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 산책
하지가 한 달 채 남지 않은 오월 끝자락 넷째 토요일이었다. 밤이 많이 짧아져 날이 일찍 밝아왔다. 새벽 다섯 시가 넘으면 시내버스 첫차가 운행되는데 겨울에는 캄캄한데 요즘은 바깥이 훤했다. 봄날에 산행은 어지간히 다녀 들녘 강둑을 걸으려고 마음을 먹었다. 집에서 도시락을 준비해 아파트 근처 마트에서 국순당을 두 병 샀다. 105번을 타고 도계동 만남의 광장으로 나갔다.
휴게소 매점 아주머니는 늘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나는 담배도 커피도 살 일이 없는지라 매점 수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아주머니는 아주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내가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야 함은 버스 운행 계기판에 가려는 곳의 버스가 언제쯤 오는지 살피기 위함이었다. 동읍 자여 가는 7번 마을버스가 운행 간격이 가장 짧고 그 다음이 1번이었다.
나는 주남저수지를 돌아 가술을 가쳐가는 1번 마을버스를 탔다. 평일이나 주말이든 이른 아침 승객은 두 가지 부류였다. 대산 들판 비닐하우스나 요양병원으로 요양보호사로 나가는 아낙들이었다. 비닐하우스 일은 외국인 노동자들도 한 몫 한다. 그들이 창원역에서부터 빼곡 타서 버스 통로 바닥까지 앉아 갔다. 키와 피부색으로 미루어 봐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으로 짐작 되었다.
나는 가술과 모산을 지난 제1 수산교에서 내렸다. 나를 내려준 버스는 종점인 신전마을로 향했다. 나는 강둑 따라 새로이 개설되는 도로를 건너 강둑 자전거 길로 나갔다. 강 안쪽 너른 둔치는 물억새를 비롯해 원시의 밀림이었다. 4대강 사업 때도 삽질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곳곳에 창원시민들의 상수원을 뽑아 올리는 취수정이 있기 때문이었다. 강변 여과수취수정이라 이른다.
나는 시원스레 뚫린 자전거 길을 따라 본포로 향해 걸었다. 강 건너는 밀양 초동 곡강마을이 보였다. 강물이 바위벼랑에서 휘어져 돌아간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곳에서는 해질 무렵 저녁노을이 무척 아름다운데 나는 아직 한 번 감상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곡강보다 더 위쪽 반월지구 둔치에서는 행사가 열렸다. 시야가 멀어 확성기소리만 들렸다. 아마 양귀비꽃 축제로 짐작되었다.
상옥정마을이 보이는 쉼터에서 배낭에 넣어간 국순당을 비웠다. 본포 생태공원에 이르니 주말을 야외에서 보내는 캠핑객들이 더러 보였다. 본포에서 창녕 부곡 학포로 건너는 길다란 교량이 걸쳐 지났다. 본포다리 아래로 생태보도교를 따라 강변 벼랑을 따라 걸었다. 바위벼랑에는 양수장 취수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생태보도교는 임해진에서 휘감아 흘러온 강물이 한 눈에 들어왔다.
습지에서는 산 꿩이 강 꿩으로 바뀌어 ‘꽁!꽁!’ 울어댔다. 아마 그 장끼 곁에는 까투리가 알을 품고 있지 싶었다. 아찔한 바위벼랑에 붙어 자란 돌나물에는 노란 꽃이 피어났다. 마삭덩굴도 붙어 자라면서 하얀 꽃을 피웠다. 생태보도교를 돌아가니 북면 생태공원이었다. 쉼터에서 남은 국순당을 비우면서 몇몇 지인에게 강변 풍광을 담은 사진을 날려 보내고 마금산 온천장으로 향했다.
신목마을을 지나면서 전깃줄에 앉은 제비들을 볼 수 있었다. 길가 슬라브지붕 처마에 제비들이 진흙을 물어와 집을 지어 놓고 들락거렸다. 내가 여러 곳을 많이 다녀봤지만 제비가 찾아와 집을 짓는 마을은 흔하지 않았다. 그만큼 농사가 농약을 덜 뿌리는 친환경 농법으로 바뀌어 가는 증거지 싶다. 하기야 요즘 농촌은 워낙 고령화되어 농약을 뿌릴만한 인력조차 없을 지경이렷다.
모처럼 들린 온천장인지라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한 시간 가량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나왔다. 배낭엔 도시락이 남아 있는데 어디 앉아 비울만한 자리가 없었다. 서둘러 화천리로 나가 지인 농장으로 갔다. 농막에서 오수를 즐기고 있던 지인을 깨워 라면을 끓여 도시락밥과 같이 먹었다. 식후에 고구마 이랑 김을 매고는 푸성귀를 뽑았다. 상추와 쑥갓 잎을 따고 부추를 몇 줌 잘라 가렸다. 18.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