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극기 단계라고 불리는 이 단계에서 상처를 드러낸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보다는 기만이, 심지어는 잊어버리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사실 고통스러운 것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다. 무엇인가를 주장할 때 그대는 그것을 그대의 것으로 만들고 그것이 그대의 것임을 인정한다. 또한 그대는 상처를 드러내고 인정할 뿐 아니라 그 상처가 그대의 삶에, 권리에, 완성과 행복을 바라는 그대의 기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대는 또한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을 경우 앞으로도 그 상처가 그대의 삶에 끼칠 영향까지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안에는 지난 상처에 대한 선명한 기억과 그 사실을 감추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우리의 교만은 우리가 얼마나 깊숙이 영향을 받았으며 그 결과 우리의 삶이 나쁜 쪽으로 얼마나 심각하게 변화했는지를 인정하기 싫어한다. 상처를 대면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따라서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것을 못 본 척하려고 애쓴다. 상처에 대한 기억은 고통을 증폭시키거나 연장시키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억을 잊으려고 한다. 잊을 수 없으면 그 기억을 가급적 최소화하고, 그 상처가 과거에 주었고 지금 주고 있는 충격을 고의적·무의식적으로 축소하려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자신의 잘못으로 상처를 받았다면 그 죄책감을 감추려 하거나 확대시켜 사랑하는 (또는 미워하는) 누군가가 자행한 잔혹한 해악을 자기 탓으로 돌리려 한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상처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어른들게게서 온갖 것을 받는 어린아이들은 –흔히 자존심이 상하고 죄책감으로 인한-이유를 만들어 냄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이해하려고 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부주의하거나 정신이 없을 때 자신에게 냉정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대가 설령 다른 사람들에게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해도 윤리와 정의에 관한 개념을 새롭게 수정할 수밖에 없다. 그대는 자신의 상처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된 개념으로 살게 되고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그대를 의지하거나 그대와 가까운 사람의 삶까지도 왜곡하게 된다. 그대가 상처받은 이유를 찾아낼 유일한 길은 대개 불가능하므로 그대는 자신의 관점에서 상처를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된다. 사실과 마주한다는 것이 두렵고 불쾌해도 똑바로 바라보고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대는 그대의 상처가 정확하게 무엇이며 누가 그 상처를 입혔는지 솔직하게 (그리고 뼈저리게) 알아야 한다. 치유하지 않으면 안 될 상처는 무엇인가? 그 상처가 삶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가?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대의 상처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상처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상처는 우리 자신은 아니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는 누구이며 장차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와 직결된다. 상처는 지금까지 삶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주는 상처가 되지 않기 바라지만, 그 흔적은 분명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상처가 더 단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처를 낫게 하려면 우리는 그 상처와 상처 자국을 받아들여야 한다.
용서할 상대가 누구인지 아는 것뿐만 아니라 무엇을 용서할 것인지도 알아야 한다. 이 상처가 우리의 믿음과 정의감과 자존심에, 자유롭게 우리의 세계와 관계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야 한다. 가해자는 상처를 주는 행위뿐만 아니라 그것이 주는 온갖 영향도 책임져야 한다.
우리의 기억과 판단이 정확하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오래된 상처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최근의 상처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그저 상처를 가능한 한 솔직하게, 숨김없이 다루되 우리 자신이나 다른 누구도 예외로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진실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하시듯이) 기억하고 이해한다면, 용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류의 어리석음과 우둔함, 나약함과 이기심을 알아차릴 때 용서는 좀 더 현실적인 것이 될 뿐 아니라 훨씬 쉬워질 것이다.
부정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다. 또한 실제로 상처받기는 했지만 그렇게 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가 심했지만 그것을 극복했노라고-그대가 용서하지 않았다면 상처는 결코 극복된 것이 아니다-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적들이, 우리를 해친 사람들이 있었고 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용서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자 한다면 가능한 그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한번 그들을 확인하고 나면 우리는 진실로 그리스도인다운 투신의 기회를 갖게 된다. 우리가 받은 상처와 서로를 용서하는 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복음이 무슨 구실을 하겠는가? 복음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요약되고 있지 않은가.
나중에 영화까지 만들어진 소설 ‘러브스토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미안하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이 감상적이고 터무니없는 말이 큰 인기를 끌어 운동복·깃발·배지에 새겨져 거리에 나돌았다. 만일 사랑이 속 썩이는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절대로 없겠지만, 속 썩이는 일을 저지른다면 반드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하고 또 그 사과-용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에 담아두어야 할 말은 이런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을 누구보다 먼저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덧붙여도 좋다. ‘그리고 그처럼 후회하는 마음을 재빨리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대가 상처를 주장하는 이 용서의 첫 단계에 들어서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무엇이며, 그대가 현재의 상태에 매이지 않고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그대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편지를 써라. 그대가 어떻게 느꼈고 지금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설명하라. 그때 받은 상처가 그대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현재 그대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야기하라. 그대의 느낌과 분노, 그대가 용서하기 힘들어하는 이유를 말하라. 그런 다음에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 그대 자신을 상대로 또 다른 편지를 써라. 그대에게 가장 유익한 도움이 될 것이다. 가해자가 어떤 입장에서 상처를 주었는지 되도록 자세히 사과 편지를 써라.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은 상처를 드러내고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만일 가해자가 아직 살아 있고 그대가 (또는 가해자가) 연락을 끊었다면, 상대방이 연락을 해오면 받아들일 마음가짐이 되어 있음을-그대가 그럴 마음이 되어 있는 경우-그 또는 그녀에게 알리는 것이-가능할 경우-중요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상대방이 접촉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을 때는 특히 그렇다. 이를 위해 성탄이나 생일 축하 카드를 보낼 수도 있다. 인쇄된 내용에 서명만 해서 보내도 상관없다. 가해자가 그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 할 때 그대가 거부하지 않을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 다음에 기도하라. 할 수만 있다면 가해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라.
만일 가능하다면 가해자 스스로 용서를 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혹시 그가 죽었다면 하느님의 용서를 얻도록 기도하고, 만일 그대가 아직은 가해자를 위해 기도할 상태가 아니라면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 그대 자신이 자유로워지고 온전해지기 위한 과정에 착수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수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그대는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대는 지금 당장 그대가 할 수 있는 일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참조 문헌:용서의 과정 윌리엄A. 메닝거 지음-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