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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한번 심심해서 써 본 글 때문에 논란이 생기는 바람에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네요. 이번 글로 땡치고 빨리 제가 하던 일 기한 안에나 마쳐야 겠습니다.
아무튼 제 글에 이리 저리 댓글도 많이 달렸는데...일일히 댓글 달기 보다는 한꺼번에 모아서 씁니다.
제가 항상 늘 의문을 품고 있던 것 가운데 하나는....
한반도 주변에는 역사상 한족을 비롯해 흉노족, 몽골족, 거란족, 여진족(만주족), 일본족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라 이후 한반도의 왕조들은 항상 한족 왕조와는 친했는데, 아니 먼저 신하를 자처하며 복속했는데, 왜 유목민 왕조와는 대립했을까요?
물론 나중에 정복당해 신하가 되기는 했지만, 처음에 말입니다. 처음 유목민 왕조와 만났을 때 왜 항상 대립했느냐는 것이죠?
신라 이후 한반도 왕조가 벌인 대외 전쟁은 모두 유목민족들과 했습니다. 대신 한족 왕조와는 단 한번도 전쟁을 안했습니다.
이에비해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족과 대립도 했지만 같이 한편 먹은 적도 많습니다. 물론 한족 왕조와 친선을 유지한 적도 있지만 대립한 적이 더 많았죠. 특히 마지막에는 수나라 당나라와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였습니다.
답은 각자 생각 해보시고...근데 저는 말이죠. 우째 그리 한족들과는 친하게 지내면서 혈연적으로 문화적으나 언어적으로나 한민족과는 훨씬 더 가까울 수 밖에 없는 유목민족들과는 그리도 박터지게 싸웠는지가 정말 의문입니다.
이도형님 말을 약간 바꾸면 '중국에게는 비굴하고 다른 민족에게 콧대를 세웠던' 게 아니라 세우려고 하다가 귀싸대기 맞았는지...혹시 화교 왕조의 '원초적 본능' 아니었을까요?
김유신은 당나라 군대한테 짜장면 배달한 철가방에 불과했습니다.
아래 2584번 글에서 열거했듯이, 신라계는 끈질기게 중국과의 연관성을 찾습니다. 나라 없어진 뒤 고려 왕실에 들어가서도....신라계들은 중국 얘기만 나오면 일단 '오르가즘'부터 느끼는 모양입니다.
문무왕은 626~681년 재위했습니다. 문무왕비가 그가 죽은 뒤 바로 세워졌는지 아니면 나중에 세워졌는지는 모르겠는데...아무튼 투후 김일제를 자신의 선조로 언급한 것은 신라 왕실의 핏줄과 정통성을 한나라에 투항해 충성을 다했던 김일제에게 찾았다는 말입니다.
즉 김일제처럼 자신과 그 후손들도 중국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표시라고 봐야죠.
대신 대왕암 전설(?)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에 대한 극도의 적개감을 드러낸 것이고요. 사실 일본이 지금 우리와 원수지간이지만 삼국 시절만 해도 백제와 형제국이나 다름 없었죠. 즉 지배층이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죠.
이른바 당나라를 쫓아낸 매소성 싸움이 서기 675년입니다. 이걸 두고 신라의 자주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짐승도 자기 영역은 지키는 법입니다.
지난해 12월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된 사진입니다. 한 이스라엘인이 페루의 야루강 일대를 관광하다가 찍은 사진인데...딱따구리가 3미터 길이의 뱀과 혈투를 벌입니다. 뱀이 딱따구리의 둥지를 침입하자 싸운 거지요.
신라의 매소성 싸움이란 결국 이 정도 입니다. 자기 영역은 포유류나 조류도 지킵니다. 이것도 못하면 곤충 수준입니다.
당나라가 고구려 공격해 이른바 삼국통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김유신이 한게 뭡니까? 짜장면이나 배달했던 철가방 수준 아닌가요? 이에비해 연개소문한테 당한 당 태종 이세민은 사실상 화병으로 죽었지요. '듣보잡 흉노'나 끌어들여 신라의 위대성을 말하기보다는 이세민도 굴복시킨 연개소문과 한번 겨뤄봤다는게 신라의 자랑거리 입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당 태종 때 당나라의 국력은 엄청났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1945~1960년대 미국 수준이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이세민을 아작내, 그 자존심 강했던 태종을 '고구려는 정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게 만들었던 것은, 베트남이 프랑스와 미국을 굴복시킨 것보다 더한 것입니다.
이런 연개소문을 폄하하고 철가방 김유신을 찬양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오늘날 애국세력을 자부합니다. 조갑제씨가 대표적이죠? 이들이 말하는 애국? 그건 애국이 아니라 '신라 부족주의'죠.
이런 연개소문이 있는데, 기껏해야 오늘날로 치면 당나라의 사단장이나 군단장급 벼슬을 했고, 탈레스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대패해 종이 기술자가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세계사에 '찬조 출연'한 고선지가 찬양 대상이 됩니까? 고선지의 힌두쿠시 돌파는 어쩌고 저쩌고....고선지라는 이름만 들어도 우는 애가 울움을 그쳤다는 둥....(소수민족 어린아이까지 얼마나 잔인하게 잡아죽였으면 그런 소리까지 나왔을까?
다 화교 왕조의 후예들이 가지는 '원초적 본능' '오르가즘적 마름의식'이 아니라면 뭘로 설명합니까?
신라 이후 화교 왕조의 후예들이 감행한 대외 정벌은 거칠게 말하면 딱 2가지 입니다. 월남전에 미국의 꼬붕으로 참전해 같은 약속민족인 베트남 양민들 학살한 것. 또 하나는 해외 섹스 관광 나가서 '백마' 타고 각종 체위를 종횡무진 신출귀몰하게 구사하며 '대한 남아'의 기상을 전 세계에 드날린 것.
요즘 한류? 요것 자칫하면 한 50년 뒤 중국인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돈받아 사는 기예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고구려 후예와 화교 왕조의 후예 구별법
잘 아시다시피 단재는 아와 비와의 투쟁으로 역사를 파악했습니다. 그는 한국사를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립으로 파악했습니다. 유교가 조선에 들어오면 조선의 유교가 되어야하는데 유교의 조선이 되어버렸다고 한탄했습니다.
맞습니다. 성리학이 조선에 들어왔으면 조선의 성리학이 되어서 새로운 해석도 나오고 그를 바탕으로 조선 특유의 유학이 성립했어야 했는데 단 한 글자 의심을 품었다는 이유로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단재는 이런 황당한 일이 왜 계속 되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었고...그 뿌리가 신라가 외세를 끌어들여 만주 땅을 잃고 당나라의 노예가 된 것에 있다고 봤습니다. 신라가 당나라 끌여들어 이용해먹고 만주 땅만 차지하고 당나라를 쫓아버렸다면 단재는 <조선상고사>를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단재가 말한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립,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결국 부여족(동이족?)과 '듣보흉'(듣보잡 흉노)의 대립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고구려와 화교왕조의 대립이죠. 또 다른 말로 하면 연개소문과 김유신의 대립입죠.
고구려, 연개소문의 후예가 묘청, 최영, 정여립, 전봉준, 안중근, 김구, 장준하 등이죠.
화교왕조, 김유신의 후예가 김부식, 이성계, 선조, 고종, 이완용, 이승만, 박정희 등이죠.
그 중간에 있어 판단하기 힘든 인물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종대왕. 화교왕조의 왕이었으나 제가 볼 때 다른 건 제쳐두고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정신적 DNA는 연개소문의 후예입니다. 한글 창제를 아주 폄하하면 결국 중국어 발음 부호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으나, 어쨌든 한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복거일씨가 열렬히 주장하듯 아마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지금도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지 못한 것이 원통하고 분한 사람들이 널려있는데...
흉노 피를 끌여들여 신라의 위대성을 말하는 시도가 부질없듯이 혈연적인 피는 의미가 크게 없습니다. 아예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만 최소한 생물학적 DNA 보다는 정신적 DNA가 훨씬 중요합니다.
정신적 DNA가 바로 부여족(동이족?), 고구려, 연개소문의 후예냐 아니면 듣보흉, 화교왕조, 김유신의 후예냐를 결정합니다.
따라서 본인의 조상이 옛날 고구려를 공격했던 당나라 장군이었다고 할지라도 지금 현재 나는 화교 왕조의 후예일 수 없죠.
신채호 역사관은 지금도 상당히 유효합니다.
너무 단순하다고요? 예 맞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뼈대만 말했습니다. 수많은 요소가 서로 얽히고 ㅤㅅㅓㄺ혀 역사를 만들기 때문에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의 줄기를 잡아보면 위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립은 지금도 계속 중입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갈등, 이라크 파병을 둘러싼 갈등, 남북 문제를 둘러싼 갈등 등등 아주 대단히 많습니다. 사회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계급적 갈등과는 다르다고요? 그럴까요? 저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단재와 같은 역사관에 찬성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의 차이는 결국, 현재 한국인이 한반도에 살면서 한국어를 말하고 김치 찌개를 끓여먹고 있는 것, 즉 한국인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게 과연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가에 대한 해석 차이에서 비롯되는 면이 큽니다.
신채호식라면 오늘날 '한민족'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고구려, 연개소문의 후예들이 고통받고 억압받으면서도 끈질기게 버텼기 때문입니다. 민중사관과 완전히 같지는 아니해도 비슷한 면이 많습니다.
그에 비해 다른 견해는 화교왕조의 후예들 때문에 그나마 목숨 보전하고 살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흔히들 듣는 말이죠? 자주적으로 나가야 하면 "그나마 강대국에 얹혀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거야" 흔히 듣는 말입니다. 이런 소리 주로 어디에서 나옵니까? 보수적인 사람들 입에서 나옵니다.
앞의 소리는 진보적인 사람들 입에서 나옵니다.
즉 한국사를 자주파와 사대파의 대립으로 보는 것은 무슨 켸켸묵은 사관상의 대립이 아니라 바로 한국 사회 지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급, 계층 대립과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이런 저런 면에서 볼 때 단재 신채호가 말한 아와 비아의 대립과 투쟁은 결코 단순히 일제하 독립 운동의 필요성에 따라 급조한 말이 아니라 한국사에 대한 냉정한 판단과 관찰력의 소산이라고 봅니다.
말 한마디 더하면, 단재의 역사관은 일제하라는 특이한 조건에서 형성된 것으로 일반화할 수 없고 한계가 많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럼 두계 이병도의 역사관은 식민 정부의 간섭없이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졌나요? 이병도가 일제하에서 어떤 벼슬을 했는데?
같은 조건에 대해서 이중잣대 사용하는 그런 심리,,,다 '화교 왕조의 후예들이나 가지는 원초적 본능이죠.
고구려는 스파르타가 아니라 아테네죠.
마지막으로 고구려에 대한 아주 심각한 오해가 있는데요. 고구려가 군사적 무력만 강한 스파르타식 사회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천만에 만만에 콩떡입니다. 고구려는 그 벽화나 무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볼 수 있듯이 문화적 수준이 아주 높은 나라였습니다. 즉 아테네였습니다.
지금 남겨져있는 유물만 봐도 고구려보다 300년이나 더 갔고 전쟁도 거의 겪지 않았던 신라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보입니까 아니면 고구려 문화적 수준이 높아보입니까? 고구려가 훨씬 더 높습니다.
더구나 고구려는 대단히 개방적인 사회였습니다. 말갈족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드넓은 만주 벌판과 다른 지역의 유목민들이 쉽게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개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다민족 사회였습니다.
이태백의 <고구려>를 한번 볼까요?
金花折風帽(금화절풍모) : 금꽃 달린 절풍모를 썼는데
白馬小遲回(백마소지회) : 백마는 슬슬 머뭇거리네
翩翩舞廣袖(편편무광수) : 펄펄 춤추는 넓은 소맷자락
似鳥海東來(사조해동내) : 한마리 새가 동해를 날아온 듯 하네
이에비해 신라는 한반도 한쪽 구석인데다가 골품제에서 알 수 있듯 대단히 폐쇄적인 사회였습니다.
만약 위 시의 제목이 '신라' 또는 '화랑'이었다면? 위 시가 가지는 미학적 아름다움은 곧 파괴되고 말 것입니다. 고구려의 활달함과
개방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시입니다. '꽁생원' 두보에 비해 이태백 자신이 엄청나게 활달했죠. 거리낌이 없었죠. 이태백 자신의
이미지 자체가 고구려 이미지가 잘 조응됩니다.
고구려 멸망이 우리 민족사에 끼친 가장 큰 폐악은 만주땅을 잃었다는 것보다는 고구려의 개방성을 잃었다는 데 있습니다.
단일 민족의 신화? 그건 화교 왕조, 특히 골품제의 신라,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의 산물이지 고구려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피에쓰)
이태백은 701~762년까지 살았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그가 '고구려'라는 시를 썼는지도 의문입니다. 발해는 698~926년간 존재했습니다. 혹시 발해 사람이
당나라에 온 것을 보고 쓴 것일까? 아니면 과거 고구려의 이미지를 생각해서 쓴 것일까?
아무튼 혹시 이태백이 신라와 관련한 시를 썼다면 아마 지금쯤 교과서에도 실리고 전 국민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소개되었을 겁니다. 시선이라 일컬어지는 이태백이 신라라는 시를 쓴 것은 그만큼 신라가 위대했기 때문이라고...그런데 고구려라는 시, 그것도 대단히 잘쓴 저 시가 일부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것 역시 참 이상합니다. 하여튼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많은 이른바 '한민족'입니다.
첫댓글 우리 카페는 블로그가 아닌 일종의 커뮤니티입니다. 특정 국가나 인물에 대해 불필요하게 비하하는 식의 발언을 하신다면 그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시는 분들로서는 거부감이 강하게 드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그러한 발언에 대해서는 자제해달라고 권유드리고 있습니다. 논지방식에 있어서 다른 회원분들과 상충되는 부분이 더러 보이기에 아무래도 논란이 초래될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그에 따른 적절하고도 카페 수칙을 준수하는 토론이 되었으면 하는군요.
마르치님에게는 자주 아니면 사대 뿐이네요 자주는 선이고 사대는 악이라는 개념이 너무 철저하십니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하시면 특히 작은 나라일수록 자주는 선 사대는 악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발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를 쌀배달이나 했다는 것 역시 지나치게 신라를 무시하는 발언이라 무시하고... 단재의 역사관은 용도폐기 되었습니다. 일단 단재 서적을 읽어보면 지나치게 자기 사상을 강요하고 있고,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오류가 많습니다. 단재의 사상은 지금이 아니라 그 때 유효했던 것 입니다. 지금의 단재는 당시의 역사관을 알려주는 자료로서는 매우 크지만, 그런 사상을 지금 가지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마르치님은 지나치게 흑백논리로 모든 것을 나누고 있습니다. 논술이라 하였지만 논술에 흑백논리 들어가면 채점하는 교수님들은 점수 안 줍니다. 흑백논리는 학문의 적이지요. 아니 인류 평화공존의 가장 큰 적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통일 이후에는 겪지 않았지요. 뭐 전쟁 자체가 불가능하긴 했지만..
1+1 = 2 가 괘씸하니까 이제부터 0으로하겠다. 그냥 당신같은 분들은 종교인이 되는게 좋습니다. 제가 조선왕조는 화교정권이라는 한참사주장을 듣다가 배꼽빠진경우가 있었는데 이젠 화교논리가 삼국시대까지 가네요.
두꺼비영웅님, 토론에 있어서 상대방을 비하하는 발언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주의 바라며 댓글을 수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댓글수정은하지 않겠습니다. 상대방이 이미 작정하고 대한민국역사를 화교로 폄하한데 대한 사과가 없다면 저역시 수정을 해야 할 이유가 없지요.
마르치님 밑에 글에 상당히 의미있을 법한 의문을 제기하신 점에 대해 긍정적으로 댓글을 달았는데 음,,,
이건 삼천포로 빠져도 아주 제대로 다이빙을 하시네요,,,현재 중궈애들과 흉노후예라 자칭?타칭되는 신라계 對 부여를 계승한 고구려를 위시한 백제와 형제국? 일본의 거룩한 한판을 아주 노골적으로 귀착시키누만요,,,저 역시 역사란 책나부랭이들관 별도의 음험하게 도사리는 DNA를 유심히 바라보는 편인지라,,언제 백제시대 토착세력이었던 말을 다룰줄 몰랐다던 그 마한사람들의 진솔한 역사를 재조명 한번 해주심 어떨지요? 사실 개인적으로 몹시 궁금한 역사거든요,,,
베세토님 보기에 말이 안된다면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니 잘 참고하겠구요. 단, 흉노 기원설 등 신라와 관련한 '소설'(?)들이 많아서 저도 맞불 소설(?) 한번 써봤습니다. 마한 뿐 아니라 이른바 한반도 토착세력으로 추정되는 '한'에 대해서는 저도 관심은 있는데, 아직까지는 감만 있을 뿐 아는게 없어서 뭐라 말 못하겠습니다.
마르치님의 글을 보니 문듯 이런 생각이 드는군요..김유신 장군은 철가방에 짜장면 배달을 할때 짜장면을 피마자유(Castor Oil)로 볶아서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당나라 소정방군이 설사 복통 배탈이 나서 한방 부르스로 자기네 나라로 보내버렸다 이는 고구려가 한달넘게 지겹도록 전투를 한 것과 사뭇 다른 획기적인 방법으로 소설같은 생각이 드는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