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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아무일도 없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요?
이말에서 여러분은 무슨일을 연상하세요?
그날은 아무일 없었다!
혹시 청춘남녀가 단둘이서 같이 밤을 지새우고 아무일(?)없었다고 하는 말은 아니냐고요?
이건 어떤 사람의 일기장에 나오는 말이랍니다.
프랑스 대혁명때 목이 날라간 루이 16세를 아시죠?
제가 보기에도 이사람은 좀 모자라는 사람같이 보이는 데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사냥"과 "자물쇠 만들기"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 더욱 기가 막히는데...사냥이라도 나가지 않은 날이면
차라리 "아무일 없었다"라고만 쓰거나 아예쓰지를 않았는데...
혁명이 일어난 날 몇일간의 일기를 보면...
"1789년 7월 11일 아무일 없었다.(사실은 재정총감이 추방당한날!)"
"7월 13일 아무일 없었다."
7월 14일 (공백) 그러나 실은 이날 대혁명이 일어났다.
"8월 4일 사냥을 가서 사슴 한마리를 잡았다. 갈때와 올때 모두 말을 탔다.
(이 날은 봉건제를 폐지한 날!)"
"10월 5일 사냥을 가서 81마릴 잡앗다. 그러나 사건이 있어 중단되었다.
(이날 파리의 시민이 베르사이유로 쇄도, 왕과 왕비를 파리로 끌고 간 날이다)"
"사건"이란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보시다 시피 정치적 상황에는 전혀 무관심 했다는게
나타나죠.. 난세에 어리석게 태어난게 죄랄까..아니면 봉건적 착취를 한자의 최후로 당연한
결과일지..
#매맞는 남편! 독수공방하는 아내!#
얼른 듣기에는 남편이 아내에게 매를 맞고 집에서 쫒겨나서 아내가 독수공방하는 걸로
들리시죠? 그런데 그게 아니랍니다..하하하하
매맞는 남편은 황제의 사위고요, 독수공방하는 아내는 황제의 딸이랍니다.
누가 감히 황제의 사위를 핏떡이 되도록 두들겨 팰까요?
러시아의 전설적인 깡패 잘팬다스키(?)일까요? 하하하하
그런데 부마를 두들겨팬건 여관(우리나라로 치면 상궁쯤)과 환관이었답니다.
명나라에서는 공주가 결혼을 하면 시집에서 살지않고 궁에서 살았읍니다.
그리고 만약 부마가 공주와 자고 싶으면 궁으로 들어와 공주의 침소에 들었다가
다시 돌아가야했는데, 명나라에서는 원칙적으로 부마를 얼굴이 잘생긴 미남으로 재산가나
군인의 자제중에서 뽑았답니다.
그런데 이 부부의 사이를 갈라놓는 고약한 여자가 한명있는데 "관가파"라고 불리는
여관이지요. 아무리 공주라 하여도 이 관가파의 허락없이는 부마는 공주의 침소로
들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부마는 끊임없이 이 관가파라는 여관에게 뇌물을 주어야하는데
어떤 부마는 돈이 없어서 공주와 만나지 못해 노이로제에 시달리다 죽었고
(아마 만력제의 누이가 아닌가 기억됩니다) 그공주는 과부가 되었죠.
또 어떤 부마는 여관의 허락없이 공주의 방에 들어갔다가 나중에 알고 달려온 여관과
환관에게 핏떡이되도록 얻어맞고 맨발로 도망을 쳤지요.
그리고 나중에 여관이 황제에게 거짓으로 아뢰어 부마는 3개월간 궁 출입금지처분을 받았죠..
#자의가 마음만 먹으면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이말을 한사람은 누굴까요? 자의가 누군줄 아세요?
이말을 한사람은 당나라의 대종인데 자의란 안사의 난을 진압했던 곽자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안사의 난"을 아시죠? 당나라 현종때 안록산이란 인물이 일으킨 당왕조로선
전대미답의 대란이었죠.
이난을 진압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삭방절도사 출신의 곽자의였죠.
그는 난을 진압한 뒤 당나라 군부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어요. 그의 부하들의 다수가
절도사로 임명이 되었거든요. 그가 명령만 내린다면 당장에라도 그들은 황실의
명령보단 곽자의의 명령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의에게 반심은 없었습니다. 황제 주위의 측근들이 자의를 참소하면 그는 즉시
입조하여 반심이 없음을 증명하였으므로 황제도 그를 의심할수가 없었죠.
그리고 그의 공적이 워낙 컸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그의 처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당왕조 4대에 걸쳐 무공을 세워 나중에 "상부"의 칭호를 받고, 태위중서령의
관직을 받고 85세의 장수를 누렸습니다.
"상부"의 칭호는 황제가 그를 신하의 예 이상으로 대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6남 곽애는 황제의 부마였어요.(어제오늘 부마들이 수난을 당하누만.)
대종의 딸 승평공주를 맞이했는데 그녀는 막대한 재산을 화장료로 지참한
것으로 유명하죠. 그리고 황제의 딸이랍시고 기세가 대단했답니다.
어느날 공주는 곽애와 부부싸움을 하였읍니다.곽애가 화가 나서 덜컥!
"당신은 당신 아버지가 황제랍시고 거들먹거리지만 사실은 우리 아버님이
황제가 되실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무사하다는걸 알아야된단 말이요."
공주 역시 화가나서 수레를 타고 궁으로 가서 부황께 고했어요.
그러나 대종은 그말을 듣고 별로 화도 내지않고..
"애의 말이 옳다. 만약 자의가 천자의 자리를 노릴 생각이 있다면 천하는
곽가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라고 하며 공주를 타일렀다.
이 소식을 들은 곽자의는 즉시 아들에게 금족령을 내리고 참내하여 벌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대종은..
"속담에도 있지 않소, 바보천치가 되지 않으면 가장노릇을 하지 못한다고.
여자들이 규방에서 하는 말을 일일이 신경을 쓸 수 있겠소?" 라고 말하였다.
자의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아들을 매질함으로써 황공하다는 뜻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이는 관리가 자기의 몸을 지키는 데 신경을 썼던 대표적인 예로 권력의
정상에 선 사람을 시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죠. 지금도 권력자가
혀나 입을 잘못놀려 구설수에 오르는데 자의의 얘기를 한번 읽어 보시면 어떨까요..
*재미있는 역사얘기*
#애 낳는것 구경하는게 최고의 영예?#
세상에! 애낳는것 구경하는게 무슨 큰 영예냐고요?
사실 이것은 유럽 여러 왕조국가에서 왕비가 아이를 낳을때 신하중 유력한 이가
왕자의 출산을 증명(?)하기위해 산실에 입회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국에서도 신하가 왕비의 산실에 입회. 왕자를 분명히 왕비가 낳았다는걸 관증하였고,
프랑스에서도 그리하였는데 그런데...프랑스에서는 그도가 좀 지나쳤읍니다.
단순히 증명을 위한 입회가 아니라 여기에 참석함으로써 왕으로 부터 신임을 받고
있다는걸 과시하기위해 수많은 사람이 산실에 입회를 하렸는데
....
앙리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의 경우엔 산실에 200명이 입회하였고,
유명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분만 때는 신하들이 서로 참석하려고
아우성치다가 산실의 문이 부서지고 왕비가 기절까지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오늘은 저도 동성 연애자들에 관한걸 좀쓰죠...
미국에선 요즘 동성연애자의 군입대를 허용하느냐,마느냐로 논란이 많은데
역사적인(?)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동성연애자의 군입대는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혹시 에파미논다스라는 사람을 아시는지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테베의 유명한 장군인데
이사람이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군사적 천재였는데 그가 전술상 획기적으로
계발해낸 "중장보병에 의한 사선진 전법"은 이후 그리스 군대의 기본 전법이 되었지요.
그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기발한 전술이나 군대를 만들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동성연애자로 구성된 "동성연애자 부대"였읍니다.
그가 이런 부대를 만들게 한 의도 역시 다른 사람으로선 생각도 못할 기발한 착상이었는데
그의 생각으론 애인(?)을 바로 옆에 두고 싸운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라고 생각을 했죠. 그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역시 이들 동성 연애자로 구성된 부대는 어떤 부대보다도 용맹을 떨쳤는데
그 이유는 위와같은 이유에서 였읍니다.
에파미논다스의 테베는 그의 힘에 의해 펠로폰네소스전쟁 기간중 잠시나마
스파르타를 꺽고 그리스의 패자가 되었는데 그의 사후에 다시 패권은 무너지고
알렉산더의 출현이 있기까지 그리스는 질서를 유지할수가 없었죠.
사실 알렉산더의 전술도 모두 에파미논다스의 전술을 흉내낸 것에 불과 하답니다.
#차마 부끄러워 외국어는 배울수 없다!?#
이말이 무슨 말일가요?
요즘 같은 국제화시대에 이런 얘기를 한다면 좀 우습지만 이런 국제화시대일 수록
자기문화와 글에 대한 긍지를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에서요..
요즘엔 무슨 외국어 몇마디 하는게 큰 자랑이고 능력이라고 생각되지만
예전에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나 봅니다.
명나라의 영락제라는 임금을 아세요?
아주 용감하고 씩씩한 황제엿는데 그래서 외국원정도 자주하였답니다.
직접 고비사막을 넘어 5번이나 몽고족을 쳤지요. 중국에선 이를 3리5출이라며
대단한 위업이라고 칭송을 하죠. 환관 정화를 시켜 8회에 걸친 남해원정을 하게하여
아프리카까지 다녀오게 한 것도 이 황제랍니다.
그런데 명나라게 이렇게 국위선양을 하자 각국에서 조공사절도 많이 왔는데
이때문에 이들 외국어를 할수있는 사람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국립대학인 국자감에서 학생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치게 되엇는데
이에 학생들이 데모를 하며 반대를 하였답니다. 이유를 묻자 외국 오랑캐의 말은
차마 부끄러워 입에 담기도 싫다는 거였죠.
그들의 중화의식의 자존심을 엿볼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요즘 우리의 사정을 보면
영어를 써야 좀 잘나보이고 한글은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좀 잇는 것 같습니다.
전 단언하건데 이 지구상에서 한글만큼 훌륭한 글은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글과 문화에 자긍심을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빙혼 주 : 그런데 한글 띄어쓰기는 그렇다고 치고 맞춤법까지 이토록 개판이냐?)
전 개인적으론 우리나라의 모든 국경일을 다 없애더라도 한글날 만큼은 꼭 국경일로 하고
이날만이라도 전 방송이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이며 편리한 문자인지 하는걸 홍보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지구상에는 3000이상의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누가 이많은 언어를
다 구사할 수 있을 까요...그러니 3개국어를 하건 8개국어를 하건 20개국어를
하건 그건 그리 큰 자랑거리는 안되죠.
그러니 외국물좀 먹었다고 혀끝을 굴리는 사람들을 보면 좀 비웃어주고 싶답니다.
우리말이나 똑바로 하라고요. 전요즘 TV어린이유치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데 반감을
가지는데 우리글이나 제데로 가르쳣으면 좋겠읍니다.
(너부터 좀 한글 좀 똑바로 배우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처음에 수정을 하여 글을 올리려다가
전체를 수정하려면 시간이 걸려 그냥 올리는 중이다. 글 보다는 내용이 배울 것이 있어서.)
#거세 수술#
사실 환관들은 우리나라나 중국에만 있었던 건 아니고 유럽이나 중동 아프리카 등
세계각국에 다 있었습니다. 수술(?)얘기만 하자면 대체로 인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취없이
수술을 하였는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관들은 모두 거세를 하였답니다.
당연히 수술도 그들이 하였는데,가늘고 강한 털실로 국부를 묶고요 .
그뒤 예리한 면도칼로 자른뒤 출혈을 재와 뜨거운 기름으로 막고
요도에 금속막대를 삽입한뒤 뜨거운 모래속에 몸을 파묻고 5~6일간을 방치하였죠.
이방법이 제일 난폭하여 치사율이 무려 60%에 이르렀어요.
남인도에서는 도기로 만든 수술대위에 환자(?)를 앉힌뒤 아편을 먹여 마취시키고
대나무칼로 국부를 쿡쿡 찔러넣고, 면도칼로 대나무를 따라 절단을 하죠.
그뒤 뜨거운 기름을 붓고 기름을 적신 천으로 감은뒤 마취상태에서 회복되때까지
우유로 영양을 공급햇는데 실패율이 제일 적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선 궁궐옆에 수술실이 있죠. 이들은 대대로 이것을 직업으로 삼는 자들인데
먼저 수술자가 오면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물어요. 그래서 후회하는 기색이 없으면
돌의자에 앉히고 조수3명에게 허리와 양다리를 잡게한뒤 천으로 국부주위를 단단히 묶고
뜨거운 후추탕으로 국부를 세척한뒤 수술칼로 단숨에 절단하죠.
그리고 나무못을 요도에 삽입하고 찬물로 적신 종이로 국부를 감싸죠.
이후 환자를 일으키고 2~3시간 걷게 한뒤 눕히지요.
이후 3일간 물을 못마시게하는데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고 합니다. 3일후 나무못을 뽑아
오줌이 나오면 수술이 성공한 것인데 오줌이 안나오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성공율은 90%이상이었다고 하죠.
어때요? 좀 끔찍하지요? 환관들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이 어떠하신지 궁금하군요.
시간만 좀 난다면 역사상 유명했던 환관들의 얘기를 다룬 "환관열전"을 연재하고픈
생각도 있지만요. 제가 조조를 연재하는것만 해도 벅차서요.
#환관 장군들#
뭐 얘기하자면 길지만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환관들 중에는 씩씩한 군인들이
많았답니다. 통념상 환관들이란 임금옆에서 허리를 굽히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니예.니예"하는 살살이 아부꾼으로 알지만요. 강직하고 학식있는 환관들은 물론
용감한 장군들도 많았답니다.
우선 중국외의 나라에서 장군으로 유명한 사람을 살피면,
이란의 카쟈르 왕조를 세운 "아가 무하매드"라는 사람이 있었죠.
그는 이란의 한 토호의 환관으로 어릴때 거세를 당했는데 나중에 전 이란을 평정하고
황제가 되어 카쟈르 왕조의 시조가 됩니다.
동로마 제국의 "나르시스"라는 장군도 있지요. 그는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측근 환관이었는데
용맹과 지략이 뛰어나 장군으로 발탁되었지요. 나중에 황제의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의
동고트족과 랑고바르드족을 평정하고 전 이탈리아를 수복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답니다. 그공으로 이탈리아 총독겸 진서장군의 칭호를 얻었지요.
이상은 중국외 나라의 환관장군들이지만 역시 환관하면 중국이죠.
먼저 중국 춘추시대의 패자였던 제환공의 잔군들 중에 "수조"라는 장군이 있는데
그는 "채"라는 나라를 칠때 전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또 수조는 기록상 첫
"자궁환관(스스로 거세하여 환관이 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외에도 제가 쓰는 소설 조조에도 나오는 건석이 있읍니다. 그는 황제의 친위부대인
서원8교위라는 부대의 총대장인 상군교위였죠. 그러나 실재로 전쟁터에서 크게
용맹을 떨친 장군들만 들라면,
먼저 "장사"를 들수가 있는데 그는 5호16국시대에 전진의 장군으로 부견이 화북지역을
통일 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사람이죠. 아주 용맹무상한 환관장군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또 "왕계은"이라는 환관장군도 있습니다. 그는 송나라 태종때 촉을 평정한 장군이었습니다.
그외에도 "동관"이라는 환관장군이 송나라에 있었읍니다만 그는 북송을 망하게한
장군으로 기록이 되어있지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환관장군들이 가장 활약하던때는 명나라 성조때였죠
.성조는 환관들을 장군으로 적극적으로 이용했는데 서역을 경략한 이달,
월남을 평정한 마기, 태국으로 원정을 했던 이흥등은 모두 환관이었읍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용맹을 떨친 사람으론 여진족을 토벌하고 "누르간도사"를 설치한
이시하, 티벳과 네팔까지 원정했던 후현, 그리고 환관들이 이룩한 최고의 쾌거로 알려진
"정화에 의한 남해원정"이 있지요.
정화는 환관인데 전후 7회에 이르는 남해원정을 했고 그범위도 동아프리카까지
탐험을 하고 동남아 여러나라들을 굴복시켜 당시 인도의 여러 토후들과 동남아의
여러 왕들로부터 "무관의 제왕"으로 떠받들어지는등 아주 대단한 활동을 했었답니다.
#성서는 표절작품?#
구약성서는 원래 한권의 책으로 된것이 아니라 목차를 보시면 알겠지만 39종의 문서를
한데 모아놓은 것이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꺼번이 씌어진 것도 아니고 1000년이라는
긴시간을 두고 쓰여졌던 것이기도 하고요.
이것이 한권의 책으로 묶어 지게 된때는 기원전 70년으로 로마군의 정벌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할때 유태인들은 그들 정신적 구심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이 문서들을 한권의 책으로 엮었던 거죠.
그러데 여러분들이 창세기편을 보시면 제1장 과 제 2장의 내용이 조금 틀리다는걸
알수 있을 겁니다. 가만히 한번 보세요. 2장 5절부터는 천지창조의 얘기가 다시
나오고 그내용도 앞과는 달리 상당히 소박하다는걸 알수 있죠.
사실 창세기의 1장과 2장은 같은 시대에 쓰여진게 아니라 각각 수백년간의 시간차이를
두고 쓰여졌는데 2장의 사료를 J사료라고 하고 1장의 사료를 P사료라고 합니다.
시기는 오히려 J사료가 기원전 8~9세기경에 쓰여져 기원전 5세기경에 쓰여진
P사료보다 앞서고 있읍니다.
옛날 유다교인들이 가장 먼저 생각해냈던 천지창조의 시나리오는 J사료에 나오는
2장의 내용이었읍니다만 후세로 내려오면서 새로이 1장의 내용이 추가된것이지요.
그러면 이러한 천지창조의 시나리오가 유태인에 의해 처음 생각된 것일까요?
그이전에 어떤 민족이 다른 신화에서 창작해 놓은걸참고해서 창세기를 한건 아닐까요?
아~~교회다니는 분들이 이쯤되면 화내실텐데..후후후.
수메르인이라는 고대인이 있지요. 기원전 5천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인류최초의
고대문명을 일으킨 사람들인데 그들의 신화가 이후 이지역 여러민족들의 신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답니다.
이들의 신화는 창세기와도 상당히 유사한데 조금만 적어보면
"하늘이 땅에서 제거된뒤, 땅이 하늘에서 나누어진뒤, 사람의 이름이 정해진뒤,
앙(천신)이 하늘을 실어간뒤, 엔릴(기의 신)이 땅을 실어간 뒤,
(중략)
형제여 어디가 아픈가?
늑골이 아프다.
그럼 그대를 위해 여신 닝티를 낳아주겠다.
(이 여자는 늑골을 빼서 만든 여자죠)"
그외에도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든 것이라든지. 하는 얘기도 있답니다.
또 노아의 홍수얘기도 있는데.
"신들은 인간들을 전멸시키고자 했다.그 러나 지우드 수라만은 살려 주기
로 했는데.."
이 얘기는 지우드수라에게 배를 만들게 하고 그를 살렸다고 합니다.
또 7일낮 7일밤을 천지를 휩쓰는 비가 내렸다고 하고요.
이 홍수 신화의 테마는 이후에 여러 신화에서 다시 인용되는데
특히 "길가메쉬의 서사시"라는 게 특히 유명하죠.
이책은 서점에서도 비교적 쉽게 구할수 있으니 한번 사서 보세요.
여기에서는 "우트나피슈팀"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는 노아와 이름난 다를뿐
그의 행적은 노아와 거의 같답니다.
이 고대오리엔트의 신화를 발견한 사람은 "죠오지 스미스"라는 대영박물관 소속 학자인데
이것을 발견하고 해독한뒤 교회에서 굉장한 욕을 먹었답니다.
흔히 역사학자들이 "교회의 3대 충격"이라는 말을 쓰는데
첫번째 충격은 갈릴레이의 지동설이고,
두번째는 다아윈의 진화론,
세번째가 스미스의 이 오리엔트 신화발견이랍니다.
뭐 그저 있는데로만 얘기한거니까요 교회다니니는 분들 혹시 이글보고 너무 상심하거나
화내진 마세요. 여기에 대한 글을 확인하고 싶으시면 도서관에 가셔서 스미스, 죠오지 라는
사람의 항목을 찾아보시거나 서점에서 길가메쉬의 서사시를 보셔도 좋고요,
좀 구하기는 힘들지만 77년도 판 현암사판 세계사 1권을 보셔도 좋습니다.
종교적 얘기라서 상당히 하기가 힘든데요. 전 있는데로만 얘기했을뿐입니다.
#포청천의 실재모델이었던 인물. 이응.#
요즘 KBS2 TV에서 금요일밤마다 방영되는 판관 포청천이라는 연속극을 아시지요?
저도 참 재미있게 보고 있는 연속극인데 시대배경은 북송때이고 장소는 북송의 수도였던
개봉을 배경으로하여 주인공 개봉부윤 포청천이 권력에 굽히지 않고 법에따라
정의를 수호한다는 내용의 극입니다.
그러나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포청천이란 인물은 실재 존재했던 인물이 아닌
가상의 인물입니다. 그러면 역사상에 있어 포청천과 비슷한 행동을 보여주었던 인물이
있었는가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아주 비슷한 행동을 했던 인물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인물이 바로 이응이라는 사람입니다.
이응은 후한 환제때 사례교위를 지낸 인물인데 이 사례교위란 직책은 개봉부윤과
아주 흡사한 직책입니다. 개봉부윤이라면 지금의 서울시장의 역활에 서울시 경찰청장.
대법원판사. 감찰원장. 법무부 장관겸 검찰총장의 직책을 합친것과 같은 대단한 관직이였고,
사례교위란 직책은 여기에 수도경비사령관의 직책을 더한 더욱 막강한 관직이었읍니다.
이 이응이라는 인물은 당시 태학생들에게 있어 가장 인기있던 관료로 학식과 덕망,
용기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는데 이사람이 사례교위의 직에 오르자마자 처음으로 한일이
당시 환관정권에서 건석과 더불어 떠오르던 태양과 같은 인물이었던 중상시 장양의 아우
장삭을 처형한 일이었읍니다.
이응은 사례교위로 부임된 그날 당시 야왕령으로 권세를 휘두르던 장삭을 임산부 살해죄로
기소하고 사례교위부의 수사관들을 야왕에 파견하여 그를 체포케 하였습니다.
이를 두려워한 장삭은 서둘러 임지를 떠나 낙양에 있는 형 장양의 집으로 도망을 쳤는데
일이 이쯤 되자 사례교위부의 수사관들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장양의 집을 수색할 수가
없었읍니다.
이에 이응은 직접 수사관들을 거느리고 장양의 집을 강제로 수색하여 기둥속에 숨어있던
장삭을 도끼로 기둥까지 부수며 체포를 한뒤 그를 5일만에 처형을 해버립니다.
이에 중상시 장양은 놀라고 분노하여 황제에게 이응을 참소하였는데 이응은 조정의 대신인
자기의 집을 무단 수색하였고, 기둥까지 부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보는 앞에서 동생을
잡아가 자신의 위신에 먹칠을 했으며 자기의 아우를 체포한지 겨우 5일만에 처형했다는
그런 내용이었읍니다.
이에 황제도 이응의 처사가 심했다고 생각하고 그를 물러 심문하였는데
여기에 이응이 대답하길,
"옛날 진문공(춘추5패중의 한사람)은 같은 공작(공후백자남의 작위중 첫 번째 서열)의
제후인 위성공을 체포하여 경사(낙양)에 보낸일이 있읍니 다. 또 죄가 분명한데도 서둘러
벌주지 않는것도 헌법에 어긋나는 일로,
옛날 공자께서 노나라에서 사구(법무장관)로 계실때 관직에 오른지 7일 만에
소정묘(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노공의 친척인듯함)를 처형하 신 일도 있으니
신이 이번에 10일만에 삭을 처형한것은 결코 빠르지 않 습니다."
이응이 이렇게 황제에게 당당하게 말한뒤 장양에게도,
"그대의 동생에 대한 처벌에 잘못된 점이 있다면 사례교위부로 와서 따지시오."
라고 말한뒤 자기 치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일로 인해 그는 환관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고 결국 당고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 당하게 됩니다.
결국 중국에서 포청천과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하는 일로
이응 이후에 권력자에 대해 이와같이 대담한 저항을 했던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포청천이란 극의 대본을 쓰는 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극의 모델로서
이응을 설정했을 것이라고 필자의 생각으로 이글을 써본것인데 혹시 다른 인물중에
포청천과 비슷한 인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읍니다.
#환관 학교#
요즘 KBS2 TV에서 방영되는 장녹수라는 드리마를 보세요?
요즘 그 드라마에선 사극에서도 보기드물게 내시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어
저도 관심있게 보고 있는데 사실 우리들이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환관(내시)들의 생활을 잘못알고 있는게 상당히 많답니다.
우선 본얘기와는 상관이 없지만 우리나라 내시들에 대해서 잠깐 얘기하면
우리가 알기론 내시란 그저 임금옆에서 잔시중이나 드는 사람으로 알지만
상당히 권세를 누리는 자들도 많았고 내시들의 최고 우두머리인 "판내시부사"의 경우에는
6조의 판서와 동격인 정2품관으로 당당히 "장관"격의 위치를 가진 사람입니다.
또 당상관 이상의 관료들이라 하더라도 내시들에게 함부로 하댓말을 쓰는 경우는
없었다고 하는데 만일 내시들이 단합하여 관료하나를 공격한다면 판서한명 쫓아보내는건
문제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건 우리나라의 얘기였지만 환관의 수가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많았고
권력도 비할바 못될정도로 강력하게 휘둘렀던 중국의 경우를 보면 엘리트 환관을
양성하기 위한 환관학교까지 있었는데..
우리나라 궁궐에서 종사했던 내시(환관)의 숫자를 평균적으로 살피면 그 수가
대략 250~350명 사이였다고 하는데 중국에선 당나라 현종때 10만명의 환관이 있었던
것을 비롯 명나라 신종 만력제때에 만해도 4만명의 환관이 궁궐에 종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4만명의 환관들이 모두 권세를 휘두를순 없고 대부분은 "정군"이라 불리는
궁궐의 막노동군으로 일생을 보내지만 "내서당"이란 엘리트 환관 양성소를 나온 환관들은
출세를 보장받았다고 합니다.
이 내서당이란 환관학교에서는 학생으로 10세이하의 어린이를 2,3백명 수용하여
글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례감의 제독(군대에서 중장급. 문관으로선 차관급.)이
교장을 맡았으며 교장아래 6~8명의 학장이 있었고 ,교사로는 당시 최고의 학식들을 갖춘
한림원 학사들을 초빙하였다고 합니다.
이정도 진용이라면 당시 최고의 엘리트 양성소인 "국자감"에 비교될만한 대단한
고급 인역 양성소라고 말할수 있는데 대신에 교육은 대단히 엄격하여 학생들이 끝까지
졸업하는 비율이 겨우 50%정도였다고 합니다.
또 교육을 받는 도중에 가혹한 체벌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거세수술을 받는 동안 첫번째로 목숨을 걸었고, 또 내서당에서 공부하는동안
두번째로 죽을뻔한 이들이 이곳을 졸업하자마자 상당한 대우를 받는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이곳 내서당 출신의 환관들은 "정도"라고 불리며 외부세계에서의 과거출신자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조조군의 실제숫자*
연의를 보시고 제글을 보신분들중에서 이상한 내용이 많기도 하지만 그중에서도
조조군의 숫자가 너무 적은것에 대해 이상히 여기시는 분들이 계실겁니다.
연의에선 항상 조조가 앞도적 수의 군대로 적에게 고전을 면하지 못했기 때문일텐데
실제에 있어선 그반대였답니다.
조조가 처음 동탁을 칠때 일으킨 군대는 대략 5천 가량이었고, 제가 변수전투에 투입된
병력을 6천이 조금 넘는다고 했지만 실제에 있어선 5천이 안되었다는게 정설입니다.
또 그가 원소와의 싸움에서 동원한 군사는 대략2만. 원소가 10만 가량이었습니다.
가장 과장이 심했던 적벽의 싸움을 보면 조조가 가장 많은 15만의 군대를 동원했다는게
일반적인 정설이고 이문열님도 그정도 수준이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필자의 생각엔
그것도 상당히 과장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적벽의 싸움에서 유비가 2만. 손권이 3만을 동원했다는게 일반적이고
필자역시 그점엔 동의하지만 조조군은 실재전투에 2만정도가 투입된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조가 남하하면서 거느렸던 군대가 5만. 형주에서 항복시켰던 군사가 10만.
합해서 15만이라고 하지만 형주병들은 실재로 전투엔 참가하지 않았고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에 조조가 풍토병으로 고생하던 병사3만을 본국으로 철수시켰으므로
실재 싸움에선 2만정도가 투입되었다는게 제생각입니다.
그리고 전투의 내용도 유비가 이기긴 했지만 자기병력의 태반을 잃었던 참담한 승리였고
조조는 패하긴 했으나 전세가 불리해 후퇴한 정도였지 연의에 나타난 것같은 황당한 일은
없었읍니다.
그러면 여기서 조조군의 숫자가 왜그렇게 부풀려졌는지 이유를 설명해보겠읍니다.
일단은 나관중이 후한말 당시의 인구를 정확히 추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후한말 환제 영수년간에 마지막으로 조사된 인구를 보면 중국의
총인구는 3500만가량이었고 이후 수차례에 걸친 전란으로 인구는 급속히 줄어들게 됩니다.
아마 조조가 화북을 석권했을 당시 중국의 인구는 500만명정도로 추정되고 삼국이 정립되어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인 명제년간엔 1000만명 정도로 회복됩니다만 이정도 숫자론 도저히
수십만 대군을 동원할수가 없읍니다.
또 이정도 대군을 동원하기 힘든 이유론 경제적인이유도 있는데 오죽하면 조조가
항복한 원소의 군대 5만을 먹여 살리기가 힘들어 학살해버렸을 정도니까요.
조조로서는 2만정도의 자기군사를 먹이는 일만도 힘에 버거웠다는 겁니다.
*만주
지난 8월 25일자 투고란에 난 "만주"라는 지명이 일제의 잔재로 침략을
합리화하는 용어라는데 대해 이견이 있어 이글을 쓴다.
먼저 역사적으로 만주라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지 살펴보면 여진족어의 "만쥬"라는
말에서 나왔다고 한다.이말은 불교의 보살중 가장 지혜로운 보살인 "문수보살"의
"문수"를 여진어로 발음 한것이다.
여진족들은 그들의 추장을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생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자기 종족을 문수보살의 종족인 만주족이라고 일컷고 자기들의 본토를
문수보살의 땅이란 뜻으로 "만주"라고 불렀다.
우리는 이 만주족들을 여진족이라고 불렀는데 "여진"이란 말 역시 "인간"이란 뜻을 가진
여진족어로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엔 말갈족. 물길. 혹은 숙신이라고도 불렀으며
이들은 바로 고구려의 백성들이었으니 고구려가 망한뒤엔 발해에 편입되어
그 국민의 근간을 이룬 족속이었음은 국사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여진족. 즉 만주족은 우리민족과는 준 동족으로서 혈연상으로도 우리민족과
가장 가까운 민족이었다.
또 만주족 스스로도 그들 종족과 우리민족을 다른 민족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는데
예를들면 병자호란때에도 그들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말살하지 않고 형식적인 군신관계로
묶어두는 선에서 전쟁을 끝낸 것이라던지 그들이 30만의 적은 인구로 중국을 정복하여
2억이 훨씬 넘는 한족을 통치하면서 그들 종족의 단결을 강화하기위해 옹정제때에 펴낸
"만주씨족통보"에도 당시 조선인으로서 청나라 조정에 출사하고 있던 사람들을 그들의 씨족
통보에 당당히 올리고 그들을 "고려성"을 가진 "만주인"이라고 하였으니 그들의 인식에서도
우리 한민족을 이민족으로 본것같진 않아 보인다.
그런데도 만주라는 지명이 나중에 일본군에 의해 세워진 괴뢰국 만주국의 국호로 쓰였다고
해서 만주가 일제의 잔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중국에선 만주를 동북지방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오히려 그들의 중화사상에서 나온
대단히 거만한 용어이다.그들은 그들의 본토라 할수 있는 황하유역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보고 그외의 지역은 모두 문화의 주변지로 보고있다.
동북이란 용어역시 다분히 만주지방을 문화의 주변지로 깔보고 있는 용어라 할수 있는데
우리민족이 마음속으로 우리의 고토라고 생각하는 만주를 중국인의 문화 주변지라고
낮춰 불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만주라는 용어는 민족의 자존심을 세울수 있는 용어이므로 더 자주 쓰여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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