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7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요한 21,15-19
유혹의 정의
클레오파트라는 당대 근친혼으로 이복동생과 혼인했지만 로마 제국을 점령한 카이사르와 연을 맺었습니다.
이는 경쟁 관계에 있던 이를 물리치고 이집트에서의 정권과 안녕을 위해서였습니다.
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자신이 그저 노리갯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정권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기는 편이 이집트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선택했지만, 전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합니다.
클레오파트라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장군직을 내려놓고 평민으로
클레오파트라와 내 가족을 살아가게 해 달라.”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처형될 것이란 옥타비아누스의 회신에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 자리에서 칼로 자결합니다.
죽어가던 중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단 소식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기 위해 들것에 실려 만났지만 결국 그녀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를 두고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로부터 버림받았던 기억에 안토니우스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독사에 물려 죽었을 것이란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살기 위해 로마의 두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목숨을 목숨으로 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투자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인간이 그런 선택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 양들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당신이 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목숨을 건다는 말은 그 대상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하느님은 본래 베드로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에 베드로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면
그분은 다시 베드로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공부를 목숨 걸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유혹이 끼어듭니다.
나의 목숨을 나에게 생명으로 되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내어놓는 일입니다.
하와는 뱀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였고 아담은 하와에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마치고 중학교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였습니다.
이미 고등학교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 시험은 그저 형식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이때 한 친구가 마지막 시험인데 자신도 점수를 잘 맞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그러면 지우개에 해답을 적어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걸려버린 것입니다.
손짓이나 뭐 그런 것으로 했다면 증거가 없었겠지만, 지우게에 답을 다 써 놓았으니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딴청만 피우고 있던 선생님은 시험지를 찢고는 저의 따귀를 수십 차례 때렸습니다.
저는 좀 지나치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철저한 개신교 신자였고 그런 부정한 행위는 눈감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는 저에게 매우 미안해하였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모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등록금을 대주고 고생해서 공부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우개에 정답을 적어준 친구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돌려줄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나의 목숨은 해답이 적힌 지우개였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살면서 자기 목숨을 어디엔가는 투자합니다.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됩니다.
돈이나 권력, 혹은 결혼에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생명으로
되돌려 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지옥에 가더라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합니다.
어린이는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고 그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라면 자기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내어놓는 삶이 가장 합당한 투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위해 삽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우리는 이 지혜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유혹에 빠져 의미 없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며 살아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17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 21,15-19
묵주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모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입니다!
연인들 사이에 생기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수시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당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한 두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도 우리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며 우리를 총애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그 옛날 베드로 사도에게 던지셨던 그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거듭 던지고 계십니다.
“○○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역시 베드로 사도처럼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에게는 당신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 고백은 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제대로 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제대 앞으로 나아가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해 정성껏 파스카 성제에 참여하고 몰입할 때,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묵상할 때, 우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를 손에 쥐고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삶과 죽음, 인류 구원 사업의 전체적인 여정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풀톤 쉰 대주교님(1895~1979)의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묵주기도가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모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주님을 향한 사랑 고백은 성체성사나 기도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미사와 기도의 핵심 정신이 우리 매일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될 때,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 고백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강론>
(2024. 5. 17. 금)(요한 21,15-19)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17)”
1) 열두 사도 가운데 하나였던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과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된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은, 사도들의 위신을 크게 추락시킨 일이었고, 교회에 심각한 위기로 작용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위기 상황을 미리 아시고,
최후의 만찬 때 다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19-20).”
이 말씀에서 ‘일’은, 제자 하나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다른 제자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려두고 흩어지는 등 예수님 수난 때에 사도들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일들을 미리
예고하신 것은, 당신의 수난은 모르고 당한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한 일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당신이 사도들을 뽑으시고 파견하신 일은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베드로 사도에게 물으신 것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잘못 때문에 가장 크게 상처를 받으신 분은 예수님이지만, 베드로 사도 자신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원래 죄라는 것은, 죄인 자신에게도 큰 상처를 남깁니다.
고해성사는 죄의 용서와 죄의 상처 치유를 겸하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치유의 성사’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대화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이미 용서하셨음을 알려 주신 일이고, 그의 상처를 치유해 주신 일이고, 그를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신 일, 즉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이 취소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신 일입니다.
고해성사로 표현하면, 예수님과 베드로 사도의 대화는 ‘보속’을 주는 단계에 해당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직후에 곧바로 크게 통회했습니다(루카 22,62).
고백과 용서는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만 나타나셨을 때(루카 24,34; 1코린 15,5)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한다. 너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느냐?”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는, 보속을 주신 말씀입니다.
그 보속은 베드로 사도가 평생 실행해야 할 보속입니다.
3) 예수님의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말씀을 보면, 처음 두 번은 사랑이라는 말에 ‘아가페’를 사용하셨고, 세 번째는 ‘필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 번 다 ‘필리아’로 대답했습니다.
‘아가페’는 성경에서만 사용된 단어이고, 주로 이타적인 사랑과 하느님의 사랑을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필리아’는 당시 사람들이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용하던 단어이고, 사랑을 말할 때 폭넓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아가페’와 ‘필리아’가 그렇게 엄격하게 구분되어서 사용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문이 ‘아가페’에서 ‘필리아’로 바뀐 것과 베드로 사도가 ‘필리아’로만 대답한 것 자체에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말씀하실 때
‘필리아’를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20절,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라는 말씀의 ‘사랑’에 ‘필리아’를 사용하셨고, 또 요한복음 16장 27절, “바로 아버지께서 너희를 사랑하신다.” 라는 말씀에도 ‘필리아’를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단어를 사용했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중간에 단어를 바꾸셨지만 뜻이 바뀐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어를 바꾸신 것 자체도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사랑 실천’을 보속으로 주셨고,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비록 겁에 질려서 잠깐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자신의 믿음과 사랑에는 변함이 없음을 고백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보속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대답과 고백에 대한 매일미사 책의 설명은 잘못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에 베드로 사도가 슬퍼한 것은, 자신이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에 대한 죄책감 때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