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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홀로 테마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광나루
[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 (5)] 일제 침략전쟁 속 꽃핀 트로트 대중가요
월간중앙 2022.07.21
망국의 설움 달래준 ‘황성 옛터’부터 희생 부추긴 선동가 ‘혈서지원’까지
트로트 1세대 가수들의 노래에 어려 있는 식민지 한국인의 애환
전시 총동원 시대 고통과 시름 달랬지만 친일 군국가요라는 오점도
오케레코드 전속 조선악극단의 공연 모습. 오케레코드는 1930~1940년대 대중가요 황금기를 이끌며 고복수·김정구· 남인수·이난영· 저고리시스터즈 등 소속 가수들을 당대 최고의 인기스타로 만들었다. / 사진:독립기념관
1930 ~1940년대는 일제가 침략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혀 식민지 조선을 수탈하고 한국인을 강제로 동원한 시기였다. 한국 대중가요는 그 무렵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황금기의 개막을 알렸다. 전시 총동원으로 고통받은 한국인에게 대중가요와 레코드는 무엇이었을까? 트로트 1세대 가수와 전설의 노래에 어려 있는 식민지 조선의 애환을 만나보자.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 폐허에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18세 가수 이애리수의 구슬픈 목소리가 신파극 무대 막간에 흘러나왔다. 취성좌 악단의 전수린이 곡을 쓰고 왕평이 노랫말을 지은 ‘황성 옛터’였다. 연극을 보러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하나둘 훌쩍거리더니 이내 눈물바다가 됐다. 앙코르 무대가 이어졌고 청중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극장은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였다. 감시 중이던 일본 경찰이 서둘러 공연을 중지하고 관객들을 해산시켰다. 1928년 종로 단성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취성좌는 전국을 순회하는 연극 단체였다. 공연 차 개성에 들렀을 때 악단 소속의 왕평과 전수린이 고려 왕조의 옛 궁궐터를 구경하게 됐다. 허물어진 성에 수풀만 우거진 광경은 세월의 덧없음을 일깨웠다. 영감에 사로잡힌 두 사람은 함께 노래를 만들고 ‘황성(荒城)의 적(跡)’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말 그대로 ‘황량한 성의 자취’가 물씬 풍기는 곡이었다. 개성 출신의 배우 겸 가수 이애리수가 무대 막간에 나와 이 노래를 불렀다.
트로트 대중가요 황금기 연 ‘황성 옛터’
개성 만월대 전경. 본격 트로트가요 ‘황성 옛터’ 탄생에 영감을 줬다. 달빛 아래 황량한 옛 궁성의 자취가 망국의 설움을 간직한 1930년대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2007년부터 남북 공동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 사진:남북역사학자협의회
연극계에 입소문이 난 ‘황성의 적’은 1932년 4월 레코드(record, 축음기 음반)로 발매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무려 5만 장이나 판매했다. 당시로선 놀라운 수치였다. 노래가 한국인의 가슴에 자리한 ‘망국의 폐허’를 건드린 것이다. 나라 잃은 슬픔과 한이 공명한 것이다. ‘황성의 적’은 세간에 ‘황성 옛터’로 알려지며 한국 대중가요 탄생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바야흐로 이 땅에 본격적인 대중가요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대중가요는 음반·공연·방송 등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이 즐기는 상업적인 노래를 말한다. 1926년 ‘사의 찬미’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그것은 소프라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현해탄에서의 투신이 화제를 불러일으킨 덕분이었다. 음악 장르로서의 대중가요는 1930년대 초 축음기와 트로트의 보급에 힘입어 기지개를 켰다.
“레코드의 홍수이다. 레코드 예술가의 황금시대다. 중산층 가정에서 오락으로 찾는 것은 레코드뿐이다. 오늘날 조선에는 300개가 넘는 축음기 가게가 있다. 여러 음반 회사가 매달 50종에 가까운 신보를 내놓는다.” ([삼천리] 1933년 5월 호)
트로트(trot)는 서양 댄스 폭스트롯(fox trot)에서 발원해 일본 가요 엔카(演歌)의 영향을 받고 국내에 ‘유행가’라는 명칭으로 정착했다. 트로트 유행가는 신민요와 함께 레코드 시장을 장악하며 1930~1940년대 대중가요 황금기를 열었다. 특히 ‘황성 옛터’를 필두로 단조 음계의 구슬픈 트로트가 그 시절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며 대중가요의 주류를 이뤘다. 여기에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맞물린 시대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일본은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의 포문을 열었다.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 위기에 처하자 침략전쟁으로 활로를 뚫으려고 한 것이다. 이듬해 만주국을 수립한 침략자들은 곧바로 더 큰 전쟁을 준비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고혈을 짜냈다. 식량과 물자의 수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국인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일제는 매년 본국에 보내는 수백만 석의 쌀뿐 아니라 전방부대의 말을 먹인다며 보리까지 거덜냈다. 가난한 소작민들은 춘궁기에 닥치는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어졌다. 그들은 날품팔이라도 해보려고 식구들을 데리고 도시로 떠났다. 경성부의 하천 변과 다리 밑에는 토막(土幕)이 대거 들어섰다. 토막은 땅을 파고 거적때기로 덮은 극빈층의 거처였다. 경성부의 토막민 인구는 1931년 5092명에서 1935년 1만7320명으로 급증했다.
만주로 이주하는 한국인도 해마다 늘어났다. 총독부는 농업을 진흥한다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수리 사업을 벌였다. 저수지를 만든다며 좋은 논을 골라 공시지가로 징발했다. 또 지주들에게 터무니없이 높은 수리조합비를 물렸다. 결국 한국인 자영농은 땅을 수리조합에 넘기거나 일본인에게 팔고 고향을 등졌다. 푼돈을 쥐고 새로운 땅과 일자리를 찾아 만주로 떠났다. 그 타향살이의 설움은 당시 유행한 대중가요에 절절히 배어들었다.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1934년 6월 신인가수 고복수가 발표한 노래 ‘타향살이’(금능인 작사·손목인 작곡)다. 이 음반은 오케레코드에서 제작했다. 그 무렵 한국 음반시장에서는 콜럼비아·빅타·시에론·포리돌·오케 등 5개 레코드사가 활발하게 신보를 발매하며 경쟁하고 있었다. 가수와 작곡가는 이들 회사에서 전속으로 활동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오케레코드에서 ‘타향살이’를 낸 고복수는 원래 콜럼비아레코드가 발굴한 가수였다. 어찌 된 일일까?
‘타향살이’ 심금 울린 오디션 스타 고복수
1935년 9월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목포의 눈물’ 음반과 가사지. 가수 이난영이 불러 크게 히트했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가사로 인해 일제의 검열과 탄압을 받기도 했다. / 사진:우리역사넷
콜럼비아레코드는 1933년 10월부터 해를 넘겨 전국 순회 가수 오디션을 열었다. 이름하여 ‘명가수 선발 음악대회’였다. 우선 경성·평양·부산·군산·함흥 등 10개 도시를 돌며 예선을 치러 가수 후보자를 2~3명씩 뽑았다. 19명이 겨룬 최종결선은 1934년 2월 17일 경성공회당에서 벌어졌다. 경성라디오방송이 실황중계에 나설 만큼 관심이 높았다.
이 무대에서 전남대표 정일경이 1등, 경남대표 고복수가 2등, 함북대표 조금자가 3등을 차지했다. 그러나 고복수는 준우승자임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정일경과 조금자, 두 여자 가수는 곧바로 음반을 내고 활동에 들어갔지만 그는 신곡조차 배정받지 못했다. 콜럼비아레코드의 터줏대감인 채규엽과 강홍식, 두 남자 가수에게 밀린 것이다.
오케레코드는 그 틈을 파고들어 고복수를 낚아챘다. ‘타향살이’ 음반은 순식간에 5만 장 이상 나갔다. 대도시와 만주 등지에서 타향살이하던 사람들은 이 노래만 흘러나오면 왈칵 눈물부터 쏟았다. 고복수는 뭇 여인들의 로망으로 떠올랐다. 여성 팬들의 애정 공세로 전화통에 불이 났다. 공연장에서 까무러치거나 혈서를 써서 보내는 극성팬도 있었다. 기생들은 스타를 모셔가려고 극장 앞에 인력거를 대기시켰다. 톱스타 신드롬이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 삼백연원안풍은 노적봉 밑에 /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1935년에는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손목인 작곡)이 큰 사랑을 받았다. 오케레코드의 전국 6대 도시 ‘향토 찬가’ 가사 모집에 당선된 노래였다. 그해 9월 음반이 나오자마자 5만 장을 너끈히 판매했고 이난영은 ‘엘레지의 여왕’으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 음반은 출시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일본 경찰이 노래에 ‘불순한 의도’가 있다며 오케레코드 관계자들을 불러 추궁했다. 당선자 문일석이 쓴 가사 중에 ‘삼백연원안풍(三栢淵願安風)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을 문제 삼았다. 노래를 불러보면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고 들린다는 것이었다. 오케레코드에서는 한자를 풀이해 ‘삼백연 연못의 평안을 기원하는 바람이 노적봉 밑에 분다’라고 해명했다.
노래는 천신만고 끝에 빛을 보게 됐다. 사실 원래 가사는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가 맞았다. 노적봉은 목포 유달산의 봉우리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군량미를 쌓아둔 것처럼 위장하여 왜적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장군은 전란으로 고통받은 백성의 원한을 갚고자 고군분투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300여 년이 흘렀으니 ‘삼백 년 원한’이다. 그것을 이순신 장군의 전술처럼 ‘위장 가사’로 되살린 것이다.
목포는 일제 강점기에 군산과 함께 수탈의 최일선이었다. 곡창지대인 나주평야의 쌀과 목화가 목포에서 배에 실려 일본으로 들어갔다. 지역민들이 보기에는 집 안의 곳간이 강도에게 털리는 것 같았다.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회자되는 것은 당연했다. 항일정신이 드높았다. ‘목포의 눈물’에서 ‘임’은 그리운 연인일 뿐 아니라 잃어버린 조국이기도 했다.
‘위장 가사’에 항일정신 감춘 ‘목포의 눈물’
1937년 12월 중국 난징에 입성하는 일본군. 일제는 그해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난징에서 대학살을 자행했으며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한국인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 사진:독립기념관
대중가요에 나타난 민족의식은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위축됐다. 일제는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국과 거대한 전쟁을 시작했다. 대륙은 드넓었다. 소모적인 장기전이 불가피했다. 일제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식민지 조선을 더욱 쥐어짰다. 그러려면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철저히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10월부터 모든 학생에게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도록 했다. 이듬해 초에는 한글 교육을 폐지하고 학교에서 일본어 사용을 의무화했다. 그리고는 병력 증강을 위해 한국인의 일본군 지원을 독려했다. 전쟁을 뒷받침할 노동력도 반강제로 모집했다. 민족의식을 말살하고 황국신민을 부르짖은 이유다.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경찰력과 군병력을 늘려 ‘병참기지’ 조선을 폭압적으로 통제했다. 비밀 고등경찰, 헌병 스파이 등이 각계 인사와 단체들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민족지도자와 사회운동가들에 대한 검거·투옥·살해가 비일비재했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문화예술인들은 전향 공작을 통해 친일로 돌려세웠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중가요는 사랑과 눈물의 세레나데로 흘러갔다. 오케레코드 전속가수 남인수는 1938년 ‘애수의 소야곡’(이노홍 작사·박시춘 작곡), ‘꼬집힌 풋사랑’(조명암 작사·박시춘 작곡)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최고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다. 덧없는 사랑에 눈물짓는 체념의 정서가 일제의 폭압에 지쳐가던 대중의 연민을 자아냈다.
같은 해에 발표된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김용호 작사·이시우 작곡)은 특별한 사연을 담았다. 작곡가 이시우가 악극단 공연차 두만강 변 여관에 묵었을 때 일이다. 자려고 누웠는데 옆방에서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어찌 된 사연인지 알아보니 독립투사 남편을 만나러 먼 길을 왔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죽었다는 비보에 눈물의 둑이 무너진 것이었다.
“띵호와 띵호와”, 가수 김정구가 부른 코믹송
가수 고복수와 김정구. 1930~1940년대 한국 대중가요 간판스타였다. ‘타향살이’와 ‘눈물 젖은 두만강’은 지금도 한국인의 애창곡으로 사랑받고 있다. / 사진:문화원형백과
이시우는 그 사연을 단조 트로트 음계에 실어 두만강 푸른 물에 띄웠다. 김정구의 목소리로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눈물 젖은 두만강’ 음반은 몇 년 후 민족의식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김정구에게는 더욱 흥행한 히트곡이 있었다. 이 빠진 중국인으로 분장하고 코믹하게 부른 만요(漫謠), ‘왕서방 연서’(김진문 작사·박시춘 작곡)였다.
“비단이 장사 왕서방 명월이한테 반해서 / 비단이 팔아 모은 돈 퉁퉁 털어서 다 줬어 / 띵호와 띵호와 돈이가 없어도 띵호와 / 명월하고 살아서 왕서방 죽어도 괜찮다”
한국인들은 “띵호와 띵호와” 흥얼거리며 달관의 정서를 공유했다. 만요는 웃을 일이 별로 없는 팍팍한 삶을 재미있는 가사와 흥겨운 선율로 토닥여줬다. 1938년 12월 콜럼비아레코드에서 나온 ‘오빠는 풍각쟁이’(박영호 작사·김송규 작곡)도 크게 유행했다. 가수 박향림은 간드러진 콧소리로 가부장적인 오빠의 ‘횡포’를 풍자했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무어 오빠는 심술쟁이야 무어 / 난 몰라 난 몰라 내 반찬 다 뺏어 먹는 건 난 몰라 /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고 / 오이지 콩나물만 나한테 주고”
1940년대 들어 가요계는 오케레코드의 작곡가 박시춘·가수 남인수 콤비와 태평레코드의 작곡가 이재호·가수 백년설 콤비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쌍벽을 이뤘다. 백년설은 ‘나그네 설움’(조경환 작사·이재호 작곡)으로 10만 장 넘는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고 여세를 몰아 ‘번지 없는 주막’(처녀림 작사·이재호 작곡)도 히트시켰다. 그 무렵 식민지 대중가요 황금기는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빛나는 무대 조명 뒤로 그림자도 짙게 드리웠다.
일제는 서구열강과 백인들을 물리치고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겠다는 환상에 빠져 미쳐갔다. 1941년 12월 미국 태평양함대 기지가 있는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했다. 이듬해 2월에는 영국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싱가포르까지 점령했다. 아시아 태평양 전역이 전쟁의 광기에 휩싸였다. 일본은 한국인들을 창씨개명시키고 침략전쟁에 총동원했다.
한국인 희생 부추긴 ‘군국가요’ 내놓기도
1943년 징병제가 법령으로 공포됐다. 1945년 8월까지 한국인 19만여 명이 전선에 투입됐다. 군속으로 끌려가 군사시설에서 일한 사람도 약 15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전쟁 말기에 총알받이나 옥쇄를 강요당하며 죽어갔다. 가슴 아픈 사연도 많았다. 1945년 2월 미군에 포위돼 보급이 끊긴 남태평양 첼퐁섬에서는 한국인 군속이 일본인들에 의해 식인의 희생양이 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분노한 한국인 군속 170여 명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일본군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1939년부터 시행 중이던 징용령도 갈수록 대상이 확대됐다. 일제는 1945년까지 한국인 112만여 명을 연행해 강제 노역을 시켰다. 노동자들은 일본·동남아 등지의 광산이나 건설 현장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죽도록 일했다. 사할린 탄광에서 석탄을 캐다가 흙더미에 깔려 죽고, 홋카이도에서 비행장 공사를 하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졌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는 한국 여성 수십만 명을 ‘정신대’로 징집하거나 납치했다. 군수공장에서 일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도 이 시기에 쏟아져 나왔다. 침략전쟁의 광기에 휩싸여 일제의 전시 총동원을 찬양하고 한국인의 희생을 부추긴 것이다. 친일로 돌아선 문화예술인들은 특히 ‘피’를 강조했다. 침략전쟁에 뿌려진 한국인의 피가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의 밑거름이라는 취지였다. 대중가요도 한몫했다. 인기가수 백년설·남인수·박향림은 1943년 오케레코드에서 ‘혈서지원’(조명암 작사·박시춘 작곡)을 발표했다. 이른바 ‘군국가요’였다.
“무명지 깨물어서 / 붉은 피를 흘려서 / 일장기 그려놓고 / 성수 만세 부르고 / 한 글자 쓰는 사연 / 두 글자 쓰는 사연 / 나랏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
유행가는 동시대인의 정서를 담기 마련이다. 1930~1940년대 식민지 조선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은 일제의 전시 총동원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폭압에 저항하느냐 순응하느냐를 두고 깊은 시름에 잠기기도 했다. 트로트 대중가요는 그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하고 시름을 달래주는 진통제요 묘약이었다. 때로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겨레의 버팀목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침략전쟁에 협조해 역사에 오점을 남긴 시대의 두 얼굴이었다.