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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여행] 제주 민속박물관 민속전통주택편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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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방 :남아선호사상이 심하던 시절,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면 아기를 낳을 때 남자 아기를 낳는다는 말이 있었
다. 미신인 줄은 알지만 재미삼아, 또는 정말 진지하게 아들을 바라며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돌하르방의 코 부분을 부셔 가루 내어 물에 타 마시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일부 돌하르방은 코
가 닳거나 없어진 것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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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여행] 제주 민속박물관 민속전통주택편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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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유랑자가 찾은 곳은 전통 민속 주택편이다. 먼저 입구에 도착하자 돌하루방이 유랑자를 맞이한다, 제주도
의 상징이자 마스코트가 되어버린 ‘하루방’이란 ‘할아버지’의 제주 방언이다. 알다시피 돌하루방은 현무암을 깎아
만들어지는 제주도 특유의 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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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돌하루방은 현무암을 깎아서 만들어지는데, 크기는 제주도의 각 지역 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주시에서 발견된 돌하루방의 평균 신장은 187cm이며 성읍은 141cm, 대정은 134cm이다. 가장 큰 돌하
루방의 크기는 266cm, 가장 작은 것은 103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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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한국에서는 고인돌을 지석묘라고도 한다. 한국에는 많은 고인돌이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퍼져 있
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며, 골짜기 방향이나 강·해안선을 따라서 만들어졌다. 고인돌은 제단고
인돌과 무덤고인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무덤고인돌은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굄돌에 따라 탁자식고인돌·바둑판
고인돌·구덩식고인돌로 나뉜다. 우리나라에는 땅 위에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는 구덩식고인돌이 가장 널리
분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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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돌하루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은 싱긋 웃는 입과 동공이 없이 개구리 왕눈이처럼 불룩 튀어나온 눈, 크
고 넓적한 코, 미세하게 웃는 모습, 그리고 손은 배 위에 얹어져 있는 하루방은. 1971년 8월 25일에 지방 민속자
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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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입구에 세워 수호신 구실을 하는 장승같은 역할을 하는. 석상인 돌하루방은 이 이름 외에도 벅수머리, 武石
木(무석목), 偶石木(우석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탐라 역사서에 따르면 翁仲石(옹중석)이라고 불렸는데,
'옹중석'은 '돌하르방'과 같은 표현이지만, 문헌상의 기록으로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호칭으로 현재에는 쓰이지
않는 말이다. 다만 하루방의 기원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이 돌하르방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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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낭:제주도의 전통 가옥에는 대문이 없다. 대신 구멍이 뚫린 화산석으로 된 돌기둥과 그 구멍 사이를 연결한 3
개의 나무막대로 이루어진 입구를 볼 수 있다. 구멍이 뚫린 돌기둥을 ‘정주석’, 구멍 사이를 연결한 나무막대를
‘정낭’이라고 한다. 정주석과 정낭은 처음에 소나 말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 마당에 있는 곡식을 먹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집에 찾아오는 손님에게 집주인의 상황을 알려 주는 역할
도 하게 되었다.
*정낭 3개가 모두 끼워져 있으면 ‘하루 종일 집을 비운다’는 뜻이다.
*정낭 2개가 끼워져 있으면 ‘마을 밖으로 외출했다’는 뜻이다.
*정낭 1개가 끼워져 있으면 ‘잠깐 외출했다’는 뜻이다.
*정낭 3개가 모두 빠져 있으면 ‘집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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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제주에 돌하루방이 처음 세워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260여 년 전, 영조30년(1764년) 때로 알려져 있다. 耽
羅紀年(탐라기년)에 의하면 당시 제주에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죽는 사람이 늘자 김몽규라는 제
주 목사가 중국의 옹중석을 세워 원귀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수호신 같은 구실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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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돌하루방의 원래 이름은 ‘옹중석’이었다는.......,또한 돌하루방의 종류는 손의 위치에 따라 상징하는 인
물이 달라지는데, 오른손이 왼손보다 위에 놓인 돌하루방은 文人(문인)을 상징하고 왼손이 위에 놓인 돌하루방은
武人(무인)을 상징한다. 양손이 평등한 돌하루방은 평민 또는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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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남아선호사상이 심하던 시절, 돌하루방의 코를 만지면 아기를 낳을 때 남자 아기를 낳는다는 말이
있었다. 미신인 줄은 알지만 재미삼아, 또는 정말 진지하게 아들을 바라며 돌하르방의 코를 만지는 사람들이 있
었다. 심지어 돌하르방의 코 부분을 부셔 가루 내어 물에 타 마시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일부 돌하르방
은 코가 닳거나 없어진 것들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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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인자한 모습의 돌하루방을 지나면 제주도 전통 가옥들이 나타난다, 제주의 초가는 크기에 따라 두 칸, 세 칸,
네 칸 집으로 구분한다. 또는 울담 안에 배치된 집의 수에 따라 ‘외커리집(一자형)’, ‘두커리집(二자형)’, ‘세커리집
(ㄷ자형)’, ‘네커리집(ㅁ자형)’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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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커리집’은 ‘안거리’ 한 채와 부속채로 이루어진 집, ‘두커리집’은 ‘안, 밖거리’를 갖춘 두 채 집을 말한다. ‘안거리
(안채)’와 ‘밖거리(바깥채)’는 마당중심의 이(二)자형으로 마주보거나, 기역자(ㄱ)형태로 배치된다. 또한 부속시설
로 외양간 (쇠막) 변소(통시) 장독대 (장항굽) 짚가리(눌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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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zj리 이상의 집은 각채마다 부엌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 부자간의 가족이 취사를 각각 따로 하며 생산, 소비, 경
제를 각자 영위하며 살게 되어 있는 접이 육지의 민가와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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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만나는 네커리집(토호가)이다. 네커리집은 토호가라고도 부르기도 하는데 지방에서, 재력과 세력을 바탕으
로 양반 행세를 할 정도로 힘을 과시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향촌에 토착화한 재지 사족들을 지배 세력
이라 지칭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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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민가의 일반적 형태인 초가집은 제주도의 자연환경과 가족구성 및 생활양식을 반영하는 건축물이다. 외
벽은 제주산 현무암을 쌓아 두르고 , 지붕은 띠를 덮어서 직경 50m가량의 굵은 동아줄로 바둑판처럼 얽어 놓은
점이 특이하다. 이엉은 2년에 한 번씩 덧 덮어가므로 상마루의 선이 완만하고 매끈한 유선형이 된다. 이런 기본
틀은 바람이 많은 제주에서 견딜 수 있는 지혜로운 건축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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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을 보면 이 초가는 옛 제주인의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약간 거리를 둬 자리 잡은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는 결혼한 자녀가 한 울타리에서 부모와 살면서도 독립적인 세대를 구성했던 것을 그대로 보여주
고 있다. 강렬한 햇빛이나 비바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풍채(차양)는 그들의 지혜를 엿보게 한다.
여기에 우영밭(텃밭)과 쇠막(외양간), 통시(화장실) 등을 갖춰 역사적·학술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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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호(재지)라는 용어는 대체로 조선사회에 들어와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토호는 흔히 武斷行爲(무단
행위)가 지적되고 있듯이 官權(관권)에 대립적인 존재였다. 국가의 대민지배의 범주밖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국가
의 수취 기반을 불법적으로 침탈해 사적 이득을 채우는 지배 계층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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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 전후의 향촌사회 세력들 간의 대립은 土豪鄕戰(토호향전)으로 지적되어 규제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토호들은 중앙 정계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이해를 달리하는 가운데, 토호로 존재하기도 하고, 士夫(사부)
및 官僚(관료)로 존재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武斷土豪(무단토호)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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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중앙집권화가 비교적 확고히 자리 잡은 조선 사회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토호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따라서 토호는 그 이전 시기까지의 지방지배세력 일반을 지칭하는 뜻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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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토호는 농장이나 전장을 소유하고 양민을 수세대상에서 이탈시키고 있었던 부류로서, 이러한 지방
의 분산적 세력은 중앙집권체제의 안정적 정비를 위해 견제 대상이 되고 있었다. 1524년(중종 19)의 土豪品官推
刷事(토호품관추쇄사)는 이러한 정책의 반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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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19세기의 토호는 대부분이 신분적으로 양반층이었기 때문에 (兩班土豪(양반토호)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時俗(시속)에서도 토호를 班戶(반호)라 불렀다.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노론계로서
척신 세력과 결탁해 국가 권력의 비호 하에 수령권을 압도하면서 향촌 사회에 군림하던 층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중앙정계에서 탈락하거나 관계 진출이 좌절되면서 향촌에 토착화해가는 사족 집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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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커리집(종갓집)제주 민속촌에서 딱 하나 대문이 있는 집, 네커리 종갓집이다, 종갓집이란 한 문중에서 맏이
와 그 식구가 사는 집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장남으로만 대대로 이어온 집을 말한다. 제주도의 특징
을 간략하게 표현한 말이 "삼다"와 "삼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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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다"는 돌과 바람, 그리고 여자가 많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고, "삼무"는 도독과 대문, 그리고 거지가 없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 종갓집의 대문은 뭘까?, 제주 민속촌 네거리 종갓집은 대문이 버젓이 있었다, 이거는
무순의미일까? 문중의 족보를 가지고 있는 종갓집이기 때문일까? 그런데 종갓집 앞에 웬 도적으로 보이는 현상
범 초상과 함께 방문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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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따먹기게임 :숫자를 적어 번호 순서대로 밟는 놀이다. 방과 후 학교 놀이터나 동네 골목길에서 돌이나 분필(학
교에서 몰래 가져옴)로 판을 그렸던 추억에 떠오른다. 규칙은 간단하다. 판을 그리고 1번부터 8번까지 숫자를 적
은 뒤 번호 순대로 돌을 던져 돌이 놓인 번호는 밟지 않고 한 바퀴 도는 게임이다. 돌이 놓인 번호를 피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스킬과 몸을 많이 쓰게 되는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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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수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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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현상 수배범으로……. 헐 ~~ 제주도는 삼무, 즉 도적과 대문, 그리고 거지가 없다고 들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의구심을 가진 채 유랑자는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민속촌 네커리 종갓집은 안채가 20여 평 정도나 되
는 아주 큰 방이 있고 이 밖에 바깥채, 곁채, 사랑채, 그리고 종주를 모시는 사당까지 있는 규모가 상당히 큰 집이
다, 과연 종갓집다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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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종갓집이라는 말이 원래의 의미대로 쓰이려면 같은 성씨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있어야
한다. 굳이 집성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문중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 문중에 속한 사람들이 이런저런
행사를 하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모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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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집안, 제사 한 번을 지내면 제사상이며 손님 주안상과 다과상, 손님들 돌아가실 때 가져갈 음식까지 준비해야
했으니 음식을 많이 할 수밖에.....,집성촌과 외부 사람들은 종갓집 맏며느리는 하늘이 내려준다는 말을 자주 한
다.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 하늘이 점지해준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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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종갓집이며, 그 문중 사람들이 모여서 대소사를 치를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사
람들이 바로 종갓집의 종손들인 것이다. 유랑자는 예전에 과연 종갓집 며느리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다. 그
래서 종갓집 며느리는 하늘이 내린다는 말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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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는 뜻도 된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지니고 살아야 하는 운명
과도 같은 것들이 있다. 바로 종갓집 며느리다, 태어날 때 내가 이것을 평생 지니고 살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절대로 택하지 않았을 법한 종갓집 며느리 宗婦(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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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제주도는 8만여 가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사회였다. 대부분 초가에다 돌담을 두르고 옹기종기 모여 살았
다. 집집마다 2~3채 되던 초가들이 새마을운동의 위력 앞에 운명을 마감하기 시작했다. 어림잡아 15만여 채가 넘
는 제주초가들이 박정희 정권의 그릇된 새마을 가꾸기에 희생양이 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대로 보존
되어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한층 더 제주다운 모습이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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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종갓집은 언제나 일이 많다. 종손으로 태어난 다는 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거의 대부분 하지
못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이어지는 문중의 대소사를 항상 도맡아 주최해야 하고 그때마
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뒷감당을 다 해야 하는 종손, 종부 그리고 그 사람들의 먹거리, 잠자리를 다 보살펴
야 하는 종갓집의 며느리라는 존재는 그야말로 일복이 타고났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어렵고도 힘
든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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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힘든 임무는 언제나 종손과 종부들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렇게 힘든 상황이면서도 모여든
문중 어르신들에게 힘든 내색도 하지 못하고 웃는 낯으로 접대를 해야 하는 종손, 종부들, 그런 종손, 종부들을 바
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에는 언제나 애틋함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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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초가는 고귀한 전통이 살아있는 공동체 삶의 버팀목이었다. 제주초가의 탄생 과정도 특별하다. 제주의 자
연과 섬사람들의 삶의 문화가 조화를 이룬 모습이 놀랍게도 과학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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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는 허리가 휠대로 휜 종부의 긴 한숨소리와 같은 환청을 들으면서 다시 발길을 옮긴다. 이번엔 세커리집
이다, 세 칸 형은 작은 ‘구들’이 있는 型(형)과 없는 형으로 구분되고 다시 작은 ‘구들’이 있는 형은 한 칸 형, ‘정
지’내형, ‘중마루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작은 ‘구들’이 없는 세 칸 집은 ‘구들’ 하나만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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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상방(마루)’을 두고 왼쪽으로 ‘정지’가 있다. 오른쪽 앞뒤에 큰 ‘구들’과 ‘고팡’이 위치한다. 이런 유형은 제
주 한라산 산북지역보다 산남지역에 더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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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구들이 있는 세 칸 집에서 한 칸 형은 가운데 ‘상방’을 두고 왼쪽으로 앞뒤에 큰 ‘구들’과 ‘고팡’, 오른쪽 앞뒤
에 ‘정지’와 작은 ‘구들’이 있다. 밀집 촌락에 이런 집이 많으며 산북지역에도 볼 수 있다. ‘정지’내형은 작은 ‘구
들’이 없는 세 칸 집 ‘정지’ 안에 작은 ‘구들’을 꾸민 집으로 작은 ‘구들’은 건물과 별개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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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型(형)은 지역에 관계없이 볼 수 있다. ‘중마루형’은 ‘정지’내형과 같은 ‘칸살’로 하되 작은 ‘구들’을 ‘상방’에
붙이지 않고 거꾸로 ‘상방’ 반대쪽에 붙여 ‘상방’과의 사이 생기는 공간에 마루를 깔아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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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론 두커리집이다 :제주의 주거 생활 중 흥미로운 것이 안거리와 밖거리다. 제주의 전통가옥은 중앙에 마
루, 양쪽에 안방과 작은방을 배치하는 일자형이다. 안방에는 고팡(창고), 작은방에는 부엌이 연결되고. 두 칸 형
집은 ‘막살이집’이라고 한다. 세 칸의 ‘안거리’를 지을 경제적 여유가 없을 경우 두 칸 집을 짓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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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칸은 ‘정지’, 다른 쪽 칸은 ‘구들’로 구성된다. ‘구들칸’은 앞, 뒤로 분할되어 앞쪽은 ‘구들’, 뒤쪽은 ‘고팡’이 있
다. 이 ‘고팡’은 ‘정지간’으로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정지간’은 ‘세 칸 집 정지간’과 같고 ‘통간’으로 쓰며 흙바닥이
다. ‘구들’전면에 ‘무뚱(문밖)’이 있어 이곳으로 출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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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칸 집은 ‘안, 밖거리’로 배치된 가옥인 경우 ‘밖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경우 한쪽 칸은 헛간, 다른 쪽 칸은
‘구들’로 시설되며, 헛간은 ‘쇄왕(쇠막)’이나 대문간이 간살에 놓이기도 한다. 그런데 마당을 기준으로 마주보고
같은 구조로 한 채를 더 지으면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 즉 두커리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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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전통은 부모와 혼인한 자식이 한집의 안거리(안채), 밖거리에 살면서 식생활을 독립적으로 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삼시 세끼를 안거리 부부와 밖거리 노모가 따로 만들고 따로 먹는다. 제주도의 전통적인 주택 형식은
중앙에 마루, 양쪽에 안방과 작은방을 배치하는 일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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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圍籬安置(위리안치):예전에, 죄인을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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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에 고팡(보관창고), 작은방에 부엌이 연결된다. 마당 사이로 마주보고 같은 구조로 한 채를 더 지으면 안거리
와 밖거리, 즉 두거리집이 되고 ‘ㄷ’자로 모로 더 배치하면 모커리라 부른다. 안거리와 밖거리는 가족들이 살고 모
커리는 창고 또는 축사 등의 용도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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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리는 부모 세대가 살고 밖거리는 자녀 세대가 살다 자녀가 혼인해 자식을 낳게 되는 때를 기점으로 부모가
밖거리로, 자식이 안거리로 들어간다. 밖거리 자식이 안거리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 집안을 주도하는 세대가 바뀌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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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떡잎식물강에 속하는 속씨식로. 미국에서는 호박과 스쿼시로 나누는데, 스쿼시는 빨리 자라고 작은 열매를 맺
으며 덩굴이 뻗지 않는 변종인 반면 호박은 생장기간이 길고 덩굴이 길게 뻗으며 큰 열매를 맺는 변종이다. 열매
의 무게는 보통 4~8kg이며 색은 노란색, 오렌지색 등으로 다양하고 모양 역시 편구형에서 구형, 장방형까지 다양
하다. 껍질은 매끈하고 얕게 골이 패 있거나 이랑무늬가 있다. 유럽에서는 주로 채소로 쓰이며, 미국이나 캐나다
에서는 호박파이나 수프 등으로 사용한다. 한국에서는 품질 좋은 동양계 재래종인 서울마디호박이 주로 재배되
며 호박범벅, 호박떡 등에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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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는 제주도 사투리의 하나로 ‘집까지 이어지는 길’을 뜻한다. 올레는 강한 바람이 부는 제주도의 자연 환경 때
문에 발달한 주택 구조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큰 길과 가옥을 대문으로 바로 잇지 않고, 제주도에 많은 현무암으
로 돌담을 쌓아 짧은 골목을 만들어 이어주고 있는데 이를 ‘올레’라고 부른다. 이런 구조는 강풍이 곧바로 가옥에
들이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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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집에 살지만 각 세대는 별개의 부엌과 장독대를 갖고 독립된 취사에 식사를 따로 한다. 부모와 자식 세대가 분
할된 경제 단위다. 요즘 용어로는 핵가족단위이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안거리, 밖거리 세대가 왜 따로 밥을 해
먹는지 궁금해 할 것 같아 이야기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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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밥 먹는 시간이 다르다”, 또는 “신세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각각 직업과 직
장이 다르다. 시어머니는 당근 밭에서 일하러 새벽에 나가야 하고 며느리는 물때 맞춰 바당(바다)에 가야 한다. 한
집에 살면서 따로 밥해 먹는다는 것이 외지 사람들에게는 많이 낯설듯 하지만 이것이 제주의 전통생활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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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자방아 :연자방아는 곡식을 찧거나 빻는 방아의 한 가지이다. 연자매라고도 한다. 발동기가 없던 옛날에 말이
나 소의 힘을 이용하여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거나 빻는 데 사용하였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서, 이를 말이나 소가 끌어서 돌리도록 되어 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연자방아를 갖
추어 놓고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거의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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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제주도는 할머니 사후 통장에 몇 천만 원씩 남아있는 것은 보통이다. 집에서 살림만 하는 육지 주부
개념으로는 제주도의 세대별 식사 연유를 도저히 풀 수 없다. 어찌 보면 이들은 일찌감치 부모와 자식 세대가 독
립적인 경제력을 바탕으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답을 찾은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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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두 개의 부엌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각자 살면서도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이는 혹독한 제주
의 자연환경 속에서는 부부 중심의 핵가족 형태를 유지하는 게 노동의 관점에서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을 반영한
것이며.또 자식이 결혼하면 부모와 자녀가 집을 맞바꾸는 것 또한 가족 수를 감안한 실용주의적 사고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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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면 으레 독립하여 딴 집에서 사는 것이 보편화된 요즘, 부모와 자녀세대가 한 공간에 살면서도 독립적인
경제단위를 유지하는 제주의 안거리, 밖거리 문화는 노후 생활의 독립성과 함께 지혜로운 공존의 삶의 방식을 잘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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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통가옥이 콘크리트 건물로 대체되는 요즘, 안거리, 밖거리 주거형태는 많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그 형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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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제주민속촌박물관은 제주 타 지역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1890년대를 기본연대로 제주초가의 원형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다. 관리상태도 양호하다. 100여 채의 초가가 한결같다. 곱씹어 보면 근원적인 문제에 생각
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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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박제품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이들 초가가 앞으로 제주를 상징하는 유일한 문화
유산이 되어야 할 판이라는 게 서글픈 제주초가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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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람들은 초가의 벽을 이루는 '축담'과 올래(길가에서 좁은 골목을 거쳐 집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울
담', 밭과 밭의 경계를 짓는 '밭담' 등을 쌓으면서 매서운 바람과 싸워왔다. 바람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바람
을 극복해 내는 독특한 삶의 양식이 주거문화에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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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제주도에서 물을 긷고 다니기 위해 쓰인 작은 항아리. 허벅을 `물구덕`이란 대오리(대나무)로 만든 구덕에
넣고 등에 지고 다니면 편리하다.제주도는 현무암으로 이뤄진 지형 탓에 비가 오면 물이 죄다 땅으로 빠져나가,
과거 제주도 사람들은 해안가 용천수나 봉천수가 있는 곳까지 허벅을 지고 물을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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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 중세에 유럽에 전파되었다. 물레는 큰 물레바퀴에 실이 감기면서 회전할 수 있도록 조작하고 섬유 뭉치가
감겨 있는 가락을 왼손에 쥐고 물레바퀴를 오른손으로 돌린다. 16세기 초 유럽에 처음 소개된 색슨 물레는 실을
계속 감을 수 있는 실패와 함께 사용했으며 수직으로 고정시킨 막대에 섬유 뭉치를 감았다. 발판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양손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었다. 18세기에 개량직기의 등장으로 실의 대량생산이 요구되면서 기계방
적이 양산되어 물레를 대신할 동력·기계 발명품이 등장하였고 이것이 산업혁명의 한 부분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물레가 오래전부터 쓰였는데 나무로 된 여러 개의 살을 끈으로 얽어매어 보통 6각 또는 8각의 둘레를
만들고 가운데에 굴대를 박아 손잡이로 돌리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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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홍 :초롱꽃목 국화과에 속하는 원예식물. 원래 멕시코의 잡초였으나 원예종으로 개량·보급되었다. 북아메리
카가 원산지이며 배수가 잘 되고 부식질이 많은 참흙에서 잘 자란다. 꽃은 6~10월에 줄기 끝에서 지름이 5~15㎝
쯤 되는 두상꽃차례를 이루어 피는데, 100일 정도 피므로 백일홍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씌어진 기록에 나오는 초
백일홍이란 식물이 백일홍과 같은 것이라 여기고 있으나 언제부터 한국에서 심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배롱나무를 나무백일홍이라 부르기도 하나 백일홍과 배롱나무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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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00미터 이하의 마을에는 어촌이 형성되어 있다. 어촌 마을에 들어서자,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
미는 듯하다. 금방 해녀가 잡아 올린 소라와 해삼이 망사리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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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관광은 홈페이지: https://www.visitjeju.ne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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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기
*홈페이지 :https://jejufolk.com/index.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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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민속해안로 631-34
*(지번)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40-1
10월 ~ 02월 :매일 입장시간 08:30 ~ 18:00
03월:매일 입장시간 08:30 ~ 18:30
04월 01일 ~ 07월 15일:매일 입장시간 08:30 ~ 19:00
07월 16일 ~ 08월 31일:매일 입장시간 08:30 ~ 19:30
09월 01일 ~ 09월 30일:매일 입장시간 08:30 ~ 19:00
*휴무일:연중무휴
*대표번호:064-787-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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