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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고 성이 무너지다
수 6:12-21
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14 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15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6:12-21 / 여호수아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백성에게 행진 명령을 내렸다.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계약궤를 어깨에 메고 13) 일곱 제사장들은 각자 뿔나팔을 들고 계약궤 앞에서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또 그 앞에는 가려 뽑은 정예 부대가 계약궤를 호위하고 후위 부대는 계약궤를 뒤쫓아가며 그것을 보살폈다. 이렇게 행렬은 제사장이 나팔을 부는 대로 행진하였다. 14) 이튿날에도 첫번째 날과 똑같이 여리고 성을 한 바퀴 돌고 진영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이렇게 엿새 동안 계속해서 여리고 성을 돌았다. 15) 이렛날 새벽 동이 막 틀 무렵 그들은 일찍 일어났다. 그들은 이때부터 성을 돌기 시작하였다. 다른 날과 똑같은 식으로 성을 일곱 바퀴 돌았다. 다른 날은 모두 하루에 한바퀴씩만 돌았지만 이날만은 일곱 바퀴를 돌았다. 16) 일곱 바퀴째 돌 때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자 여호수아가 소리쳤다 `고함을 질러라. 큰소리로 함성을 질러라. 여호와께서 이미 이 성을 우리에게 주셨다. 17) 이 성은 여호와께 모조리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도 남기지 말고 없애라. 이 성뿐 아니라 성안에 있는 모든 것도 우리 여호와의 것이다. 그러니 그냥 남겨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렇지만 몸을 파는 여인 라합에게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의 집안 사람도 해치지 말아라. 그 사람은 우리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기 때문이다. 18) 모조리 없애 버려야 할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내 말을 잊지 말아라. 절대로 흘려 들어서는 안 된다. 아까운 마음이 들어 그냥 두어서는 결코 안 된다. 어찌되었든 없애 버려라.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하나라도 훔쳤다가는 이스라엘 진영 전체가 그것을 훔친 결과가 되므로 이스라엘 전체에 비참한 결과가 빚어질 것이다. 따라서 없애 버려야 할 것은 절대로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19) 은과 금은 그 어떤 것이든 모두 다 여호와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놋쇠로 만든 그릇, 쇠로 만든 그릇도 무엇이든지간에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거룩하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갖다두어라' 20)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모두 다 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성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백성은 성벽이 허물어지자 성안으로 쳐들어가 성을 점령하였다. 21)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여자건 남자건 어린 아이건 나이 먹은 노인이건 모조리 칼로 쳐죽였다. 또 소든 양이든 염소든 나귀든 모조리 칼로 쳐죽였다.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할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여호와께 온전히 바칩니다.
일찍이 일어나서(12-16)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엿새 동안 첫 날과 같은 행렬대로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들은 불평이나 원망없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순종의 요구에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욕망과 자아를 죽이고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믿음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끝까지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일곱째 날, 일곱 바퀴째 돌 때에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으니 외치라고 선포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대하 20:15).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삼상 15:22-23).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17-21) 처음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여리고 성은 가나안 땅의 수많은 성읍 가운데 첫 정복지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의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의 죄에 대한 심판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모든 이교적이며 사악하고 음란한 문화를 파괴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의 우상들을 섬기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모든 것이 진멸되는 가운데서도 정탐꾼을 살렸던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고 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며 심판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 날 일곱 번째 돌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크게 소리 질러 외치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적용: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데도 상황과 형편에 변화가 없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마침내 이루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믿고 선포할 때 견고한 진이 무너지는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이 때에 따라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만의 유익을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 설 교 >
여리고 성이 무너지다
수 6:12-21
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14 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15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16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17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18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19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하니라
20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21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 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여호와의 명령대로 순종할 때 여리고 성이 무너집니다. 그리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여호와께 온전히 바칩니다.
일찍이 일어나서(12-16)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엿새 동안 첫 날과 같은 행렬대로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들은 불평이나 원망없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끝까지 순종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순종의 요구에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욕망과 자아를 죽이고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믿음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끝까지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일곱째 날, 일곱 바퀴째 돌 때에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으니 외치라고 선포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대하 20:15).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삼상 15:22-23).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17-21) 처음 것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여리고 성은 가나안 땅의 수많은 성읍 가운데 첫 정복지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의 승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에 대한 믿음의 표현으로 모든 것을 불태워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의 죄에 대한 심판이며 하나님의 공의를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모든 이교적이며 사악하고 음란한 문화를 파괴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의 우상들을 섬기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모든 것이 진멸되는 가운데서도 정탐꾼을 살렸던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고 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며 심판 중에도 긍휼을 베푸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지막 날 일곱 번째 돌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고 백성들이 크게 소리 질러 외치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적용: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데도 상황과 형편에 변화가 없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마침내 이루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믿고 선포할 때 견고한 진이 무너지는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이 때에 따라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만의 유익을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 설 교 >
여리고 성을 점령하라
수 6:15-21 / 김성광 목사
A. 점령과 승리에 대하여
1. 점령, 승리
2. 본문 배경 설명
B. 여리고 성을 점령하라
1. 여호와의 궤로 성을 돌게 하니라 - 말씀 중심의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원망 불평 말라(수 6:8~11)
2.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 순종, 인내(수 6:12~14)
3.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 하나님의 권능, 능력, 승리(수 6:15~21)
C. 2003년 한 해도 하나남의 말씀 중심으로 살고, 순종하고 인내하여서,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으로 승리하고,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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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점령과 승리에 대하여
1. 점령, 승리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리고 성을 점령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이자 목표로써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삶의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습니까? 사람은 목표가 있어야 승리할 수 있고 보람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그냥 하루하루를 산다면 결국 그의 삶은 아무 의미도 없이 그저 죽기위해 사는 것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삶에는 반드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앞으로 성공해서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선하게 살겠다.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겠다. 나는 행복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 등의 목표를 하나씩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에게 맞는 삶의 목표가 있어야 하고 어른은 어른대로, 또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목표를 가지고 살 때 그 인생은 더 강하고 담대해지며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발전과 성장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을 영적인 투쟁이라고 합니다. 늘 갈림길에 서서 고민하고 갈등하며 무언가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성공과 실패 중에 성공을 취해야 하고, 질병과 건강 중에서 건강을 선택해야 합니다. 사업을 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앞서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과 싸우고, 질병과 싸우고, 가난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도 투쟁적인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앞장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정신적인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점령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점령해야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올 한 해는 모두 점령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영국의 정치가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 1874~1965)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전쟁에서는 승리를 해야 하고, 어떤 공포에서도 승리를 해야 하고, 그 길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승리를 해야 한다. 승리 없이는 생존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승리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합니다. 승리가 없으면 죽음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고, 그 인생에는 희망과 보람이 있습니다.
2. 본문 배경 설명
오늘 본문말씀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기적으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첫 전투인 여리고 성에서 승리하여 그 성을 점령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서자마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인 여리고 성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그 성의 벽은 높이 9m, 두께 2m에 35° 경사를 이루고 있었고, 성벽도 이중으로 쌓여있었습니다. 게다가 높은 산악지대의 자연 암석 위에 세워놓아 적군의 침입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을 점령하게 되면 여리고 성의 위치 상 북쪽으로, 남쪽으로 진군하여 가나안의 전체 지역을 점령하는 일이 그만큼 더 쉬워집니다. 그렇지만 만약 패하게 되면 가나안의 다른 족속들이 힙을 합쳐 공격할 것이고,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폐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이 여리고 성을 내가 너에게 주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믿음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아무리 그 성이 강하고 튼튼하며, 훈련된 군사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거인 같은 장군이 있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전진하여 그 성을 점령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쟁을 하고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방법이나 군사적인 전략으로 도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혼자의 힘으로 노력해서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축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심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놀라운 역사를 성취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시험과 환난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여리고 성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앞으로 사는 동안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또는 가정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감당할 수 없는 크고 견고한 여리고 성이 버티고 서서 앞길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포기하시겠습니까? 뒤로 돌아가겠습니까? 아니면 피 흘리고 싸워 많은 대가와 희생을 치루시겠습니까?
여러분, 그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여호수아를 전쟁에서 승리하여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말씀을 보니 무장한 군사를 앞세우고, 그 뒤에서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고, 가운데에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그 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군하면서 여리고성 주위를 돌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6일을 돌고 7일째 되는 날, 그들이 일곱 번을 돌고 큰 소리로 외치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했을 때 그만 지진이 나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여리고 성 사람들은 모두 도망을 쳤고,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또한 여리고 성은 가나안 땅의 중심부에 있어 여리고 성만 점령하면 가나안 전체를 점령하는 일이 쉬워지기 때문에 이 땅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이제 우리가 한 해 동안 직장생활, 사업,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하면 승리하며 성공하고 축복받고 살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고,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승리하는 한 해 되시기 바랍니다. 축복받는 한 해 되시기 바랍니다.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여리고 성을 점령한 세 가지 단계를 설명하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여호와의 궤로 성을 돌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고 하였습니다.
B. 여리고 성을 점령하라
1. 여호와의 궤로 성을 돌게 하니라 - 말씀 중심의 삶,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원망 불평 말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 매 제사장 일곱이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진행하며 후군은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더라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 번 돌게 하니라 무리가 진에 돌아와서 진에서 자니라”(수 6:8~11)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여리고 성으로 진군하던 모습을 살펴보면 무장한 자들이 앞에 서고 그 뒤에 나팔 부는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며 따라가고, 대열의 가운데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뒤에는 또 제사장들이 있고, 그 뒤로 백성들이 따라왔습니다.
아마 여리고성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여리고성을 돌던 날 모두 나와서 구경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성 주위를 한바퀴 돌기만 하고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분명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역사하십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쓰인 두 개의 돌판과 만나가 담긴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언약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군했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환경 가운데 있다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라고 하셨겠습니까? 아마 하나님께서 침묵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으면 분명 그 중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려고 왔으면서 전쟁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성만 돌고 있으니 인간적인 생각으로 아마 여러 가지 원망과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행하시지 인간의 방법대로 하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방법을 알지 못해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것입니다.
진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열에서는 오로지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만 들렸습니다. 그것은 입을 열어서 소리를 내려면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뻐하는 소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그저 하나님의 소리만 들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 여리고 성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진으로 돌아와 잠을 잤습니다. 잠을 자는 것도 전략적인 방법입니다. 그 다음 날을 위해서 충분히 잠을 자두어야 합니다. 쓸데없이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잠을 푹 자면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기대해야 합니다.
역대상 13장 1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영접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중에 유독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내리신 것은 오벧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는 집은 축복을 받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장에도 언약궤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그 소유와 그 집과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축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축복의 말씀이고 사랑의 말씀이고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할 때는 응답을 받는 조건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왜 응답을 받지 못합니까? 그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있을 때, 그 때는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마음속에 가득한 탐심으로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교만과 원망과 불평과 불순종한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모든 교만, 불신앙, 원망, 불평, 시기, 질투하는 마음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만 마음속에 있을 때 원하는 대로 구하면 다 이루어주십니다.
올 한 해,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함으로 그 말씀을 통해 기도하는 것은 어떤 기도라 할지라도 모두 응답받고 축복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 1743~1826)은 “이 세상의 모든 책을 성경과 비교해 볼 때 성경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성경은 내가 처한 모든 공경에서 언제나 나에게 빛과 힘을 주어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되고, 약할 때 힘이 되고 용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올 해는 책을 많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전문서적을 읽어 지식도 쌓고, 신문을 읽어 세상 돌아가는 이치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고 용기를 얻고 믿음을 얻으면 우리의 삶을 승리하는 삶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신앙이 발전하지 않는 사람, 시험에 잘 드는 사람들은 대개 그 마음속에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뿌리가 없으므로 바람만 불어도 흔들거리다가 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배드릴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속에 뿌리가 내리고 충만한 사람은 아무리 악한 마귀가 와서 흔든다 할지라도 결코 뽑히지 않고 자신의 믿음과 신앙을 지켜 하나님 앞에 충성, 봉사, 헌신할 수가 있습니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2년 한 해 동안 교통사고가 약 26만 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루에 평균 7백 건 정도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연간 1만 2천명이 교통사고로 인해 사망을 했습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교통사고가 제일 많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교통사고 원인 중에 90%가 교통법규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통법규만 제대로 지켜도 현재 우리나라 교통사고의 90%를 줄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운전하는 사람들이 교통규를 지켜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면서 행복하게 사느냐,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사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에 대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아야 그 사람의 인생에 하나님의 도움과 축복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라-제이(SARA-J)패션’ 대표 안병은 안수집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여성의류사업을 하기 위해 새벽예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다가 욥기 22장 28절의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는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고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브랜드 이름을 고민하다가 여성의류이므로 아브라함의 아내이자 믿음의 여인인 사라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영문 이름 첫 글자인 제이(J)를 따서 사라-제이로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새벽예배를 열심히 드리면서 20대부터 50대까지의 여성들을 상대로 의류를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전 11시, 오후 3시, 오후 7시에 하루 세 번씩 사원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자 그 기도를 통해 회사가 점점 잘되기 시작했습니다. IMF에도 흔들리지 않고 매상이 계속 늘었습니다. 그래서 8년 만에 큰 회사 빌딩을 구입하게 되었고, 국내 7개의 매장을 비롯해서 중국 상해에 국제 1호점을 만들었습니다. 또 방글라데시에 공장을 세우면서 중견의류기업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이제 세계 60개국에 공장을 설립해서 회사가 더욱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면 반드시 그 사업은 성공합니다. 여러분, 올 한 해 동안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통해서 반드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인간적인 생각은 중지하고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원망, 불평, 의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민수기 21장 5절 말씀을 보면 에돔이라는 지역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식량과 물이 없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자 갑자기 땅에서 불뱀들이 나타나서 백성들을 물어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은 땅에서 불뱀들을 불러옵니다. 불뱀은 곧 파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원망,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탈무드를 보면 “입을 다물 줄 모르는 사람은 문을 닫지 않고 사는 집과 같다.”고 했습니다. 입을 여는 것은 집의 대문을 여는 것과 같습니다. 집의 문을 열어 놓으면 그 곳을 통해 도둑과 강도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입을 열어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그것으로 인해 분쟁과 싸움과 다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침묵을 지켜야 합니다. 입을 다물고 순종하는 믿음과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특히 올 한 해는 하나님 앞에 침묵하여 주님의 뜻대로 이루시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말을 하지 않고 나팔소리만 듣고,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앞으로 나가야 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2.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 순종, 인내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진행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에 행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하니라 그 제이일에도 성을 한번 돌고 진에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수 6:12~14)
여리고 성을 돌고 그 다음날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든지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일찍 일어나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사업도 잘하고,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는 사람이 응답을 더 많이 받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회사원이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일찍 일어나는 나라가 부강해집니다.
여러분, 올 해는 작년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성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도는 일을 첫째 날과 똑같이 둘째 날도 했고, 그것을 엿새 동안 했습니다. 이것은 끝까지 순종하고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그 명령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엿새 동안 하루에 한 번씩 여리고 성을 돌았습니다. 성을 점령하겠다는 사람들이, 전쟁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전략과 전술을 세우지 않고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그저 하루에 한바퀴 씩 성을 돌고 들어가서 자고, 또 다음날도 그렇게 하기를 엿새 동안을 했습니다.
전쟁은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고 하는데 엿새 동안을 그렇게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답답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합력해서 함께 나아갈 때, 큰 승리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엿새 동안 계속해서 반복적인 일에 순종을 했습니다. 여러분,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순종하기는 하지만 한두 번 순종하고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 했으면 일주일 동안 순종하고 인내하고 침묵을 지켜야 하는데, 그 다음날부터는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시작했으면 끝날 때까지 순종하고 인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열왕기하 5장 말씀을 보면 아람 왕국의 군대에 나아만 장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문둥병자였습니다. 겉은 높은 계급을 단 장군이었지만 속은 문둥병으로 자꾸만 살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선지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와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갔는데 엘리사 선지자는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종 게하시를 통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시오’라는 말만 전하게 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났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나와서 인사도 하고 상처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 줄줄 알았는데, 나타나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목욕을 하라고 하니 자존심도 상하고 체면도 깎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녀가 목욕하는 것이 무엇이 힘든 일이냐며 그를 설득해서 요단강으로 갔습니다. 그는 엘리사의 말대로 요단강에 가서 몸을 담갔습니다. 요단강 물은 그렇게 깨끗한 물이 아니었지만 그는 한 번 들어갔다 나오고, 두 번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그렇게 여섯 번을 들어갔다 나왔지만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보통 일곱 번을 씻어서 나을 것이라고 하면 세 번째나 네 번째에서는 그래도 나아질 기미가 보여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상처에 손을 얹어주고, 또 대접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해서 중도에 포기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나아만 장군은 결국 일곱 번을 들어갔다 나왔고, 그가 일곱 번을 들어갔다 나왔을 때 그는 문둥병에서 깨끗이 고침을 받아 어린아이의 살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에 역사하십니다. 일의 중간에는 우리의 인간적인 눈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했다면 지금 우리는 아무도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더 큰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에 가서 승리를 바라봐야지 도중에서 평가하면 안됩니다. 도중에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끝까지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승리를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 말씀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인내가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지 모릅니다. 순종과 인내는 같은 것입니다. 순종은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순종을 통해 사랑을 깨닫고 인내를 통해 성공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탈무드에는 “성공의 절반은 인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라고 했습니다. 빨리 병아리를 보고싶다는 조급한 마음에 달걀을 깨뜨리면 병아리는 나오지 않습니다. 달걀은 품어 인내를 해야 그 속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성공도 품어야 하고, 행복도 품어야 하고, 우리의 인생도 품어야 합니다. 조금 더 인내하며 참아야 하는데 조금 참다가 포기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의 SMI 인터네셔널 창립자이자 회장인 폴 마이어(Pohlmeier)는 ‘LMI'(Leadership Management International)라는 세계적으로 리더들을 키워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또 세계적인 대부호입니다. 그는 “성공과 실패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그 종이는 바로 인내이다. 90%는 실패한다. 그리고 이 실패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10%만이 성공하는데 이들은 모두 인내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인내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성공하고, 포기하는 사람은 실패합니다. 즉, 성공은 곧 인내이고, 포기는 실패인 것입니다.
돈이 성공과 실패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학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배경이 그의 성공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성공과 실패를 가름합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공부하는 학교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성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토마스 모나간(Thomas S. Monaghan)은 고아원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아원에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에게 주일학교 선생님이 성경말씀을 가르쳐주었는데, 요한복음 15장 5절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는 말씀을 듣고 그는 하나님께 “나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지키고 보호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군대에 갔다 와서 미시간 대학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형이 피자가게를 하나 인수하게 되었고, 그도 그 곳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처음 피자가게를 인수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 인내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인내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기도하다가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는 피자의 맛은 대개 비슷하니까 배달을 빨리 해주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가게들보다 신속하게 피자를 배달했습니다. 그러자 피자가 빨리 배달된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의 가게 전화가 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거래량이 자꾸만 늘어나고, 지금은 전국적으로 1,300개의 분점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그 가게가 바로 도미노 피자의 시작인 것입니다.
고아원에서 자란 한 꼬마가 기도로 성장하여 얻은 아이디어 때문에 세계적인 기업이 탄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과 결실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3.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 하나님의 권능, 능력, 승리
“제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수 6:15~21)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 째 날에도 새벽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일곱 째 날에는 다른 날과 다르게 성을 일곱 번 돌았습니다. 그러나 도는 방식은 여전했습니다. 그렇게 일곱 바퀴를 돈 후에 먼저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이 무너진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성을 주셨다고 외친 것이 아니라 성이 무너지기 전에 믿음으로 미리 선포를 한 것입니다. 복을 받았다고 먼저 시인해야 복이 오는 것이고 성공했다고 말을 해야 성공이 오는 것이고 병이 나았다고 해야 병이 낫는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 앞장을 서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고, 여호수아가 믿음으로 선포하고, 백성들도 함께 외치니 갑자기 성벽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갑작스런 지진으로 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누가 지진이 일어나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자는 그것을 몰래 취하였다가 나중에 돌에 맞아 죽는 심판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신앙과 믿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해주심으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을 부수고 성에 올라가 싸움으로 성을 점령한 것인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성을 점령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방법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전쟁을 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많이 피를 흘리고 피해를 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역사하셔서 피를 흘리지 않고 상처도 남기지 않고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사사기 7장 말씀을 보면 기드온과 삼백용사는 메뚜기 떼 같이,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은 미디안 족속들이 쳐들어 왔을 때,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방법대로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돌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외치자,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미디안 족속들끼리 서로 싸움을 해서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담대한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대통령 워싱턴(George Washington ; 1732~1799)은 “하나님께 우리를 도와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있으면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자꾸 내 편이 되어달라고 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편으로 가면 그 때는 승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 편에서 행동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응답과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간증입니다. 강영식 성도님은 회사에서 늦게 퇴근하여 새벽에 집으로 가다가 깜빡 조는 바람에 그만 길에 세워 놓은 포크레인을 들이받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식도와 기도를 연결하는 물렁뼈 두개가 완전히 부서져 빨리 수술을 하지 않으면 100%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아무리 잘 하여도 벙어리가 되거나 언어 장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살기는 살아야 하는데 수술을 하고 나면 말을 할 수 없다고 하니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의사임으로 두개 다 고칠 것을 믿는다고 기도하고 의사에게 퇴원을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퇴원한 후에 사망하더라도 병원 측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각서를 쓰게 한 후에야 퇴원을 허락했습니다.
그는 병원을 나와서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시편 119편 8~9절의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는 말씀을 가지고 3일 금식기도를 했습니다.
3일 째 되는 날, 기도하는 데 몸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목이 간질거리더니 기침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침을 하다가 부러진 목뼈가 입에서 튀어나왔습니다. 목을 절개해서 부러진 뼈를 빼내야 하는 데 금식기도를 3일 했더니 기침을 하면서 부러진 그 뼈가 밖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수술하지 않으면 100% 사망, 수술을 하면 말을 못한다고 했는데 수술도 하지 않고, 성대도 상하지 않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는 예전보다 더욱 건강해져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성가대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올 한 해를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해서 응답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2003년 한 해도 하나남의 말씀 중심으로 살고,
순종하고 인내하여서,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으로
승리하고,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축복받는 성도가 되자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여리고 성을 점령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올 한 해는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복하는 신앙
여호수아 6:12~21
여호수아서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구원은 ‘안식(resting)’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우리의 삶에 안식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싶어 하는 대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의 세력으로 인해 죄의 종 노릇 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종 노릇 하며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삶에는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언가에 묶여 끌려 다닐 뿐입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의 삶에 안식이 없습니다. 이런 삶을 ‘종 된 삶’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벽돌을 찍으며, 주체적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지배를 받으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은 안식을 의미합니다.
여호수아서에서 정복을 다루고 있습니다. 정복해야 하는 목적은 더 이상 지배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참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의 완성이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천국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영원한 안식입니다. 우리는 7일마다 안식합니다. 주일은 안식의 개념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놓이는 참된 자유를 누립니다.
본문에 보면, 양각 나팔 일곱, 일곱째 날, 일곱 번 등 일곱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여기에는 안식의 개념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하게 만드셨습니다. 에덴에서 축제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없이 참된 안식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사람들은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노예 된 삶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며 살게 하시려고 가나안을 주셨습니다.
가나안의 목전에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분기점, 전환점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넘어가느냐, 넘어가지 못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리고 성을 넘어가지 못하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과거로 돌아가야 합니다. 노예 된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루도 안식할 수 없습니다. 종에게 안식이 있겠습니까.
여호수아서는 우리의 구원의 삶을 구체화시키는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 1:3~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발로 밟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지만, 발로 밟고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광야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넜지만, 그들은 여전히 광야에 40년 동안 머물러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지만, 가나안에 들어가 가나안을 누린 사람은 1세대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믿음생활을 하고 구원 받았지만, 구원 받은 삶을 누린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지만, 교회를 다니지만, 신앙생활을 하지만, 구원이 무엇인지 제대로 누리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만 맹숭맹숭합니다. 무미건조합니다. 신나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나은 것 같습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풍성한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나안의 입구에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알려진 바에 의하면 굉장한 성입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입니다. 여리고 성을 통과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첫 번째 통과해야 하는 성입니다. 첫 싸움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됩니다.
첫 번째에서 밀리면, 계속 밀리게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영적 전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첫 번째 싸움에서 접고 들어가면, 계속해서 접고 들어가야 합니다.
어디서든 마찬가지입니다. 첫 번째 싸움에서 지면, 계속해서 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첫 번째 전쟁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타협하게 하는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첫 번째 관문입니다. 여리고 성을 통과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견고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는 것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구원 이후에 우리가 누리는 삶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견고합니다. 허접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조직화된 군사들이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보호벽이 강합니다. 정복은 고사하고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군사들은 비정규군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신자들은 겉으로 보면 열세(劣勢)입니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마음껏 신앙생활하도록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가나안 정복은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수여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분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작정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발로 밟는 땅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발로 밟는 것은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관적이고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 관점으로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향해 적극적으로 돌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리고 성은 정복 프로젝트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야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한 번의 승리는 또 다른 승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승리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겁을 먹습니다. 믿음의 길은 낯설고 험난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승리를 경험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노예적 삶은 패배주의로 점철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가 무엇인가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존감이 바닥나있었습니다. 승리했을 때에 맛보는 성취감이 무엇인가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몰랐습니다.
승리를 경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벽을 넘어야 합니다. 불가능의 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 싸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기게 하시려고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해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자신감입니다.
믿음이 무엇일까요? 믿음은 용기입니다. 믿음은 자신감입니다. 여리고 성을 그냥 바라보기만 하면, 주눅들 수밖에 없습니다. 압도하는 것 같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삶에 두려움을 줍니다.
여호수아 6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허락하다는 의미입니다. 보상, 선물, 축복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 손에 넘겨 주었다는 것은 네 손에 들린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물을 안겨주시려고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취하면 됩니다. 포장지를 뜯고 가지면 됩니다.
여리고 성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작전 명령은 특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수 6:2~5)”,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수 6:10)”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딱 하나입니다.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훈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이성적 판단입니다. 그냥 도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돈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믿음은 이성을 무시하지 않지만, 믿음은 이성에 갇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이성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하라고 말씀하시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석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계속 훈련해야 합니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믿음생활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믿음의 세계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자신의 생각을 극대화시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각은 작아지고, 하나님의 생각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전쟁하려면 실제적인 전략이 필요합니다. 전쟁에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여리고 성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성벽을 타고 올라가야 합니다. 성에 있는 사람들을 밖으로 유인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의 왕을 체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생각과 차이가 있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3만 2천 명의 자원자를 다 돌려보내시고, 기드온과 3백 명만 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미디안과 싸우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힘을 쓰고 싶을 때,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른 작전을 세우셨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에게서 힘을 빼게 하셨습니다. 뭔가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돌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열심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힘을 빼야 이기는 싸움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혈과 육을 동원하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혈과 육을 동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고함을 지릅니다. 힘을 동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의 위용이나 전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여리고 성이 얼마나 큰가는 주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여리고 성이 아니고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주제입니다.
상대로 인해 걱정하지 마세요. 상황을 걱정하지 마세요. 적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문제입니다. 내 발에 내가 넘어집니다.
문제가 얼마나 큰가, 어떻게 싸워 이길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상이나 목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불신앙, 의심, 두려움, 패배주의, 열등감, 상처 등이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벽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눅 들어 벌벌 떨게 하시려고 우리를 여리고 성 앞에 데려다놓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리고 성 앞에 데려다놓으시고, 우리에게 “큰 여리고 성은 너희의 밥이다.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자는 대범해져야 합니다. 문제가 커도 피하지 말고 정면 승부해야 합니다. 피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거부하지 말고 돌진해야 합니다.
문제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문제를 보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삶으로 들어온 후,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문제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삶의 문제를 돌파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의 문제를 다루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자신감과 담대함은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있으면 아이들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 당당합니다. 우리가 믿는 구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전에는 우리가 믿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함께하는 인생입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떨지 말아야 합니다. 눈치 보는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꿀릴 것이 없습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땅 밟기를 하세요. 하나님께서는 적당히 살라고 우리를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믿음으로 취하라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그 땅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돌라고 말씀하신 것은 여호수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 1:3~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 주위를 돌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믿고 땅 밟기를 시작해보세요. 두려워 떨며 돌아갔던 곳이 있습니까. “이제 내가 너를 취하겠다.”라고 선포하세요. 그 땅을 정복하세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생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계산과 방법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리고 성 주위를 도는 것은 전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군사학에는 없는 방식입니다. 그냥 돌라는 것은 그냥 죽으라는 것으로 들립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은 내가 무너뜨린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계략, 술수와 지혜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머리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정과 노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세상의 방식으로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상식이 걸림돌이 될 때가 있습니다.
지성이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지성이 오히려 함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기도 하지만, 아는 것이 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식을 넘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십니다. 사람의 노력과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십니다. 이것은 영적 방정식입니다.
돌고 돌면서 힘을 빼게 하십니다. 힘을 주면 오히려 패배합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신앙의 묘미가 무엇입니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목격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목격하려면,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온전히 순종하고,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즉각적 순종으로 인해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본문 여호수아 6장 15절에 보면,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전과 같은 방식으로’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전적으로 순종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1세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1세대의 삶의 특징은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시작했다면, 계속해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완전한 순종의 결과는 엄청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략은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순종보다 좋은 무기는 없습니다. 순종보다 탁월한 전략은 없습니다.
순종은 최고의 무기입니다. 순종으로 나아가면, 여리고 성은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순종의 능력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문제는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대한 성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 앞에서 끙끙거립니다. 문제에 깔려 질식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생각보다 작습니다.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거창해보일 뿐, 사실은 별 것 아닙니다.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한순간에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졌습니다. 사람의 눈에 크게 보일 뿐 자세히 보면 별 것 아닙니다.
여호수아 2장에 보면, 기생 라합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탐꾼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라합이 정탐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것과 애굽을 굴복시킨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수 2:9~10)”고 말했습니다.
골리앗은 덩치가 컸지만, 다윗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쓰러질 정도로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겁을 줄뿐입니다. 사탄은 힘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할 때, 우리 안에 염려가 줄어듭니다. 이전에 염려했던 것이 더 이상 염려되지 않습니다. 이전에는 걸려 넘어졌던 것들을 넉넉히 통과합니다.
이전에는 염려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에 들어온 후에는 더 이상 염려거리가 아닙니다.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한 방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극적 반전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모든 상황은 끝입니다. 하나님께는 문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암이나 감기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믿음생활은 내 실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수준으로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의 수준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된다는 것을 확신하며 일상 속에서 경험하면, 우리가 가진 문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돌며 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전쟁은 눈에 보이는 싸움이 아닙니다. 여리고 성을 도는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영적인 말이 아닌 것은 우리의 기를 빼버립니다.
말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는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비생산적입니다. 일을 그르칩니다. 말이 족쇄가 됩니다. 말이 씨가 됩니다. 말로 인해 자신이 넘어집니다. 말에는 위력이 있습니다. 말로 인해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침묵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작전지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는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성의 잣대로 성경을 보면 이해되지 않는 말씀이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돌라고 명령하신 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말씀에 토를 달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에 토를 달려 한다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입을 통해 육신의 생각이 흘러나오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이 입을 통해 흘러나오면,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삶에서 실패는 말을 통해 일어납니다. 힘들 때 조심해야 합니다. 힘들면 말이 험악해집니다. 힘들수록 악담을 합니다. 힘든데 곱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로 싸웁니다. 말로 서로의 감정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다.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영적 세계에서는 침묵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각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려면 잠잠해야 합니다. 말을 절제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에 침묵하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순간에 잠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승리의 전략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황을 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전 지시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의 작전 지시를 들으려면 침묵해야 합니다. 그 속에 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말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말은 필요 없습니다.
믿음은 절대 순종을 낳습니다. 절대 순종하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믿음생활은 아이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 14:1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명해보이시는 순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침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무릎 꿇게 하시고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충분히 목격했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보는 데 대단한 전략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순종만 있어야 합니다. 침묵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잠잠히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우리가 정복해야 할 영역이 많이 있습니다. 나의 여리고는 무엇인가 생각해보세요. 내가 정복해야 할 영역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세요. 삶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넘어뜨리고 물러나게 하는 장애물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세요. 성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바라보고 주실 것을 믿고 여리고 성을 돌 듯 돌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맛볼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삶의 전환점입니다. 전환점을 통과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을 통과한 이후에도 정복의 전쟁은 계속됩니다. 한 번의 전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적 전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초입에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리고 성을 통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넘어서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노예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묶인 것이 모두 풀립니다. 참된 자유인이 됩니다. 이 약속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땅이 많다는 것을 여호수아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양 머물러있지는 않습니까. 여리고 초입에서 허둥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귀로부터 풀려난 것만이 구원은 아닙니다. 여리고 성을 통과하고, 아이 성을 통과하고, 수많은 성을 정복하며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살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마음껏 취하여 누려야 합니다. 참된 안식과 평안,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여러분의 삶의 바깥에 있을 수도 있고,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외부의 상황이 여리고 성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수많은 상처들, 두려움, 불안, 불신앙, 열등감 등이 여리고 성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여리고 성을 통과해야 새로운 땅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무한한 것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여리고 성을 해결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망가지 말아야 합니다.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의기소침해서는 안 됩니다. 용기를 가지고 맞부딪쳐야 합니다. 정면 승부해야 합니다. 도전해야 합니다.
두려워 떨고 고통스러워하는 문제 안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약속의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도망가지 마세요. 여리고 성을 뛰어넘으시기 바랍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시기 바랍니다.
그때 가나안이 열릴 것입니다. 가나안이 열려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세계가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마세요. 기도 응답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마세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과 가나안에 들어간 후는 매우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전략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믿고 행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여리고 성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손대시면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세요. 작전은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말을 줄이세요. 하나님께 민감하게 반응하세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세요.
그리할 때,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 우리의 믿음의 지평이 넓어지고,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할 것입니다.
여리고성 함락 (2)
수 6:12-16, 20-21
강하고 견고한 성인 여리고성은 무너졌습니다. 하늘을 닿을 듯 한 바벨탑 어떻게 되었습니까? 무너졌습니다. 크고 강한 거인 골리앗 결국 쓰러졌습니다. 앞길을 막은 큰 홍해와 요단강도 주님의 능력으로 갈라졌습니다. 그것들 모두 우리 앞에 모두 넘어짐의 대명사로, 갈라짐의 대명사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서시니 그리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여리고성 함락 첫 번째 비결을 들어 알았습니다. 뭐였습니까? 기도였습니다. 새벽에 외치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부르짖고 외칠 때 새벽에 도와주시리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 믿고 부여잡고 특별새벽기도회를 한 주간 했습니다. ‘가뭄과 메르스’라는 국가적인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도 새벽마다 외쳤습니다. 앞으로도 나라와 민족, 목포를 위한 책임 있는 기도가 교회로부터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어서 여리고성 함락 두 번째 비결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눈에 보이는 여리고성보다 더 무서운 여리고성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 안에 있습니다. ➀거인 골리앗을 보고 사울 왕과 군사들은 ‘우리는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 누가 저 큰 골리앗과 맞서 이길 수 있겠는가? 싸움이 안 된다. 불가능하다.’ 하며 자기 마음 안에 더 큰 골리앗을 만들어 버립니다. 내가 만들어 내 안에 있는 골리앗이 진짜 무섭고 큰 것입니다. 그러나 소년 다윗은 달랐습니다. 사자와 곰도 이겼으니 골리앗도 이길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 안에는 골리앗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과 그분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➁모세의 인도를 받아 출애굽 하여 홍해 앞에 진을 쳤습니다. 그러자 애굽 군사들이 추격해 옵니다. 어린아이들, 그 많은 짐승들, 부녀자들, 60만 장정들에게 앞에 보이는 홍해는 건널 수 없는 큰 바다였습니다. 문제는 이미 그들 안에 들어 온 더 큰 홍해였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며 절망에 빠져 모세를 원망합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출14:11)
반면, 모세는 홍해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 계셔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모세 마음속에는 홍해가 없었습니다. 홍해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는 여러분이 만든 어떤 여리고성과 홍해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습니까? 무엇이 한 발자국도 뛰지 못하게 잡고 있습니까? 상처입니까? 그럴싸한 나만의 변명입니까? 질병입니까? 열등감입니까? 우월감입니까? 아집과 고집입니까? 내 안에 있는 여리고성부터 무너뜨려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인류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무거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53:5)
질병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에게 나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가난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8:9)]
가난은 하나님이 원하신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은혜의 공로로 죄와 질병과 가난으로부터 모두 해방되시고 자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리고성 함락 두 번째 비결
여리고성 함락 두 번째 비결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전을 주시기 전에 먼저 여호수아에게 뭐라 말씀하신 줄 아십니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수6:2)
1. 승리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하나님께서 이미 그 성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전쟁도 시작하기 전에 이미 승리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도 이 약속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히11:30)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성을 돌았습니다. 그러니 그 성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가시적 여리고성과 여러분 안에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붙잡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작전과 방법을 믿었습니다.(수6:3-5)
①매일 한 번씩 성을 돌되 6일 동안을 같은 방식으로 돌라. 그리고 마지막 일곱 째 날에는 일곱 번 성을 돌라는 것입니다. ②성을 행진 할 때 선두는 무장한 자, 그 다음은 일곱 양각 나팔을 든 제사장이 나팔을 불며 따르고, 그 다음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든 제사장이, 그 다음은 후군이 뒤 따르라는 것입니다. ③누구든지 말하지 말고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④나팔이 길게 들릴 때, 하나님이 주신 신호이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 되어 외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을 믿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주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는 복음을 믿습니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좋은 걸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습니까? 새벽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리라 말씀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전도를 통해서 영혼을 구원한다는 하나님의 영혼 구원 방법을 믿습니까? 한결같이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중국 선교의 선구자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내륙 양주에서 선교사역을 할 때의 일입니다. 선교사들이 의료 선교를 열심히 하자 양주 사람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알을 도려내고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으며 아이 밴 여자의 배를 갈라 그것으로 약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폭도로 변해갔습니다. 이것이 양주폭동사건입니다. 이 때 많은 선교사들이 심한 상처를 입거나 죽어 갔습니다. 겨우 영국 당국이 직접 개입하여 진정 되었지만 선교사역은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었습니다. 이 일 후에 허드슨 테일러가 이끄는 선교회는 영국으로부터도 “군함을 앞세우는 선교회”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교 후원금이 대폭 줄게 되었습니다. 현재 상황도 어려워진데다 모국의 후원도 줄어들어서 더 이상 중국선교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구차하게 변명하려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영국에서 헌금 2000파운드와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습니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에게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 편지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을 갖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신뢰하신다면 그분의 약속을, 그분의 방법을, 그분의 타이밍까지도 모두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방법을 믿었기에 순종했습니다. ➀매일 도라고 하니 돌았습니다. 마지막 날은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➁침묵하라 하니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수6:10)
전체가 참았습니다. 대단한 인내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임금님이 있었는데, 이 임금님의 이상한 습관은 항상 머리에 아주 큰 모자를 푹 눌러 쓰고는 절대로 벗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이를 닦을 때도, 심지어 목욕을 할 때에도 모자를 벗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임금님이 모자를 벗은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와 같이 매우 컸기 때문에 임금님은 이런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모자를 벗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궁금해 하며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모자를 벗은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는데, 임금님의 머리를 깎아준 이발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임금님의 머리를 깎아준 이발사들은 집으로 돌아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나이 어린 이발사만이 임금님의 머리를 깎으면서 한 번도 웃지 않고 깎아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 임금님의 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을 발설하면 그는 곧 죽게 됨으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병이 되어 그는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고, 그 배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할 수 없이 병원을 찾아 갔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이 병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아서 생긴 병이오! 도대체 무슨 말을 그토록 많이 참았기에 이렇게 배가 많이 나왔소?" 하고 물었습니다. 이발사는 이 말은 절대 비밀인데, 만약 이 말을 하면 나는 죽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삽으로 구덩이를 깊게 파고 그 속에다 머리를 넣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라고 했습니다. 이발사는 의사의 제안대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 구덩이를 파고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고통을 잘 표현해 주는 유고슬라비아 민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얼마나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고 옆 사람에게 물어보고 듣고 싶었겠습니까? 그들은 7일 동안 하고 싶은 말들을 다 참고 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➂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 하니 일어났습니다. ➃외치라 하니 하나 되어 일제히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그대로 백성들은 모두 순종했습니다. 그 믿음과 순종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여러분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려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좀 부족해도,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배움이 적어도, 나이가 어리거나 많아도 주님은 그런 것을 탓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중요한 것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여리고성은 무너집니다. 순종하는 성도들을 통해 하늘비전교회는 부흥성장하고 은혜가 넘칠 줄 믿습니다. 새벽기도에 총력을 다 합시다. 전도에 집중합시다. 주님의 일에 매진합시다.
내 삶에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라!
수 6:12-16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허락받아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 가나안 땅에는 오래전부터 가나안족속들이 살고 있어서 그들을 정복해야만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백성의 것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 여리고 성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들어갈 때에 가장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성이요, 이스라엘 백성들로서는 제일 먼저 무너뜨려야할 성이었습니다. 이 성을 무너뜨리지 못하면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성은 크고 견고하여 성 안에 있는 군사들은 잘 훈련된 군사들로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것을 알고 잘 준비되고 훈련되어 있는 강한 군대였습니다.
그 여리고 성에 비해 이스라엘은 어떠했습니까? 애굽에서 나와 40년간을 가족과 재산을 이끌고 광야를 걸쳐 가나안까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을 위하여 준비된 군인들도, 무기도 잘 준비되지 않은 이스라엘 민족으로서는 이 싸움에서 도저히 승산이 없는 전쟁의 시도이었습니다. 인간적인 면으로만 보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였습니다.
때때로 우리 앞에도 여리고 성과 같은 난관을 만나게 됩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하지만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원하는 대학교를 가야 앞으로 계획하는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가 있는데 도저히 노력으로는 역부족인 것을 느낄 때, 취직자리를 찾아서 여기저기를 알아보고 다녀보지만 쉽게 취직은 되지 않고 자꾸만 자신감을 잃게 된다면 이는 삶의 여리고를 만난 것입니다. 결혼적령기가 지났는데도 여기저기 선을 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면 이도 삶의 여리고를 만난 것입니다. 사업을 일으켜 보려고 하는 사방이 꽉 막힌 채 전혀 앞길이 보이지 않거나 삶의 계획은 있으나 현재의 여건으로는 전혀 그 계획이 이루어 갈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삶의 여리고를 만난 것입니다.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내 삶이 전개되면서 점점 고난의 수령에 빠져 헤쳐나 올 길이 없을 때, 생활의 아픔과 더불어 질병의 고통에서 생명의 위협을 당할 때 우리의 삶에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여리고 성을 만난 것입니다.
이런 내 삶에 여리고를 만날 때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의 힘과 경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리고를 무너뜨린 하나님의 역사의 방법을 배워 하나님께 맡길 때 우리의 삶의 여리고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를 만났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성의 왕과 수많은 군사들을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셨고, 조건적으로는 열세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창과 칼을 쓰지 않고서도 완벽하게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는 승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전략은 참으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엿새 동안은 매일 한 바퀴씩 돌게 하고, 제 칠일에는 그 성을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바퀴를 돈 후에 제사장들은 언약궤 앞에서 양각 나팔을 불며 백성들은 일제히 큰소리로 외치면 그 여리고 성은 무너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순종할 때 여리고 성은 제 칠 일째 되던 날, 원자폭탄을 맞는 것처럼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적군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저희들끼리 치고받는 자중지란이 일어나서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이 있지만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 앞에 여리고를 무너뜨리신 것과 같이 내 삶에 앞에 있는 여리고가 아무리 강하고 난공불락의 성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면 힘없이 우리 앞에 무너지고 우리는 그 문제를 함락시키는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그리고 교회에 무너뜨리지 못할 여리고 성은 없습니다. 믿으면 아멘 합시다. 여러분의 삶의 여리고 앞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놀라운 비밀의 말씀이 담겨져 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내 인생의 앞에 모시고 나가는 것입니다.
상대를 무너뜨리려면 상대방보다 더 큰 힘이 있어야만 하는 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과 그 안에 있는 군사들 보다 어떤 더 큰 힘이 있었을까요? 그들에게 무슨 힘이 있었기에 그 난공불락과 같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 힘의 근원을 우리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힘에는 대체로 세상의 권력의 힘, 경제적인 능력이나, 지식의 힘이나, 경험이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배경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힘들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과도 같지만 때로는 전혀 소용없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방해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힘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의 힘 속에 승리의 비밀이 깃들여 있습니다. 요한일서 5:4절 말씀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고, 믿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397장을 지은 '죤 예이츠'는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하고 찬송을 했습니다.
여리고성은 어떤 성인지 아십니까? 여리고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입니다. 고고학자들의 조사를 보면 이 도시가 주전 약 8천년쯤부터 존재했을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광야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로서 대단히 비옥한 지역에 건설되었습니다. 신34:3에서도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벽도시로서 잘 조직되고 번영하던 도시였습니다. 여리고성은 방어체제가 뛰어난 성벽도시였습니다. 성벽의 어떤 곳은 그 두께가 무려 6미터 이상이었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신9:1).
성만 크고 견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주민들도 모두 신장이 장대하고 강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스스로를 그들 앞에서 메뚜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민13:28-33). 그래서 여리고성은 외부에서 공격하기가 불가능한 성으로 여겨졌고 막강한 군사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런 여리고성이 이스라엘 백성의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단히 방어태세에 돌입했습니다. 여호수아 6장 1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성벽이 높게 쌓여 있고, 굳게 닫힌 성을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여리고 성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이룬 역사였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밝히 증거하고 있는데, 히브리서 11:30절 말씀을 보면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은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힘으로 무너뜨린 것입니다.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이 초인적인 지략과 전투력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그 여리고 성 주위를 빙빙 돈 것뿐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자기들의 군사 앞에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시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한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신 것입니다.
또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했습니다(수6:10). 백성이 그 지시대로 했을 때 실제로 여리고 성의 성벽이 무너지며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본문 20-21절을 봅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만일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행하시며 그들을 이끌고 간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면 그들이 여리고 성을 몇 번을 돌았던들, 소리를 외쳤던들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돌았기 때문에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무조건 하나님을 앞세우고 살아갈 때 기쁨도 행복도 승리와 성공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성에 살던 여인을 보십시오. 일찍이 남편 5명을 갈아치우고 6번째 남편과 살고 있습니다. 왜 이 여인은 남편을 그렇게 갈아치우며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며 살았을까요? 이 여인은 남편이 자기 생애에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남편만 잘 만나면 행복할 줄 알고 자기가 생각하는 남편을 선택하는데 총력을 기우렸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보편적으로 생각해 보면 먼저 젊었을 시절이니까 잘 생긴 남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늘씬한 키에 잘 생긴 이목구비로 보기만 해도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긴 남자라고해서 안 먹어도 배부른 것도 아니요, 성격이 좋아서 자기를 왕후처럼 받들어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만을 섬기라는 주문에 지쳤고 잘 생긴 남자의 환상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잘 생긴 남자보다는 실제적인 문제로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절감했기 때문에 돈 많은 남편이 좋을 것 같아 돈 많은 남편을 찾아서 결혼했을 것입니다. 한참은 좋았지만 돈 많은 남편은 돈을 벌기 위해서 일에만 몰두하는가 하면 또 다른 여자들과 사건으로 결혼의 행복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자기 행복을 빼앗아간 것이 화가 나서 권세를 가진 남편을 찾아 결혼을 했습니다. 권력은 가진 남편은 결혼의 단꿈이 깨어나기 전에 자신 얼마나 멸시 천대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월급쟁이와 결혼하면 사랑을 받고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생활은 지루하고 미래에 소망이 없는 생활인 것을 느끼며 또 다른 대상을 찾았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남편을 찾았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수입이 들쑥날쑥해서 생활에 짜증이 나고 말았습니다.
어라 모르겠다! 시골에 가서 농사꾼과 결혼해 보자 해서 시골로 와서 결혼생활을 해봤지만 시골 생활이 장난이 아니었고 농촌사람들은 모든 동네사람들의 생활을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동네사람들에게 늘 손가락질을 당하며 걸핏하면 남편을 갈아 치우는 부정한 여인으로 이웃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동네사람들에게 완전히 왕따를 당하는 불쌍한 여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앞세웠지만 남편은 그녀의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더 꼬이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여인처럼 세상의 것들을 먼저 앞세우고 살려고 합니까? 이 여인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이 만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를 만나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 먼저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대답은 남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대답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여인이 바라는 인생의 행복에 갈증을 해결해 주는데 남편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네 말이 옳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내 인생의 앞에 어떤 것을 앞에 두느냐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때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그렇게 목말랐던 갈증이 그 배에서 영원히 솟아오르는 놀라운 경험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내 인생의 행복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 따라가면 됩니다. 내 인생의 성공에 목말라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앞에 모시고 순종하십시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에 대한 수학적 공식을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숫자를 말할 때 앞에 어떤 숫자를 놓느냐에 따라 그 분량이 달라집니다. 숫자 중에 앞에 0을 먼저 놓으면 그 뒤에 아무리 많은 숫자를 놓는다고 해도 1도 못됩니다. 그러나 앞에 1이라는 숫자를 놓고 뒤에 0이라는 숫자를 놓게 되면 0이라는 숫자를 놓는 만큼 10되되고, 100, 1000, 10000 ... 놓는 숫자만큼 그 분량은 많이 집니다.
이런 원리를 생각하며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창조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따라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만으로는 창조의 숫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숫자적으로는 0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역사의 시작이기 때문에 숫자의 시작인 1로 보아도 됩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앞에 놓고 즉 1을 먼저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나가기만 하면 순종의 횟수만큼 0을 더하면 한 번하면 10이 되고, 두 번하면 100이 되고 순종 할수록 그 축복의 숫자나 성공의 숫자는 더해지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유능해도 나를 앞 세우로 나중에 하나님을 놓는다면 0,1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앞세우고 가실 것입니까? 나를 앞세우고 살 것입니까? 결정은 내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앞에서 행하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 성을 돌았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입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돌았기 때문에 그 견고한 성읍 여리고성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내 앞에 태산같이 버티고 있는 여리고와 같은 문제가 있다고 하면 내가 먼저 해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무엇이라고 하는 가를 깨닫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가운데 그 문제를 무너질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와 같은 것이 여러분의 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그의 말씀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내 인생의 여리고가 아무리 견고하고 강하다 할지라도 완전히 무너뜨려 정복하는 역사를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여리고 성을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여리고 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순종할 때 무너졌습니다.
여리고 성은 굳게 닫혀있고, 높고 견고했지만, 그 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쉬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통하여 명령하시기를 7명의 제사장들이 일곱 양각 나팔을 손에 들고 제일 앞서 가게 하고, 그 뒤에 언약궤가 따르고, 그 뒤에 백성들이 따르면서,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씩 육일 동안을 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 칠일에는 일곱 바퀴를 돌게 하며, 일곱 바퀴를 돈 후에는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울려 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팔소리가 날 때 백성들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리고 성은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돌 때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수6:10).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성을 돌았습니다. 이것은 이유를 대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육일 동안은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제 칠일에 7바퀴를 돌았다는 사실도 순종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육일 동안은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제 칠일에는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하는지를 그 이유를 당장은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시키는 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이유를 따지지 않고, 절대적으로 순종할 때 저 성을 과거 40년 동안 광야에서 기적을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을 믿고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성이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무너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이 초인적인 지략과 전투력을 발휘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그 여리고 성 주위를 빙빙 돈 것뿐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순종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바로 6:3-5에서 듣는 대로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명령하기를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했습니다. 백성이 그 지시대로 했을 때 실제로 여리고 성의 성벽이 무너지며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는 믿을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본문 20-21절을 봅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에는 따라야 할 하나님의 또 다른 명령이 있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는 일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여 단지 말없이 성벽주위를 도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본문 17-19절에 있는 대로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명령도 순종했습니다. 물론 이 명령에 대한 이스라엘의 순종은 완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곧 뒤따르는 7:1이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아간이라고 하는 자가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훔친 것이었습니다(7:21). 그러나 이 사실을 뒤집어 보면 아간 한 사람 빼고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자세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불가능할 것 같던 여리고 성 함락이라는 기적을 얻어내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결단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일이라고는 그 성 주위를 돈 것밖에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자기희생을 치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슨 희생입니까? 그 부자 도성 여리고성에서 물건 하나에도 손을 대지 않은 것입니다. 좋은 물건 하나라도 갖고 싶은 마음을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전투를 해서 승리를 거두면 패자의 도성을 맘껏 노략질하는 것은 승자의 권리였습니다. 물건도 빼앗고 싶은 대로 빼앗고 사람을 죽이거나 자기 노예로 삼는 것도 자유였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성에는 얼마나 탐나는 것들이 많았겠습니까? 게다가 이스라엘은 사십년간을 광야에서 이동하며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려주셔서 굶지는 않았지만 무슨 호의호식을 해보았겠습니까? 사십년간 광야에서 땀과 흙먼지에 찌들대로 찌들었을 이스라엘 백성의 옷차림은 보나마나 거지 떼들의 그것에 흡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종려나무 우거진 여리고 성에 들어와서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와 이백 세겔 되는 은덩이와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를 보고 눈이 뒤집힐 사람이 어찌 아간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사람 아간 말고는 아무도 그 넘쳐나는 온갖 진귀한 물건들에 손 댈 생각을 안 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인 것입니다. 놀라운 자기포기인 것입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기까지 한 백성입니다. 그 무서운 정신력과 규율을 지닌 백성 앞에서 어떤 민족이 감히 상대가 되겠습니까?
믿고 순종하는 것을 또 다른 표현으로는 자기희생, 자기포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리고 성 주위를 빙빙 돈 일입니다. 사실 그 크고 견고한 여리고 성을 공격해야 할 군사들에게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하루에 한 번씩 성 주위를 돌기만 하고 일곱 번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고 제사장들의 나팔 소리에 맞추어 소리만 지르라는 명령은 받아들이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것입니다. 제정신으로는 그대로 따라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합리적으로는 수용이 되지 않을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그 말씀대로 행한 것은 엄청난 자기포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성적 사고의 희생이고 합리적 판단의 포기인 것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경험과 지식을 내던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맡긴 것입니다. 사람을 신뢰하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사람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역사를 목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만이 가졌던 힘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이유를 묻지 않고 무조건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을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침묵하며 순종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고통을 잘 표현한 동화 가운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임금님이 있었는데, 이 임금님의 이상한 습관은 항상 머리에 아주 큰 모자를 푹 눌러 쓰고는 절대로 벗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이를 닦을 때도, 심지어 목욕을 할 때에도 모자를 벗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임금님이 모자를 벗은 모습을 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임금님의 귀가 당나귀 귀와 같이 매우 컸기 때문에 임금님은 이런 사실을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비밀로 붙인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궁금해 하며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모자를 벗은 모습을 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임금님의 머리를 깎아준 이발사였습니다.
임금님의 머리를 깎아준 이발사들은 이상하게도 집으로 돌아온 사람이 없었지만 어느 나이 어린 이발사가 임금님의 머리를 깎으면서 한 번도 웃지 않고 깎아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 임금님의 귀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왔고,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비밀을 발설하면 그는 곧 죽게 되므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병이 되어 그는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고, 그 배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할 수없이 병원을 찾아 갔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이 병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아서 생긴 병이오! 도대체 무슨 말을 그토록 많이 참았기에 이렇게 배가 많이 나왔소?" 하고 물었습니다. 이발사는 이 말은 절대 비밀인데, 만약 이 말을 하면 나는 죽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말하기를 그렇다면 깊은 산속에 들어가서 삽으로 구덩이를 깊게 파고 그 속에다 머리를 넣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라고 했습니다. 이발사는 의사의 제안대로 깊은 산속에 들어가 구덩이를 파고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는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을 돌 때, 만약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면 그들은 "왜 오늘은 한 바퀴만 돌아야 하나요? 왜 오늘은 어제와는 달리 7바퀴나 돌아야 하나요?" 하면서 그들의 궁금증을 토로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궁금증은 의심을 낳고, 의심은 불평을, 불평은 불신을 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조용히 성을 돌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의심도 있고 불만도 있었겠지만 모두들 침묵으로 궁금증과 불평을 삭이며, 하나님의 깊은 뜻을 마음속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되새임질을 하면 역사를 주장하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그 깊은 계획을 아는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새기고 되새기면 심령 속에는 점점 의심은 사라지고 믿음이 생겼으며, 그 믿음은 굳건한 반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절대적으로 순종하자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던 그곳에 하루는 예수님께서 그 여리고 성을 지나가시게 되셨습니다. 그때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신 후에 내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소경 바디매오는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상식적으로 소경이 눈을 뜬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믿음을 갖았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을 만지시며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마9:29). 그러자 그의 믿음대로 눈이 밝아지고 모든 사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믿음으로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소경이 눈을 뜨는 불가능한 사실도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 여리고 성에 들어간 자들은 다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자들은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해 주실 것을 믿는 것이고, 그런 믿음의 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여리고 성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다만 순종하여 따르기만 하면 어떤 여리고 성이든지 무너지게 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기도할 때 여리고 성은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육일 동안 일찍 일어나서 성을 돌았습니다. 그러나 제 칠일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성을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성을 일곱 바퀴를 돈 후에는 제사장들은 나팔을 길게 울려 불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신호와 함께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바로 그때에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입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성을 일곱 바퀴 돌고, 일곱 제사장들은 크게 나팔을 울려 불고, 백성들이 크게 소리 질러 외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의 모습으로 표현하라면 통성으로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 여리고 성은 무너진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고, 우리를 가로 막는 높고 견고한 여리고 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할 때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앞세우고 여리고 성을 돌 때 이미 믿음의 밧줄은 여리고 성을 묶고 있었습니다. 두 바퀴 돌 때는 두 번 감기고 세 바퀴 돌 때는 세 번 감긴 것입니다. 칠 일째 일곱 바퀴를 돌 때까지 믿음의 밧줄은 여리고 성을 칭칭 동여매었습니다. 마지막 마음을 모아 힘껏 소리를 지른 고함 소리는 감긴 그 믿음의 밧줄을 힘차게 잡아당긴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귀와의 영적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끝까지 결사적으로 저항할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끝까지 대적해야 합니다. 일곱 번 돌라는 말씀은 "이기기까지 대적하라." "절대로 물러나지 마라." "끝까지 대적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일곱 번 기도하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만날 때마다 먼저 하나님과 의논하고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앞세우고 가려는 성도들의 신뢰의 모습입니다.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모세가 산에 올라가 두 손을 들고 기도했던 것처럼, 베드로가 물에 빠져가면서 예수님께 부르짖었던 것처럼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을 때 내 앞에 있는 여리고와 같은 철옹성이라도 무너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앞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라! 우리 인생에 노여 있는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여리고 성들을 하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정복할 수 있는 믿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게 됩니다. 내 모든 이론을 버리고 내 이성적인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리고 성과 같은 모든 문제는 무너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 저 하늘나라에 빛나는 면류관과 상급이 예비 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여리고성을 직접 무너뜨려 주실 것입니다
수 6:1-2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과연 무엇을 가장 중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우상의 병균들로 오염되어 있는 가나안 땅에서 그들이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지속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율법을 항상 가까이 하고 이를 묵상하며 기록된 대로 지켜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요단강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게 하심으로써, 과거 출애굽 1세대가 경험했던 홍해의 기적이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그저 머릿속으로만 기억되는 지식으로 끝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또한 요단의 기적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과는 질적으로 다른 민족이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가장 큰 힘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 여리고 정복을 목전에 두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직접 그분의 군대대장을 보내기까지 하셨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한 사람이 칼을 빼들고 여호수아 앞에 서 있었습니다. 순간 여호수아는 당황하며, 당신이 과연 누구편이냐고 묻습니다. 이때 칼을 빼어 든 자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그러자 여호수아는 즉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이때 여호와의 군대대장이 다음과 같이 명합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이 명령에 여호수아는 즉시 신발을 벗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크게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이스라엘 보다 먼저 그분의 군대대장을 여리고성에 보내심으로써 여리고 정복 전쟁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즉 이 전쟁은 곧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따라서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순종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손에 칼을 든 자가 자신은 여호와의 군대대장으로써 지금 이곳에 왔다고 하자, 여호수아는 즉시 엎드리며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묻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하자, 여호수아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신발을 벗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철저히, 또한 즉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여호와의 군대대장은 지금 여호수아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시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여리고는 어떤 곳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전쟁을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는 곳, 그래서 이제 그 땅이 하나님의 거룩한 땅으로 회복되는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이 여리고성 앞에 다다랐습니다. 그때 그들이 본 것은 굳게 막힌 성문이었습니다. 여리고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비해서 일단 여리고성과 그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성 안으로 들여보낸 후에 문을 굳게 잠그고 이스라엘이 이 성읍을 그냥 포기하고 지나갈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여차하면 성벽 위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을 막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는 여호수아 6장 1절의 말씀만 보면 여리고성은 결코 쉽게 무너질 수 없는 요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6장 2절은 이러한 요새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즉 아무리 그들이 성문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철통같은 방어막을 구축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참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십니다. 성벽을 타고 올라가거나 성문을 부술 장비를 준비하도록 하거나 어떤 치밀한 작전을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저 매일 여리고성을 한 바퀴씩 6일 동안 돌고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반응은 뭐였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도저히 받아 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여리고성을 돈다고 해서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여리고성이 무너지겠습니까?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아해 했다는 구절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이 말씀에 묵묵히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왜입니까?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 정복전쟁에 참여하면서 해야 하는 일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묵묵히 순종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언약궤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도는 순간에 함께 했습니다. 즉 행렬의 첫 부분에는 무장한 호위병이 섰고 그 뒤에는 제사장이 행렬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따랐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여리고성을 도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 행렬의 초점이 하나님의 언약궤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 ‘여호와의 궤’ 등으로 표현된 단어가 1-14절 사이에 무려 10정도나 집중적으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전쟁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리고성 정복전쟁에서 7이라는 숫자도 주목해야 합니다. 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 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여기서 보십시오. 제사장이 일곱 명입니다. 일곱 명의 제사장이 일곱 개의 트럼펫을 불며 7일 동안 여리고성을 돌았고, 7일째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여기서 7은 완전수입니다. 즉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 하나님의 완전한 사역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은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습니다.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께서 7일 동안 완전한 창조사역을 이루신 것 같이 여리고성 함락도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이루실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행하자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20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들을 때에 크게 소리 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그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성문의 빗장이 걸리고, 어디에도 뚫을만한 틈이 없었던 여리고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그것도 일시에 허물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보통 정복전쟁의 클라이맥스는 어떤 장면이겠습니까? 당연히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 6장에서는 단지 성벽이 무너져 내렸고, 이스라엘이 그 성을 점령했다는 정도만 짧게 전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정복에 대한 별다른 설명 없이 간단히 사실 자체만을 요약하고 넘어가 버린 겁니다. 왜일까요? 이 전쟁의 진정한 클라이맥스는 여리고성이 무너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장벽을 만나게 됩니다. 어떨 때는 그 성벽이 너무도 높아 보여서 바라보는 것조차 아찔하기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앞이 캄캄한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성벽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벽 앞에 무릎을 꿇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저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칼과 창을 만들기보다 우리의 삶을 성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여리고는 하나님께서 직접 무너뜨려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뜨개질이 여리고를 무너뜨렸다.
수 6:15-21
여리고를 맘껏 조롱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정복의 첫 전투를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치르라고 명했습니다. 여리고 성에서 보기에는 사격 연습하기 아주 적합하게 횡대로 열을 지어서 무방비 상태로 찬양하며 성 주변을 걸어서 돌게 했습니다. 제 삼자가 볼 때는 마치 여리고 성의 주민에게 “내 잡아봐라!”는 식으로 놀리는 것 같습니다. 여리고로선 약이 오르고 분노에 차서 뭔가 반응을 해야 마땅한데 일주일 내내 쥐 죽은 듯 침묵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엄청난 권능 앞에 그들의 심장이 이미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던 철옹성 같은 성벽을 믿고 의외로 편안하게 지냈을지 모릅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 기괴한 전투 방식 때문에 두려웠겠지만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조금씩 긴장이 풀렸을 것입니다. 대엿새가 지나자 평온에 익숙해지고 점점 신경이 무뎌져 갔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계획한 대로 장기간 농성하면 이스라엘이 제 풀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고 말 것이라고 안심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여리고 성 주민으로선 이스라엘이 며칠 동안 몇 바퀴를 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7일 째는 한 바퀴가 아니라 계속 돌자 다시 바짝 긴장하며 예의 주시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일곱 바퀴째에 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고 그러자 전차 두 대가 교차할 수 있는 그 튼튼하던 성벽이 순식간에 폭삭 다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가 사방에서 물밀 듯이 쳐들어와 완전히 진멸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진멸하라고 명령했다고 해서(21절) 우상 숭배를 하는 이방 족속들을 극도로 미워하는 비정하고 잔인한 분이라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애굽에서 아홉 번이나 큰 재앙을 내리며 회개의 기회를 주었으나 바로가 회개할 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장자들이 죽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여리고도 그 사십년 전의 홍해의 기적을 통해 당신의 엄청난 권능에 대해 익히 알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사백 년간이나 노예로 고생시키면서도 가나안의 죄악에 대해선 계속 참아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세상 어느 신에게도 없는 그런 큰 자비를 지금 7일 째 일곱 바퀴까지 여리고에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당시의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제사장의 양각 나팔 소리 빼고는 온 사방이 고요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성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정말 입에 지퍼를 달아놓은 듯이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제사장을 따라 걷기만 합니다.
오래전 영화 ‘미션’(Mission)에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존 원시부족들에게 파송된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다 살해당합니다. 주인공 선교사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임지로 떠났는데 활과 창으로 무장한 원주민을 만나자 작은 피리를 꺼내어 불었습니다. 영화에선 엔니오 모리코네가 작곡해 아카데미 음악상까지 받은 절묘한 선율이었으나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수도사가 연주할 수 있는 곡조는 찬양뿐입니다. 당장 죽일 듯이 달려들던 원주민들은 그 신기한 음악에 취해서 처음으로 그 선교사를 살려주었고 드디어 복음의 씨앗이 그곳에 뿌려지게 됩니다.
지금 여리고에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리고 백성들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찬양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들 우상 신에게 바치는 음악과는 곡조가 달랐을 것입니다. 자기들 영혼을 울리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겸손하고 정결해졌을 것입니다. 화려하고 거창한 신상도 없고 감각적인 춤도 없습니다. 생전 처음 듣는 곡조일 뿐 아니라 음악을 듣고 마음이 깨끗해지기도 생전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흥분만 일으켜서 음행으로 이끄는 우상 신전의 세속적인 음악과는 차원이 달랐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족속 여리고도 그만큼 긍휼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찬양이 일주일 째 성을 완전히 감싸고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백성들을 당신의 사랑의 품 안에 안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 눈에 보이는 증거로 이스라엘이 공격할 기색을 전혀 내비취지 않게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리고는 그 잘난 성벽 하나만 믿고서 하나님이 먼저 내밀어주신 긍휼의 손길을 끝까지 뿌리쳤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
여리고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첫 전투였습니다. 그렇다고 진멸하는 본보기를 보여서 다른 가나안 족속들에게 경고하여 두려움을 심어주려는 단순한 뜻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전쟁의 첫 전투는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는 과업의 첫 열매인 셈입니다. 첫 열매는 반드시 거룩한 하나님에게 거룩한 모습으로 바쳐져야 합니다. 우상숭배의 죄악으로 타락한 더럽고 추한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어선 안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성벽을 직접 일시에 전부를 무너뜨린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여호와의 진멸하라는 명령을 정확히 알려면 모세오경 전체를 종합적 심층적으로 분석해야만 합니다. 그 가장 근본적인 뜻만 말씀드리면 이스라엘더러 절대로 더럽고 추한 죄악과 공존하지 말고 그들과 통혼하여 우상숭배의 유혹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진멸 대신에 이스라엘더러 먼저 화평하기를 요청하고 그 제안을 거절하고 대적하면 전쟁을 치르라는 원칙을 명시하신 하나님이십니다.(신20:10-12) 여리고 이후로는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자진해서 항복하는 성과는 전투하지 않았을 것이며 여리고처럼 끝까지 대적하는 성들만 정복했을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여리고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지 조롱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불신자들을 향해서도 천하보다 더 무거운 부담감을 갖고서 진정으로 애통해하며 안타깝게 바라보십니다.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원죄 하의 모든 인간이 사탄과 죽음의 세력에 눌려 있는 상황에 대해 통렬히 분노하면서 크게 슬퍼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울었다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여리고 성에 대한 최근의 고고학적 탐사가 알아낸 사실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곡물을 많이 비축해 놓은 것이 밝혀졌습니다. 마침 보리를 처음 추수하는 때와 겹쳐 장기 농성 계획이 무리 없이 채택되었음을 입증합니다.
무엇보다 성벽이 일시에 안쪽으로 폭삭 무너졌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지진으로는 그렇게 무너질 수 없다고 하며 당시에 그 지역에 지진이 일어났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홍수로 물이 침투해서 지반이 약해져서 무너진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부분적으로 무너지면 먼저 무너진 곳의 피해가 가장 심해 나중에 그 원인을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지진도 없는데 성 전체가 단번에 동일한 모습으로 무너진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끔 TV 뉴스에서 보듯이 오래 된 빌딩에 무게 중심이 되는 요소마다 폭약을 부착해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다이너마이트가 없던 고대에 그런 방식으로 무너져 내렸으면 강력한 초자연적인 힘이 작동되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단번에 무너졌으니까 성 위의 군인들은 아무 대비도 못하고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성안의 주민들도 너무나 놀라 큰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일시에 성안으로 침투해서 진멸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정미한 심판을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역사하는 방식이 참으로 오묘하고 정미하지 않습니까? 성이 안쪽으로 무너졌다면 얼마든지 고라당의 반역 사건 때처럼 땅을 열어서 모든 백성을 함몰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구태여 당신의 백성들의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고 후대에 더 큰 권능으로 기억될 텐데 오로지 성벽만 무너뜨렸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여리고 주민이 그 튼튼한 성벽이 자기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온전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 한에는 아무리 세상에서 최고 큰 것에 의존한들 절대로 보호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미국의 일부 어리석은 부자들이 한적한 리조트로 피난 갔으나 오히려 자기들처럼 도망친 부자들이 몰려서 더 많은 환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핵전쟁 대피소를 구입하는 자들도 늘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전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미개한 원시종교의 거대하고 기묘한 신상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자기에게 안전과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붙들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여리고는 바알보다는 사실상 성벽이 우상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진실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당신보다 더 좋아하고 섬기는 존재나 물건이 있다면 반드시 철저하게 응징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이름에 먹칠하고 당신의 영광을 가리면 그냥 넘어가시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그 잘못을 당대는 물론 후대 사람이 정확히 깨달을 수 있는 방식으로 벌하십니다.
출애굽 때에 애굽에 내린 아홉 재앙은 그들의 중요한 우상 신들을 완전히 휴지조각으로 만들어서 당신만이 천하를 다스리는 유일한 신임을 이스라엘이 아니라 애굽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인생 말년에 이삭을 바치라고 명했습니다. 틀림없이 아브라함은 이삭을 자기 생명보다 귀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당신보다 아들을 더 사랑하는지 엄숙하게 물었던 것입니다. 밧세바와 간음하여 낳은 아이를 성전에서 다윗이 밤새 기도했어도 앗아간 것은 그 죄를 심각하게 깨달으라는 뜻이었습니다.
심판뿐 아니라 은혜를 베푸실 때도 마찬가지 방식을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생산이 전혀 불가능한 때에, 그것도 많은 인간적 시행착오를 겪게 한 후에 정말로 자기 몸에서 이삭을 나게 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당신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이뤄짐을 온전히 믿게 하여서 이삭을 바치는 자리에까지 이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의 얼굴에 직접 손을 대고 낫게 해주셨습니다. 너무 추해서 아무도 근처에 가지 않는 문둥병자도 직접 살을 맞댈 정도로 사랑하심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자가 아님을 보여준 것입니다. 나면서 봉사였던 자는 진흙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 우물에 가서 씻게 해서 낫게 해주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새로운 눈을 창조해준 것입니다. 당신의 극렬한 대적자 바울도 사흘간 눈을 멀게 했다 다시 보게 해주었는데 율법의 멍에에 묶인 영적 봉사를 십자가 은혜의 구원으로 이끈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뿐만 아니라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십니다. 매사를 당신의 영원하고 완벽한 뜻과 계획에 따라 거룩하게 통치하십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당신만의 거룩하고 온전하신 뜻이 있으며 또 그래서 반드시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특별히 당신의 백성을 향해선 그분에게 중요하지 않는 사건이나 사람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회개하고 묵상하는 기회
여러분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여리고 성 승리에서 궁극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그 주변의 땅을 밟으면서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이 잘된다는 가르침입니까? 그럼 땅을 밟으며 돌지 않으면 즉, 일상적인 기도는 응답 받기가 힘들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아홉 번이나 살펴보면서 강조했듯이 이스라엘의 행진은 기도가 아니라 승리의 찬양이자 목숨을 것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세상 앞에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하게 변화되는 모습으로만 드러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아무 소리 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에서 언제 창이나 화살이 날아올지 몰라서 하나님께 지켜 달라는 기도는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칠일 째 일곱 번까지 돌면 성을 무너뜨리겠다고 약속했으니 돌긴 도는데 왜 꼭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해야 하는지 의아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와 미숙한 영성으로는 도무지 분별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신세대더러 침묵하며 행진만 하라는 명령은 모든 인간적인 수단은 물론 생명까지 당신께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여리고가 아무 대응을 하지 않자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해보는 시간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들로선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이 주실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불가항력적인 코로나 사태로 모두가 집에 격리되자 그동안 돈만 주인으로 열심히 섬기던 불신자들마저 자기 인생을 절대자와 연결해 진지하게 묵상할 계기가 되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돔과 모압과는 싸우지 말고 우회하라, 음행으로 이끈 미디안 족속과 발람을 심판하라, 급류가 넘치는 요단을 건너라, 전쟁을 눈앞에 두고 할례와 유월절 의식을 치르라는 등의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모든 지시는 선뜻 기쁨과 감사로 행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자꾸 주저하게 만들고 담대한 믿음의 결단과 순종이 요구되는 힘든 일들뿐이었습니다.
거기다 그 척박한 광야에 부모를 묻어야만 했던 쓰라린 추억도 있습니다. 비록 아침저녁으로 구름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고 만나 메추라기 반석의 생수로 광야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할 수 있었지만 그것과 별도로 당시로선 그분의 명령과 역사들이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며칠 간 곰곰이 따져봤더니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모든 일이 선하게 결말 지어졌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하나님만의 은혜와 권능이 있었음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 모든 개별 결과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유익과 구원과 연결되었고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겠다는 사백년 전에 선조들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당신은 세상의 어떤 제약과 훼방 없이 그 길로만 앞서서 꾸준히 걸어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방 대적들과 자연 기후 지리 등 그 어떤 것들도 그분이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불순종과 주저함만이 그분의 걸어가시는 속도를 지체케 만들었다는 점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영적 깨달음의 내용과 깊이는 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 모두가 부인하려야 할 수 없었던 두 가지 진리에는 도달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그분께 불순종해선 당장 자신들이 손해볼 뿐 아니라 그분의 엄위한 징벌이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같은 맥락에서 자기들 부모가 광야에서 너무나 헛되게 인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자기들은 앞으로 진군하여 가나안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가 이스라엘로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믿음의 배수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고 초조하면서도 지루하고 언제든 생명이 날아갈 수 있는데도 열 세 바퀴를 군말 없이 행진했던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 땅을 차지하지 못하면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습니다. 광야로 돌아가는 것은 죽기보다 싫습니다. 하나님이 이곳에서 죽이면 죽이고 살리면 살리십시오.”라고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 이심전심으로 합의했을 것입니다. 열세 바퀴 채에 이르자 그 간절한 소원을 담아 하나님의 큰 역사를 보여 달라고 큰 소리로 외친 것입니다.
여리고가 기도로 무너졌다는 교만
금주까지 여리고 성이 함락된 배경, 근거, 요소, 목적들을 여호수아가 새 지도자로 세워진 이후로만 열 번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모세의 출애굽과 족장들의 시대를 거쳐 아브라함을 불러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완벽한 주권과 섭리가 종합적 체계적으로 정교하게 작용되었는지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진리는 가장 적합한 시기에 가장 적합한 사건이 가장 적합한 인물에게 일어났다는 것과 그 각각의 사건에 하나님의 고유한 영적 의미 진리 훈계 등이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의 땅 밟기 기도로 무너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신 통치를 그렇게 간단하고도 시시하게 이해하고 치워선 안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은 인간 신자가 열심히 기도만 하면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는 너무나 교만한 것입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신자들의 진실하고도 간절한 기도의 권능과 은혜를 폄하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여 여리고 같은 엄청난 초자연적 기적도 일으켜주지만 그분의 뜻과 계획으로 이미 확정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간도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행한 기도보다 더 간절하고 순전하게 기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기도인데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서 이뤄지지 않았지 않습니까?
최대한 양보하여 여리고 성을 돌 때에 하나님의 약속을 끝내 믿지 못한 일부 백성들이 성벽을 무너지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칩시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럼 그 기도는 누가 시킨 것입니까?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부터 하나님이 심어준 것입니다.
무조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 부모도 자식의 성장 단계에 맞추어서 힘에 부대끼는 과제를 주어서 자식이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 극복할 수 있게 양육합니다. 그 힘든 가운데 부모의 뜻이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고 순종하는 자식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그럼 비록 자녀들 본인이 수고했지만 올곧게 자란 근본 배경과 근거는 부모의 사려 깊은 계획이지 않습니까? 또 그런 훈련이 끝나면 자식이 전혀 기대도 않았는데 부모는 여리고 성 승리처럼 최신 스마튼 폰 같은 엄청난 선물을 준비해 놓지 않습니까? 신자의 기도와 하나님의 역사도 동일한 방식으로 서로 상충되지 않고 조화 통일 되어서 그분의 일을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기도만 한다고 도깨비 방망이처럼 뿅 하고 응답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전부 초자연적 기적으로만 채워집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어리석은 우리와 아주 많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그분은 신자의 기도를 통해 신자와 크게 다른 그 당신의 길을 역사하시길 기뻐합니다.
여리고성의 특이한 전투와 승리는 역사상 딱 한번만 있었습니다. 성경에 또 다른 예는 없습니다. 그 당시 상황에 딱 맞는 방식이었습니다. 그것도 사백 년 전부터 계획해 놓은 승리였습니다. 다른 세대에서 다른 상황에 처하면 그에 합당한 다른 방식의 승리를 주십니다.
가데스 바네야에선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이 아낙의 후손처럼 기골이 장대한 것에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담대히 믿음으로 전투에 임했으면 결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노예근성에 절은 그 약점을 고쳐주기 위해서 다윗이 골리앗을 간단히 물리친 것 같은 엄청나고도 손쉬운 승리를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신자 인생을 뜨개질 하는 하나님
우리의 믿음도 이스라엘처럼 연약하고 영적 분별력도 어리석어 각 개별 사건을 겪을 때마다 아주 힘들고 하나님의 뜻이 이해도 되지 않습니다. 한 사건이 완전히 끝나도 그 뜻을 정확히 깨달을 수 있는 신자는 드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신자의 일생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우리에게 맡겨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각자에게 가장 적합하게 마련해 놓은 계획에 따라 일생을 거룩하게 인도해주십니다. 당신의 절대적인 섭리와 주권을 당신만의 고유한 방식과 시기에 따라서 신자의 현실 삶에 완벽하게 실현시킵니다. 신자로 당신의 궁극적인 영광으로 참여케 하고 신자 본인에게도 큰 유익이 되게 이끌어주십니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은 신자의 일생을 뜨개질 하듯이 주관하십니다. 형형색색의 실을 갖고 짜기 시작하면 그 실만 봐선 또 그때까지 짠 형태로만 봐선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각 개별 실에도 온갖 색깔이 섞여 있고 그런 실들이 어지럽게 가로 세로로 엮어져 나가므로 당시로는 도대체 이해도 안 되고 곤혹스럽기만 합니다. 다 짜고 나서야 너무나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완벽한 옷이 되고 그런 복잡한 색깔의 여러 실들이 없었더라면 그 무늬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국 입성시키기 위해서 신자에게 짜서 입혀가고 있는 예복에는 신자 본인이 계획 소망 상상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너무나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질 것입니다. 각 신자에게 가장 합당하고 그 신자에게만 어울리기에 다른 사람이 입어선 전혀 멋지지 않는 그런 옷을 지금도 뜨개질 하고 계십니다.
어지간한 믿음으로는 자기 인생의 마지막 그림을 알 수 없고 그때그때 일어나는 개별사건들의 의미조차 모릅니다. 신자로선 그냥 순순히 기도하면서 앞서 가시는 주님을 묵묵히 따라갈 뿐입니다. 그러다 그 옷이 다 지어질 무렵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처럼 하나님이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다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약속을 사백년 전부터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차지할 첫 열매가 이제 열세 바퀴 채 돌면 실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뜨개질로 치면 마지막 코에 매듭을 지어서 옷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옷이 얼마나 아름답게 짜였는지 보고 싶은 열정과 소망으로 충만해서 마지막 외침으로 추측컨대, “할렐루야 여호와를 송축합니다!”라는 한 목소리로 터져 나왔고 성벽은 일시에 무너졌습니다.
그 모습을 멀리 떨어진 진영에서 지켜보던 노인과 여자들과 아이들 나머지 백성들도 정말로 땅이 흔들려 지진이 일어날만한 기쁨의 함성을 함께 질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한 하나님, 한 성령, 한 믿음, 한 소망 안에서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세울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를 하나님 당신께서 모든 추한 것들이 진멸되어서 온전히 순전하게 바쳐지도록 만든 것입니다.
신자는 자기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눈으로 볼 줄 알아야 하고 또 그렇게 분별한 것에 걸맞게 반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에만 시선을 집중하면 앞뒤를 헤아리지 못하고 그저 불안 염려 초조해지면서 하나님에 대한 원망 불평만 쌓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도 마찬가지로 광대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뜨개질이 끝나면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이 반드시 그려질 것이라는 진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이 사태가 끝난다고 당장에 더 풍요롭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더 어려운 일이 계속 생기고 어쩌면 우리 세대에, 아니 그 다음 다음으로 아무리 세대가 흘러도 이 땅의 고난은 없어지지 않고 더 심해질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기어이 사백 년 뒤 후대에게 온전히 이뤄졌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신자는 주님이 다시 오셔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진정으로 소망하며 감사와 기쁨과 자유와 평안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의 삶이 아무 형통이 없고 광야 같을지라도 그 궁극적인 영광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축복이요 특권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를 때에는 그와 정반대의 영원한 절망과 죽음으로 걸어갔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 길이 옳다고 끝까지 고집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오직 성령이 간섭하는 은혜로 우리 인생길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 하나만 해도 평생을 감사해도 모자라지 않습니까?
내가 나를 봐도 부끄럽기 짝이 없고 연약하고 어리석고 교만하고 죄가 많았어도 예수님은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그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지금도 그 큰 사랑으로 내 인생에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형형색색의 씨줄 날줄을 엮어서 뜨개질 하고 계십니다. 진정으로 그 마지막 그림을 보기를 소망하기에 이 땅에선 아무리 힘들어도 묵묵히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서 행진하는 것이 신자의 인생입니다. 그럼 현실의 삶이 어떤 모습이던 간에 영적으로는 여리고의 오묘하고도 엄청난 승리를 매일 충만하게 누릴 수 있습니다.
승리하는 비결
여호수아 6:15-21
모든 승부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축구 경기 하나만 봐도 무승부가 나면 연장전을 치르고, 그래도 승부가 안 나면 마지막에는 페널트 킥을 해서라도 승자를 결정합니다. 결국 승부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는 것이죠. 물론 저도 상관없는 승부도 있습니다. “누가 돈을 더 많이 버냐?”, “누가 더 힘이 세냐?” 하는 세상 사람들이 싸우는 것에는 저도 상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져서는 안 되는 승부, 우리 모두가 반드시 승자가 되어야 하는 승부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 싸움입니다. 다른 것은 다 져도 영적 전쟁에서만큼은 반드시 승리해야만 합니다. 우리 중 영적 전쟁에서 지고 싶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의지만 가지고 다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승부가 그렇듯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함께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여호수아의 모습을 통해 영적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지 그 비결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지런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첫째로, 부지런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수 6:15) 제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정복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사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 일어났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이처럼 성경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승리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8장 9절에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을리 해서는 아무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려면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일을 하려거든 “부지런하며,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고 권면 했습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사람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늘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 열심히 하는 사람, 성실하게 사는 사람, 부지런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여호수아는 부지런했습니다. 늘 남보다 일찍 일어나서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십니다. 왜냐하면 나태해지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썩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사는 것, 부지런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고 탁월한 사람도, 게으르고 나태하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배짱이 같은 사람을 사용하시지 않으십니다. 게으른 사람은 요행과 술수만 의지하기 때문에 결국 부정직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게으른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능력 있으나 게으른 사람 보다, 부족해도 성실하게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세월을 아껴 부지런한 신앙생활을 할 때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됩니다.
순종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지런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부지런한 사람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보실 때 적극적으로 반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의 사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단순히 아침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가 기가 막힌 전략과 전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어떻게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돌아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토 달지 않고 주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주께서 일하시겠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묵묵히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여호수아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영적 승리가 주어집니다.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은 패배하는 삶이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승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생활을 하면 반드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성결한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셋째로,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수 6:21)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살아 있는 가축을 다 죽여야 한다니 얼마나 아깝습니까? 소 한 마리가 얼마나 귀합니까? 소 하나만 있어도 밭을 갈고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양과 나귀는 얼마나 유용하겠습니까? 양이 있으면 우유도 짜고 털도 얻을 수 있습니다. 나귀가 있으면 짐도 나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모든 유익을 뒤로하고, 여리고 성의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진멸한 것은, 우리 영혼 안에 있는 모든 추하고 더러운 죄를 모두 버린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하게 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그 안에 죄를 가지고 있으면 영적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불의한 죄, 부정한 죄, 더러운 죄가 있으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불의와 불법 그리고 죄에 대해서 방관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부정한 것을 제거해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여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살펴 보았습니다. 첫째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둘째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셋째는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의 삶,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