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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년∼1804년)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 1755년 혹은 1757년 1월 11일∼1804년 7월 12일)은 미국의 법률가이자 정치인, 재정가, 정치 사상가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 중 한 명으로 꼽히며, 1787년 미국 헌법의 제정에 공헌했다. 초대 워싱턴 정부 시절 재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카리브해의 네비스 섬에서 스코틀랜드인 아버지와 위그노의 핏줄을 이어받은 어머니에게 태어났다. 조지 워싱턴과 뜻을 같이 하는 연방주의자로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반 연방주의자와 대립하였다. 특히 토머스 제퍼슨과 많이 초기 재정 정책으로 대립했는데, 해밀턴이 독립전쟁 때의 빚을 모든 주가 공평하게 나눠 내자고 한 반면에 제퍼슨은 자치주의 빚은 자치주가 갚으라고 하였다. 해밀턴의 기반 지역이었던 뉴잉글랜드는 공업 위주 지역이라 빚이 많았는데, 결국 수도를 북부인 뉴욕에서 남부와 북부 경계선 즈음에 위치한 워싱턴 D.C로 옮기고 모든 빚을 나눠 갚는다는 절충안을 내놓았고 제퍼슨이 이를 수용하게 된다. 제퍼슨과는 1791년 미국 제1 은행 설립 당시에도 큰 마찰을 빚었는데, 제퍼슨은 은행 설립에 반대했으나 해밀턴은 수정헌법을 근거로 설립을 주장했고, 당시 대통령 워싱턴이 해밀턴의 주장을 들어줌으로서 아메리카 합중국 은행을 설립하게 된다. 이 당시 제퍼슨은 “왕당주의”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워싱턴이 정계에서 물러난 뒤 연방주의자당은 애덤스 파와 해밀턴 파로 나뉘게 되고, 결국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퍼슨에게 대통령을 내주고 의회마저 장악당하게 된다.
같은 연방주의자였던 존 애덤스, 그러나 나중에 서로 갈라졌다. 18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두려워하는 에런 버 대신 토머스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으나 1804년 당시 부통령 에런 버와 결투를 벌이다 버에게 살해당했다. 사후 달러화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닌 인물은 알렉산더 해밀턴(10달러)과, 벤저민 프랭클린(100달러) 두 명뿐이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리워드 제도 네비스 섬의 수도인 찰스타운에서 태어났다. 네비스는 영국 서인도 제도 중에 하나이다. 해밀턴은 프랑스 위그노 후손인 레이첼 포셋과 스코틀랜드 출신인 제임스 해밀턴 사이에서 태어났다.
해밀턴의 어머니는 어린 해밀턴을 데리고 버진 제도에 있는 세인트크로이 섬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세인트크로이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해밀턴의 출생년도가 1757년인지 1755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해밀턴이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이후 대부분의 역사적 증거들은 해밀턴이 1757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1930년대 덴마크에서 해밀턴의 캐리비언 제도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 처음 발간된 기록에서는 1755년생으로 보고 있다. 해밀턴은 13개 식민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출생년도를 1757년으로 기입했다.
1772년 가을에 해밀턴은 뉴저지주 엘리자베스타운에 있는 그래머 스쿨인 엘리자베스타운 아카데미에 도착한다.
1789년 9월 11일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초대 재무장관으로 해밀턴을 지명한다. 1795년 1월 마지막 날 해밀턴은 사임한다. 의회의 구성과 활동을 필두로 미국 정부의 대부분이 이 5년 동안 구축된다.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결투는 1804년 7월 11일에 발생한 미국 역사상 초유의 결투사건으로 서로 정적(政敵)지간인 미국의 두 정치인인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 사이에서 벌어진 일대일 대결이다.
알렉산더 해밀튼은 에런 버로부터 1804년 7월 11일에 결투를 신청 받았다. 결투로 아들을 잃은 적이 있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입장에서는 결투를 원치 않았으나 자신의 명예 때문에 억지로 결투를 승낙했다. 그 당시 뉴욕주의 법은 결투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렉산더 해밀턴과 애런 버는 강을 건너서 결투가 허가된 지역인 뉴저지 주의 위호켄 외곽의 허드슨 강변 바위절벽 아래로 이동한 뒤 그 곳에서 결투를 벌였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총을 겨누고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으나 에런 버의 총에서 총알이 먼저 발사되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오른쪽 골반에 총알을 맞고 쓰러졌는데 총알이 척추까지 관통했다. 그리고 이 후유증으로 다음날 알렉산더 해밀턴은 사망했다.
이 대결은 승자와 패자의 인생을 모두 망쳤다. 패배한 알렉산더 해밀턴은 다음날 사망했으니 말할 나위도 없고 승리한 에런 버 역시 이 사건 때문에 당시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차기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에서 제명당하고 조지 클린턴이 부통령 후보에 지목되었으며 토머스 제퍼슨은 재선에 성공하였다. 더군다나 토머스 제퍼슨에 의해 에런 버는 정치인으로서 매장 당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토머스 제퍼슨은 애런 버를 비록 정적(政敵)이긴 하지만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의 개념이 아닌 선의의 경쟁자, 라이벌로서 인정해줬기 때문에 애런 버를 부통령으로서 존중했지만 이 사건이 발생하자 에런 버에 대한 토머스 제퍼슨의 실망은 극에 달하였고 결국 토머스 제퍼슨은 애런 버가 두 번 다시는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에 에런 버는 1807년 미국이라는 나라에 크게 앙심을 품고 프랑스로 건너갔으며 당시 유럽의 권력자들 중 한 사람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접근해서 나폴레옹에게 미국을 공격하도록 설득했으나 애런 버가 개인감정으로 미국에 앙심을 품고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애런 버의 요구를 계속 묵살했다. 1812년까지 나폴레옹을 설득하지 못한 버는 결국 미국으로 귀국해서 변호사를 했다.
이 사건으로부터 200년 후 2004년 7월 11일 에런 버와 알렉산더 해밀턴의 후손들은 이 사건이 발생한 장소에 모여 이 사건을 재연한 뒤 서로 화해했다. 재연에는 에런 버의 역할은 애런 버의 사촌의 후손인 안토니오 버가, 알렉산더 해밀턴의 역할은 알렉산더 해밀턴의 5대손인 더글러스 해밀턴이 담당했다. 이들은 실탄이 장전된 권총 대신 공포탄으로 재연했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의 삶은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극적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한 그는 신생 독립국 미국의 미래 청사진을 만들어낸 ‘뉴욕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미국 지폐에 초상이 새겨진 인물 중 대통령이 아니었던 사람은 벤자민 프랭클린(100달러)과 알렉산더 해밀턴(10달러)뿐이다. 그만큼 해밀턴이 미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755년 영국령 서인도제도의 세인트 크로와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난 해밀턴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대다수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해밀턴은 달랐다. 해밀턴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제3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제4대 대통령)은 모두 버지니아 주에서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던 명망가의 후손이었으나 해밀턴의 아버지 제임스 해밀턴은 떠돌이 교역상이었다. 어머니 레이첼은 프랑스 의사의 딸로 제임스 해밀턴을 따라 덴마크령 서인도제도의 세인트 크로와 섬으로 이주했다.
1765년 해밀턴이 10살 때 아버지 제임스는 가족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생활이 어려워진 레이첼은 조그만 가게를 열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해밀턴도 11살 때부터 회계사 사무실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가 13살 때이던 1768년 어머니 레이첼이 사망하면서 살림살이는 더욱 궁핍해졌다.
해밀턴의 인생행로를 바꾸어놓은 것은 한 편의 글이었다. 17살이 되던 해 여름 허리케인이 몰아치자 해밀턴은 자연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관한 글을 쓴다.
‘하늘에서 계속되는 거대한 섬광, 천둥소리, 울부짖는 바다, 날리는 물체들, 부서지는 집. 사람들의 비명 소리로 마치 세상이 다 꺼져버리는 것 같았다. 대부분의 건물이 주저앉았다. 사람들은 숨을 곳을 찾지 못해 길거리를 방황했다. 몸을 감쌀 젖지 않은 천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목이 말라도 물이나 빗물은 짜디짜 도저히 마실 수 없었다.’
해밀턴이 쓴 이 글은 세인트 크로아에서 발행되던 신문에 실렸고, 그 글을 읽은 섬의 유지들은 돈을 모아 해밀턴을 뉴욕 킹스 칼리지(컬럼비아대의 전신)에 유학보내기로 결정한다. 킹스 칼리지에 입학한 그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영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해밀턴은 1774년∼1775년 영국 상품의 수입금지·소비금지·수출금지라는 이른바 ‘3금(禁) 정책’을 지지하며 반영(反英)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해밀턴은 자진 입대해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최측근 참모가 된다.
1776년 3월 해밀턴은 뉴욕 식민지의회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식민지 포병대의 대위로 임관한다. 독립전쟁에서 뉴욕은 미국과 영국에게 전략적 요충지로 떠올랐다. 메사추세츠와 버지니아, 필라델피아의 중간에 위치한 뉴욕을 누가 선점하느냐에 따라 독립전쟁 초기의 전세가 판가름 날 상황이었다.
영국은 대규모 함대를 파견해 뉴욕을 점령했다. 조지 워싱턴은 뉴욕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영국군에 패퇴한다. 뉴욕 탈환 의지를 불태우던 조지 워싱턴은 ‘뉴요커’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고, 특히 해밀턴의 머리에 많은 부분을 의존했다.
미국 독립전쟁은 근본적으로 ‘게릴라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패했듯이 당시 영국도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미국 독립군에 밀리기 시작했다.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했던 대영제국은 대서양 건너의 미국 반란군만 진압하고 있을 수 없었기에 총력전으로 맞선 미국 독립군에 패퇴하는 횟수가 점차 많아졌다.
미국 독립군은 허드슨 강 근처의 사라토가에서 영국군에 ‘승리다운 승리’를 거둔다. 또 프랑스가 미국을 지원함으로써 전세는 급격하게 독립군 쪽으로 기울었다. 1777년 2월 조지 워싱턴은 해밀턴을 중령으로 승진시키고,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다. 워싱턴의 참모로 있던 4년 간 해밀턴은 조지 워싱턴과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그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조지 워싱턴과 프랑스 해군 사령관을 잇는 연락 장교로 기용된다.
해밀턴은 필립 스카일러 장군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1781년 11월 독립전쟁이 사실상 종결되자 해밀턴은 올버니로 거주지를 옮긴 뒤 법률 공부에 몰두, 1782년 변호사 자격증을 딴다. 뉴욕 시 재정담당관을 거쳐 1783년부터 뉴욕 시 변호사로 일하게 된 그는 1787년 뉴욕 하원의원에 선출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조지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해밀턴을 1789년 초대 재무장관으로 임명한다. 의회는 해밀턴에게 나라살림을 어떻게 이끌고 갈지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해밀턴은 국내외 신용을 확립하고, 주권(州權)을 가급적 억제하는 반면 중앙정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놓는다. 그는 또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해밀턴이 내놓은 보고서는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토머스 제퍼슨과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된다. 이른바 해밀턴주의와 제퍼슨주의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미국 역사는 해밀턴주의와 제퍼슨주의의 끊임없는 사상적 투쟁과 타협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연방파를 대표했던 해밀턴과 공화파의 거두(巨頭)였던 제퍼슨의 대립과 갈등은 미국 최초의 정당정치를 움트게 하는 기폭제가 됐다.
해밀턴이 주도한 연방파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민주주의 이념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밀턴은 일찍이 캘빈이 설파한대로 인간은 나약한 존재여서 타락할 수밖에 없으며, 홉스가 지적한 대로 이기적이며 다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인간의 ‘선천적 악성’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해밀턴은 국민들에게 전폭적인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일정 규모가 넘는 재산을 소유한 시민들에게만 선거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설파했으며, 주정부보다는 연방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제퍼슨이 이끌고 있던 공화파는 영국과 긴밀한 유대를 갖고자 했던 연방파와 달리 프랑스와의 결속을 강화하려 했다. 또 약한 중앙정부와 중농주의(重農主義)를 채택해 연방파와 잦은 마찰을 빚었다. 재무장관이었던 해밀턴은 연방파의 강령을 관철시키기 위해 제퍼슨이 맡고 있던 외교 분야에까지 개입했고,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를 내각에서 몰아내기 위해 치열한 각축을 벌이게 된다.
초대 재무장관으로서 해밀턴이 넘어야 할 산들도 많았다. 프랑스에서 빌린 차관, 독립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밀린 월급, 새 국가건설에 소요될 엄청난 예산 등이 그를 짓눌렀다. 해밀턴은 이같은 재정적 위기를 국공채 발행, 증권거래소 설립, 독립조폐국의 설치, 관세제도 시행을 통해 정면 돌파해나갔다.
하지만 파산 지경에 이른 신생 연방정부의 재정위기 앞에서는 해밀턴도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연방정부는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오직 주정부만이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해밀턴은 재정문제 해결을 위한 승부수를 띄운다. ‘수도를 양보하는 조건으로’ 제퍼슨과 메디슨의 협조를 얻어 재정난 해결을 위한 법률을 통과시킨 것이다. 다만, 워싱턴DC에 수도를 건설하기 전까지 임시 수도를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로 옮겨야 한다고 제안했다. 임시 수도를 필라델피아로 옮기려 했던 것은 당시 재정난 해결을 위한 법률에 반대했던 펜실베이니아 주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묘책’이었다.
해밀턴은 한때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세금 징수에 나섰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농부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명분을 내세워 위스키에 25퍼센트의 세금을 부과했다가 농민 폭동으로 혼쭐이 나기도 했다.
해밀턴은 1795년 1월 초대 재무장관직을 그만둔다. 그러나 사임한 뒤에도 해밀턴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조지 워싱턴은 정책 현안에 관해 해밀턴에게 조언을 구했다.
17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방파 지도자들은 해밀턴의 주장을 무시하고 존 애덤스를 미국 제2대 대통령 후보로, 토머스 핑크니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애덤스가 연방파의 정치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판단한 해밀턴은 선거인단을 움직여 핑크니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애덤스는 대선에서 승리했고, 해밀턴은 수많은 억측과 불신의 중심에 서게 됐다. 대통령직에 오른 애덤스는 그러나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해밀턴을 내치지 않고, 오히려 중용했다.
프랑스와 외교 갈등을 빚자 애덤스는 1798년 해밀턴을 평화사절단의 일원으로 파리로 파견한다. 프랑스와의 교섭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해밀턴은 국가 전시체제로 돌입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프랑스가 미국을 침공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해밀턴과 애덤스 사이는 벌어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해밀턴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스페인령 루이지애나와 플로리다를 비롯한 남부 지역을 공격하려는 계획이 알려지면서 최고조로 치달았다. 애덤스는 외교분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해밀턴에게 임시 군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한다.
결국 해밀턴은 1800년 6월 자신의 모든 직위를 내놔야 했다. 애덤스는 즉각 내각에서 해밀턴 측근들을 축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해밀턴은 애덤스의 재선을 막으려 했고, 두 사람의 다툼은 연방파의 분열을 가속화시켰다. 해밀턴은 애덤스뿐 아니라 애런 버와도 갈등을 빚었다. 1800년 3대 대통령선거 1차 선거인단 투표에서 토머스 제퍼슨과 버가 똑같이 73표를 얻어 무승부가 되자 이듬해 해밀턴은 하원에서 버가 아닌 제퍼슨이 3대 대통령에 선출되도록 앞장섰다. 버가 대통령에 오르지 못하고 차점자 부통령이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대선 이후 연방파 내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해밀턴은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 뒤 이듬해 ❮뉴욕 이브닝 포스트❯ 신문을 창간했다. 해밀턴은 이 신문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피력하는 데 주력했다.
1804년 뉴욕 주지사를 뽑는 선거가 치러지자 해밀턴을 제외한 대부분의 연방파들은 뉴욕 주지사 후보로 버를 지지했다. 그러나 해밀턴은 버와 경선을 벌인 공화파 후보를 밀었다. 선거는 해밀턴이 지지한 공화파 후보가 근소한 표 차로 뉴욕 주지사로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해밀턴이 항상 자신의 앞길을 막아왔다고 판단한 버는 선거가 끝난 뒤인 1804년 6월 해밀턴에게 ‘죽음을 건 결투’를 요청한다. 그해 7월 11일. 두 사람은 허드슨 강을 따라 죽음의 대결이 그때까지 합법화돼 있던 뉴저지의 위호켄에 도착, 54구경 칼리버 권총으로 1대1 대결을 벌인다. 그곳은 3년 전 해밀턴의 장남 필립이 결투로 목숨을 잃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해밀턴은 영국의 귀족주의를 열렬히 찬미하고 숭배하였으며, 민주주의는 국민의 변덕과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분위기가 좌우하는 통치로 이해하였다. 동료인 제임스 매디슨과 다르게 미국 상원을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귀족의 대표로 생각했다. 해밀턴은 노예무역에서 법률 대리인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이후 노예 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