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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선의 무덤 안흥량(安興梁), 굴포운하를 뚫으소서!
서해와 조운항로
그림1. 서긍의 고려항로
고려의 수도 개성, 그 관문이었던 벽란도는 당시 중국(宋)은 물론이고 저 멀리 아라비아 상인까지 왕래하던
국제무역항이었다. 당시 국제 교류의 근거는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의 고려도경
(宣和奉使高麗圖經)에 전해 오고 있다. 당시 사신 서긍 일행의 고려 항로(그림 1)를 보면, 닝보(寧波, 옛 明洲)
항에서 무역풍을 타고 출발하여 흑산도, 군산도(古群山列島) 등을 경유한 뒤, 목적지인 개성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에 이르는 항로이다.
닝보에서부터 개성까지는 약 28일이 걸렸고, 귀국길은 일기불순으로 무려 42일이 걸렸다고 전한다.
한편 서해는 고대로부터 국제교역의 마당이기도 했지만, 고려 때부터 조선조 말에 이르기까지 삼남(충청, 전라,
경상)의 세곡을 수도로 이송하는 간선 조운(漕運)항로이기도 했다. 조운은 11월초부터 이듬해 1월까지
조창(漕倉)에다 집적한 뒤, 2월부터 시작하여 늦어도 5월까지 경창(京倉)까지 이송을 마쳐야만 했다.
삼남에서 서해뱃길의 숱한 난관을 거슬러 올라가는 조운 항로, 그 항로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길목, 조운선의
무덤이라고도 불렀던 인흥량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안흥량, 조운선의 무덤
그림2. 굴포운하와 판목운하
서해 연안 뱃길에서 잦은 난파로 악명 높았던 곳들은 충청도의 안흥량(安興梁, 난행량, 難行梁), 강화의 손돌목,
황해도의 장산곶을 꼽는다. 그 중의 최대 난관이 안흥량이었다. 태안반도 안흥 앞바다, 잦은 난파사고로 인해 무사 항해를 비는 뜻으로 한동안 안행량(安行梁)으로 불렀다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다시 본래대로 안흥량이라고
한다.
그림3. 조선조의 조운선(자료: carlife.net)
고려 말부터 조운제도가 정착된 이래, 조선조 내내 안흥량은 조운선의 잦은 파선으로 악명이 높았다. 실록에 의하면, 조선 태조 4년(1395)부터 세조 1년(1455)까지 60년 동안 선박 200여 척이 안흥량에서 부서지거나 침몰했고,
인명도 1,200여 명이나 희생되었다. 또한 세곡 1만5,800섬도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필자가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조운 파선’으로 검색을 했더니 무려 43건이 등장했다. 물론 이들 모두가 안흥량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아니지만, 안흥량의 파선 사고가 가장 빈번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관련 기사들을 인용해본다.
1) 고려 인종 2년(1134)이, 안흥정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돌하게 되어 있고, 또 암석 때문에 위험한 곳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으니, 소태현 경계로부터 도랑을 파서 이를 통하게 하면 배가 다니는 데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여, 정습명(鄭襲明, 1096?∼1151, 의종 5)을 보내어 인근 군읍 사람 수천 명을 징발하여
파게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 뒤에 종실의 왕강(王康)이 건의하기를, “예전에 파던 도랑은 깊이 판
곳은 10여 리나 되고, 파지 않은 곳이 불과 7리인데, 만약 (그곳을) 마저 다 파서 바닷물로 하여금 유통하게 한다면 매년 조운(漕運)할 때에 안흥량 4백여 리의 위험한 물길을 경유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인부를
징발하여 다시 팠으나, 물 밑으로는 온통 돌이요, 또 조수가 심하여 파는 대로 다시 메워버리므로, 공을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 태안군 산천 조(條)
그들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870년 전에 태안반도에 인공으로 굴포(堀浦)운하(일명 가적운하)를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우리 역사 상 최초(?)로 인공운하의 건설을 주도했던 정습명, 비록 운하 건설은 실패했을 지라도 그 고귀한
뜻은 길이 전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조군(漕軍)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막고, 소중한 양식들이 수장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놀라운 시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림 2>에서 보다시피 굴포운하는 태안반도 위쪽의
가로림만과 아래쪽의 천수만 위쪽의 적돌만을 수평(6.8km)으로 뱃길을 뚫는 공사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인공운하(人工運河)를 만들려고 했을까? 또한 10여 리를 굴착한 뒤, 마지막 7리를 남겨두고 왜 포기했던 것일까?
암반 제거
인공운하란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시킨 수에즈운하(1869년 개통),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시킨 파나마운하(1914년 개통)를 들 수 있다. 위 <그림 2>에서 보듯이 안흥량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가로림만과 천수만을 이어 수평운하를 뚫는 것, 거리는 불과 시오리 남짓이지만, 최대 난관은 땅 속의 암반을 제거하는 일과 가물막이를 설치하는 일이다.
당시로는 암반 파쇄작업에 화약을 사용하기 전이었다. 흑색화약은 18세기 후반에야 발명되고, 뒤를 이어 19세기
후반,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나서야 비로소 건설공사에 화약이 사용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암반을 제거했을까? 수작업으로 정(釘)과 메만을 사용했을까? 그렇지 않다.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식은
장작불이었다. 우선 바위에다 금을 긋고 그 선을 따라 장작불을 지핀다. 장작불에 바위가 벌겋게 달아오르면,
그 달아오른 부위에다 찬물을 끼얹는다. 그러면 바위가 급냉으로 인해 균열이 생기고, 그 갈라진 부위에다 정을
끼우고 메로 쳐서 바위를 깨내는 식이다. 참으로 지난한 작업이다.
굴포운하와 판목운하
고려중엽에 처음으로 제기된 태안반도의 굴포운하 건설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뜨거운 감자였다. (일설에 의하면, 굴포운하는 고려 인종 12년(1134)에 첫 삽을 떠, 조선 세조 7년(1461)까지 무려 327년 동안 이뤄졌다고 한다.)
조운선이 안흥량에서 파선할 때마다 조정에서는 굴포운하의 건설을 주장하는 기록들이 숱하게 보인다. 대표적인
기록들을 살펴보자.
2) 순제(蓴堤)는 충청도 태안군(泰安郡)의 서쪽 산마루에 있는데, 길고 곧게 바다 가운데로 수식(數息)이나 뻗쳐
있어 수로가 험조(險阻)한지라, 이름하여 안흥량이라 하였는데, 전라의 조운은 이곳에서 실패가 많아 예나 이제나 걱정거리였다. (중략) 이제 하윤이 건의하였다.
“(전조-고려조에) 왕강이 뚫던 곳에 지형이 높고 낮음을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제방마다 소선(小船)을
두며, 둑[堤] 아래를 파서 조선(漕船)이 포구(浦口)에 닿으면 그 소선에다 옮겨 싣고, 둑 아래에 이르러 다시 둑 안에 있는 소선에 옮겨 싣게 합니다. 이러한 차례로 운반하면 큰 힘을 들이지 아니하고도 거의 배가 전복하는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으나, 사람들이 모두 어려울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었다. 김승주가 순제로부터
돌아와 그린 그림을 바치고, “신의 소견으로는 왕강이 뚫던 곳은 모두가 단단한 돌이어서 쉽사리 공효를 거두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내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독단(獨斷)할 일이 못되니...”- 태종 24권, 12년(1412) 11월 16일
3) 굴포를 판다면 수로가 가까워져서 전라도의 첫머리와 연하여지므로 조운(漕運)이 이곳을 경유하여 곧바로 올 수 있고, 경상도의 조운도 이 곳을 경유하여 옮겨 올 수 있으니, 이곳을 굴착한다면 참으로 만세토록 무궁한 이로움을 얻을 것입니다.
왕강이 파지 못하였다고 하나 전조(고려)의 해이한 기강에다가 연약한 군졸로 어떻게 이러한 큰일을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중략)
중국은 5백여 리나 되는 땅이라도 굴착하는데, 이 굴포는 육지와 습지(濕地)가 함께 이어져 물을 건너는 곳은 겨우 20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마음이 깊지 못하여 큰일을 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어렵게 여깁니다. 그러나 1년간의 조선(漕船)·상선의 패몰과 사람이 빠져 죽은 일 등을 계산해 보면 그 경비가 거만(巨萬)에 이르러
계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노는 인력을 부역(赴役)하게 한다면, 설사 일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실로 나라에 손해된 것이 없을 것입니다. - 중종 31년(1536) 9월 27일 기사
굴포운하의 건설을 강조하며, 중국의 경항(京杭)대운하까지 언급하고 있다. 물론 경항대운하는 수나라(581~618) 때에 간선항로가 완공된 것으로 대단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운하의 초입인 항조우는 서해와는 달리
조수간만의 차가 거의 없다. 따라서 기술적인 난이도는 경항운하에 비해 굴포운하가 훨씬 어려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실록을 보자.
4) 감목관(監牧官) 신점(申點)이 서계(書啓)하기를, “전라도의 전세(田稅)를 배로 운송할 때 안흥량(安興梁)에서 해마다 배가 침몰하여 조운(漕運)을 그르칠 뿐 아니라 또 물에 빠져 죽는 조군(漕軍)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이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굴포(堀浦)를 파서 왕래할 수 있게 하거나 혹 그곳에 창고를 설치하여 조선을 그 아래 정박시켜 창고에 곡식을 옮기고 나서 빈 배로 서산(瑞山) 경내로 돌아가 정박하게 한 다음 이어 육로(陸路)로 운반하였다가 다시 배에 싣게 하소서. 그 사이의 거리는 육로로 10리가 채 못 되니, 납세하는 자들에게
약간의 되 쌀을 더 내게 하여 육로로 옮기는 비용을 치르게 하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 일에 응모할 것이라서
운송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만세의 이익이라는 것입니다.”-출처: 선조17년 (1584)
4월 26일 기사
굴포운하는 결국 무위로 끝났고, ‘꿩 대신 닭’으로 조선 인조(재위 1623∼1649)는 안면곶의 허리를 끊어 판목운하(그림 2)를 판다. 서해의 바닷물을 천수만과 이은 것이다. 원래 육지와 연결됐었던 안면곶도 이때부터 안면도가
됐다. 그렇다면 굴포운하는 실패했고 판목운하는 왜 성공했을까? 추정컨대 안면도의 판목에는 땅 속과 해저에 경암(硬岩)이 없었고, 가물막이도 훨씬 쉬웠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삼남의 세곡선들은 안흥량을 피해 천수만으로
진입한 뒤, 가로림만까지 육로 이송, 다시 배에 실어 한양으로 운송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식은 품과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결국 본래 방식으로 돌아가고 만다.
안면교
안면대교
안면도 꽃게다리
원산안면대교
할매바위 할배바위
꽃지해변 낙조
안면송
안면송은 백두산의 미인송과 백두대간에서 자라는 금강송, 우리나라 널리 퍼져있는 해송과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4대 소나무 중 하나. 안면송은 금강송처럼 소나무 빛깔이 붉은 황색을 띠고 있고 단단해서 주로 절이나
궁궐을 짓는 나무로 사용되어 온 나무이다.
꽃지해수욕장: 충남 태안군 안면읍 광지길
충남 태안군 안면읍 광지길에 자리하고 있는 꽃지해변은 약 5km에 이르는 백사장과 할배바위, 할매바위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을 보여주고 있다.
2개의 바위 사이에 붉게 물드는 낙조는 태안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풍광 중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꽃지 백사장을
따라 해당화가 지천으로 피어나 ‘꽃지’라는 어여쁜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긴 백사장을 따라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과 가족의 모습도 꽃지해변의 풍경과 함께
멋진 영화와 같은 장면을 만들어 준다.
이곳에는 꽃지해변을 상징하는 두 바위에는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다. 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가 안면도에 기지를 두었고 기지사령관이었던 승언과 아내 미도의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출정 나간 승언은 돌아오지 않아 그의 아내
미도가 바다만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할매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할매바위보다 바다 쪽으로 나간 곳에 있는 큰 바위는 자연스레 할배바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바다로 나간 남편을 맞이하듯 마주선 두 바위는 왠지 애틋해 보인다.
썰물 때면 두 바위가 마치 한 몸인 듯 모래톱으로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꽃지는 한여름뿐 아니라 사계절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위와 어우러진 낙조 때문이다. 해질 무렵이면 할매바위, 할배바위 너머로
아름답게 물드는 일몰 풍경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안면도에는 1999년 여름 당진에 국선도 안중지원이 있고 지원장 강 사범이 국선도 제9기 사범친교회 회원이어서
1박 2일로 방문하여 당진 시장에 있는 국선도 도장도 보고, 꽃지해변, 할매바위 할배바위 등을 보았는데, 길지 않은 좁은 다리(길이 208m, 폭 8m의 다리)가 있었고 다리 아래 푸른 물이 흐르고 물살이 상당히 세게 보였다. 그 후
국선도 양천구청지원 회원과 들러 꽃게탕을 먹고 울창한 소나무숲도 보았다.
거북산우회 회원들과 가서 할매바위 할배바위 사이에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며 낙조도 보았다.
가물막이, 실패 원인
그림4. 정주영공법(천수만 서산간척지 1984)
콘크리트가 없던 당시에 가물막이는 어떤 구조였을까? 안면도의 봉산(封山)에서 나온 대부등 육송으로 담틀을
짠 다음, 그 속에다 돌과 흙을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튼튼한 가물막이라 해도 조수간만의 차가
6m 이상으로, 엄청난 수압에 견디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근거로 1984년 천수만의 서산간척지 개발 때,
최후 난관이었던 물막이 연결에 폐유조선을 동원한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림 4>와 같이 유조선공법(속칭
정주영공법)을 동원하고서야 마지막 제방을 연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해, 동북아의 지중해
그림5. 서해, 동북아의 지중해
서해는 단순히 한반도의 서쪽 바다가 아니다. 중국의 보하이만(渤海彎)에서 산둥반도, 남쪽의 항조우, 닝보와
남중국해를 거쳐 일본의 오키나와(琉球國), 타이완(臺灣), 큐수섬에 이르기까지 동북아의 지중해 역할을 톡톡히
하는 바다였다. 해상왕 장보고의 통일신라에 이어, 고려조까지는 해양 강국이었다. 하지만 조선조는 지나친
쇄국정책으로 해양 강국의 지위가 일시에 쇠락한다. 일제강점기 역시 일제의 자원 수탈과 대륙 진출의 수단으로
철도 위주의 정책에 따라 기존의 수운·해운마저 퇴보했고, 그 관성은 6.25 전쟁 이후 남북 냉전 구도 속에서 더욱
고착화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서해바다는 무역입국의 전진기지로 깨어났고, 연안의 섬들에도 연육교가 속속 건설되고 있다. 또한
경인아라뱃길의 준공(2011)으로 서해에서 한강으로 직통하는 뱃길도 뚫렸다. 이로 인해 강화도의 손돌목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달리, 안흥량의 암초는 예전 그대로이다. 안흥량에서 희생된 숱한 원혼들, 그들을 위한 진정한
진혼제는 수중 암초를 없애고 안전한 뱃길을 여는 일, 그 길만이 우리 역사 속 천년의 숙원사업을 완성하고,
명실 공히 서해가 동북아의 지중해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참고자료
1.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2. 해양문화재단, 『우리나라 해양문화-경기·충청편』, 실천문학사, 2000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