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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성을 돌다
수 6:1-11
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수 6:1-11 / [여리고 함락]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성문을 굳게 잠갔다.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2) 그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수아야! 보아라. 내가 여리고성뿐만 아니라 성의 왕과 여리고의 군인들을 모조리 네 손아귀에서 꼼짝 못하게 하리라. 3) 그러니 너희는 모두 군대를 동원하여 매일 한 번씩 여리고성 주위를 돌아라. 한 번만 돌지 말고 엿새 동안 여섯 번을 돌아라. 4) 제사장 일곱 사람은 계약궤 앞에서 숫양 뿔나팔을 각각 하나씩 들고 여리고 성을 돌아라. 군인들과 함께 성을 돌아라. 그렇게 돌다가 이렛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돌아라. 돌면서 가지고 있던 나팔을 계속해서 불어라. 5) 그러다가 제사장들이 나팔을 길게 불면 같이 성 주위를 돌던 군인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라. 그러면 여리고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럴 때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성안으로 쳐들어가거라.' 6) 그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말하였다. `계약궤를 메시오 일곱 제사장은 각각 숫양 뿔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계약궤 앞에 서서 계약궤를 안내하시오.' 7) 또 백성들에게는 이렇게 명령하였다. `성을 돌아라. 너희 중 가려 뽑은 정예 부대는 계약궤 앞에 서서 움직여라.'' 8) 여호수아가 이렇게 명령한 대로 일곱 제사장은 각자 숫양 뿔나팔을 들고 여호와의 계약궤 앞에 서서 나팔을 불고 계약궤를 멘 행렬은 그 뒤를 따랐다. 9) 물론 가려 뽑은 정예 부대는 뿔나팔을 부는 일곱 제사장 앞에 서서 행진하고 후위 부대는 계약궤를 뒤따라가며 그것을 보호하였다. 이들 행렬은 제사장들이 뿔나팔을 부는 대로 행진하였다.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였다. `소리치지 말아라. 너희 말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여라. 한마디도 입 밖에 낼 생각을 말아라. 내가 소리치라고 말할 때 일제히 고함을 질러라.' 11) 백성은 여호와의 계약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런 다음 진영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본 장은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전쟁으로 여호와께서 직접 진두지휘 하시고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행해지는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1-7) 여리고 성은 이중벽의 구조를 가진 난공불락의 성으로 양식만 풍부하다면 몇 년이고 버틸 수 있는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을 두려워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출입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쟁의 기운이 돌고 있을 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넘겨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으면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이 어떠하든지, 내 생각과 내 경험과 내 방법과는 달라도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창조주이시기에 여호와께서 원하는 국가에게 땅을 줄 수 있는 권리가 있으십니다.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 성을 도는 것은 이 전쟁이 단순한 국가 간의 침략이 아닌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 함락을 위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일들은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략과는 거리가 먼 명령이지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여리고 성 같은 인생의 어려움을 만났을 때 여호와께서 이르시는 말씀대로 순종할 때 이기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8-11) 놀라운 일입니다. 제사장들과 백성들 또한 여호수아를 통해 들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나아가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을 불고 그 뒤에는 여호와의 언약궤가 뒤따릅니다. 언약궤 뒤에는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백성들은 외치지도 않고, 음성도 들리게 하지 않고, 입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호수아의 외치라는 명령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에 들어와서 잡니다. 광야에서 입을 열어 원망하고 불평하던 출애굽 1세대 모습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군대 행렬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이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전쟁의 나날들을 앞서가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적용: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생각과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과 다르고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높다고 말합니다(사 55:8-9). 여호와께서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대로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앞으로 다가올 큰 일에 대비하여 사전에 당신의 자녀들을 시험하심으로써 그 자녀들을 담대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시험받을 때 원망하지 말고 그 시험을 이겨냄으로써 장차 다가올 큰 일들을 잘 견뎌내야 합니다.
< 설 교 >
무너진 여리고
수 6:1-11
태초에 에덴동산에는 기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무엇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먹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제시하신 선악기준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 세워진 기준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선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이기 때문에 말씀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기준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스스로 새로운 기준을 세웁니다. 그것은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원대로 이루어주는 하나님을 최고로 여깁니다.
현대 사회 역시 자기가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기준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있다면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용주의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편리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선이 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 대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농·축협 통합을 반대하던 축협 회장이 국회에서 할복을 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대기업의 구조조정이나 농·축협의 통합이나 이 모든 것은 정부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실용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강제적으로라도 실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구조조정을 당하는 입장이나 통합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실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피해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大)를 위해서 소(小)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이 바로 실용주의입니다. 한사람이 죽고 열 사람이 산다면 그것이 바로 실용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열 사람이 힘을 합해서 자신들을 위해 한 사람을 죽게 합니다. 이것은 다수의 힘이 제일이라는 논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대(大)를 위해서 소(小)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 비록 세상 기준으로 내세워진다고 해도 결국 소(小)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려는 기업이나 통합을 한다고 할복을 하는 사람이나 그들 역시 자기 가치 판단이 기준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실용주의라는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 하지만 그것도 역시 기준이라고 할 수 없고, 상황과 환경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현대 사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로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공부할 때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결혼을 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결혼을 합니까? 직장을 다닌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직장을 다닙니까?
TV에 보면 연예인들이 나와서 얘기를 할 때 사회자가 어떤 남자, 어떤 여자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남자를 고르고 여자를 고르느냐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기준을 말합니다.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 '이해심이 많은 사람' 등등 여러 가지를 얘기하지만 결국 기준은 '나의 행복'입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 실용적인 사람을 고르겠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고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골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으면 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역시 빠지지 않는 것은 이 직장이 내 인생에 힘을 실어줄 것인가를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시 기준은 '내 인생'입니다. 내 인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용적인 직장인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근심을 하고 고민을 하고 초조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열심히 키웠습니다. 모든 정성을 다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사업고시에 합격을 해서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는 그 자식을 인해서 주어질 혜택을 생각하면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떵떵거리는 집안과 사돈을 맺을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가난한 집 여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부모의 초조함과 근심이 시작됩니다. 결국 부모의 초조는 자식은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모르는데서 온 것입니다. 부모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식 때문에 초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제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사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확실한 기준으로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근심하고 고민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계획대로 이루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는 인생이기 때문에 고민하고 근심할 권리가 인간에게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신다가 아니라 모든 것은 나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6:22절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28장에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를 받는 최고의 높은 기준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실용주의와 자기 행복을 위한 가치 판단, 근심과 불안과 초조함을 다 부숴 버리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 의해서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자의 기준은 40일 금식기도하고 성경을 백번 천번을 보고 주일 성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여러분의 삶의 하나하나를 점검해 보십시오. 참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알 수 없고 감히 판단할 수 없는 높은 차원에서 일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초조해 하고 근심하고 고민하며 살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우리에게 실용적인 방향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쪽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시는데 왜 우리가 걱정을 합니까? 실용주의가 기준으로 되어 있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일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여전히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을 기준으로 여긴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지 않는 세상은 어둠입니다. 이 어두움의 세상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로 인간이 되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빛되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계획입니다. 세상은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되어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내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여 주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지는 쪽으로 움직여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다시금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에 철저한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내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대해서도 철저한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돕는 계획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계획으로 일하신다는 것도 분명한 기준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여리고 성이 함락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여리고 성이 함락된 내용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에 서서 강한 적도 이기게 해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원하는 것은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빙글빙글 돌았을 때 무너진 것처럼 가지고 싶은 땅이 있으면 그 땅을 이스라엘처럼 돌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기를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함락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성을 주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점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하는 일은 싸움입니다. 가나안 땅은 곧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하나의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천국이 싸우는 곳인가?'라는 생각입니다. 우린 보통 '천국'이라고 하면 편안하고 즐겁게 아무런 고생도 없이 사는 것으로 연상합니다. 물론 그러한 천국에 싸움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싸움에 있다고 할 때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제 그들은 놀고먹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싸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싸움입니다. 싸우며 살아가는 이것이 곧 천국입니다.
어떤 싸움입니까? 언약궤, 즉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었다는 이 정신에 위배된 사고방식과 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안에서 사는 신자에게는 필연코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위배된 사고방식에 합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는 싸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어린양의 피의 정신을 세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 세우기 위한 싸움입니다. 학생들은 오직 성적을 올리기 위한 싸움에 몰두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성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의 피보다는 성적에 매어서 살아갑니다. 가정주부는 이웃과 또는 친구와 경쟁하고 싸웁니다. 암암리에 불꽃튀기는 전쟁이 벌어집니다. 누구 남편이 더 능력이 있는가를 경쟁하고, 누구 남편이 더 자상하고 잘해주는가를 비교하면서 우쭐해하며 살아갑니다. 직장인 역시 피곤한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교회 안에서도 계속되어집니다. 말은 형제, 자매라고 하고 한 지체라고 하면서도 결국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적으로 만나고 헤어집니다. 희생과 섬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 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싸움에 하나님이 내편 되어주기를 원합니다. 내 앞에 있는 강한 자를 여리고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편 되어서 저 여리고 같은 존재를 이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합니다. 옆 사람과, 옆 교회와, 다른 교단과, 다른 종교와 경쟁하는 이 사고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대적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를 못합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니까 하나님은 교회를 안 다니는 저 사람보다는 내 편을 더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 엄청난 착각입니다. 지금 현대교회가 이 착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중심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흔히 성직자라고 하는 목사를 중심으로 하지도 않고, 장로님을 중심으로 일하시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고 헌금을 더 많이 했다고 해서 그를 중심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어둠의 나라는 버리시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나라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목적과 계획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부름 받은 신자는 오직 예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예수님의 주되심과 예수님의 피만을 증거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기준이 예수님만을 중심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은 실패로 보는 상황 속에서도 실패에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더욱 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우리 속의 여리고를 하나님이 무너뜨림으로서 되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나에게 이러한 싸움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껏 무엇과 싸우며 살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천국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가나안이 이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천국인데 무슨 싸움이 있는가?'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천국이기 때문에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살아갈 때를 의미합니다. 세상이 심판을 당하고 완성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싸움이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천국이 미완성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미완성의 나라이지만 그리스도안이라는 천국은 완성된 나라입니다. 완성된 나라에서 살지만 아직 죄가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싸우면서 장차 주어질 죄 없는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적은 여리고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여리고가 구분되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입니까? 유월절이란 의식이 기준입니까? 아니면 할례라는 표가 기준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제사를 드리는 것이 기준입니까? 만약 이러한 것들이 기준이라면 여리고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스라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여리고의 구분은 언약궤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넌 자들입니다. 즉 죽어야 할 자가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다시 산자가 되었다는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증표로 할례를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는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없습니다. 즉 죽어야 할 인간이 어린양의 피로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서 여리고는 무너져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없는 자를 공격하시는 것이지, 혈통을 보고 이스라엘로 구분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아닌 자를 공격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로 인해서 자신들이 요단강을 건넌 것을 목격을 했고, 다시 언약궤에 의해서 여리고가 무너짐을 목격을 합니다.
여리고가 무너지는 광경은 참으로 희한하기 짝이 없습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더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6일 동안 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7일 째는 성을 일곱 번을 돌라고 합니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여리고가 무너집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총 몇 바퀴를 돌았는가를 계산하기도 합니다. 보통 성경퀴즈라는 것을 할 때도 보면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총 몇 바퀴를 돌았는가를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총 몇 바퀴를 돌았는가에는 전혀 관심 둘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6일 동안 한 바퀴씩 돈 것과 칠 일째 일곱 바퀴 돈 것에 대한 구별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 째는 복을 주사 안식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안식할 수 있는 완전한 나라라는 증표가 7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나라가 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완전한 새로운 나라를 창조하시겠다는 것이고, 그 나라를 주시겠다는 것을 7일째 일곱 바퀴를 돌 때 여리고가 무너지게 함으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6일 동안 한바퀴씩 돈 것은 인간의 일입니다. 그러나 7일째 일곱 바퀴를 돈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7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일곱 바퀴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증표입니다. 6일 동안 여섯 바퀴를 돈 것은 인간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인간의 노력을 묵살하고 오직 하나님이 홀로 하신다는 것을 칠일 째 일곱 바퀴를 돌게 함으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7이란 숫자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일곱 제사장, 일곱 양각 나팔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더러 안식일을 지켜라고 하셨던 이유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사는 나라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시는 새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라는 의미가 안식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주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산다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피를 의지하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돌라고 하실 때 그 앞에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언약궤 뒤를 따릅니다. 언약궤가 그들의 중심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궤가 이스라엘의 중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나라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어린양의 피를 기초로 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고자하는 계획입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서 여리고를 도는 이스라엘은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나라를 세우지 않고 오직 어린양의 피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나라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는 마음으로 돌아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속에 내 힘과 내 중심으로 내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나라, 여리고성은 다 무너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한 하나님의 집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정신이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기 위해 신자가 힘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결말이 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 뜻이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 일이 잘 될 때 내 뜻대로 되어진다고 좋아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질 여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싸움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싸워야 할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무너져야 할 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이미 승리한 싸움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만 보여주십시오. 세상 나라를 무너뜨리고 예수님의 피로 사는 새로운 나라로 우리를 집어 넣으셨다는 것만 보여주십시오. 세상을 향해서 '너희들은 돈 번 것을 좋아하고 좋은 집에 살게 된 것을 복으로 여기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 감사하고 그것이 귀할 뿐이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인간의 싸움이 아닌 하나님의 싸움을 하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바라보고 살면서 마지막 때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리고와 기도작전
수 6:1-11 / 김충기 목사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와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동안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번 돌며 제사장들을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을 각기 앞으로 올라갈찌니라 하시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번 돌게 하니라 무리가 진에 돌아와서 진에서 자니라-여호수아 6 : 1 - 11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의해서 구출되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인도로 400여년 동안의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의 생활을 청산하고 홍해를 건너 출애굽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너자 애굽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벗어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속박과 억눌림 속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 완전한 독립, 완전한 해방을 맞이하여 평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을 들어가기 위한 첫 작업에 불과했습니다. 이제부터 정신을 차려야 하고, 용기를 내야 하며, 담대해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배고픔을 당하기도 했고, 추위에 떨어 보기도 했으며, 때때로 죽음의 위기를 넘겨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너무 힘들고 고달플 때는 애굽을 생각하기도 했고, 자기들을 인도한 모세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나안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갖은 방황과 고난 끝에 가나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숨을 내쉬기도 전에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은 실망하고 낙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방향과 목표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새로운 지도자를 준비하셨다가 세우셨습니다. 그가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정말 모든 끝이요 완성인 줄 알았습니다. 목표를 달성했고 목적지에 도착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갔어도 끝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막상 들어가 보니 또 싸워야 했습니다. 가나안에 일곱 족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곱 족속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멸하여 점령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나안은 거져 얻은 것이 아닙니다. 싸워서 얻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어도 가나안의 일곱 족속을 멸해야만 완전히 소유하게 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거져 얻은 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모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땀을 흘려서 번 돈은 귀하게 여기지만 거져 얻은 돈은 쉽게 사용하게 됩니다. 가나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워서 얻은 땅이기에 더욱 귀하고 소중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갔으나 여리고라는 성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서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전에 봉독해 드린 본문을 통하여 "여리고와 기도작전"이라는 제목으로 피차 말씀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성문은 닫혔다
광야의 시련을 극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요단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백성들은 이제 모든 수고와 고통 그리고 시련이 끝난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에는 여리고가, 뒤에는 요단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광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전세를 가다듬어 막상 싸우려고 보니 여리고 성은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여리고 사람들은 성벽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리고는 실제로 그렇게 트지 않은 도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성벽을 아주 두껍게 쌓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문을 굳게 닫은 이유도 성문만 굳게 닫으면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상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세상도 문들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어떤 문이 닫혀 있습니까?
첫째로 집의 문들이 닫혀 있습니다. 아파트의 벨을 눌러도, 주택을 돌아다녀도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특별히 아파트 지역은 경비실을 통과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경비실부터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쁜지 문만 닫혀 있고 낮에는 집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둘째로 문만 아니라 마음의 문도, 눈도 닫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말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할 것 같으면 말문조차 열지 못하게 합니다. 심지어는 부모 자식간에도, 형제 자매간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조금 여는가 싶더니 또 막혀 있습니다. 외벽을 뚫었으나 내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여리고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2.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우리의 손에 맡겼다.
여리고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손에 붙였습니다. 본문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다"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의 벽이 두껍고 문이 단단하게 닫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붙이셨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셨다는 것은 곧 승리를 보장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영혼을 맡기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구원의 사역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를 맡기셨습니다. 요나서 1 : 2에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버리고 다시스로 도망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계획하고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돌이키게 하시고 니느웨로 가게 하셔서 결국 니느웨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우리에게 붙이셨으면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욥기 23 : 13 이하에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어려움이 있을 줄 알고 가지 말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주와 선장의 말을 더 믿고 따랐습니다. 결국 항해하던 중 유로굴라라는 광풍을 만나 파선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여망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저들을 바울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24절에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고 하나님의 사자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십 사일이나 표류한 이백 칠십 육 명의 선원들을 먹였고, 파선의 위기에서 건져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이들을 맡기셔서 이와 같은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혼들을 맡기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웃의 영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은 물론 더 나아가 소련, 북한, 중국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반드시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사실 전도는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닫았다 하더라도 이미 가지고 있는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발견하면 전에 가지고 있던 가치를 버리게 됩니다. 복음에는 큰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자.
하나님께서는 여리고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이시고 그 성을 점령하도록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을 성을 돌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절에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간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계속해서 5절에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울려 불어서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일 때에는 백성들은 다 큰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들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였지만 결코 법궤를 앞서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로 하여금 법궤를 메고 앞서게 해 놓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여러분! 법궤를 앞세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법궤 안에는 돌 비가 들어 있었고, 만나가 들어 있었으며,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부활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말합니다. 돌 비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돌 비는 곧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말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생명의 양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법궤를 앞세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웠다는 것이요 부활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앞세웠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앞세울 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 의지하고 모든 것을 내어 맡기면 동일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힘이나 지식, 경험 그리고 능력을 앞세우기 보다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앞세워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든지 그대로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내 생각, 내 의지, 내 경험보다도 말씀 그대로를 믿고 앞세우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성령께서 능력을 행사하십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돌았다'는 것은 기도를 말합니다. 기도를 하되 때로는 조용하게 하기도 하고, 크게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 주위를 돌던 백성들은 나팔을 불기도 하고, 때로는 큰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조용하게 돌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난 뒤에 백성들이 함께 소리를 지르니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20절에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결국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매사에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기도에 힘쓰면 맡겨주신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워야 할 줄 믿습니다.
4. 그리하면 승리하고 점령하리라.
하나님은 여리고를 맡기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라 무너지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리고를 맡겼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싸워 이겨서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라는 큰 장벽을 만났던 것처럼 큰 고난이나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상황이든지 사람이 앞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판단이 앞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론이 앞서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끝내는 정복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끝이 아닙니다.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만사형통인 줄 생각하셨을 줄로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시험이 오고, 어려움이 오고, 환난이 옵니다. 광야를 걷기도 해야 하고, 때로는 요단을 건너기도 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여리고와 같은 큰 장벽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말 것은 하나님을 믿고 나가면 점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 때 승리하는 한 주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목숨을 건 순종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수 6:1-7
전투를 포기한 여리고
세계적인 코로나 사태로 너무나 힘든 요즘 같은 시기에는 많은 신자들이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함락한 기사에서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백성들이 줄서서 성 주변을 돌면서 함께 기도만 했는데도 철옹성 같던 성벽이 그대로 무너지고 손쉽게 진멸하는 큰 승리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선교지에서나 어떤 해결하기 힘든 대상의 주변 땅을 밟으면서 기도하면 마찬가지로 기적적인 응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이번 위기도 전 세계의 크리스천들이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순간적으로 종식시켜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신자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응답해주는 것은 분명한 진리이고 이번에도 반드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로 무너졌다는 것은 본문에 대한 잘못된 해석입니다. 신자들로 더 이상 신앙생활에 잘못된 적용을 하지 않도록 정확하게 가르쳐져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주까지 그 승리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한 여덟 가지 요소들을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 내용이 바로 본문 1절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파견한 두 정탐꾼은 기생 라합으로부터 엄청난 정보를 얻었습니다. 히브리 민족의 신이 그 백성을 애굽 노예에서 탈출시켰을 뿐 아니라 광야에서 거뜬히 생존케 했고 최근에는 아모리 왕들 시혼과 옥을 심판한 것까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별히 출애굽 직후에 홍해 물을 둘로 나누고 마른 땅을 건너게 한 것은 너무나 엄청난 일이라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고 실토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의 장대한 군대와 튼튼한 성벽들을 보고 자기들이 메뚜기처럼 너무 작게 여겨져 전투 자체를 포기했습니다. 라합에 따르면 사실은 가나안 족속들이 사십년 전부터 여호와에 대해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 신이 이번에도 급류가 흘러넘쳐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을 갈라 마른 땅을 건너게 했다고 하니 다시 더 크게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수5:1)
본문 1절은 여리고 성 주민들이 거꾸로 메뚜기 신드롬에 걸려서 전투 자체를 포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리고가 전투를 포기했기에 이스라엘이 성 주변을 돌며 기도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로 승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가 아니라 찬양이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지시한 내용을 정확히 살펴보면 지금껏 여리고 성 전투를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 해석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땅 밟기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과, 둘째 결코 손쉽게 기적적으로 거저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곱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양각 나팔을 불고 그 뒤를 또 다른 제사장들로 언약궤를 매고 행진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보호하려고 앞뒤로 무장한 군사들을 배치했고 언약궤 뒤를 모든 군사가 따르게 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처음 육일 간 한 바퀴씩 돌 때나, 마지막 칠일 째에 일곱 바퀴 돌 때나 줄곧 나팔을 불러야 했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가 백성이나 군사들에게 여호와께 기도하라는 언급은 눈을 닦고 보아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여호와가 지시하는 대로 전했는데 기도하라는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가 그렇게 하신 이유는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기”(2절b)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이미 확정해놓은 승리를 두고 기도하라고 지시할 이유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양각 나팔을 부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매고 전투를 수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럼 전쟁은 여호와의 것으로 당신이 지시하는 대로 행하면 당신께서 승리를 안겨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송축하면서 성 주변을 돌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양각 나팔은 이스라엘의 매 절기마다 하나님의 임재 하에 드려지는 예배에 나오라는 소집 공고였습니다.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베풀어주셨던 그분의 은혜와 권능에 감사하는 예배로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요컨대 이스라엘 군대들이 여리고 성 주변의 땅을 밟으면서 돌 때에 기도한 것이 아니라 찬양의 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그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6:1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모세오경을 눈으로만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그 뜻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읊조리듯이 작게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귀에 들리는 소리에 따라 다시 말씀에 생각을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독특한 운율이 있어서 시를 낭송하면 노래처럼 아름답게 들립니다. 성경을 기록하고 암송해야 할 유대인들로 당신의 역사와 은혜를 암기하기 쉽도록 예비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유대인들은 기도도 그렇게 묵상하듯이 작은 소리로 읊조리듯 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야단쳤습니다.(마6:5) 모든 사람들이 보고 들으라고 평소보다 더 큰 소리로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여호수아가 행진하는 동안에 일절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것은 기도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지금은 제사장의 선창으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몇 번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때때로 아주 짓궂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생사가 오가는 위급한 전쟁터에서 너무나 한가하게 찬송에만 귀 기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너무나 여유자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위급한 일이라도 전지전능하신 그분에겐 절대로 위급하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즉, 당신께서 그들을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어 놓았는데 구태여 급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목숨을 건 아슬아슬한 행진
둘째로 이스라엘이 손쉽게 승리를 얻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이런 전투 방식은 제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세계 전쟁사에서 전무후무할 것입니다. 성을 공격하는 가장 정상적이고도 효과적인 전술은 제일 약해 보이는 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입니다.
바위로 쌓은 성벽은 폭약이 개발되기 전에는 무너뜨리기 아주 힘듭니다. 가장 방어태세가 허술한 곳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백병전을 벌립니다. 또 나무로 된 성문을 부수려고 뾰족하게 자른 큰 나무둥치나 쇠뭉치로 계속 힘껏 두들깁니다. 이번처럼 튼튼한 성안에서 장기적으로 농성하려고 들면 공격하는 쪽도 충분한 보급을 받으면서 성내의 식량과 물이 떨어지도록 기다립니다.
지금 이스라엘 군대가 어떤 모습으로 행군하고 있습니까? 제사장을 따라서 성 주변을 빙빙 돌아야 하니까 여리고 성에서 볼 때는 세로가 아니라 가로로 걷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성을 바라보며 방어 태세를 갖추고 도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만약 성 쪽을 보고 돌려면 가재걸음이어야 하는데 그 많은 군대로선 도무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아가 성경은 무장한 자들이 제사장 앞뒤로 호위했다고 말합니다.(6,9절) 일반 군사는 무장을 하지 않았거나 했어도 아주 빈약한 수준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였다가 얼떨결에 탈출했으니 제대로 무기를 갖출 수도 없었습니다.
출애굽 후에 천부장 백부장 제도를 통해 군대를 조직하긴 했지만 광야를 도는 동안에 무기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보급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사기 시절부터 다윗 시대까지 블레셋 족속에게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괴롭힘을 당한 까닭도 철기로 된 무기를 블레셋이 독점했고 유대인들은 아직 그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었지 않습니까?(삼상13:19-23, 17:7)
말하자면 자기들 약점을 최대한 감추며 여리고의 최고 약한 부분을 공략해야 할 이스라엘이 거꾸로 자신들의 가장 취약한 상태를 적군에게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 위에서보면 이스라엘 군대는 화살이나 창으로 사격연습하기에 딱 좋은 표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런 모습으로 칠일이나 돌라고 했고 마지막 날은 일곱 번까지 돌라고 명합니다.
아무리 전투 경험이 많지 않은 신세대라도 이는 전투에선 절대로 행해선 안 되는 일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아예 창이나 화살이 닿지 않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돌라고 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명령이라면 순종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그냥 운동하며 체력을 비축하는 것입니다. 구태여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앞뒤에서 양각나팔을 불며 찬양할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지시를 내릴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틀림없이 창과 화살의 사정권 안에서 돌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 명령을 듣자마자 더더욱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여호수아는 물론 모든 백성들에게 순간적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너희 목숨을 걸고 칠일 동안이나 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그 말씀에 그들은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처럼 아무나 창과 화살을 맞고 픽픽 쓰러져 죽을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요단 급류를 건너는 동안, 또 길갈에서 할례와 유월절 의식을 치르는 동안에 적군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습니다. 여리고 주민들이 완전히 공포에 질려있다는 라합의 실토가 진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수아에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나타나 이 전투는 당신께서 먼저 가서 행할 테니 너희는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순종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다 마련해주면서 당신의 권능을 실제로 체험케 했습니다.
성문 앞에 이르러 보니 하나님 말씀대로 전쟁을 치르려는 기색이라곤 없습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두려워서 조금 망설였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여호와의 군대 장관을 대면하여 힘을 얻은 여호수아가 앞장서서 제사장들을 독려했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마지못해 용기를 내어 진군했는데 성에서 창이나 화살이 전혀 날라 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군사들도 여전히 조금 불안하긴 해도 담대히 그 뒤를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장한 자들로 앞서게 한 것도 여리고가 공격할 것을 염려한 때문이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 해도 맨 앞장을 서야하는 제사장들이 두려워할 수 있기에 그들을 격려할 목적이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로선 공격 받기 너무 좋은 모습으로 행군하기에 하나님에게 자기들을 지켜달라는 기도는 했을 것입니다. 성을 무너지게 해달라는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행진만 하면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는 여호와의 약속까지 이미 받았습니다.(5절) 그럼 성을 함락시키는 것보다 위급하고 소중한 것이 자기 목숨이고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을 것 아닙니까?
찬양으로 치르는 전투
당시 상황을 재현해보면 이 행진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아주 아슬아슬한 땅 밟기였습니다. 그것도 칠일 동안에 도합 열 세 번이나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네가 밟는 땅을 다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럼 여리고 성을 한번만 돌아도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더러 구태여 이렇게 번잡하고 가슴 졸이는 절차를 거치게 하신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첫째 이유는 살펴본 대로 신세대들이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시험한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야 이후로 부모들과 동일한 체험을 시켜서 동일한 의미의 신앙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지금 성을 공격하려는 태세가 전혀 아닙니다. 그 반대로 완전히 무력하게 두 손과 두 발을 다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그동안 교육받은 것을 실전을 통해 최종시험을 치르는 셈입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고 바울이 고백했습니다. 인간이 절망에 빠져 현실의 소망이 없어질 때가 하나님의 기적적 권능이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오직 그분만 소망하고 의지하여서 그 절망을 당당히 싸워 이겨내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칠일 동안 돌되 마지막 날에는 일곱 번을 돌아야 했고 일곱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나팔을 불었던 그 회수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그 숫자는 칠년 째의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는 희년을 상징합니다. 희년의 영어가 ‘jubilee’인데 히브리어로 양각 나팔 ‘요벨’(יבל)이 그 어원입니다. 지금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불면서 희년을 상징하는 숫자만큼 찬양예배를 인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 번 당시 상황을 상상해보십시오. 처음 하루 이틀은 불안해서 자기들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들이 겁을 집어먹고 미리 도망갔고 당시에 위세를 크게 자랑하는 여리고 성입니다. 적의 사정권 내에서 완전 무방비 상태로 걸어가는데도 성은 쥐 죽은 듯이 꼼짝 않고 있습니다.
점점 여호와의 크신 권능과 완전하신 섭리가 가슴 가득히 채워지고 나중에는 정말로 신나고 힘이 넘치는 찬양을 했을 것입니다. 양각 나팔 소리는 찬양 가사로 이렇게 들렸을 것입니다. “저 굳게 닫힌 성문과 너무나 조용한 성벽을 보라. 이 전쟁은 너희 힘으로 치르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나에게 속했으니 아무 염려 말아라. 할례 없는 백성의 성벽은 이제 곧 무너지리라.”
상식과 이성으로 따져선 너무나 비정상적인 전투였으나 사실은 하나님과 당신의 백성들 간에 너무나 은혜로운 교제와 동행의 시간이었습니다. 출애굽 때에 구세대는 홍해를 완전히 건넌 후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찬양예배를 드렸지만 지금은 전쟁 중에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찬양예배로 전투를 대신하게 하시는 신은 온 천하에 오직 여호와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당신만의 오묘하고 완전한 섭리와 주권이 역사하여 당신의 백성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히 주십니다.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심지어 아무리 이해가 안 될 만큼 힘들어도 당신과 온전한 교제를 나누는 자만이 깨닫고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영적 유익이 숨겨져 있습니다. 지금 아주 번거롭고도 너무나 아슬아슬한 땅 밟기를 명하시는 이유입니다.
너무나 기괴한 전투방식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유가 또 있는데 성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꼼짝도 않는 여리고 주민들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을 이미 여러 번 체험했습니다. 여호와가 그렇게 명하시는 구체적인 이유, 과정, 결과는 몰라도 이번에도 당신이 알아서 하시겠지라는 기본적인 신뢰는 있습니다.
반면에 이런 전투의 방식은 여리고 주민들에게 이상하다 못해 아주 기괴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극도로 긴장해야 하는 전투 현장에서 이스라엘이 자기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평온한 가운데 찬양만 부릅니다. 공격할 태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성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합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칠일 동안 열 세 번이나 말입니다. 가뜩이나 홍해와 요단강을 가른 여호와에게 잔뜩 겁을 먹고 있는데 그 공포심은 더 심해졌을 것입니다.
여리고 주민들은 히브리신이 언제 큰 능력을 발휘할까 긴장해서 초조하게 지켜봤을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하고 항복할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걸어놓은 붉은 줄을 보고 제발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항복을 의미하는 힌 깃발을 내걸라는 것입니다. 칠이라는 수자가 중복이 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만의 긍휼을 인내의 한계까지 베풀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제사장과 언약궤를 앞세운 이유도 지도자로 솔선수범시키려는 뜻이 전부가 아닙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고대 전쟁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들의 파워게임(power game)이었습니다. 히브리신이 홍해와 요단강을 갈랐고, 발람의 세 번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었고 그 탐욕스런 이방에서 최고로 영험한 주술사를 심판하셨다는 사실도 다 알고 있습니다. 능력으로는 히브리 신과 자기들 신과는 전혀 게임이 안 된다는 점을 인정하기 싫지만 익히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리고 주민이 겁을 먹은 대상은 이스라엘 군대가 아니라 히브리 민족의 신 여호와였습니다. 그 신의 힘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사장과 언약궤를 창과 화살로 공격해보려니 철통같이 무장하여 사방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여호와로 인해 간담이 녹아있는 판에 그런 시도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에 여리고는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전쟁을 어떻게 시작할지 눈여겨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신에게 제사도 드리지 않고 곧바로 양각 나팔을 불며 찬양부터 시작했습니다. 발락과 발람의 예에서 보듯이 이방족속들은 전쟁을 앞두고는 자기 신에게 풍성한 제물을 바치며 승리의 신탁을 받으려는 제사부터 경건하게 드립니다.
이스라엘이 성을 도는 동안에 여리고 주민들도 틀림없이 성안에서 자기들 신에게 제사를 지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제사를 경건하고 거창하게 드려도 갈멜산의 바알 선지자들이 인간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치성으로 자기 몸을 찔러 피까지 흘렸으나 묵묵부답이었듯이 아무 응답이 없었을 것입니다. 발람의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가 도리어 축복으로 바뀌었듯이 저주의 주술도 승리의 신탁도 전혀 먹히지 않고 도리어 불안과 공포만 커져갔을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우상은 실존조차 하지 않기에 아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 배후에 작동하는 사탄도 지금 여호와 앞에 완전히 메뚜기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신탁의 절차 없이 바로 찬양을 시작할 뿐 아니라 신상조치 없다는 점이 더더욱 이상했을 것입니다. 단지 금으로 덮은 상자를 제사장들이 어깨에 매고 있습니다. 장엄한 인간이나 동물 모습의 신상이 아닙니다. 이방의 우상들은 위엄을 조장하려고 아주 크게 만들기에 신전에 모셔놓습니다. 저렇게 어깨에 메고 다닐 크기가 아닌데다 신성모독이라 인간이 감히 맬 수도 없습니다.
신들끼리 능력을 다투어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변변한 신상도 없는데다 제사장들의 출정식을 치루는 모습부터 전혀 달랐습니다. 거기다 이스라엘이 성 주위만 빙빙 돌고 있으니까 우리라도 그런 상황에선 간담이 완전히 얼어붙었을 것입니다. 제사장이 찬양하며 언약궤를 매고 행지하는 것은 히브리신은 당신의 백성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들 안에서 동행하시며 이런 전쟁에선 더더욱 앞장서신다는 뜻입니다. 이방들처럼 가만히 앉아서 치성과 제물만 배불리 받아먹는 신이 아닙니다.
여리고가 히브리신에게 감히 맞설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절감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이 다른 신들보다 능력이 더 센 것이 아니라 전혀 차원이 다른 신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들로 단순히 당신의 능력이 두려워 항복하지 말고 하늘과 땅의 온 족속을 거룩하게 통치하는 유일한 신임을 제발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지금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진행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여리고는 하나님의 그 넘치는 긍휼을 헌신짝처럼 차버렸습니다. 모든 인간적 지혜를 다 동원해 짜낸 대책이 기껏 한 번도 무너지지 않는 성벽만 믿고 버티다 보면 이스라엘이 포기하고 돌아가 주기만 기대한 것이었습니다. 모압과 암몬과 싸우지 않고 이스라엘 스스로 우회했다는 소문도 들은 바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자기들 스스로 현실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지시에 따랐다는 점을 몰랐습니다. 지금도 만약 우회해 줄 양이면 그렇게 열세 바퀴나 행진할 리가 없음을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원죄 하의 인간들이 이성적인 지혜도 너무 모자라고 영적으로는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너무 모르고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징벌적인 큰 고난을 겪어봐야 겨우 정신을 차릴까 말까입니다.
주술적인 땅 밟기는 당장 그만두라.
이 행진에서 완전 숫자 칠이 두 번 겹치듯이 하나님이 여리고에 대해서 끝까지 인내하셨다는 것은 만약 마지막 한계가 차기 전에 여리고가 항복했다면 진멸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가나안과 여리고를 진멸하라는 진술을 보고 너무나 냉혹 잔인한 구약의 하나님이라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애굽에서 바로가 잘못했는데도 모든 애굽 집의 장자를 심판한 것이 냉혹해보여도 그 전에 아홉 번이나 회개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또 그전에 당신의 백성들로 사백 년간이 애굽의 노예로 고생시킨 후입니다. 여리고에도 하나님은 모든 기회를 주셨고 참을 때까지 참은 것입니다.
이스라엘더러 한가하게 할례나 유월절 제사를 지내게 하며 지체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칠 일간 성을 도는 것도 듣도 보도 못한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게 하는 여호와에 대해 한번이라도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런 신에게 항복하는 대신 끝까지 버텨보자는 완악한 결정을 내린 것은 그들의 잘못이자 책임입니다. 모든 이는 자기 죄로 심판 받으며 또 하나님도 반드시 심판해야 할 자만 심판하는 너무나 공평하신 분입니다.
이제 여리고성 전투에서 우리가 정말로 본받아야 할 믿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전통적으로 배워왔던 가르침에서 수정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여리고는 이스라엘이 응답 받고 싶은 제목을 정해서 간절히 기도한 것이 아니라 이미 확정해놓은 승리를 감사하고 기쁨으로 받아 누리는 찬양예배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승리는 사백년 전에 이미 작정되었고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 때문이라도 지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자들이 차지하고 싶은 지역 내지 대상을 정해놓고서 둘레를 돌며 간절히 끈질기게 기도한다고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주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달렸고 응답하는 시기와 방식도 그분이 정하십니다. 더 중요하게는 신자에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과 제목들도 사실은 하나님이 심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에게도 여리고 성 같이 궁극적 승리가 보장된 소명을 다 심어주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함께 해주십니다. 패배로 끝날 것이면 그런 권세로 동행하지 않습니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에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실제 신앙생활의 현장에선 큰 어려움이 따르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순종이 요구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과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b)는 예언과 약속을 함께 주셨습니다. 신자의 눈에는 큰 고난과 위험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같아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탄의 흉계를 깨트렸기에 궁극적 승리가 신자들 앞에 항상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문처럼 하나님은 그 승리를 확신하고 범사에 감사 찬양하기만 요구하십니다. 최소한 아무 염려 초조해 하지 않고 그분이 주실 승리를 잠잠히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여리고 주민의 회개를 기다리며 끝까지 인내하셨던 하나님의 심정에 동참해야 합니다. 불신자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신자부터 먼저 주도적으로 자기 목숨까지 거는 순종으로 그들 앞에 증명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매고 선봉에 섰는데 여호와가 가장 앞서 간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리고가 공격하면 제사장 즉, 여호와가 먼저 죽는 셈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여리고 현장에도 충만하게 베풀어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영적지도자들부터 주님을 따라서 먼저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자기가 죽어서 신자는 물론 불신자들의 미혹된 영혼을 예수님의 영으로 살려내야 합니다.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두고 땅 밟기 기도만 하면 큰 응답을 받는다는 죄송하지만 주술적인 가르침은 당장 그만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시장어귀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지 말라고 야단쳤지 않습니까?
무슬림 지역에 가서 눈에 띄게 수십 수백 명의 신자들이 모스크 사원을 줄지어서 돌며 찬양하며 기도하는 바람에 현지인들과 충돌을 빚고 추방당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자들이야 그 뜻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지만 막상 현지인들은 제2의 십자가 전쟁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먼저 자기를 죽여 가며 그들을 섬기면서 십자가 대속죽음의 순정한 복음이 함께 전해져야만 그들의 얼어붙은 심령을 녹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리고 승리에 이르는 길을 완벽하고 세밀한 섭리로 다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혀 이해가 안 되는 비상식적이고 목숨까지 걸어야 할 방식의 전투를 명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앞서서 행하셨음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홍해나 요단이나 철옹성 여리고나 이번 코로나 사태나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고 그분을 묵묵히 따라가기만 하면 매일의 삶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친밀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쥬블리 참 안식의 찬양을 목청껏 부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여리고 성을 정복하라
수 6:1-11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으로 하나님이 행하실 위대한 일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고 모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주목합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갈렙처럼 결코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온전히 좇아갑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동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가 잘사는 것도 죄가 아니고, 못 사는 것도 죄가 아닙니다. 학식이 있는 것도 죄가 아니고, 배우지 못한 것도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 없음은 죄악입니다.(롬14:23).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골골짜기를 걸어가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복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절망 가운데서도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분명한 결과입니다. 요즘 우리가 묵상하는 에스겔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하나님은 절망에 빠져있는 이스라엘민족에게도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입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바벨론의 포로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앞으로 이루실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성경에 주목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성이 나옵니다.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가나안성읍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견고한 여리고성이 가나안 정복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고고학자 존 가스탱(John Garstang)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여리고성은 이중벽으로 되어 있고, 외벽의 두께가 2미터, 내벽의 두께가 4미터, 높이가 10미터나 되는 견고한 성입니다.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철옹성,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망루에 서면 먼 거리까지 시야가 확보되기 때문에 적군의 동태를 한 눈에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많은 전투로 단련된 강한 군사들과 강한 무기들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리고성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최고의 요새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런 여리고 성을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정복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습니다. 이 성을 장악해야 가나안 땅 중심부로 향해 있는 거점을 확보할 수가 있고, 남과 북을 차단하는 효과도 있어서 적의 연합 전선 구축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가나안 정복을 위한 첫 번째 전투라는 점에서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반드시 승리해야만 했습니다. 모든 일들이 그렇듯이 처음 시작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정복의 시발점이 바로 여리고 전투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3400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 여리고 전투와 우리의 신앙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수 천년 전에 있었던 전쟁의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영적인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난공불락의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애쓰지만 철옹성과 같은 여리고성이 우리 앞을 버티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내 인생의 문제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가정과 자녀의 문제들, 지금과 같은 코로나시대에 부닥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질병, 의지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내안의 타락한 죄성과 못된 습관들, 내 힘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어둠의 권세들을 우리는 인생길에서 끊임없이 만납니다.
사실 여리고성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리고 성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버티고 있는 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우리 인생 앞에 놓여져 있는 내적인 문제, 외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있는 여리고를 반드시 정복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여리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나친 이기심과 욕심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우상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교만일 수 있습니다. 기쁨을 잃어버린 바리새적인 신앙일 수도 있습니다. 내 힘으로 극복하기 힘든 나쁜 습관이나 버릇일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우리 가정과 교회를 위협하는 세속주의나 사탄의 문화일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사탄의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내가 반드시 극복해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 앞에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여리고를 정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축복의 땅을 눈앞에 두고서도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축복을 온전히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 안에 있는 여리고부터 찾으십시오. 그리고 그 여리고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1.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크고 견고한 성을 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2절).하나님은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후 친히 작전명령을 내리십니다. "내가 승리를 보장할 테니 너는 나가서 여리고성을 정복하라."
여러분!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지만 갈렙이 가나안 땅의 요새와 같은 헤브론 땅을 보는 순간, 저땅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라는 비전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렙은 85세가 되었지만 흔들리지않고 그 땅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분명하게 믿으십니까? 이것이 여호수아에게만 주신 약속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영적인 여리고를 정복해야 되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약속입니다. 말씀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전에 말씀을 먼저 주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을 정복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병든 자를 치유하는 회복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만사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세상의 모든 죄악을 끊어버리고, 승리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악한 권세를 깨뜨리고 능히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기 위한 비결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 7-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수 1:7-8)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면 절대로 패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항상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가 가는 길이 항상 평탄하고 형통한 길이 주어집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다시한번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고 계십니다. 다시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희는 내 말에 순종만 해라. 그러면 내가 네 앞에 있는 모든 대적을 멸하겠다. 닫혀있는 문을 열어 주겠다. 내가 너로 반드시 승리하게 해주겠다.” 할렐루야! 바로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허탄한 소문이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환경에 지배받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순종하십시오. 말씀의 검을 들고 나아가는 자에게는 반드시 승리하는 놀라운 역사가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반드시 믿음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시해 주신 여리고 성의 정복 작전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성벽을 때려 부술 수 있는 무기를 준비해라. 특공대를 조직해라가 아닙니다. 군사적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여리고성 주변을 날마다 한 바퀴씩 돌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한 바퀴 돌고 그 다음날도 한 바퀴 돌고 그리고 마지막 일곱 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소리를 지르면 견고한 여리고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명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희한한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눈 앞에 여리고성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고 적막감만 감돌고 있습니다. 맨 앞에 무장한 선봉대가 서고 그 뒤에는 나팔을 든 일곱 제사장이 따라갑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따라가고 나머지 군사들이 뒤에서 행진을 합니다. 여리고성의 크기로 볼 때 적어도 1시간 이상은 걸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엄청난 모험이고 또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성 주변을 돌 때 성안에서 갑자기 공격이라도 하면 속수무책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거기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절대로 순종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믿음장이라고 불리는 히 11:3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칠일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된 요인은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고,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상식을 뛰어 넘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믿음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요 기초가 됩니다. 믿음은 보화입니다. 믿음은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성도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승리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철학이나 지식이나 선행이나 자기 의를 가지고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하지만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어둠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만 유일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만 믿고 나아가는 자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전에 염려하고 두려워하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군대 대장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요구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수 5: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무엇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까? 너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라 그러면 내가 너를 책임질 것이다. 하는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왜 염려하고 걱정하십니까? 우리가 주인의 자리에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와서 모든 것을 다 주께서 맡기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평강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미 다 주께 맡겼습니다. 이제 주인의 명령이라면 이유없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성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주셨지만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렇게 그들이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으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힘으로, 내 생각으로, 내 방법으로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가 대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앞장 세우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여리고성이 다 무너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3. 침묵가운데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적군들의 목전에서 매일 성을 돌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3, 4일 정도 돌았으면 뭔가 성이 무너질 조짐이 보인다든지, 적들에게서 내분이 일어난다든지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7일 정도 되었으면 성벽이 조금씩 갈라진다든가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지막 7바퀴를 다 도는 순간까지도 여리고성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뭡니까?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벽을 돌 때 한 가지 주의사항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것은 7일 동안 성벽을 돌면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수 6: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왜 하나님께서는 침묵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원망과 불평에 있어서는 선수들입니다. 1세대 조상들이 광야에서 원망하다가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미 조상들을 통해서 그들이 배운 역사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하지만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원망이 튀어나올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리고성을 도는데 입을 열어서 말을 하게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무슨 작전이 이래? 여호수아 너무 겁쟁이 아니야? 우리를 뺑뺑이 돌리다가 죽게 만드는 거 아니야?"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신경이 예민하고 힘든 상황에서는 누구나 부정적인 말을 내뱉기가 쉽습니다. 또 부정적인 생각은 엄청난 전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이스라엘 군대를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침묵은 이런 것들을 고려한 하나님의 고도의 심리작전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침묵이 더 힘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침묵하십시오. 침묵은 곧 우리가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묵묵히 침묵하는 자가 하나님의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가시면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말없이 침묵하며 묵묵히 그길을 가셨습니다. 짐 엘리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탄은 적어도 세 가지를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다. 소음, 조급함, 그리고 군중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영적인 리더로 쓰임을 받으려면 이 세 가지 장애물을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조급함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고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도록 항상 중심을 잡고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영적인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 날 6바퀴까지만 돌고 포기해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리고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기도가, 얼마나 많은 일들이 마지막 몇 분을 버티지 못해 포기함으로써 무산이 됩니까?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된 순종은 응답이 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다가 멈추지 마십시오.
순종하다 보면 위기가 있을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 날까지 성을 돌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소리를 질렀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3바퀴를 돌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끝까지 순종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가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도 인간의 창과 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원망하거나 불순종하면 여리고성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작전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전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침내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역사가 우리에게 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는 무엇입니까? 비록 지금은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계속 도전해 보십시오. 우리에게 어려운 난관과 장애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난관과 장애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데서 끝이 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더 좋은 내일의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리고 작전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에 가로놓여 있는 절망의 여리고 성을 돌아야 합니다. 낙심의 여리고 성을 돌아야 합니다. 불의의 여리고 성을 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은 반드시 무너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인생의 여리고 성 앞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13바퀴를 돌았던 인내가 필요합니다. 침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내 앞에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트리고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간증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순종의 기적을 체험하라!
수 6:1-14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 일대에 150척에 이르는 일본 전함이 출몰하여 한반도를 유린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낡은 선박 몇 척밖에 없던 그 시절,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인근의 지형지물을 깊이 연구하다가 배 여섯 척을 일본 전함과의 전투에 최선봉으로 내어보냅니다.
맹렬히 공격하다가 도망치는 조선의 배를 추격하기 위해 일본의 전함들은 뒤따라오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이 여섯 척의 선박이 일본의 전함들을 유인했던 곳은 거제도와 고성 사이에 있는 좁은 협곡인 한산도였습니다. 그곳의 지형은 정확하게 모르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특이한 지역이었습니다.
한산도 주변에는 무인도가 많았고, 전혀 곡식을 생산할 수 없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이곳에 학익진을 형성하며 공격하여 일본의 전함들을 완전히 섬멸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대첩을 한산도 대첩이라고 일컫습니다. 이 전공은 너무도 혁혁하여 임진왜란 삼대 대첩 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전쟁의 승패는 크게 두 가지로 결판이 납니다.
첫째는 전투력입니다.
어느 쪽이 더 막강한 전투력을 갖추고 있는지, 누가 더 많은 군사력과 화력을 보유하고 있는 가로 승패가 갈립니다.
둘째는 전략입니다.
누가 더 지혜로운 전략을 구사하는가에 따라서 승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당시 일본 군대는 어린 시절부터 칼을 쓰며 살았던 사무라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무장하고 한반도를 건너온 것입니다. 또한 저들은 일찍부터 포르투칼로부터 조총과 대포를 전수받아 그 당시 최신예 전투력으로 한반도를 진격하고자 했습니다. 전투력으로는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위시한 조선군에게는 탁월한 전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놈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리고성을 정복하기에 앞서 여호와의 작전지시가 내려지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는 여리고 성의 왕과 백성들을 여호수아에게 넘겨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여리고성을 점령하기에 앞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지시하십니다.
굳게 닫힌 여리고성
수 6: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여리고성은 그 당시 가나안의 다른 도시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성읍의 규모에 비하여 여리고 성이 가지는 비중은 매우 컸습니다. 여리고 지역은 좋은 오아시스를 가진 지대인 만큼 일찍부터 개발된 고대 도성으로서 성경은 일명 ‘종려의 성읍’(신34:3)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단 대 평원 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여리고성은 그 전략적 위치상 매우 중요한 가나안의 방어 거점으로서 군사 요충지일 뿐 아니라 가나안 중부로 통하는 교통의 요로였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 군대가 가나안 도시 국가들의 남북 연합 작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리고성을 장악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성은 직접적인 군사 작전으로서는 거의 공격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천연요새였습니다. 즉 가파른 경사지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여리고 성은 적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 밖으로 3-4m 높이의 석조 장애물을 설치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본성의 중앙 벽과 약 35도 각도로 경사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가파르고 미끄러운 경사지와 여러 방해물 때문에 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접근하는 행위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습니다. 따라서 유일한 방법으로써는 장기간의 포위 작전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가나안 족속들이 연합하여 반격할 기회를 줄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여리고성은 성문을 굳게 닫고 마냥 버티는 작전을 구사한 것입니다.
여리고성은 마치 중국에 있는 만리장성처럼 튼튼한 성벽이었습니다. 성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성이었습니다. 요즘 대조영이나 사극 드라마를 보면 어떤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성문을 어떻게 돌파하고 적진으로 침입하느냐가 관건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리고 성문은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그들은 출애굽사건, 요단강 동편의 두 왕의 전멸사건, 요단강 도하 사건 등으로 인해 정신을 잃고 간담이 녹았기 때문입니다.
수 5:1 요단 서쪽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들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들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
여호와의 작전명령
여호와께서는 작전명령을 내리시기 전에 먼저 확실한 약속을 주십니다.
수 6: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여호와께서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승리하게 하시며, 이스라엘의 권세 아래 두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거룩한 전쟁’(holy war)의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전쟁의 용어입니다. 왕과 용사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넘겨주었다는 것은 여리고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항하며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여리고성의 왕이나 용사들 위에 높이 계셔서 친히 전쟁의 판도를 결정하시며, 한 성읍의 운명과 역사의 방향을 정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구체적인 여리고 작전명령을 내리십니다. 첫째는 군사에게, 둘째는 제사장 일곱에게, 셋째는 모든 백성에게 각각 다른 역할을 부여하십니다.
수 6: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수 6: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수 6: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하나님이 지시하신 전투대형을 재현해 본다면 최전방에 전투 병력이 배치되었습니다. 9절을 보면,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라고 하십니다. 무장병력이 앞에 있고, 그 뒤에 7명의 나팔수 제사장이 행진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지나가고, 최후후방에는 무장한 병력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이 전투대형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이 대형 자체로는 공격적인 전투를 감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와 나팔수가 전방과 후방에 각각 배치한 군사 가운데서 행군했다는 것은 이 전쟁에서 싸우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언약궤와 나팔수를 보호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수한 전투대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매일 엿새 동안 여리고 성을 한 바퀴씩 돌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거대한 성벽 주위를 도는데, 만약 여리고성의 사람들이 성벽 위에서 돌을 굴리거나 나무토막을 굴릴 수도 있고 불화살을 쏘아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행군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전투력이 그대로 노출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하나님께서 이런 전투 대형을 명령하실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2절을 주목하여 보십시오.
수 6: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여호수아는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전군의 지휘관들을 소집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그 말씀을 하달하였습니다. 작전을 구상하는 데는 많은 이론(異論)이 제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장군과 모든 군사들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한 바퀴씩 돌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큰 함성을 지르니 미동도 하지 않던 여리고성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행군하라, 그러나 침묵하라
역사는 결코 항변하고 외치고 떠드는 자의 소리에 의해서 바뀌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살아 계신 하나님의 권세에 묵묵히 의지하여 순종하는 소수에 의해 이 시대의 역사는 변혁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없든 간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삶이 우리 인생에 놀라운 기적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행군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10절을 봅시다.
수 6: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행군하라, 그러나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종종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표현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은 더 위대합니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한 것을 모두 말한다면 이 세상은 혼란과 고통 속에 빠질 것입니다. 서천에 가면 ‘송내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제 친구목사님이 시무하였던 교회인데 100년이 넘은 교회입니다. 목사님이 그 교회 부임하여 교회 안에 써 붙인 글귀가 있는데 “침묵”이라는 글귀였습니다. 저는 그 글귀를 보면서 ‘이 교회가 얼마나 말이 많았으면 침묵이라는 글귀를 써 붙였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입을 다물고 침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어떤 공동체 훈련을 받는 곳에 가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침묵하는 훈련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한 방에 네 명이 숙식을 하는데 일체 대화를 해서는 안 됩니다. 더 나아가 TV를 시청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말을 안 하고 지내는 것이 그렇게 답답하고 갑갑한 줄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유익하기도 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조용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는 시간도 많고 좋았던 것을 느꼈습니다.
성경이 말한바 만물보다 더 부패한 것이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규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우리의 표현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침묵할 때 그 침묵은 하나님이 역사하실 여백을 담아드리는 위대한 축복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역사를 앞두고 하나님은 침묵할 것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침묵이란 나의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장면을 목격하는 시간입니다. 침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사역하실 때 침묵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군하면서 그들의 모든 생각을 쏟아 놓았다면 절대로 여리고성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공동체 내에 부정적인 생각과 말들이 돌기 시작하면 그것은 엄청난 파괴력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단체, 한 공동체, 한 개인을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에게 베푼 장점과 긍정적인 영향력이 무엇인가를 먼저 힘써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문제점들을 밤새 들추어내어 백 가지 천 가지를 세어 본다한들, 그 문제점들은 비평 그 자체의 힘으로는 결코 개선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뜻과 발전 가능성, 그리고 비전을 밤새도록 연구하여 모든 분들이 나눈다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자유가 있다고 외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용해된 생각만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주는 언어의 범위 안에서만 표현할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합니다. 때로 침묵할 때 우리 가슴 안에 긍정적인 밀을 심습니다. 침묵할 때 진정한 순조의 씨앗을 우리의 심령 안에 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홍해 앞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뭐라고 외쳤습니까?
출 14: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 14: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출 14: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스라엘의 입에서는 질풍노도와 같은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 같았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 모세가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출 14: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는 백성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거대한 홍해 바다가 물 벽을 이루며 갈라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유히 바다 길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우성치는 소리가 결코 이 시대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인생의 전체를 의탁하고 그분의 말씀 앞에 조용히 순종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오늘도 이 시대는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가정에서, 동네에서, 교회에서 원망을 내려놓으십시오. 불평을 잠재우고 침묵하십시오. 쓸데없는 소리를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심령 가운데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순종하십시오. 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기적을 창조하십니다.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