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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잔 앞에서 고해하는 사람들
막걸리는 귀를 가진 술이다.
말을 듣지 않고 핀잔하는 남편 때문에 속상한 옆집 아주머니의 오랜 상처와 아들을 낳지 못해 구박당하는 며느리의 허전한 속내를 헤아려준다. 쌀뜨물처럼 뽀얀 막걸리를 한 잔 앞에 두면 사람들은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우리 집 마당에 놓인 들마루는 김치 한쪽에 막걸리 한 사발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역할을 하는, 마을 아주머니들의 카페였다.
카페 단골 손님들은 매일 들어도 똑같은 이야기, 그러나 당사자에겐 날마다 켜켜이 쌓여 무거워진 사연을 들려주었다.
이때 함께 나눈 막걸리는 누군가의 더운 머리를 식혀주고, 한여름에도 얼음장 같은 마음을 녹였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막걸리 한두 잔에 고단한 일상을 잠시 잊었을지도 모른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우리 할머니가 술을 빚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막걸리는 누룩, 쌀, 좋은 물, 햇볕, 바람의 도움과 정성으로 만들어진다.
할머니는 분쇄한 밀(또는 보리)을 반죽하여 소창에 싸서 발로 밟아 동글 납작한 모양의 누룩을 빚었다.
빚어진 누룩은 헛간에서 짚으로 덮여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말라가면서 띄워졌다.
단단하게 마른 누룩은 절구에 빻아진 뒤에 며칠 동안 밤에는 이슬에 젖고 낮에 햇볕과 바람을 맞으면서 쿰쿰한 냄새를 벗어놓고 마침내 향기로운 가루가 된다.
누룩가루를 얻는 일이 술 빚는 일의 신성한 첫발이다.
잡균을 없앤 항아리에 누룩가루, 고두밥을 골고루 섞고 맑은 샘물을 넣는 것까지 만드는 사람의 부지런한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한지로 뚜껑 삼아 항아리를 덮고 나면 술이 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시작된다.
가끔 기다란 나무 주걱으로 항아리 속을 저어주는데, 어떤 날은 항아리에 귀를 대면 톡톡 터지는 술 방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술을 담근 지 대략 열흘 정도 지나면 대나무로 만든 용수를 항아리에 박아서 맑게 고인 제사용 청주를 떠내기도 한다.
그리고 남은 걸쭉한 술덧을 체에 치대면서 물을 부으면 비로소 우리가 잘 아는 술이 완성된다. 막걸리라는 이름 역시 굵은 체에 막(곧바로, 방금) 걸러냈다고 해서 그리 붙었다.
그런데 '막'은 '거칠게, 함부로'라는 뜻도 있기에 사람들에게 막걸리는 거칠게 걸러낸 술로 여겨지기도 했다.
쓰인 재료와 만드는 정성에 비해 '막'이라는 말이 붙어서 싸구려 술로 업신여김을 당하며 귀한 대접받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실제로 소주, 막걸리, 맥주 한 병당 제조원가를 비교하면 막걸리가 제일 높다고 한다.
세금이 적게 붙어 비싸지 않게 우리를 찾아온 막걸리는 질도 좋고 가격 부담도 적은 술이다.
우리 마을의 비무장지대는
일흔을 넘긴 할머니다
새벽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옆집 아주머니의 벌건 눈도
아래 뜸 할머니의 고목 속마음도
적금 붓듯 남편 흉보는 며느리도
할머니 앞에서 무기를 내려놓는다
그려그려 가심 아팠겄네
욕봤어! 자네나 허니께 젼디지
별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어떤 날은 살짝 졸고 계시는 듯한데
사람들은 꽃 보듯 마음을 놓고 간다
막걸리 한잔하라며
무릎 세우는 도라지꽃 같은 할머니
대접에 따르는 술이 출렁 넘쳐
들끓는 마음 적셔주고
마당가 석류나무 꽃봉오리도 귀를 연다
꽃이 피는 뜻은
들을게 많아서다
-최경실, 마을의 꽃
🍅몸도 마음도 품어주는 막걸리의 맛
막걸리는 여섯 가지 효능이 있다. (이종호의 <막걸리를 탐하다>참고)
첫째, 마시면 묵직하고 배부르니 열량이 높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포도주나 소주, 위스키보다 매우 낮다.
둘째, 곡물과 누룩 속에 있는 단백질이 술이 되는 과정에서 아미노산으로 분해되는데, 그 덕에 필수아미노산이 많이 들어 있다.
셋째, 장 속 유해균을 억제해 면역력을 높이는 유산균이 많다. 무려 요구르트의 10배다.
넷째, 갈증을 멎게 하고 소화를 돕는 유기산이 풍부하다.
막걸리 특유의 산미를 부여하는 유기산은 우리의 피로감을 빠르게 해소해주기도 한다.
다섯째, 비타민B도 많아서 역시 피로감을 덜어주고 피부와 시력을 좋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막걸리의 술지게미에는 단백질, 섬유소 등의 영양소가 많아서 변비를 개선해주고 식후 혈당을 낮춘다고 한다.
실제로 변비가 심한 나는 배상면주가에서 만든 '느린마을 막걸리'를 마신 다음 날에는 황금빛 변을 시원하게 보곤 한다.
막걸리는 적절하게 마신다면 건강에 도움을 주는 좋은 술이다.
막걸리는 품이 넓은 술이다.
다른 술처럼 까탈스럽게 곁에 두는 안주를 가리지 않는다.
안주가 없어도 마시는 사람에게 외로움이나 괴로움을 주지 않고 홀로 든든하다.
김치 한쪽만 있어도 부족함이 없다.
갓 쪄낸 가지나물, 호박나물, 파전, 생오이, 묵직한 수육이 모두 어울린다.
특히 차가운 성질의 홍어와 궁합이 잘 맞는다. 세상 어떤 술이 암모니아 향 진하게 풍기는 홍어를 품을 수 있겠는가.
막걸리는 사람의 마음도 품어준다.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의 시를 보면 그가 막걸리를 나누면서 이웃과 벗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너 나그네가 가을빛 따라와
시지으며 흥을 돋우니 재주는 따지지 않네
서늘한 바람나무에 있건만 매미는 아직 울고
맑은 달빛 모래밭에 가득하자 기러기 돌아오려네
푸른산 오막집에 추위가 스며들자
사방 이웃들이 막걸리잔을 건네네
나무꾼에 고기잡이까지 기쁘게 친구가 되니 집집이 마음껏 웃음꽃 피웠구나'
정약전의 <사포소집차두운(沙浦少集次杜> 중에서
세상과 떨어져 작은 집에 홀로 고적하게 있을 정약전에게 섬마을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를 유배지의 죄인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여기면서, 집에서 빛은 귀한 막걸리 항아리를 헐었을 것이다.
함께 나누는 막걸리는 이들에게 살아갈 힘을 주는 밥처럼 튼튼하게, 고단한 일상에 여유와 재미를 주는 웃음꽃처럼 환하게 왔을 것이다.
🎈막걸리 따라 떠나는 여행
최근 막걸리가 MZ 세대를 중심으로 뜨겁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건강과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재평가를 받으면서 막걸리는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낡고 허름한 집에서 찌그러진 않은 주전자에 든 막걸리를 별다른 안주 없이 마시던 기성 세대의 풍경과 달리 붉은 벽돌집 테라스, 반짝이는 조명 아래에서 예쁜 잔에 막걸리를 음미한다. 젊은이들은 술을 맛보고 나서 맛보기 노트를 적기도 한다.
색, 향, 목 넘김, 청량감, 신맛, 단맛을 꼼꼼히 체크하고 어울리는 안주도 추천한다.
이들은 유명 막걸릿집을 찾아다니며 예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면서 막걸리와 관련된 정보를 공유한다.
이제 막걸리는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우선 이름부더 달라졌다.
한통의 구절초꽃술, 한통의 연꽃담은술, 만강에 비친 달, 동짓달 기나긴 밤, 배꽃필무렵, DOK막걸리, 술아원(술과 나를 한데 부른 말이란다), 매일 그대화, 대관람차, 봄비, 일곱쌀, 아홉쌀, 호랑이배꼽, 오미자씨, 구름을벗삼아, 술공방 9.0, 지란지교, 비틀, 시향가향기를 베푸는 집), 순진탁주 딸기, 볼빨간막걸리 등 다채롭다. 술병을 감싸는 라벨도 화려하고 감각적이다. 와인이 울고 갈 정도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막걸리를 만들 때 화학 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거나, 반드시 술 빚는 지역에서 나는 쌀을 이용하는 양조장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건강하고 맛 좋은 술을 위해 토란, 청귤, 딸기, 보리, 울금 등을 술에 넣기도 한다.
지역마다 다른 물맛 재료를 바탕으로 특색있는 막걸리가 만들어진다.
용기 있는 도전들이 새로운 막걸리의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호기심 많은 막걸리 마니아 중에는 아예 막걸리 지도를 들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나라 곳곳에 역사깊은 막걸리 양조장이 많기에 우리는 어느 곳으로 여행을 가더라도, 지역 고유의 막걸리를 마실 수 있다.
가평 잣막걸리, 강화쑥생막걸리, 서울 장수월매쌀막걸리, 정선 아우라지옥수수막걸리, 춘천 생막걸리, 면천 샘물생막걸리, 천안 쌀생막걸리, 송명섭 생막걸리, 진도 울금막걸리, 부산 금정산성 막걸리, 울산태화루 활동동주, 제주 보리쌀막걸리 같은 것들이다.
여행지까지가서 집 근처 동네 슈퍼에서 살 수 있는 맨날 그 술 말고, 이름도 재료도 건강하고 정겨운 막걸리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