성교 중인 모습 등 화랑세기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21세기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1400년 전에 선덕여왕은 남자 신하들 앞에서 거침없이 풀이하고 있다.
여왕의 말을 들은 신하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오히려 신하들이 당황했을 법하다.
그러면서 선덕여왕의 지혜와 담대함에 경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경주 오봉산 여근곡(女根谷)~(100627) -
왕이 아무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곳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되어 과연 왕이 붕(崩 :왕이 죽음)하였고
여러 신하들은 왕을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3. 고모산성에 신라 목조건물 발견
5세기 신라 대형 지하목조건축물 발굴
- 5세기 신라 지하목조건축물-
문경 고모산성.."규모 최대, 상태 최상"
12x6m에 3층 구조, 기능은 미상
5세기 무렵 신라시대 대형 지하목조건축물이 문경의 한 고대산성에서 발굴됐다.
무엇인가를 저장하기 위한 창고나 저수지일 가능성도 제기되는 이 건축물은
지금까지 백제시대 유적에서만 몇몇 사례가 보고된
그 어떤 삼국시대 지하목조건축물보다 규모가 크고,
나아가 보존상태 또한 매우 양호하다는 점에서
한국목조건축술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단법인 중원문화재연구원(원장 차용걸)은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산 30-3번지 일원의 고모산(해발 231m)에 위치하는
고대산성인 고모산성 중에서도 서문지(西門址) 주변부를 중심으로
지난해 12월 이후 2차 추가연장 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성 내부 삼각형의 넓은 평탄대지에서 상ㆍ중ㆍ하 3층으로 이뤄진
지하식 목재구조물을 확인했다고 10일 말했다.
조사 결과 이 목조건축물은 땅을 파고 내려간 다음 가공한 목재를 이용해
수평방향 목재(들보)와 이와 연결되는
수직방향 목주(木柱.기둥)를 상호 교차해서 얽어 만들었으며,
벽체는 횡판목을 맞물리는 방식으로 축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위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는 마치 바둑판식 격자 모양이며,
위로 올라갈 수록 규모는 더 커진다.
이 건축물은 평면 장방형으로 전체 규모는 12.3m(남북방향) x 6.6-6.9m에 이르며,
밑바닥 점토층에서 상층에 이르는
높이는 4.5m(하층 1.4m, 중층 1m, 상층 2.1m)로 측정됐다.
상층에서 확인된 목주 27개를 기준으로 할 때
거대한 지하 벙커를 연상케 하는 이 건축물은 남북 9칸, 동서 4-5칸이었다.
조사단장인 차용걸 충북대 교수는
"지금까지 이와 같은 삼국시대 지하 목조구조물은
공주 공산성, 대원 월평동 유적, 금산 백령산성, 대전 계족산성, 부여 궁남지와 관북리,
이천 설성산성 등지에서 확인된 적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가 충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백제시대 유적"이라면서 "따라서 이번 고모산성 지하 목조건축물은
신라시대 유적에서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차 원장은 이번 건축물의 축조시기는
"토기를 비롯한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 중반 이전이라고 판단된다"면서
"이로써 본다면, 이 유적이 백제의 유사한 목조건축물보다 연대가 빠르다고 생각되며,
규모 또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인 점이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 5세기 신라 지하목조건축물-
월평동 유적을 비롯한 백제시대 지하목조구조물은
크기가 대체로 한 변 5m 안팎인 방형이다.
특히 이번 고모산성 건축물은 다른 어떤 곳보다
지금 막 건축한 모습을 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보존상태가 완벽하다는 점에서 비상한 주목을 끌고 있다.
이곳에서는 고배(굽다리접시)를 비롯한 신라시대 토기 외에도
지름 2.5-5㎝인 용도 미상의 원형 토제품과 마치 구유를 닮은 배 모양 목기,
도르래로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목기, 평면 형태
'A'자형인 측량용으로 추정되는 목기가 출토됐다.
나아가 이번 조사에서는 이 지하건축물과 인접한 지점에서 평면 방형 형태이며,
네 벽면을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혀가는 형식으로 축조한
630년 무렵 저수지(남북 8.5-8.7m, 동서 9.0-9.5m, 깊이 2.2m)가 확인됐다.
이 저수지에서는 바닥에 '沙伐女 上'(사벌녀상)으로 판독되는 명문이 기록된
청동완과 원숭이로 추정되는 동물 얼굴 형상을
네 면에 표현한 청동장식품을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사벌'(沙伐)은 지금의 경북 상주에 본부를 둔 신라시대 광역 행정구역 이름으로
지금의 도(道) 정도에 해당하며, 문경시 일대는 사벌주에 속했다.
고모산성은 2003년 문경시가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에 따른
문화유적 정비사업 일환으로 중원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2005년 이후 연차 학술발굴조사와 복원사업을 벌이는 곳이다.
철종 임금시에 돈의문을 지키던 수문 군졸 하나가
문밖에 붙은 괴서를 발견하고 놀라
사방을 휘휘 둘러보고 괴문서를 떼어냈다.
옥쇄까지 그려 넣은 이 벽서에는 죄 없는 백성의 목숨을
끊게 하였다 하여 이나라 조정을 우롱하는 괴서였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죄없는 백성
명덕성, 정윤화등 3명을 어명으로 죽였다하여
전국 백성들에 회자되고 있는 때에 붙은 벽서였고
이는 조정에 전해져 철종 임금에게 전해졌다.
'' 조선 나라 백성들에게 고하노라. 이 나라 삼천리는
임금도 신하도 없는 허수아비 나라로 변하였느니라.
나라를 지킨 충신 명덕성, 정윤화등을 죽이고
오랑캐의 나라 청국에 머리를 조아려 빌었으니
그 어찌 이 나라를 국왕이 있고 대신들이 있는 나라라고 하겠는가?
마땅히 가권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모두 다른 나라로 이사를 갈지어다.
경신년9월 조선국왕. ''
철종 임금은 치를 부르르 떨었다.
나라의 안전을 위해 부득이 조치한 것을 두고 임금이 아니고
허수아비라 능멸하는 백성이 있으니 이 어찌 뼈를 깍는 아픔이 아니랴.
이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청나라와 가까운 국경지대에서 나무꾼으로 살아가는
건장한 백성 세사람이 도끼로 큰 소나무를 찍고 있는데
말을탄 군병들 5명이 이들을 발견하고
약탈하려고 접근해서 무엇이든 내놓으라고 겁박하니
이중에 씨름장사인 명 덕성 등이 처음에는 움츠렸으나
도끼를 들고 나서서 남의나라 국경을 넘어와서 무슨 황당한 소리를 짖거리느냐며
호통을 치고 당장 물러나기를 요청하였으나 청 군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너희 목숨을 앗아가겠다고 난리를 쳤다.
이에 지지않고 나무꾼 세명은 도끼로
청군병 다섯을 살육하고 겨우 목숨을 구하고 집으로 돌아 왔다.
그뒤 며칠후 청나라에서 사신을 조선 조정으로 보내어
"조선 백성들이 청나라 국경을 침범하여 청군졸 5명을 살해하였으니
당장 그들 셋을 죽이고 앞으로 이러한 일이 없도록 조치를 취하라고 하며
협박을 하는 통에 조선은 일부 대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죄없는 백성들 셋을 죽이고 청나라와 화친을 구했다.
이는 구체적 사실을 확인하고 청나라가 먼저 국경을 범 했음을 밝히고
조선 백성들의 정당방위를 이야기하고
청나라의 국경 침입을 방지하라고 요구해야 함에도
당시 외세의 침입이 예상되는 바 청나라의 도움을 바래
죄없는 백성을 죽인 것을 두고 조정을 우롱한 벽서 였다.
조정에서 좌포장 우포장을 시켜 범인색출에 힘을 썻으나 한달이 지나도 범인은 잡지못하고
좌포장, 우포장은 귀양을 보냈다.
다시 시간은 흐르고 얼마후에 궁궐에 괴연이 날아들었다.
" 정도를 걸었다 자신하는 대신들은 조정에 계속 남을 것이며,
도가를 차렸거나 축첩을 거듭한 대신들은 자퇴 할 것이니라.
하늘이 무심타 하나 때로는 뇌우가 있는 법, 김대감네 용마루에 벽력 없으란 법 있을 손가.
용상을 흔들고 권력을 사사로이 그렸다 지우는 무리에게 화 있을 지니라.
미리 대문을 열고 창고문을 열지라.
엄히 일러노니 내 경희궁으로 이어 하기전에 행하기를 바라노라.
조선국왕 " 앞의 괴서와 같이 국왕의 옥쇄를 그린 국왕 이름의 교지와 같은 내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철종임금은 어수를 부르르 떨고 포도청에 죄인을 잡으라 엄명하니
죄없는 백성들이 다시 포도청 감옥으로 하나 가득 잡혀와서
국문을 받고 백성들은 점점 지쳐갔다.
안동 김문의 세도정치가 십수년 계속되고 있는 때에
그들과 끈이 닿은 이들만 벼슬도 사고 호위호식하고 백성들의 불평은 높아가고 있었다.
철종임금은 왕족이기는 하나 어릴때 부모가 돌아 가시고
부모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하며 나무꾼으로 겨우 연명하며 강화도에 살다가
헌종의 후계로 안동김문 대왕대비의 천거로 왕이 되었다.
이를 아는 강화도 건달 염종수라는 자가 임금에게 거짓으로 외삼촌이라고 속이고
왕에게 벼슬자리 하나를 얻으려고 사기치려고 마음을 먹는다.
염종수는 돈도 없으면서 강화주막에서 주모를 구슬려 밥을 얻어 먹다가
술생각이 나면 주모에게 내가 왕의 외삼촌이니
언제 왕을 만나러 궁궐에 한번 가야 겠다고 말을 한다.
주모는 처음에는 헛말이려니 했으나 자주 그 말을 듣는 뒤에
정말로 왕의 외삼촌인가 하고는 염종수의 옷과 갓등을 구비하여주고
그와 맞장구를 치며 염종수가 왕의 외삼촌 임을 소문을 내니
이 소문이 강화유수에게 들어 갔다.
강화유수는 소문의 진실도 알아보지않고 출세욕으로 선물을 챙겨서
주막으로 찾아와 염종수와 인사하고 잘 부탁한다고 절을 올렸다.
염종수는 이에 힘을 내서 궁궐로 다리를 놓게하여
안동 김문인 중전에게 소개되어 중전과 왕내외분을 알현하게 되었다.
일가친족이라고는 한사람도 없는 철종임금은 외삼촌이라는 피붙이라는 말에 기쁜마음으로
염종수를 만나 외삼촌과 이야기를 나누고 회포를 풀고 눈물을 흘린다.
염종수에게 술을 가득부어주고는 임금이 그에게 묻는다.
'외삼촌, 어머니는 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까?
아는 사람도 없고 소문조차 듣지못하여 늘 알고 싶었습니다.'
'말씀 마십시요, 상감마마, 생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생각하오니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게 됩니다. 아이구...'
'답답합니다. 외삼촌 그 연유를 상세히 말 해 주세요.'
'대대로 역적으로만 몰려 사시지 않으셨습니까?
한번도 하늘을 보고 산적이 없지 않습니까?
걸핏하면 역적이라고 종친을 죽이고 귀양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굶어 돌아 가셨다 그말입니까? 외삼촌'
'예, 중전마마 하루는 이 외삼촌을 오라고 해서 달려가서 누님을 뵈었더니 흑흑 여기 보십시오.'
염종수는 도포에서 낡은 주머니 하나를 내놓으며
'여기 보십시오. 이 주머니가 그 주머니 입니다. 누님께서 이 주머니를 내주시면서
<생질들을 잘 보살펴주고 혹시 잘 성장하여 훌륭히 되는 자제가 있거든
이 주머니를 보여주면서 어머니가 이렇게 부황이 나서 죽었노라.> 꼭 이 말을 전하라고 하셧습니다.'
군자를 속이는 방법은 가기이기방 可欺而其方이라.
군자를 속이는 데는 그 방법이 있으니
아예 진정으로 목숨으로 걸고 눈물로서 속이는 방법이 그 하나이다.
거짖말이건만 눈물바람으로 지껄여 대니 임금내외가 감쪽같이 속은 것이다.
'외삼촌 봄날 꽃이 피거던 다시 들려주세요'
염종수는 큰 선물을 안고 강화로 돌아가니 이 소문은 온 장안에 퍼졌다.
신유년 봄이 와서 철종임금은 조상사당에
국태민안을 빌고자 대궐문을 나서니 사람들이 인산인해다.
많은 백성들이 왕의 행차를 맞으니 왕은 흐뭇한 마음으로
백성들을 둘러 보는데 왕의 행차에 백성들중 하나가 돌을 던졌다.
왕의 행차를 배행하던 판의금부사 윤치수가 불호령을 내려 돌을 던진 백성을 불러세웠다.
'서두를 것 없오, 어차피 죽을 목숨 뭐가 두려워 안 나서겠오.'
하고 장한이 임금 앞에 와 나선이는 조만준 이었다.
왕은 백성이 돌을 던지니 분하고 부끄러워 연을 돌려서 궁으로 돌아 가고 싶었다.
그러나 영의정등의 주청으로 예정대로 행차를 마치고 환궁하여 조만준을 친국했다.
'이 놈 역적 조만준은 들어라. 황공하옵게도 전하께서 친국하시는 바 이니라'
'알곘오'
'거짖말 할거면 미리 도망 할 궁리를 하지 않았겠오. 묻고 싶은 말 어서 물으시오'
' 죄인 조만준은 명색이 임금인 나에게 어찌 여겼기에 돌 팔매질을 했는고?'
'상감마마를 어찌보아 돌을 던졌느냐고 물으시니 대답하겠읍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나무꾼으로 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죄인 조만준을 형틀에 높이 메달고 단근질로 다스려
정신이 들게 하라' 고 의금부사 윤치수가 소리 질렀다.
왕은 윤부사를 말리며 조만준에게 다시말하라고 하니
'상감마마 이 무식하고 순진한 백성이 돌을 던진 것은
나라의 정사를 잘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상감께서 강화도 촌구석에서 어렵게 살떤 때를
전혀 느끼시지 못하고 어려운 백성들의 일을 외면하십니까?
왜 의주부 백성 명덕성등 세명을 목을 쳐서 청나라로 보내셨습니까?
청나라 놈들은 우리 것을 제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고
우리 백성은 제것을 제것이라고 하는데 어명으로 목잘라 죽였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습니까?'
풍양조씨인 조만준은 가짜인지 모르는 염종수에 대하여도 말하니
포청에서는 염종수에대하여 조사하니 가짜로 밝혀져
염종수와 조만준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왕비열전- 철종편에서
5. 자랑스러운 위대한 역사의 鑑戒(감계)
우리는 국민학교 때 이렇게 배웠다.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그리곤 조선이 망한 이유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다.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때문에 망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다.
그런데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 미국, 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이다.
금년이 2018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8년이 되는 해이다.
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년, 700년,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이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다.
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 신성 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다. 에스파냐 왕국이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 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 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 이거 안 되겠다. 형님, 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다.
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다.
전 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보자.
고려가 500년 갔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다.
고구려가 700년 갔다.
백제가 700년 갔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다.
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아시아에 하나가 있다.
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다,
고구려, 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다.
지금 말한 것은 과학이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이다.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다.
왜 그럴까요?
그러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
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 700년, 1,000년 갔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하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난다.
알다시피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한다.
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왜? 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니까. 그
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 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신문고는 왕궁 옆에 매달아 놓으니 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 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격쟁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이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이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이다.
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이다.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이 있었나?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한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한다.
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하고자 한다.
첫째는 기록의 문화이다.
이집트에 가면 스핑크스가 있다.
그걸 보면 어떠한 생각이 들까?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다.
아마도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집트 사람, 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다.
우리는 뭐냐.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자.
그 왕이 조선백성 여러분, 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 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은가?
마마, 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을까?
당신이 나가시오, 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 바로 곁에 사관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하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는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는 말을 다 적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
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 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
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
그것을 오늘 적고, 내일도 적고, 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는다.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공식 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다.
우리가 사극에서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왕은 공식 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을 갔다.
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었다.
이걸 500년을 적는데 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다. 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다.
이걸 사초라고 한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 이것이 중요하다.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한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다.
그러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한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한다. 4부를 출판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 나중에는 금속 활자본을 만들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인가,
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인가? 쓰는 게 경제적이다.
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다.
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다.
글자 하나 더 쓸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목판활자, 금속 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 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다.
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6,400만자다.
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든다.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아보자.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이었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은 참았다.
몇 년이 지났다.
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희 정승이 나섰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 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다.
이 말을 세종이 들었다.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다.
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볼까?
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볼까?
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 사또가 볼까?
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다.
누구 보라고 썼는가?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다.
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 제도, 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
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는가?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놓았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도 있다.
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 비서실이다.
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이다.
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다.
아까 실록은 그 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다.
그런데 승정원 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다.
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다.
누구 보라고 써놓았는가?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다.
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 288년 분량이 남아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이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정리가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난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이다.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이다.
왕들의 일기이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다.
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다.
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했다.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다.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서 찾아보라.
6. 갑오개혁
1894년(고종 31)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추진되었던 일련의 개혁운동.
개설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내세워
전라도를 휩쓸고 전주성(全州城)을 점거하였다.
이어 동학농민군과 정부군과의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민씨정권이 6월 초에 청나라에 대하여 파병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아산과 인천에 몰려오는 가운데
서울에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는 내정개혁안을 제시하고,
또 7월 23일에는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 뒤 7월 27일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이 회의총재(會議總裁)에,
그리고 박정양(朴定陽)·김윤식(金允植)·조희연(趙羲淵)·김가진(金嘉鎭)·안경수(安?壽)·
김학우(金鶴羽)·유길준(兪吉濬) 등 17명이 의원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그뒤 개혁운동은 3차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내용
제1차 갑오개혁은 군국기무처 주도하에
1894년 7월 27일부터 1894년 12월 17일까지 추진되었다.
이 기간에 약 210건의 개혁안을 제정, 실시하였다.
그런데 이미 한반도에 약 7000명의 병력을 파견한 일본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조선에서의 이권을 확대시키고, 아울러 청나라와의 전쟁을 일으켜
결정적으로 청나라를 조선으로부터 물러나게 할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일본정부는 청일전쟁 수행과정 중
조선정부와 일반국민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이유와,
러시아를 비롯한 열국의 외교 내지 무력간섭을 우려한 나머지,
조선의 친일정권에 대한 소극적인 간섭에 그쳤다.
따라서, 제1차 갑오개혁은 우리나라 개화파관료들인
군국기무처의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군국기무처의 핵심인물들은 청나라에 대한 전통적인 사대정책에 반대하고,
서양 및 일본의 문물을 모델로 하는 개화세력으로 반봉건적인 혁신적 개혁을 단행하였다.
제1차개혁의 중심적 목표는 정치제도의 개편이었다.
개편된 관제는 의정부관제안(議政府官制案)과 궁내부관제안(宮內府官制案)으로 구분된다.
「의정부관제」는 7월 30일에, 「궁내부관제」는 8월 22일에 제정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국왕의 전통적인 인사권·재정권·군사권에 제약을 가하고,
궁중의 잡다한 부서들을 궁내부 산하로 통합하여 그 권한을 축소시키는 한편,
종래 유명무실하였던 의정부를 중앙통치기구의 중추기관으로 만들고,
그 밑에 육조(六曹)를 개편한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 등
8아문을 분속시켜 그들 아문에 권력을 집중적으로 안배하였다.
아울러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으로 대표되는 대간제도(臺諫制度)를 폐지하는 한편,
내무아문 예하에 강력한 경찰기구로서
경무청을 신설하여 일반 국민의 모든 활동을 규제하고,
그들의 반정부활동을 탄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1881년 이후에 난립한 근대적인 기구들은
8아문의 하나 혹은 그 예하의 국(局)으로 개편하였다.
그러한 중앙정부의 개편에 뒤이어 8월 2일 관료제도에 대한 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종래 18등급의 관등품계(官等品階)를 12등급으로 축소하여
칙임관(勅任官, 正從1·2品)·주임관(奏任官, 正從3∼6品)·
판임관(判任官, 正從7∼9品)으로 구분하였다.
특히, 관료충원을 위한 과거제도를 폐지하는 대신에
8월 12일 새로이 「선거조례(選擧條例)」와 「전고국조례(銓考局條例)」를 제정하여
주임관과 판임관의 임용권을 의정부의 총리대신 및 각 아문의 대신들에게 부여하였다.
아울러 8월 16일 「관원복무기율(官員服務紀律)」과 「관원징계례(官員懲戒例)」 등을 제정하여
관리의 엄격한 공무집행과 관기확립을 기하였다.
또, 청나라와의 종속관계를 탈피하기 위한 상징적 조처로서
모든 공사문서에 있어서 개국기년(開國紀年)의 사용을 의무화하였다.
군국기무처 회의원들은 파격적인 정치·행정·관료제도의 개혁을 통하여
의정부와 8아문을 중앙정부의 실질적인 집권기구로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정권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중앙집권화와
행정의 효율화를 기하여 강력한 개혁정치를 수행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또한 오랫동안 조선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되어왔던
여러 제도 및 관습에 대해서도 7월 30일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즉, 문벌과 반상제도(班常制度)의 혁파, 문무존비(文武尊卑)의 차별 폐지,
공사노비법(公私奴婢法)의 혁파, 역인(驛人)·창우(倡優)·피공(皮工) 등
천인의 면천, 죄인연좌법(罪人緣坐法)의 폐지,
양자제도의 개선,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이 그것이다.
정치·사회제도의 개혁에 비하면 미흡하나마 경제제도에 대한 개혁도 단행되었다.
즉, 국가의 모든 재정사무를 탁지아문이 전관(專管)하도록 함으로써 재정을 일원화하고,
12월에 「신식화폐장정」을 의결하여 은본위제(銀本位制)를 채택하는 한편,
종래의 물납세제(物納稅制)를 금납제(金納制)로 대체하고,
10월 29일 전국적으로 도량형을 통일시켰다.
그러나 군국기무처 회의원들은 내란을 기화로
우리 나라에 침투한 일본군의 후원에 힘입어 집권한 정치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추진한 개혁사업에는 타율적인 것이 없지는 않았다.
일본인 고문관 및 군사교관의 초빙, 일본화폐의 조선내 유통권 허용,
방곡령(防穀令)의 반포금지조처 등이 그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반일운동으로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비도(匪徒)’로 규정하고 일본군과 합세하여 그들을 진압하였다.
1894년 12월 17일부터 1895년 7월 7일까지
김홍집·박영효(朴泳孝)의 연립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제1차개혁에 있어서 군국기무처의 혁신적인 개혁사업은
수구적인 입장을 고수하는 흥선대원군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하는 대신
그의 적손자인 이준용(李埈鎔)을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를 꾸미는 한편,
동학농민군 및 청국군과 내통하여 일본군을 협격, 축출하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정부는
현직 내무대신인 이노우에[井上馨]를 조선주차특명전권공사(朝鮮駐箚特命全權公使)로
임명하여 조선의 보호국화를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노우에는 공사로 부임한 직후 흥선대원군을 정계에서 은퇴시킴과 동시에,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망명정객 박영효와 서광범(徐光範)을
각각 내부대신과 법부대신으로 입각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권력구조의 변화를 배경으로 고종은 청나라와의 절연(絶緣),
국왕의 친정(親政)과 법령의 준수, 왕비와 종친의 정치간여 배제,
내정개혁의 실시 등을 골자로 한 「홍범십사조(洪範十四條)」를 반포하였다.
그 뒤 이노우에 공사는 내정개혁의 미명하에
다수의 일본인 고문관들을 기용하여 조선의 보호국화를 기도하였으나,
일본차관 도입의 지연과 삼국간섭(三國干涉)에 따른
조선왕실의 거일인아책(拒日引俄策: 일본을 배격하고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정책)
등이 크게 작용하여의 실패하였다.
따라서, 제2차개혁도 조선의 내각대신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한 개혁이었다.
특히, 내부대신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 이노우에 공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김홍집 일파를 내각에서 퇴진시키며 과감하게 독자적인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당시 총 213건의 개혁안이 제정, 실시되었는데,
상당수는 앞서 군국기무처에서 의결된 개혁안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었다.
우선 정치제도의 개혁을 보면,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이 ‘내각(內閣)’과 ‘부(部)’로 각각 바뀌면서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이 농상공부(農商工部)로 통합되어 모두 7부가 되었다.
내각은 각부 대신들로 구성된 합의제정책심의기관으로서 각종 법률칙령안,
세입 세출의 예산 및 결산, 내외국채(內外國債)에 관한 사항,
국제조약의 체결 등에 관한 국가의 중대사를 심의, 의결한 뒤 국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하였다.
내각과 분리된 궁내부의 관제는 대폭 간소화되었으며,
그 방계기관이었던 종정부(宗正府)와 종백부(宗伯府)는 폐지되었다.
중앙정부의 기구 개편과 더불어 지방제도에 대해서도 일대 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종래의 도(道)·부(府)·목(牧)·군(郡)·현(縣) 등의
대소행정구역이 폐합되어 전국이 23부 337군으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내부대신의 지휘·감독하에 각 부에는 관찰사(觀察使) 1명,
참서관(參書官)·경무관(警務官) 각 1명을,
군에는 군수 1명을 파견하여 일원적인 행정체계를 이루었다.
아울러 전국 9개소에 탁지부대신 관할하의 관세사(管稅司)와
220개소의 징세서(徵稅署)를 설치하여 조세 및 기타 세입의 징세사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그밖에도 근대적인 군사 및 경찰제도확립을 위한 「군부관제(軍部官制)」·
「훈련대사관양성소관제(訓鍊隊士官養成所官制)」·「경무청관제(警務廳官制)」 등이 제정되었고,
행정관이 장악하고 있던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조처로서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과 「법관양성소규정(法官養成所規程)」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교육입국조칙(敎育立國詔勅)에 따라 「한성사범학교관제(漢城師範學校官制)」및 「
외국어학교관제」가 제정, 실시되는 한편, 114명의 양반출신 유학생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제2차개혁을 추진함에 있어 박영효의 지나친 독주는
그의 귀국과 입각을 주선하였던 일본측은 물론,
고종과 명성황후의 반발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결국 음도불궤죄(陰圖不軌罪: 몰래 반역을 도모한 죄)의 혐의로 일본에 재차 망명해야만 하였다.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11일까지 제3차김홍집내각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이 내각에서는 일본세력의 퇴조에 따라 박정양(朴定陽)을 위시한 친미·친로파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이노우에의 후임으로 부임한 미우라[三浦梧樓] 공사는
일본세력의 퇴조를 만회하기 위해, 일으킨 을미사변 이후
그의 의도대로 김홍집내각의 친일적 성격은 강화되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김홍집내각은 계속 내정개혁을 추진하여
140여 건에 달하는 법령을 의결, 공포하였다.
그 가운데는 7월 9일 「소학교령(小學校令)」, 11월 10일 「상무회의소규칙(商務會議所規則)」,
11월 15일 건원(建元)에 관한 건, 11월 15일 연호를 의정(議定)하는 건,
1896년 1월 1일 태양력의 채용 등의 개혁안건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을미사변의 사후처리에 있어 김홍집내각이 보여준 친일적 성격과 단발령의 무리한 실시는
보수유생층(保守儒生層)과 일반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국왕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단행됨으로써 김홍집내각은 붕괴되었다.
의의와 평가
약 19개월 동안 지속되어온 갑오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갑오개혁을 평가함에 있어
이를 완전히 일본의 정치적 개입에 의한 타율적 개혁으로 보는 견해와
일본세력이 배후에서 작용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개화파 관료들이
주도한 제한된 의미에서의 자율적 개혁으로 보는 두 견해가 있다.
그러나 통시적으로 볼 때, 갑오개혁은 멀리
실학(實學)에서부터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개혁요구 내지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반청·독립정신을 가진 친일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한 개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조선사회에 있어서
근대적인 개혁에의 내재적 지향을 반영한 획기적인 개혁으로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나 청말(淸末)의 무술변법(戊戌變法)에 대비되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요한 역사적 기점이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그 시의성(時宜性)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추진세력이 일본의 무력에 의존하였다는 제약성 때문에,
반일·반침략을 우선시켰던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갑오개혁[甲午改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 대한제국과 간도, 독도
간도
[ 間島 ]
-만주의 길림성(吉林省) 동남부지역-
아관파천 이후 1년만에 고종이 경운궁(現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열강들이 조선에서 행사하는 영향력들이 균형을 이루면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고 연호를 광무로 했으며
스스로 황제국가임을 선언하고 원구단(現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실시했습니다.
(왼쪽)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1대 황제인 고종 ,(오른쪽)환구단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그 개혁을 광무개혁이라고 합니다.
광무개혁의 핵심은 구본신참인데요. 구본신참이란 옛 것을 근본으로 새 것을 참조한다는 뜻으로
청의 양무운동의 핵심인 중체서용(중화를 바탕으로 서양의 것을 수용한다)과 비슷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전제 황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대한국 국제(1899)를 반포하고
황실 재정을 담당하는 궁내부 내장원에 재원을 집중시켰으며
지방제도를 23부에서 13도로 개편하고 독립협회를 탄압해 해산시켰습니다.
경제적으로는 근대적인 토지 소유권을 확립시키는 문서인 지계를 발급하고
상공업 진흥책인 식산 흥업 정책을 실시해 근대적인 공장과 회사를 설립하고 전차를 부설했습니다.
-(왼쪽)대한국 국제,(오른쪽)지계-
군사적으로는 원수부를 설치해 황제가 육해군을 통솔하도록 했으며
친위대와 시위대를 개편,증설하고 진위대를 증가시켰으며 무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교육적으로는 실업학교와 기술을 알려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국비로 유학생을 파견했습니다.
외교적으로 청과 한청 통상조약(1899)을 체결해 최초로 중국과 대등한 자주적인 외교를 펼쳤으며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고 간도를 함경도로 편입시켰으며 을릉도를 군으로 승격하고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재확인했습니다.
-원수부-
광무개혁은 ①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고
②상공업을 진흥시키며
③지계를 발급하는등 근대적인 자본주의 국가로의 전환을 도모했다는 의의를 지녔지만
①집권층은 여전히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며
②열강들이 계속해서 간섭을 한다는 한계를 지녔습니다.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가 활발해지자 청은 만주족의 발생지인 간도를
봉금지로 선정하면서 간도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1712년(숙종 38년)에 조선 대표 박권과 청 대표 목극등이 합의해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워 간도를 조선의 영토를 결정했습니다.
다시 19C 후반에 간도에 대한 귀속 문제가 발생했는데요.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대한제국은
간도 관리사인 이범윤을 파견했으며 간도를 함경도에 편입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후 통감부에 간도 파출소를 설치했으며
1909년에 청과 일본은 간도협약을 맺었는데요.
청은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푸순 탄광권을 일본에 주고
일본은 대한제국의 간도를 청에게 양도했습니다.
-(왼쪽)통감부,(오른쪽)간도 협약-
간도협약 7조문 중 중요한 것
첫째, 한, 청 양국의 국경은 두만강으로 하고 일본제국 정부는 간도를 청국 영토로 인정하며
청국 정부는 두만강 이북의 개간지에서 한국인잉 거주하는 것을 인정한다.
둘째, 청국인과 섞여 사는 한국인은 청국법에 따라야 하며 청국인과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
셋째, 청국정부는 간도에 외국인의 거주및 무역을 위해
용정촌, 국자가, 두도구, 백초구등 네곳을 개방 할 것.
넷째, 장래에 길장 철도를 연장하여 한국 회령에서 한국철도와 연결토록 할것.
이렇게 하여 간도는 청국으로 넘어갔고 일본은 간도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그당시 간도의 인구는 조선인 8만3천 이었고 청국인은 2만7천 이었다.
간도 협약은 저희 마음대로 정하고 조선정부에는 사후 통고 되었다.
삼국시대때 독도가 우리영토로 복속된 이후 조선시대엔 범죄자들이 독도로 도망가자
조선 태종은 공도정책(섬에 있는 사람들을 육지로 옮겨 살게 하는 법)을 실시해
독도,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않게 됩니다.
그후 조선 숙종때 안용복이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확인시켰습니다.
그후 조선 말기에 공도 정책을 중단시키고 개척령을 반포했으며 관리를 파견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습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엔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독도를 관할하게 하도록 칙령 41호를 발표했습니다.
-칙령 41호-
일본은 러일전쟁 도중에 독도를 시마네현에 편입시켰는데요
. 2차 세계대전 패전 후엔 SCAPIN 제677호를 통해
울릉도,독도,제주도를 일본의 통치권에서 제외시켰습니다
.1953년에 일본은 독도에 상륙해 영유권을 표명했으나
홍순칠 대장 중심의 독도 의용수비대가 방어해 몰아냈습니다.
그후 1998년에 신 한일어업협정을 맺어 독도가 포함된 수역을 한일 공동 관리 수역으로 설정했는데요.
만약 EEZ(배타적 경제 수력)를 독도 기점으로 다시 안한다면 국제적으로는 독도를 잃을 수도 있습니다.
-신 한일어업협정-
8. 한일 합병조약
제1조, 한국의 황제 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는 일본국 황제 폐하께 양여함.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승낙하고고 또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 함을 승낙함.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페하, 황태자 전하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상당한 존칭, 위엄및 명예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는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 할 것을 약속 함.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달한 명예및 대우를 향유케 하며,
또 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자금의 공여를 약속함.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있는 한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한 자에 대하여 영작을 내리고 또 은급을 수여 함.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모든 한국의 시설을 담임하고
동지 同地에서 시행되는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재산에 대하여
충분한 보호를 하며 또 그의 복리증진을 도모 할 것임.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 있어 일본제국 관리로 등용 할 것임.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 폐하 및 한국황제 폐하의 재가를 거친 것으로써 공포일로 부터 시행한다.
우 右의 증서로써 양측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 조인 함.
메이지 43년 8월 22일
통감 자작 데라우찌 마사다께
융희 4년 8월 22일
내각총리대신 이 완용
이 조약으로 5천년을 이어 오던 한반도의 강토는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 갔으며 민족은 노ㅖ로서 기나긴 수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치욕의 문자로 작성된 조약은 1주일 후 인 8월29일 세상에 공포되니 이 날이 국치일이다.
왕비열전- 순종편에서
9.추사 김정희가 돌아 본 청나라와 북한산 순수비 발견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만주 여진족의 후예로 보아 무뢰한이라고 멸시해 왔다.
그러나 근대사의 청나라는 서양의 문물을 미리 받아 들여
중국의 문화로 발전시켜 조선말엽 청나라문화는 배울 것이 많았으나
청나라를 다녀온 신하들은 북경에 갔다와서 임금에게 아부 하느라
거짓으로 깍아내리고 조선의 임금이 동방의 성군인양 치켜 세웠다.
나라가 발전 하려면 무엇보다도 훌륭한 임금이 나와야 하였다.
그러나 이 나라는 대대로 외척에게 휘둘리고 여자의 치마 폭에 묻혀 정신없는 일을 하거나
신하들의 당파싸움이나 북돋는 용군들이 내려오고 있었다.
청나라가 번영하는 대는 우연이 아니었다.
비록 만주 여진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훌륭한 인금이 대대로 내려오니 나라가 발전하고 있었다.
조선은 어린 왕이 임금이 되어 세도정치가 들어서고 신하들은 자기세력들만 집권에 신경을 써니
젊은 왕들은 무절제 호색하게되어 조졸 하니 왕권이 쇠하고
나라의 백성들 삶은 어려워지고 있었으니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의 대는 경주김씨 세도정치가 시작 되었다.
추사 김정희는 25세시 순조10년 생부인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사신대열에 합류하여
청나라에 가서 북경의 서적점의 본거지를 구경하고 젊은 학자 조강을 만났다.
조강은 서른살이고 김정희는 스물다섯이다.
조강은 기름진 음식을 접대하고 다음날 법원사로 놀러갔다.
청나라는 우리나라와 같이 유학자와 불교도가 적대하지 않았다.
절에서 좋은 차를 대접 받고 추사는 시정에 젖어들어
그의 독특한 필치로 7언 시를 지어 일필휘지 하여 조강에게 주었다.
명가자제조옥수 名家子弟曺玉水
추수위신옥위수 秋水爲神玉爲隨
명문가의 자제인 조옥수는 가을물같이 신비하고 옥같이 빼어나다.
김정희의 글씨는 이때 이미 명필의 경지라
조강은 추사의 글씨를 보고 흐뭇하고 감탄했다.
" 추사 선생은 좋은 글씨를 썻소이다. 당대의 대가 담계 선생의 당 堂에 들어간 감이나오"
담계는 옹방강의 호인데 추사 김정희는 격찬을 받았으나
옹방강에 데한 말을 듣고 기회를 놓지지 않았다.
" 내 글씨야 아직도 서투르기 짝이 없읍니다.
담계 선생님을 뵈올 수 있도록 선생께서 주선해주지 않으시겠는지요"
" 그것은 어렵지 않읍니다. 나의 친구 서송徐松이
바로 담계 선생의 제자이니 그 사람을 중간에 넣도록 하지요"
다음 날 조강은 친구 서송과 같이 김정희를 보안사가에 있는 옹방강의 집으로 안내 했다.
옹방강의 서재로 들어서니 지금가지 보던 서점가의 책보다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김정희가 길게 읍하자 늙은 옹방강도 마주 일어서며 반가이 맞았다.
" 동방에서 오신 젊은 학자여 나는 벌써 귀국의 초정에게서 성화 聲華를 들었오"
그동안 초정 박제가는 서신으로 김정희를 옹방강에게 소개했던 모양이다.
" 시생이 멀리서 온 것은 선생님의 성화에 직접 접하고 자 함이옵니다"
" 고맙소 해동에서까지 나를 알아 주시니 고맙소"
옹방강은 일흔 여덟으로 3품관의 직함까지 있었지만
매우 겸손하여 해동에서 온 손주뻘 되는 젊은 학자를 잘 대해 주었다.
김정희가 서재를 둘러보니 여기저기 탁본이 걸려있고,
거기에는 그 탁본의 유래가 모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 중에도 송나라 초의 명필 구양순의 정서체는 서도가 김정희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청나라에서 자기의 옛것을 존중하는 사상이 김정희는 부러웠다.
그런 반면 유학에 밝은 동방의 조선에서는 한사람도
금석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없어서 스스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해동에도 금석문이 많이 있지요"
"예 많이 있사옵니다"
옹방강이 묻자 김정희는 얼떨결에 대답하였으나
사실은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옹 방강은 여러가지 귀중한 탁본들을 보여주었고
또 자기의 문집 중에서 소재집을 주고 그 외에 여유있는 탁본을 추사에게 선물로 주었다.
옹 방강의 아들 옹 수곤은 추사와 동갑으로 서로 친해져서
금석문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나아가서는 조선의 금석문도 보내줄 것을 말했다.
이로써 김정희는 옹씨와 금석문에 대한 인연이 깊어져서
귀국한 후에 우리나라의 금석문을 연구 하게 된 것이다.
며칠뒤 김정희는 청나라 당대의 석학이며 가장 존경받는 고증학자 완원 阮元을 찾아보았다.
완원은 당시의 고관이기도 하였으므로 매우 교만 할 줄로 알았으나
그런티는 조금도 없고 학자로서 매우 즐겁게 대해 주었다.
조선의 소위 학자입네하는 세도 정치가와는 판이했다.
"해동에서 온 젊은 학자가 찾아 온다는 말을 들은지 오래이오 어서 들어 오시오"
이렇게 기탄없이 맞아주는 품이 거드름이라고는 티도 없었다.
이것이 대국인의 관후한 금도로구나 싶었다.
이윽고 차가 나오자 주인인 완원이 먼저 맞보고 김정희에게 권하였다.
"자 드시오, 이 차는 승설勝雪차라는 것이오"
추사가 맛보니 그 향기와 풍미가 기가 막혔다.
"어디서 만든 것이옵니까?"
"이것은 남쪽 복건성에서 만든 것이오,
차를 구으면 그잎이 눈보다 희게 되므로 승설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오."
완원의 집에는 더많은 책이 있었다.
완원은 남송때의 학자 우연지 尤延之가 가지고 있던 <문선 文選> 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가장 희귀한 책인 송본 宋本을 보려주는 것이었다.
"귀국에서는 고려때에 <문선>을 간행한 일이 있는데 물론 보셨지요?"
이 말을 들으니 김정희는 앞이 캄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때는 <문선>을 읽지않고 겨우 <고문진보>만 읽었으므로
이것을 구경조차 못한 김정희는 얼굴에 땀이 솟았다.
"전에 고려 간본이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가 없읍니다.
그리고 우리 조선에서는 과거에 문선을 보지 않으므로 거의 잊을 지경입니다. "
" 아 그러시오 ? 그럼 귀국은 아직도 명나라 때의 법을 잘 고수하고 있구료. "
"예 그래서 별로 발달이 되어 가지않고 있는 중입니다. "
"학문은 자꾸 앞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는 것이오.
옛것을 고수 해서는 나아감이 없는 거지요."
김정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조선의 학문이 저하되어 가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완 원은 학자였으므로 자기가 지은 <연경 실문집>을 자비로 간행해 내고있다.
우선 제1집의 일부를 김정희에게 기증하였다.
펼쳐보니 각자 刻字로 정교하고 내용도 좋았다.
그것을 감개무량한듯 보고있는 김정희에게 완원이 말했다.
"경학을 하든지 또는 다른 학문을 하든지간에
우선 문자 文字의 훈고 訓?를 잘 알아야 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시생도 이제부터 문자의 학문을 중히하고 싶습니다. "
"그래야 하오, 성인의 길은 담과같은 것이오.
배우는 사람들이 성현의 길을 구하는 것은 그 이상이 매우 높아 좋소.
하지만 장 章, 귀 句를 깊이 연구하지 않으므로 실제로 성현의 길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오."
"참으로 그러 합니다. 해동의 학자들은 시문을 잘짖지만
실로 성현의 길은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피상적인 학문이오.
대저 공소 空疏한 억설이나 쓸데없는 성명을 말 하는 것은 명성의 길이 아니요.
귀국뿐만 아니라 어느나라의 학자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지요."
"지금 선생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요?"
"우선 우리나라의 경서인 십삼경의 문자가 틀린 것이 많아
그것을 교감하고 있소. 다 되는대로 1부 귀하에게 보내드리오리다."
"감사합니다. "
"그 뿐 아니라 우리나라 강희, 건륭시대의 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지은
경서의 해석이 너무많아 이것을 정리하여 <황청경해 >를 만들 계획입니다."
"그것은 너무 방대한 계획이 아니겠습니까?"
"그다지 큰 것도 아니요, 일부 시작을 했소이다. "
"그러시다면 청 일대의 실사구시의 학문이 집대성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그렇소. 그것도 되는 대로 역시 1부를 귀하에게 보내드리지요. "
김정희는 이처럼 귀중하고 방대한 서적을 자기에게 보내준다는 데에 또 한 번 감격하였다.
그리고 속으로 , 참으로 이 사람들은 나라도 크고 그들의 포부도 크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런 것을 모르고 조선사람들이 청인이라면
쳐다보려고도 아니 하였으니 될 말이냐고 그는 개탄했다.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바쁜데도 해동의 젊은 학자에게
시간을 베풀어준 완원은 점심때가 되자 자기 아들 완상생을 불러 인사 시켰다.
"해동에서 온 젊은 학자이다. 너희들이 배울 것이 많으니 잘 환대하도록 해라"
김정희는 이제 완상생과 사귀어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완 상생은 자기 부친이 편찬하는 책은 무엇이든지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밖에도 김정희는 청나라 당대의 학자들인 이전원, 오난설, 주야운 ,
이심언, 김의원, 김근원,등의 학자를 만나 필목으로 친하게 지내고 이듬해 3월에 귀국했다.
북경에서 돌아 온 김정희는 우선 박제가에게 청나라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주고
자기의 아우인 김명희와 김상희에게 청나라 학자들의 고증학을 설명하였으며
친구인 권돈인, 신작 등에게청나라 학문의 근황을 열심히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 완원 阮元의 학문을 크게 찬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자기의 호를 완당 阮堂이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집에서 대접받은
승설차의 맛을 잊기어려워 勝雪洞人이라는 호까지도 썼다.
이로부터 김정희는 매년 사신이 청나라로 들어 갈 때는 빼놓지않고
청나라 학자들의 소식을 묻는 편지를 띄워 보냈다.
청나라에서도 반드시 친절한 회신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옹방장의 아들 옹수곤은 전에 말한대로 금석문을 보내주기를 원했다.
우선 이약속을 지킬 마음으로 김정희는 각지에 흩어져 있을
조선 고래의 금석문을 알아 보려고 돌아다녔다.
그리하여 병자년, 순조 16년 7월이었다.
추사는 친구 김경연과 북한산의 비봉을 찾았다.
비碑봉이라는 이름른 예부터 그 봉우리에 비석이 있다해서 붙인 이름이었다.
그 비석에 새긴 금석문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곳으로 발길을 옮긴 것이었다.
날은 가장 무더운 유월이라 깍아지른 산 길을 올라가는 데 무척 힘이 들었다.
승가사가 가까워지자 나무가 무성하였고, 눈 앞으로는 계곡이 구비쳐서 대자연의 경계가 빼어나 보였다.
가파른 길을 올라가 승가사에 이르자 산승은 양반들이 찾아오는 것을 기쁘게 생각히고 큰방에 안내 되었다.
이 승가사는 신라 때에 지어진 절로 그 당시는 규모가 컸었으나 지금은 퇴락하고 있었다.
고려 때에도 중시하여 동굴안에 석상 부처가 있고 그 정면에 마애불이 사면을 위압하였다.
그런데 동굴 앞에 서있는 비석이 추사의 눈을 끓었다.
자세히 보니 그 글씨는 거의 마모되었고 판독하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비석자체가 금이가고 깨져서 미구에 땅밑으로 쓰러질 것 같이 되어 있었다.
추사는 옆의 동행을 보며 탄식했다.
"이 것보게,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적에 대해
이렇게 소홀하니 한심한 노릇이 아니겠나.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남의 나라 사람들은 자기 조상의 발자취인 고적을 아끼고 존중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대하지를 않는다는 말일세. "
주지스님이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차를 내어 왔다. 마른 목을 축이고 추사는 스님에게 물었다.
"주지스님 이 근처에 비석이 있다는데 어디로 가야 그곳으로 가는 길이 있습니까?"
" 예, 바로 이뒤이옵니다 만은 길은 없읍니다."
" 그럼 어떻게 찾아 올라가야지요. "
"정 가보고 싶다면 소승이 길잡이를 서서 안내해 드리지요. "
"아니 그렇게까지 수고를 해주시겠습니까? "
그리하여 일행은 스님의 안내로 겨우 길을 찾아 꼬불길을 올라갔다.
이윽고 산의 상봉에 서서 멀리 둘러보니 사면이 터져 환하게 바라보였다.
북쪽에는 북한산의 연봉이 우뚝우뚝 솟아있고 멀리 송악산도 보였다.
또 서쪽으로는 바다도 보여 시원한 해풍이 불어 오는 듯 했다.
바로 비봉 꼭대기를 올라 서서 김정희는 목적했던 비 碑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빗돌에는 이끼가 끼어 바위옷이 퍼렇게나 있어서
그것을 일일히 끍어내고 한자 한자씩 판독해 나갔다.
풍마세우에 그대로 버려져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억지로 글자를 찾아 읽자니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다가 진흥대왕급중신등순수 眞興大王及衆臣等巡狩라는데까지 읽다가
깜짝 놀라 김정희는 같이 온 승가사 주지에게 묻는다.
"스님 이 비가 언제적 비라고 합디까? "
"예, 전하는 말로는 고려때 왕이 이곳까지 왔다가 세운 비라고 합니다. "
" 그래요 그럼 고려 어느때 임금이라고 합디까? "
"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 자겸이 득세 할 때
임금님을 모시고 와서 시주한 후 기념으로 이곳에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또 이것은 무학대사가 세운 비라고도 합니다. "
" 음 그래요 ...하지만 이것은 아무래도 그때의 것은 아닙니다. 더 오래된 것입니다. "
"더 오래요. "
" 훨씬 더오래임에 틀림 없습니다."
"잘은 모르겠오이다. "
스님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김정희가 자기도 모르게 흥분하며 말했다.
"바로 이 비석은 옛날 신라때 진흥왕이 이곳까지 와서 국경을 정하고 순수한 기념 비석입니다. "
이에 옆에 있던 친구 김경연도 놀라 아연 하면서 혀를 찼다.
" 그런 것을 가지고 이제까지 고려비니, 이태조께서 세운 비이니 하였군요. "
"이것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예전 것을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소. "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오. "
" 내 연전에 북경에 갔을 때 옹방강 선생이 하던 말이 생각나는 구료.
심산유곡에 선인들의 발자취가 있다는 말이오.
참으로 이 것이야 말로 그 백미가 아니고 무었이겠오. "
차탄하며 김정희는 글씨를 자세히 읽어보려고 새삼 정성을 드렸다.
그러나 마멸되어 해독 할 수가 없었다.
몇번이고 이끼를 긁어내고 글자를 다시 읽어 본 끝에 겨우 68자를 판독한 후 내려왔다.
이로써 북한산 비봉에 서 있는 비석이 신라때 비석이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하여 김정희를 비롯한 젊은 학자들 중심으로
신라의 역사를 새삼스럽게 알려고 하는 연구가 시작 되었다.
1년이 지나고 그 이듬해인 순조 17년 6월, 이번에는 친구 조인영과 같이 올라가
그 비석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해 각자 刻字장이까지 데리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 비석에 다음과 같은 글씨를 자필로 써서 새기게 하였다.
차 신라 진흥대왕순수지비, 병자 7월 김정희.김경연 내독,
정축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 동래 심정 잔자 68자
(此新羅眞興王巡狩之碑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이 비는 신라 진흥대왕 순수비로서 병자년 7월에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판독하고
정축년 6월8일에 김정희와 조인영이 같이 와서 심정 하였다. 남아있는 글자는 68자이다.
이러한 글자를 각자함으로서 진흥왕순수비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추사 김정희는 금석학 연구의 큰 경과를 처음으로 세상에 발표하였다.
김정희는 이일로 해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 2년뒤인 순조 19년에 문과 전시에 조인영과 같이 급제 하였다.
그러자 순조 임금은 월성위 김한신의 사손인 김정희가 급제해서 기뻐 하였다.
이때 임금은 서른살이었고 김정희는 서른네살이었다.
왕비열전- 순조편에서
진흥왕 순수비
신라 진흥왕이 새로 넓힌 영토를 돌아보고 세운 비석
요약 신라 진흥왕이 새로 넓힌 영토를 직접 돌아보고 세운 비석이다.
비석이 세워진 위치와 비석의 내용을 통해 당시 신라의 국경과 신라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북한산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높이가 1.54미터 정도이며, 직사각형 모양이다.
바위 위에 2단의 층을 만들어 세웠다.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된 데다 상태가 더욱 나빠질 것을 염려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진흥왕은 가야와 한강 유역의 땅을 차지하고 함경도까지 진출하는 등
신라의 영토를 넓히고 삼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은 왕이다.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을 ‘순수’라고 하는데,
진흥왕은 새롭게 신라 땅이 된 지역을 순수한 뒤 기념 비석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진흥왕 순수비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는 모두 4개이다.
서울의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세워진 북한산비, 경상남도 화왕산에 있던 창녕비,
함경남도 장진군 황초령에 세워진 황초령비, 함경남도 이원군 마운령에 세워진 마운령비 등이다.
진흥왕 순수비 4개가 모두 높고 가파른 산이자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에 세워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심화
진흥왕 순수비 가운데 북한산비는 조선 시대에 김정희의 조사로 밝혀졌다.
이 비석은 국보 제3호로 지정되었는데,
비석이 닳고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비석에는 진흥왕의 업적과 수행한 사람들의 관직 및 이름이 쓰여 있다.
10. 독도 팻말의 비밀
★'독도 팻말'의 비밀
◆'독도 팻말'의 비밀 일본이 필사적으로 반출 막으려한 '독도 팻말'의 비밀
한국인이 작년 경매서 구입해 국내로… 첫 공개 1837년 니가타 해안에 걸려
"울릉도 오른쪽 섬은 한국땅 항해 엄중히 금지" 적혀 日언론
"팻말 한국 가면 안 돼" 일본이 한국으로 팔려갈 것을 우려하던
일본 에도(江戶)시대 의 나무 팻말이 극적으로 한국으로 넘어왔다.
나무팻말에는 1837년 독도와 울릉도가 한국 땅이 니
일본인의 항해를 금지시킨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팻말은 작년 3월 일본 교토에서 경매에 나왔다.
일본 산케이신문은 "당시 일본에선 독도를 울릉도로 불러
지금의 독도와 다른 곳인데 한국측이 이를 이용해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는 잘못된 주장을 한다"며
"이 팻말이 한국측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그랬던 이 팻말을 한국인 사업가가 150만 엔(2000만 원)에 입수했다.
팻말은 일본 에도 바쿠후(幕府)가 독도와 울릉도 주변에서 조 업을 한
자국 어민 2명을 해금령(海禁令) 위반으로 처형한 이 듬해에 만든 것이다.
▲ 일본 경매시장에서 150만 엔(2000만 원)에 팔려 한국으로 반입된
1837년 일본 에도막부시대의 ‘독도 도해(渡海) 금지’ 팻말. 가로 72㎝, 세로 33㎝ 크기의
소나무 팻말로 윗 부분에 2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
독도와 울릉도가 한국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진은 흐릿해진 글자를 판독하기 위해 적외선 촬영한 것이다.
나무 팻말은 1837년 2월 에도 바쿠후의 명령을 받아 다카다번(高田藩)이
니가타현 지역 해안에 게시한 것으로 가로 72㎝, 세로 33㎝ 크기다.
팻말 위쪽에는 두 개의 고리가 달려 있어 게시판에 걸었던 것 으로 보인다.
팻말에는 "죽도(울릉도의 일본 이름)는
겐로쿠(元祿·1688~1704년)시 대부터 도해(渡海) 정지를 명령한 곳이므로
다른 나라 땅에 항 해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한다"며
"죽도의 오른쪽 섬도 항해해 선 안 된다"로 기록돼 있다.
오른쪽 섬이란 독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상태 국제문화대학원대학 석좌교수는
"이 팻말은 죽도(울릉도)의 오른쪽 섬(독도)까지 항해금지를 내린 것으로 기록돼
일본이 독도를 한국 땅이라고 스스로 인정한 중요한 사료"라고 했다.
바로 이 '오른쪽 섬'이란 구절 때문에 일본측이 팻말의 반출을 막으려 했던 것이다.
도해금지령 팻말은 일본의 돗토리현 하마다시 향토사료관에도 한 개가 남아있다.
가로 1m, 세로 50㎝ 크기로 이번 발견된 팻말보다 2년 뒤인 1839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팻말은 죽도(울릉도)에 도해금지령을 내린 것으로 기록돼
일본측은 독도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반면 우리는 독도가 죽도(울릉도)의 부속 섬이니 특별히 기재하지 않았다는 논리를 펴왔다.
그러나 이번 팻말 발견으로 일본이 독도를 자국 땅에서 배제한 것이 명확해진 것이다.
팻말은 이어 "해상에서 다른 나라 배와 만나지 않도록 하고 될 수 있는한
먼 바다에 나오지 않도록 분부한다"고 되어 있다.
당시 일본 기록을 보면 "에도 막부의 도해 금지 통지는 팻말로 해서
게시판에 걸어두고 고다이칸(치안담당자)은 방방곡곡에 이를 알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이런 울릉도·독도 도해금지령 팻말은 일본 해안 곳곳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팻말은 작년 3월 15일 일본 경매회사인 코기레카이(古裂 )에서 가격 120만엔으로 공개 경매에 부쳤다.
일본인 3명이 138만엔과 145만엔, 150만엔으로 응찰했다.
5만엔 차이로 낙찰받은 것을 한국인 사업가가 인수했다.
이 팻말이 경매에 나오면서 관심을 쏟던 일본 언론들은 낙찰된 이후에도 150만엔에 팔렸지만
낙찰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경매회사가
함구하고 있다는 보 도와 함께 팻말 행방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한국인 사업가는 이 팻말이 한국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논조로 일본 언론이 관심을 보여 놀랐다"며
"일본측이 반출을 금지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따리를 싸고 풀기를 여러 번 거듭했 다"고 했다.
이 사업가는 사태가 잠잠해지길 기다려 10개월 뒤인 올 1월에야 국내로 들 여왔다.
팻말은 국내에 들어온 뒤 좀벌레가 먹은 구멍에서 나무가루가 계속 흘러나와
국내 문화유산보존연구소에서 보존처리 작업을 거쳐 공개됐다.
팻말은 살균살충 기능을 가질 수 있도록 훈증처리하고, 부스러진 표면은 전통아교로 처리했다.
나무 재질은 소나무였고 흐릿한 글자는 적외선 촬영으로 판독 했다
이즈음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세종이 세자에게 대리 집정을 시키고 훈민정음의 제정을 마무리 하고 있는때에
"황공하온 말씀으로 성상께서는 세자 저하게
대리 청정 하신 것이 이 언문 연구를 위한 핑계 이셨습니다.
그러니 신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옵니다.
일찌기 성현들이 만들어 놓은 진서문자 眞書文字가 있는데도
하필 괴상한 글자를 만드시어 우리 백성들에게 쓰게 하시려 하니 답답하시옵니다.
이제 성상께서 환후가 쾌유하시는 길은 그 언문 연구를 철회하시는 일이옵니다.
이는 일의 본말 즉, 근본과 지엽을 전도하신 것이옵니다.
<대학>에도 기본이 난이말치자부의 亂而末治者否矣라고 하였사옵니다.
보잘것 없는 언문연구는 거두어 중지 하시든지
아니면 다만 삼문, 숙주등에게 일임 하시옵소서. "
" 만리야 너는 자신이 큰 충신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은 어리석은 선비요, 고집센 바보이니라.
한자와 우리의 상용 말이 서로 달라서 곧 말과 글이 다르다 하겠으니
이를 한가지로 갖게하려는 훈민정음은 바로 대문 大文이니라.
이를 너희는 일컬어 언문 諺文이라 고집하고 보잘것 없다고 하니 한심하고녀.
더구나 오랑캐의 본을 딴 괴상한 글이라니, 넌 피가 마르고 눈이 멀도록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있는 임금의 마음을 그다지도 몰라 준단 말이냐? "
이때에 영의정 황희가 입조차 들어왔다. 황희의 이때 나이는 여든 한살이었다.
이미 2년전인 세종23년에 노쇠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으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달에 공식적으로 입조하는 것은 초하루와 보름날로 하여 2회로 한정할 것을
임금이 조건으로 하면서까지 붙들어 하는 수 없이 영의정으로 남아 있었다.
황희는 고집불통의 최만리가 벼르던 끝에 임금에게 듬벼들어
마침내 큰 거조가 날 형세임을 간파하고 얼른 최만리를 내어 쫓았다.
" 급한 정사를 논 할 것이 있어 그러니 최 부제학은 물러가게. 너무 성상을 괴롭히지 말고 말일세. "
" 아니 영상대감"
" 허허 나이 먹은 사람이 하는 말은 듣는 법이네."
" 예, 흐흠"
최 만리가 물러가자 성 삼문, 신 숙주도 모두 자리를 비우고 나갔다.
" 전하, 최 만리는 집현전의 주무 관장일 뿐으로
훈민정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이니 너무 괘념 마시옵소서.
위인이 심성이 곧아서 제딴으로는 성상의 용체를 심려한 끝에
충간을 하는 것이오니 너그러이 용납하시옵소서."
" 누가 그것을 몰라서 그러겠소. 내 저를 아끼기를 수족과 같이 하는 터이니,
그 일로 해서 무슨 벌이야 주겠소. 그런데 오늘은 경이 퍽 늦었구료."
" 예, 간 밤에 비가 몹시 내려서 조금 늦었습니다."
" 오, 비가와서? 아니, 그러고 보니 관복이 아직 젖었구료. 어인 일이지요."
" 황공하옵니다. 신의 아내가 늙으니 자연 게을러져서 이러 하온가 아뢰옵니다."
" 아내가 게으러다니, 그 는 또 무슨소리요."
" 하하.... 간밤 비로 젖은 관복을 아내가 일찍 말려서 다려 놓지 못했다 이 말씀 아옵니다."
" 간 밤 비에 젖다니, 그럼 그 비를 맞고 경이 백성들 사는 곳을 순행이라도 하였던가요? "
" 아 아니옵니다. 실은 신이 늙고 게을러서 집을 손질하지 않았더니
그만 지붕이 세어서 벽에 걸어둔 관복이 젖었던 것이옵니다. 황공하옵니다. "
" 아니, 무어라고요? "
세종 임금은 눈을 휘동그레 뜨고 입을 크게 벌리더니 한동안 다물지를 못했다.
황 희는 이때 백관의 우두머리인 영의정으로 있은 지가 13년이었다.
그가 관직에 있은 지는 자그만치 56년간 이었다.
그런데 그는 평생을 국록으로만 살았다.
일년 열두 달 녹으로 나라에서 내리는 묵은 쌀만 먹어서
그의 집에서는 햅쌀밥을 구경 한지는 수십년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의 집은 낡아서 비가 방으로 쏟아 질 지경이었다.
세종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날 안상궁을 불러서 급히 황 희의 집으로 보냈다.
집을 살펴 본 안상궁은 더욱 고개를 내저었다.
뒤주 속에는 묵은 쌀 몇 말만 들어 있고 지붕의 기와는 모두 삭아서
별이 보이는 데 어떻게 손을 대어서 더 수리 할 수도 없게 된 낡은 고가였다.
안 상궁의 고하는 말을 들은 세종 임금은 자신의 어두움을 통탄하였다.
" 내가 혼군이요. 암주로다. 여보시오 중전. "
" 예 마마 "
" 어째서요 ? "
" 영의정이 얼마나 청렴 결백하면 비가 새는 집에 살고 관복이 젖어 입조에 늦었겠습니까?"
세종은 선공감을 불러 영을 내렸다.
" 황정승이 알면 펄쩍 뛸것이니라. 아무도 몰래 일을 시작 하되
대궐에서 가까운 저 내수방 쯤에다 집을 한 채 지어라. "
" 예, 전하"
" 짖되 아흔 아홉칸으로 할 것이며 비용은 모두 과인의 내탕금으로 지출 할것이요.
가재 기물 일체도 궁실의 규범에 준하여 일습을 구비시킬 지니라. "
" 예, 전하 황공 하여이다."
그리고 세종은 이 때에 스스로 수레를 고안하여
그 설계 도면을 만들어 이름하여 초헌 軒이라 하였는데
정2품 이상의 중신으로서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입조때 출퇴근을 위해서 타고 다니게끔 새로 만들어 하사하였다.
조선 말년까지 노재상들이 타고 다니던 초헌 수레는 이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황 희 정승은 새집에 입주 할 때에 초헌 위에 앉아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훈민정음을 만든지 3년이 지난 세종 28년 서기 1446년 9월 29일 갑오일 이었다.
세종 임금은 드디어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국중에 널리 반포 하였다.
이 날이 양력으로는 10월 9일이요. 오늘날 우리가 경축하는 한글날이다.
<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도마침내 제 뜻을 펼 수 없으니,
내 이를 가엾이 생각하여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노니
사람들로 하여금 수이 읽혀 날로 슴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이후로 이 한글이 우리의 민족 문화에 끼친 영향은 너무도 커서 한마디로 말 할 수 조차 없다.
세종은 이를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서 반포 하였고
뜰에 도열한 문무백관은 숙연하여 기침소리 하나 없었다.
그리고 가을의 찬연한 하늘은 빛나고 있었다.
이어 세종 임금은 정음청 正音廳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한글로서 많은 책을 간행하게 하고 ,
이어서 옥중의 죄수를 심문하는 공문서에 새로 창제한 한글을 섞어 쓰게 하였다.
이것은 또한 세종의 인본주의 사상이다.
그는 애당초 백성을 천하의 대본으로 생각하는 데서부터
그 위대한 정치의 정화를 이루었던 대 정치가요 훌륭한 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