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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漢高祖 列傳)] 2-98 (128)
《위기의 한신(韓信)과 편할 날이 없는 유방(劉邦)》
어느 날 유방(劉邦)이 중신들과 정사(政事)를 의논하고 있었는데, 시종(侍從)이 급히 달려오더니,
"초나라의 농부 한 사람이 폐하께 아뢸 말씀이 있다고 찾아 왔사옵니다." 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유방은 <초나라에서 온 사람> 이라는 소리에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 사람을 당장 이 자리에 불러들여라"하고 즉석에서 명하였다.
초나라에서 왔다는 농부는 바닥에 엎드려 유방에게 고한다."새로 부임해 온 초왕 한신은 죽은 항우의
심복 부하였던 종리매라는 장수를 숨겨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서는 많은 농지를
수탈하여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하고 있사옵니다.이는 필시 반란을 도모하려는 것이 분명하오니,
폐하께서는 그를 신속히 다스려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출해 주시옵소서."하는 것이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며 중신들에게 묻는다."한신이 일찍이 제왕(齊王)으로 있을 때에
수상한 행동을 하기에 그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초왕으로 보내 버렸더니, 이번에는 종리매와
결탁하여 반란을 도모하고 있는 모양이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
중신들이 크게 분노하며 품한다."그렇다면 큰일이 아니옵니까 ? 당장 군사를 보내어 철저하게 응징을
해야 할 것이옵니다."그러자 진평이 앞으로 나서며 아뢴다."한신은 항우에 비길 장수가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보내어 무력으로 그를 제압하시려다가는 큰일나시옵니다.
초나라 땅은 워낙 산악이 험악하기 때문에 군사를 1,20만쯤 보내 보았자 아무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오라, 지금 당장 한신의 지략을 능가하는 용장(勇將)도 없는 형편이옵니다."
유방은 숨을 크게 쉬면서 진평에게 묻는다."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이오 ?"
"한신과 무력으로 싸워서는 안 될 것이니, 지략으로 그를 생포해 버리셔야 하옵니다. 신에게 좋은
계략이 있사옵니다.""무슨 계략인지 어서 말씀해 보시오."진평이 다시 아뢴다.
"옛날 진황제(秦皇帝) 때에는 각 지방의 민정을 살피기 위해, 각 계절에 걸쳐 지방 순행(巡幸)을 하는
관례가 있어왔사옵니다.봄에는 동쪽 지방을 순회했었고, 여름에는 남쪽 지방을 순회했었고,
가을에는 서쪽 지방으로 순행을 했었고, 겨울에는 북쪽 지방을 순행하였던 것이옵니다.
그런 전례를 복원(復原)하신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번에는 운몽지방(雲夢地方)으로 순행을 하신다는
조칙(詔勅)을 내리시옵소서.그러다가 만약 폐하를 영접하지 않는 후백(侯伯)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으면, 그를 잡아 목을 베어 버리도록 하시옵소서.그러면 한신은 그 사실을 알고
폐하를 반드시 영접하러 나오게 될 것이옵니다. 그 기회에 역사(力士)들을 시켜 한신을 생포해 버리면
되실 것이옵니다." 진평의 지략은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유방은 크게 기뻐하며 곧 조칙을 내리고 운몽지방으로 순행의 길에 올랐다.
유방이 문무 백관을 거느리고 함양을 떠나 진채(陣蔡)라는 곳에 도착하자, 영포와 팽월등을 비롯하여
인근 각 고을의 후백들이 모두 영접을 나왔다.그보다 앞서 한신은 황제가 운몽지방에 행차를 한다는
통보를 받고 긴급 참모 회의를 열었다."지난번에 왔던 수하 대부의 말을 들어 보면, 폐하께서는
내가 종리매를 숨겨 두고 있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신다고 하오.그러므로 이번에 영접을 나갈 때에는
종리매의 수급을 반드시 가지고 나가야 무사하겠는데, 친구를 차마 죽일 수가 없단 말이오.
그러나 황제는 나의 마음을 떠보시려고 순행이란 명목으로 일부러 이곳으로 오시는 것이 분명하니,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려.""..... "
참모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 부답이었다. 아무런 묘안도 없었던 것이다.
한신은 하도 답답해서 종리매를 직접 불러 솔직하게 말했다."황제께서 이번에 우리 지방으로 순행을
오시는 것은 나의 마음을 떠보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 분명하오.그대를 숨겨 둔 사실이 발각되는 날이면
나도 죽고 그대도 죽게 될 것이오. 그러니까 그대는 나를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주어야 하겠소."
종리매가 대답한다."대왕은 어찌하여 잘못된 생각만 하고 계시오. 지난번에도 말한바와 같이,
나를 죽이고 나면 대왕 자신도 반드시 죽게 될 것이오. 내가 왜 대왕에게 거짓말을 하겠소?"
"내가 비록 한제 손에 죽게 되더라도, 나에게 두 마음이 없다는 사실은 알려 드려야 할 게 아니오 ?"
종리매는 그 소리를 듣고 어처구니가 없는지 화를 발칵 내며 한신을 여지없이 나무란다.
"이 비겁한 놈아 !
너는 수십 년 이래 친구와의 의리는 생각조차 아니하고 자신의 영달만을 꾀한단 말이냐 ?
너같이 비겁한 놈을 친구로 믿고 있었던 내가 너무도 어리석었다."
종리매는 이같은 욕설을 한바탕 퍼붓고 나더니, 즉석에서 자기 칼로 자기 목을 끊어 자결을 해 버렸다.
한신은 그런 종리매의 수급을 가지고 가서 유방에게 바치며 이렇게 품했다.
"신이 그동안 숨겨 두고 있었던 종리매의 수급을 이제야 베어 왔사옵니다."
유방은 종리매의 수급을 확인하고 나서, 별안간 용안에 노기를 띄며 한신을 호되게 질책한다.
"그대는 종리매를 오랫동안 숨겨두고 있다가, 내가 이곳에 오니까 이제서야 마지못해 그의 수급을
가져 왔겠다. 그렇다면 그대는 필시 나에게 엉뚱한 생각을 품고 있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여봐라 ! 이자를 당장 결박을 지어라 ! "한신은 아차하는 순간에 결박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모든 것이 진평의 지략대로 된 것이었다.한신은 결박을 당하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신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십니까 ?"유방은 결박당한 한신을 굽어보며 큰소리로 꾸짖는다.
"무슨 죄로 결박을 당하게 되었는지 그대의 양심에 물어 보면 될 게 아니냐 ?"한신이 대답한다.
"폐하께서는 개국공신(開國功臣)을 무슨 까닭으로 포박하시는지, 신은 알 길이 없사옵니다."
"그대의 죄를 그대가 모르겠다고 ... ? 그렇다면 내가 자세하게 일러 주리라.
그대는 초왕으로 부임하기가 무섭게 농민들에게 땅을 빼앗아 부모의 산소를 요란하게 꾸며 놓음으로써
원망을 높게 샀으니 그 죄가 하나요. 이제부터는 군사가 필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전지(田地)를
빼앗아 군사 훈련장으로 써 가면서 많은 군사들을 길러오고 있으니 그 죄가 둘이요.
종리매가 나의 원수인 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오랫동안 숨겨 두고 있었으니 그 죄가 셋이다.
이렇게 그대가 반란을 일으키려던 계획이 이미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포박을 받아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유방의 꾸지람은 추상 같았다.한신은 포박을 당한 채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그 세 가지 일에 대해 신의 해명을 들어 주시옵소서. 첫째는 부모님의 산소에 관한 일이온데,
신은 어렸을 때 너무도 가난하여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도 모셔 드릴 땅 뙤기가 한 뼘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의 집 산에 부모님 시신을 가장(假葬)을 해 두었던 것이옵니다.
그러다가 초왕이 되고서야 비로소 정식으로 산소를 조성하여 모시게 된 것이온데, 백성들은 그런 것을
모르고 저를 모함한 모양입니다.변명을 듣고 보니 그것만은 이유가 그럴듯하였다. "음 ! "
유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는다."그 문제는 그렇다치고, 농토를 징발하여 군사를 훈련한
까닭은 무엇인가 ?"한신이 다시 대답한다."페하께서는 천하를 통일하셨다고는 하오나, 초나라에는
아직도 항우의 잔당(殘黨)들이 가는 곳마다 들끓고 있사옵니다.
그러니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부득이 군사를 양성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폐하를 보필하기 위한 일이었지, 결코 반란을 도모하려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리고 종리매에 관한 일은, 그와 저는 수십년래의 친구지간 이옵니다. 종리매는 죽여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물이기에 그를 살려 두었다가 적당한 기회에 폐하께 품고하여 귀하게 써 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간악한 무리들의 참소(讒訴)를 들으시고 신을 의심하신다고 들었기에 부득이
저의 진심을 보여 드리기 위해 그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온 것이옵니다. 하오니 그것이 어찌 죄가 되오리까 ?
폐하께서는 이상과 같은 점을 통찰하시와 신의 포박을 너그럽게 풀어주시옵소서."
듣고 보니 모두가 그럴듯하였다.그러나 유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난날의 여러가지 의혹들이
아직도 마음에 맺혀 있었던 것이다. 유방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한신을 다시 꾸짖는다.
"그대의 죄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 뿐이겠는가 ? 지난 날 그대가 제(齊)나라를 치러 갔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라. 그대가 제나라를 신속히 토벌하지 못하기에, 나는 여이기 노인을 보내어 제나라를 말로써
귀순시켜 놓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제왕이 되고 싶은 욕심에서 군사를 몰고 들어가 제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해 버리는 바람에, 여이기 노인이 제왕의 손에 팽살을 당하지 않았던가 ?
어디 그뿐이랴.
내가 성고성에서 항우에게 포위를 당하고 있을 때에 그대는 나를 구출해 주러 오지도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초왕으로 책봉된 데 불만을 품고 모반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그런 일련의 일을
모두 종합해 보건데, 그대에게 어찌 죄가 없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
유방이 아득한 옛날 고리짝 일까지 샅샅이 들춰 내는 바람에 한신은 숫제 입을 다물고 마음 속으로
이렇게 탄식하였다.
(아아 ! 새 사냥이 끝나면 활은 자취를 감추고, (高鳥盡 良弓藏 : 고조진 양궁장)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는 보신탕이 되어 버리고, (兎死狗烹 : 토사구팽)
적을 다 때려부수고 나면 공신이 죽게 된다(敵國破 謨臣亡 : 적국파 모신망)는 옛말이 있더니,
그 말은 과연 천하의 진리였구나 ! 아뿔사 ...! 나 자신이 꼼짝없이 이런 신세가 될 줄을 어찌 예상할 수
있었으리오 ....)한신이 아무런 대꾸를 못하고 고개를 떨구니, 유방이 시종에게 명한다."죄인을 감차
(監車 : 짐승을 실어 나르는 수레)에 태워 가지고 길을 떠나자. 여기서 운몽까지는 얼마나 되느냐 ?"
"운몽까지는 아직도 30리가 남았사옵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타시기가 어렵사오니,
말로 바꿔 타시는 것이 편하실 것이옵니다."유방이 말로 바꿔 타고 숲속으로 막 들어가려고 하는데,
말이 별안간 큰 소리로 울며 뒤걸음을 치는 것이 아닌가 ?
유방은 깜짝 놀라 말고삐를 바짝 움켜 잡으며, 뒤따르던 번쾌에게 급히 명한다.
"장군은 숲속에 무엇인가 숨어 있는 모양이니, 빨리 살펴보시오."
번쾌가 부리나케 숲속으로 달려 들어가 보니, 숲속에는 어떤 괴한이 손에 화살을 메워들고 있었다.
번쾌가 일거에 괴한을 제압한 후, 끌고나와 유방앞에 꿇어앉히자. 유방이 괴한을 심문한다.
"너는 어떤 놈이며, 이 숲속에서 누구를 쏘려고 활시위를 메고 있었느냐 ?"괴한이 대답한다.
"나는 회음(淮陰)에 사는 사람이오. 황제가 죄 없는 초왕을 포박하여 압송해 가길래, 구출해 가려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소."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이놈 ! 네놈은 한신을 구출해 가려는 것이 아니라
짐을 쏘아 죽이려 했던 것이 아니냐 ? 말이 너를 보고 놀라지 않았던들 내가 큰일을 당할 뻔 하였구나,
여봐라 ! 이 흉악한 놈을 당장 때려죽여라 ! "수레에 실려 끌려 가던 한신은 그 광경을 보고 혼자 눈물을 흘렸다.
유방이 괴한을 즉석에서 처치하고, 운몽과 적양을 거쳐 10여일 후에 장안으로 돌아오니, 문무 백관들이
성밖 멀리까지 영접을 나와 주었다.그중에 대부 전긍(田肯)이 머리를 조아리며 유방에게 아뢴다.
"한신 장군은 황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는 데 많은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폐하께서는 세인(世人)들의
말만 들으시고 운몽까지 행차하시어 한신을 친히 체포해 오셨으니, 이 어찌된 일이옵니까 ?
천하의 보고(寶庫)인 제나라를 평정한 사람도 바로 한신 장군이었으니, 그 공로로 보아서는 한신 장군을
마땅히 제왕으로 봉하셨어야 옳을 일이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신 장군을 초왕으로 강등하였다가,
이제는 죄가 있다고 체포까지 해 오셨으니, 사후 처리를 이처럼 야박하게 하오시면, 폐하의 성은(聖恩)을
누가 믿으오리까 ? 폐하께서는 재삼 통촉해 주시옵소서."
대부 전긍의 직간(直諫)에 유방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한다."경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소이다.그러나 한신은
모반할 마음을 먹고 군사를 은밀히 양성하고 있었으니,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
전긍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한신장군이 그렇게도 의심스러우시면, 함양에서 조용히 살게하면
아무런 일도 없을 것이옵니다. 폐하께오선 그의 공덕을 생각하시와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시옵소서."
"좋은 간언을 들려주어서 고맙소이다. 모든 일은 경의 충고대로 하겠소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유방은 한신을 어전으로 불러 위로하며 말한다.
"내가 장군의 공로를 모르는 바가 아니오. 장군이 없었던들 내가 어찌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겠소.
장군을 제왕으로 보냈다가 다시 초왕으로 이동한 것도 장군의 공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소.
그런데 장군은 종리매를 숨겨 두고 비밀리에 많은 군사들을 양성하고 있었으니, 내 어찌 그런 일을 그냥
지나칠 수가 있었겠소.그래서 장군을 생포해 오기는 하였으나,
지난날의 공로를 생각해 어찌 죽일 수야 있겠소.
그래서 이제 <회음후(淮陰侯)>로 봉해 줄 테니, 당분간 장안에서 편히 쉬도록 하오. 기회를 보아
다시 왕작(王爵)을 내리도록 하겠소."한신은 머리 숙여 사은 숙배하며 말한다.
"황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모든 일은 폐하의 분부대로 거행하겠나이다."
그러나 천군 만마를 거느리고 일국을 호령하던 한신으로서는 처량하기 짝없는 심정이 되었다.
그러기에 한신은 조회에 참석하기가 부끄러워 병을 핑게로 조정에는 일체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써 세상은 일단 평온하게 된 셈이었다.그런 어느 날 유방이 퇴청을 하여 내전으로 들어 오는
길이었는데, 때마침 마당을 거닐던 태공(太公)이 아들인 유방을 보자 별안간 땅바닥에 엎드리며
큰절을 올리는 것이었다.아들이 비록 황제라 하기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절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이야 말로 삼강 오륜(三綱五倫)에 벗어나는 일이 아니런가 ?
예전에 없던 일이기에 하도 어이가 없어, 유방이 태공에게 물었다.
"아버님께서는 오늘따라 소자에게 절을 하시니, 이 어이 된 일이옵니까 ?"
그러자 태공은 두 손을 마주잡고 경건하게 읍하며,"노신(老臣)이 예전에는 종사(宗社)의 예절을 몰라
폐하께 결례(缺禮)가 막심했사옵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유방은 기가막혔다.
그리하여 갑작스럽게 무슨 이유로 그러시냐고 또다시 물어 보았더니 태공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제 어느 분이 노신(老臣)에게 충고하기를 <황제가 사사롭게는 태공의 아드님인 것은 사실이지만,
공적으로는 만백성의 어버이 이십니다.그러니 태공께서는 황제 폐하에게는 마땅히 신하로서
행동하셔야 합니다>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노신은 오늘부터 폐하에게 신하로써 큰절을
올리기로 한 것입니다."듣고보니 그 말에도 일리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에게 절을 올린다는 것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유방은 그 문제를
제도적으로 시정하기 위해 중신 회의를 급히 열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인륜의 지친(至親)은 부자(父者)관계를 능가할 수는 없다. 아들은 아버지가 계셨기에 생겨난 것이므로,
비록 황제라 하더라도 최상의 존경은 아버님께 돌려야 하는 것은 인도(人道)의 기본인 것이다.
나는 이제 천하를 평정하고 제위에 올랐으나, 아버님께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존칭(尊稱)도
제정한 바가 없기에, 오늘부터는 아버님을 <태상황(太上皇)>으로 받들어 모시기로 하노라."
이렇게 공포하고 군신들과 더불어 축하연을 베풀고 있는데, 홀연 파발마(擺撥馬)가 달려와 놀라운
보고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오랑캐의 두목 묵특이 한왕(韓王) 희신(姬信)과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있사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뭐야 ? 희신(姬信)은 장량(張良) 선생의 천거에 의하여 내가
한왕(韓王)으로 임명한 사람이 아닌가 ? 그런 그가 오랑캐와 결탁하여 반란을 시도하고 있다는 말이냐 ?"
"희신은 묵특의 압력에 못 이겨 반란에 가담한 듯싶사오나, 어쨌든 그들이 한통속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조(趙)나라의 대장이었던 조리(趙利)도 오랑캐의 두목인 만구신, 왕황 등과 어울려 반란 계획을
꾸미고 있는 중이옵니다."유방이 크게 진노하며 말한다.
"육국을 모두 평정했기에 이제는싸움이 없을 줄 알았는데, 난데없는 북방 오랑캐들이 준동을 한다는말이냐 ?
이런 놈들을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후환이 두려우니, 내가 친히 출동하여 놈들을 깨끗이 쳐부수기로 하겠다."
유방은 승상 소하에게 관중을 지키게 한 뒤에 자기 자신은 조참, 번쾌, 근흠, 노관 등과 함께 2만 군사를
거느리고 오랑캐 무리 소탕의 장도에 올랐다.유방은 불과 얼마전에, 의기 양양하게 천하 통일을 이루었으나,
사방 팔방으로 국토가 워낙 광활한지라, 어느 하루도 평온할 날이 없었던 것이었다.
2-99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