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된 문건은 1951년 휴전회담 관련 기록물로 당시로서는 군사기밀 1급으로 분류된 것들이다. 「휴전협정 녹취록」, 「휴전회담장에서 작성한 비망록」, 「金日成이 리지웨이 장군에게 보낸 電文」, 「유엔 수석대표 조이 제독의 개회성명서」, 「회담대표들에게 주는 리지웨이 장군의 지침」 등의 자료들이다.
白장군이 휴전 회담 관련 개인 비망록을 비롯한 각종 기록물을 공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白장군은 『1950년대 말까지는 정부의 문서기록이나 보존체계가 정착돼 있지 않아 개인적으로 소장해 왔다』고 밝혔다.
「휴전회담장에서 작성한 비망록」은 白장군이 1군단장 재직시절인 1951년 7월7일부터 휴전회담 대표로 지명돼 활동하면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사이에 벌어졌던 「銃聲(총성) 없는 전투」를 기록한 것이다.
연한 하늘색 가로선이 그려진 미군 공식 노트 400장 분량의 비망록은 1951년 7월7일부터 8월26일까지 50일간의 현장기록이다. 평양사범을 졸업한 그는 평소의 메모습관을 살려 회담 현장을 생중계하듯 기록했다.
누렇게 바랜 비망록은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먼지가 날렸지만, 회담 당시 양측 대표의 긴박한 舌戰(설전)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듯했다. 비망록을 기초로 당시의 상황을 원문을 기초로 재구성했다. 古語體 글은 현대적 표현으로 바꿨다.
1951년 7월7일 李承晩: 『미국이 하자니 안 할 수도 없고…』
白善燁 제1군단장은 1951년 7월7일 美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대장에게서 電文을 한 장 받았다.
<귀관은 停戰에 관한 談判에 있어서 공산군 대표단과 협의할 대표 5명 중 1명으로 유엔군 총사령관이 선발하였다. 첫 회의 일정은 미정이다. 7월8일 정오까지 美8군 전방사령부까지 도착하라>
李鍾贊(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은 白장군에게 「군단장 임무는 계속 수행하되, 부군단장 張昌國(장창국) 준장에게 군단장을 대리하게 하고, 즉시 부산으로 가 李承晩 대통령에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白장군은 이날 오후 속초 비행장을 출발해 釜山으로 내려가 李대통령을 만났다. 李대통령은 심기가 불편했다.
<대통령 각하를 만났다.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이 동석했다. 대통령은 이렇게 훈시를 했다.
『美 군정 시대에 그네(미국)는 공산당과 합작을 강요하였다. 일이주 내로 해결됐으면 좋겠지만 미군이 직접 공산 측과 정전하겠다는 것은 웃음을 사고 있다. (白장군이) 정부와 민의를 반영하여야겠다. 중요문제는 허가를 받아라. 군인으로서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시를 받되, 정전대표로서는 정부의 지시를 받아라. 미국 사람들은 휴전을 하려고 하는데 100만 중공군이 내려와 있는 마당에 휴전이 말이 되는가. 우리는 통일이 목표야. 지금 휴전하자는 것은 국토를 분단하는 것이야. 나는 절대 반대다』
대통령의 이야기에 『대통령 각하의 의도가 그러시다면 참가하지 않겠습니다』고 했다. 李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 사람들이 저러하니 안 갈 수도 없고… 미국 사람과 협조하는 뜻도 있고 하니 참석토록 하라』>
7월8일 白장군은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수송기편으로 서울에 있는 美 8군사령부로 갔다. 白善燁은 밴플리트 장군을 만나고 나서 휴전협정에서 한국과 자신의 역할이 별로 없을 것임을 직감했다.
<8군에서 호디스 소장, 8군 참모장, 8군 사령관을 만났다. 밴플리트 장군은 『유엔군측 수석대표는 조이 제독이며, 각 대표들은 이를 보좌하는 것이다. 발언은 수석대표만 한다』고 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내게 元山, 鐵原, 高城 삼각지대에 대한 공격계획도 설명했다>
7월9일, 白善燁은 리지웨이 대장이 유엔군 측 대표들과 각 참모를 소집해 예비회담을 개최한다는 전갈을 듣고 현장으로 향했다. 白善燁은 조이 수석대표에게 대한민국의 「5개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조이 제독은 정전에만 관심이 있었다.
『전우들의 시체 위에서 휴전회담을 하다니 착잡했다』
<휴전회담에 대해 정부는 5개항의 조건, 즉 ▶중공군의 한반도로부터의 완전철수 ▶북한 괴뢰군의 무장해제 ▶북한 공산당에 대한 유엔의 원조 금지 ▶한국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에는 항상 한국 대표가 참석 ▶한국의 주권이나 영토를 침범하는 어떠한 案이나 행동도 適法(적법)한 것 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5개 요구사항」을 전달했으나, 조이 제독은 『잘 알았으나, 우리 단원은 오직 군사 휴전 담판을 위해 전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1사단장 시절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전사한 부하들이 묻혀 있는 곳에서 휴전회담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착잡해졌다>
정전협정 본회담 장소는 공산 측의 의도대로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인 개성에서 열리게 됐다. 유엔군 측은 회담이 끝날 때마다 汶山里 동편 사과밭에 있는 「평화촌」으로 철수키로 했다. 白장군은 평화촌을 돌아봤다.
<평화촌의 분위기는 「열흘쯤이면 휴전협상이 타결되지 않을까」 하는 낙관적 전망이 우세했다. 어느 날 평화촌을 방문한 李鍾贊 참모총장이 六堂 崔南善이 쓴 「조선역사」를 건네 주며 읽어 보라고 했다고 했다. 과거 國難을 당해 휴전회담과 유사한 講和를 해야 했던 민족의 역사가 있는 만큼 역사의식을 가지고 회담에 임하라는 충고일 것이라 생각했다.>
1951년 7월10일 오전 11시, 全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휴전회담이 개막됐다. 첫 날의 긴장된 순간을 白장군은 이렇게 기록했다.
<이날 아침,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우리는 강대국이다. 위신을 세워 정정당당하게 임하라』고 유엔군 측 휴전회담 대표단 일행을 격려했다. 우리는 헬리콥터 편으로 개성으로 향했다. 우리 대표 일행들은 출발전 손거울 하나씩을 받았다.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거울로 구조 항공기에 신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육군 1사단장으로 최초로 평양에 입성했던 白장군은 분단고착을 우려했다.
<오전 9시경, 유엔군 기지인 「힐 카크타파」에서 수석대표와 동석해 汶山을 출발하려고 했다. 역사적인 회담에 참가하면서, 국가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지고 悲憤(비분)의 피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200여 명의 내외신 신문기자들은 사진을 찍느라고 서로 다투고 있다. 인간이나 국가나 모두가 투쟁의 역사이다. 그러나 그 투쟁은 반드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敵에 항복을 받으러 가는 것이 못 되고, 휴전 담판을 하러 가는 입장이니 통곡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공산군측은 협상장소를 「선전장」으로 활용했다.
<공산군 측은 자신들이 수석대표 南日에게 큰 의자를 주고, 유엔군 측 수석대표 조이 제독에게는 南日의 것보다 4인치나 낮은 의자를 주어 마치 승자가 패자를 내려다 보면서 「훈계」하는 것처럼 연출했다.
북한군 대표들은 높은 칼라에 완전하게 갖춘 正服(정복)에 긴 가죽장화 차림의 정장을 해서 상대방을 압도하려 했다. 우리는 실무회담 분위기에 맞게 나는 전투복 차림이었고, 유엔군 측은 夏期(하기) 근무복을 착용했다.
# 공산군 측은 중립지대인 개성지역에 출입하는 모든 유엔군 측
차량에 「항복」을 의미하는 白旗(백기)를 달도록 하고, 대표 5명을 제외한 기타 인원들은 백색 완장을 착용케 했다.
첫댓글 귀한자료 소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